증산께서는 무해(無害)한 장난을 좋아하시고 또 기력이 강장하시어 힘겨루기를 즐기시거늘 이따금 아저씨뻘 되는 강기회(姜驥會)와 힘자랑을 하시니 그는 기골이 장대한 천하의 장사라. 가을 나락걷이가 끝나고 객망리 기회의 집 지붕을 갈 때, 기회와 함께 지붕날개를 마당에서 지붕 위로 던져 올리는 내기를 하시니 기회는 점점 지쳐 이엉 마름을 들고 사다리로 올리는데 증산께서는 끝까지 마당에서 던져 올리시니라.
또 어느 때에는 맷돌 밑짝의 중쇠를 이로 물어 올리시고, 마당에 서서 발로 처마끝을 차시며 한 팔을 뒤로 하여 땅을 짚고 발꿈치를 땅에 붙이신 채 장정 십여 명을 시켜 허리를 힘껏 누르게 하시되 전혀 요동하지 않으시니라. 한번은 김광문(金光文)이 보니 여러 사람들과 힘겨루기를 하시는데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 돌리듯 하시더라.
증산께서 장성하시매 얼굴은 금산 미륵불과 흡사하시고, 눈은 일월의 밝음과 같으시고, 음성은 맑은 천둥소리 같으시고, 몸가짐은 정대(正大)하시고, 도량(度量)은 관대하시고, 동정(動靜)이 정중(鄭重)하시고, 언론(言論)이 활달하시고, 지감(知鑑)이 신령하시고, 기상(氣像)이 웅장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35)
혼기에 이르시매 부모님께서 매파를 두어 여러 차례 간선(揀選)을 하시는데 증산께서 매파가 주선한 규수 집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집 선대의 가계와 친족의 인품과 악습, 악성(惡性) 등을 물건 보듯이 낱낱이 말씀하시니 쉽사리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니라.
이 때 ‘꼬시래기’라 불리는 잔뫼절의 화주 전광명화(全光明華)가 잔뫼산 일대를 두루 다니면서 포교하고 시주도 하여 주변 고을의 사정에 환하더니 증산께서 스물한 살 되시는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 늦가을에 마침 하동 정씨(河東鄭氏) 문중의 규수를 중신하거늘 성부께서 즉시 허혼하고 자부로 맞이하시니 이름은 치순(治順)이요 나이는 열여덟인데, 몸이 정상이 아니요 성정(性情)이 원만하지 못하더라.
그 해 겨울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증산께서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여 금구 내주평(內注坪)의 정씨 가문에 장가드시거늘 처가에서 첫날밤을 보내시고 이른 아침에 조용히 신방을 나와 세수하신 뒤 그 집 서당에 가 계시니 하인들이 아침밥을 해서 올리니라. 이후 그 집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시니 사도(師道)가 비범하여 주위 사람들의 경애를 받으시니라.
(증산도 道典 1:37)
류서구가 부친과 교분이 깊어 자주 내왕하는데 증산께서 항상 그의 내방을 미리 아시고 주안상을 준비하게 하시니라. 성부께서 이 사실을 서구에게 말하되 그가 믿지 않더니
증산께서 스물두 살 되시는 임진(壬辰:道紀 22, 1892)년 정월 초이렛날 서구가 또 찾아왔거늘 손수 주안상을 차려 내시고 말씀하시기를 “설 쇠기 전에는 공사가 있어 영접하지 못하였으니 부집(父執)에 대한 예가 아니었습니다.” 하시고 웃으시며 아우 영학을 불러 “안방에 가서 역서(曆書) 틈에 끼워 둔 종이를 가져오라.” 하시어 펴 보이시니
人日人來寅艮方하리니 逢場必是柳瑞九리라
인일인래인간방 봉장필시류서구
'인일(人日)에 인간방(寅艮方)에서 사람이 찾아오리니 만나 보면 반드시 류서구이리라.' 라고 쓰여 있는지라 서구가 보고 크게 탄복하니라. 이 때 조모님 묘를 시루산 정상에 개장(改葬)하시니 서구가 수종 드니라.
(증산도 道典 1:38)
증산께서 한때 고부 마동(馬洞)에 글방을 차리시고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시니 그 성예(聲譽)가 높아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니라. 이 때 마을 밖에 나가셨다가 한다리(漢橋)를 건너 마동으로 들어오시면 동네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온 동네가 환해진다.” 하니라.
하루는 청도원고개에서 명리(命理)를 판단하시니 그 신통하심에 사람들이 크게 감탄하니라. 어떤 사람이 운명을 여쭈매 증산께서 “복채를 내놓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돈이 있으면서도 없다고 속이거늘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돈을 아끼는 거나 내가 재조를 아끼는 거나 마찬가지니라.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먼저 바른 말을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39)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 사람 전명숙(全明淑)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난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으니라. 일찍이 전명숙은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부터 3년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흥선대원군을 만난 일이 있더니 대원군이 명숙의 뜻을 물은즉 “제 흉중(胸中)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오.” 하고 대답하니라.
증산께서 명숙(전봉준)과 나이 차이는 많이 나나 일찍부터 교분이 있으시더니 갑오년에 하루는 명숙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민생을 위해서 한번 거사를 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 하거늘 증산께서 그 전도가 이롭지 못함을 미리 아시고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하시며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하고 경계하시니라. 이에 명숙이 대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안 된다면 나 혼자라도 하겠소.” 하고 물러가니라.
혁명이란 깊은 한(恨)을 안고 일어나는 역사의 대지진인즉, 동방 조선 민중의 만고의 원한이 불거져 터져 나온 동학혁명으로부터 천하의 대란이 동하게 되니라. 증산께서 후천개벽을 알리는 이 큰 난의 대세를 지켜보고 계셨으니, 이 때 증산은 성수 스물넷이요 명숙은 마흔 살의 백의한사(白衣寒士)더라. 개벽의 새 시대를 알린 이 혁명은 갑오년 정월과 3월, 9월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니라.
(증산도 道典 1:43)
이 때 증산께서 본댁을 떠나 계신 지 오랜지라 성모께서 흉흉한 시국에 아들의 안부를 알 길이 없어 노심초사하시니 유덕안이 성부의 당부로 증산을 찾아 나서니라. 당시는 동학군으로 의심되면 가릴 것 없이 마구 잡아죽이는 때인지라 의관을 갖추고 출발하였으나 고부 강신리(江新里)에 이르렀을 때 동학군들을 잡아가던 관군이 덕안을 보자 “이놈도 동학군이다.” 하며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전주 형장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참형되고 마침내 덕안의 차례가 되었거늘 목이 막 베일 찰나, 갑자기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사방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치고 회오리바람이 불며 불칼이 들어오매 정신이 아득해지더라. 한참 후에 덕안이 정신을 차려 보니 밤은 깊어 사방이 캄캄한데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짙은 어둠 속에 시체들만 널브러져 있더라. ... 이에 덕안이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포승을 풀고 도포를 찾아 재생(再生)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오니라.
이 때 덕안은 호랑이가 불빛을 비춰 주어 살아난 것으로 믿고 있더니 그 후 어느 날 증산께서 객망리에 돌아오시어 덕안에게 말씀하시기를 “험한 시절에 위급한 일을 당하여 고생이 많았습니다. 나를 찾을 필요 없습니다.” 하고 위로하시거늘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난 것이 증산의 음호 덕분임을 깨달으니라.
(증산도 道典 1:45)
3월 20일에 무장(茂長)에서 기포(起包)한 동학 농민군은 백산으로 본진을 옮기고 전명숙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의 깃발을 올리니라. 이에 전라도 감영의 관군이 동학군 본진을 향해 진군하매 황토현(黃土峴)에서 양 진영이 맞닥뜨려 대치하니 이 때 태인 강삼리(江三里)에 사는 열여섯 살 소년 문남용(文湳瀧)과 정읍 대흥리에 사는 열다섯 살 소년 차경석(車京石)이, 각기 접주인 중형(仲兄) 문선명(文善明)과 아버지 차치구(車致九)를 따라 이 전투에 참가하니라.
(증산도 道典 1:46)
4월 7일 새벽에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고 그 기세를 몰아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해 나아가니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더라. 이어 23일에 동학군이 장성 황룡촌(長城 黃龍村) 전투에서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관군을 대파하고 북으로 전주를 향해 진격하니 홍계훈이 관군만으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국군 차병(借兵)을 조정에 요청하니라.
이 때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 동학군이 27일에 전주를 점령하니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마침내 청(淸)에 차병을 요청하거늘 5월 초순에 청국군 3천여 명이 아산(牙山)으로 들어오니 때를 엿보던 일본군 또한 곧이어 4천여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매 삼천리 강토에 짙은 전운(戰雲)이 감돌더라.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대치하던 관군과 동학군은 잇단 외세의 개입을 경계하여 화약(和約)을 맺으니 이로써 동학군이 일단 해산하니라. 이에 조정에서는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청하고 청 또한 일본에 동시 철군을 제의하였으나, 일본은 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과 조선의 내정개혁을 구실로 이를 거부하니라.
(증산도 道典 1:49)
증산께서 천하가 날로 그릇되어 감을 깊이 근심하시고 이 해에 의연히 광구창생(匡救蒼生)의 큰 뜻을 품으시니라. 이 해 5월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찾아와 천지 현기(玄機)와 세계 대세를 비밀히 논하니라.
(증산도 道典 1:50)
그 해 7월 어느 날 밤에 불을 밝히지 않고 홀로 앉으시어 깊은 명상에 잠기시니라.
이 때 조화로 충만한 천지의 원신(元神)을 열고 삼매에 드시어 동학군의 운명을 예시하는 옛 시 한 수를 읽으시니 이러하니라.
月黑雁飛高하니 單于夜遁逃라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
欲將輕騎逐할새 大雪滿弓刀라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
어두운 달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가 밤을 타서 도망하는구나.
경기병 이끌고 뒤쫓으려 할 적에 큰 눈 내려 활과 칼에 가득하도다.
이 글로써 사람들에게 동학군이 겨울에 이르러 패망할 것을 일러 주시며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시더니 과연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매 이 말씀을 순종한 사람은 무사히 화를 면했으나 듣지 않고 종군한 자는 모두 죽음을 당하니라. 증산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증산을 일컬어 말하기를 “신인(神人)이라.” 하고 “공부 않고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라.” 하니라.
(증산도 道典 1:51)
증산께서 이 해 10월 태인 동골에 가시어 동학 접주(接主) 박윤거(朴允擧)를 방문하시니 마침 모악산 계룡리(鷄龍里)에 사는 안필성(安弼成)이 같은 마을의 동학 신도 최두현(崔斗鉉)과 함께 윤거의 도담(道談)을 듣고 있더라.
본래 증산과 필성은 흉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사이라 필성이 반갑게 맞으며 “아니 이보게 증산,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하고 인사를 하니 증산께서 필성과 가볍게 수인사를 나누시고 마루에 걸터앉아 윤거와 성명을 통하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장래의 대세를 전하고자 함이라. 지난 4월에는 동학군이 황토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번에는 겨울에 이르러 전패할지라. 그대가 접주라 하니 더 이상 무고한 생민들을 전화(戰禍)에 끌어들이지 않기를 바라노라.” 하시고 다시 필성을 향해 정색을 하시며 “필성아, 거기는 네가 갈 자리가 아니다. 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니 부디 가지 말아라.” 하고 간곡히 충고하시되 필성이 끝내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니라.
윤거는 증산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 접주를 사면하고 전란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두현은 믿지 않고 윤거의 뒤를 이어 접주가 되어 부하를 인솔하고 출전하니라.
(증산도 道典 1:53)
한편 전명숙 장군의 주력 부대는 10월 말경에 공주를 공략하기 위해 비장한 공세를 펼치니라. 증산께서 몰살의 큰 위기에 처한 동학군의 운명을 내다보시고 곧장 공주에 있는 전 장군의 진영을 찾아가시어 “무고한 백성들만 죽이고 절대 성공을 못 하니 당장 전쟁을 그만두시오.” 하고 강권하시나 명숙은 외세를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물리쳐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뿐인지라 증산께서 일러 주시는 어떠한 말씀도 새겨듣지 아니하니라.
(증산도 道典 1:56)
필성이 종군한 김개남 부대는 전주를 떠나 청주를 향하여 북상하는 길에 여산(礪山)에서 잠시 머물러 쉬거늘 이 때 필성이, 길 한쪽에 서서 바라보고 계시는 증산을 다시 만나니라. 증산께서 물으시기를 “이제 종군하는가?” 하시니 필성이 “그러하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이 길이 크게 불리할 것이니 극히 조심하라.” 하시니라.
김개남 부대는 행군을 계속하여 진잠(鎭岑)을 지나 태전(太田) 유성장터에서 하루를 쉬니, 이는 다음날부터 청주성을 공략하기 위함이라. 이튿날 새벽 청주성을 약 30리 남겨 놓은 곳 길가에서 필성이 또다시 증산을 만나니라. 증산께서 “너희들 진중에 중(僧)이 하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필성이 “그러하네.”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그 요승(妖僧)의 말을 좇다가는 필경 멸망할 것이다. 필성아, 너는 이 길을 따르지 말고 이제는 내 말을 믿어라.” 하시니 필성이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는 마당에 어찌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면서 그런 불길한 말들만 하는가? 도대체 자네는 무얼 하려는 건가?” 하고 따지니라.
증산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도대체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그들이 미워서 그러겠느냐? 머지 않아 닥칠 너희들의 장래가 지극히 불리하므로 화를 면케 하려 할 뿐이다. 그래도 필성이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만하니 이렇게 일러 주는 게 아니냐. 필성아, 저곳은 네가 갈 자리가 아니니 돌아가자.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 나하고 돌아가야 한다.” 하시거늘 필성이 묻기를 “그러면 자네는 왜 이곳까지 계속 쫓아왔는가?” 하니 말씀하시기를 “나는 종군하러 온 것이 아니라 대세를 살펴보러 온 것이다.”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57)
이 때 금구에 사는 김형렬이 증산께서 필성과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다가와 인사를 청하거늘 형렬은 일찍이 증산과 친면이 있던 터라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니 증산께서 “그대도 종군하지 말라.” 하고 권하시니라.
필성과 형렬은 종군하지 말라는 증산의 간곡한 당부를 저버리고 계속 종군하여 앞서가는데 청주 병영 앞 산골에 이르자 갑자기 좌우에서 복병이 나타나 포화를 퍼부으매 많은 동학군이 쓰러지는지라 필성과 형렬이 황급히 소나무 숲 속으로 몸을 피하니 증산께서 그곳에서 기다리기라도 하신 듯 서 계시다가 두 사람을 부르시며 “잘 피해 왔네. 이곳은 괜찮으니 안심하게.” 하시거늘 형렬은 증산께서 신감(神鑑)이 비상하심에 새삼 감복하고 마음을 놓으니라.
이 때 증산께서 필성에게 “필성아, 가지 마라. 가면 너는 이번에 죽는다. 성공 못 하니 나 따라 가자.” 하며 거듭 타이르시니 필성이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제야 마음을 돌리거늘 이 날 동학군 네댓 명도 증산의 신이하신 말씀을 듣고 함께 발길을 돌리니라.
(증산도 道典 1:58)
증산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동학군이 오래지 않아 쫓겨 오리니 우리가 먼저 떠남이 옳을 것이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진잠에 이르러 문득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하시니 두 사람이 심히 불쾌히 여기거늘 이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가 진전될 기미를 말할 뿐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지라도 불쾌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어 산속의 한 은벽한 곳에서 쉬시는데 잠시 후에 총소리가 어지럽게 일어나더니 격전 끝에 많은 동학군이 전사하니라. 동학군의 운명의 대세가 기울어 가고 있는 이 때, 증산께서 형렬과 필성을 데리고 관군의 화를 피하여 진잠 산길을 따라 걸어가시니라.
(증산도 道典 1:59)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와 청주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고 이를 고비로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전세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과 민보군(民保軍)이 후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고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학살하니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풍경이 벌어지니라.
증산께서는 동학군의 퇴로를 피하여 한적한 샛길을 택해 전주부 경계를 크게 우회하시니 갑사로부터 금산, 무주, 진안, 임실을 거치는 험한 산길이더라. 이어 순창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산내(山內)를 지나 태인에 도착하시니라. 증산께서 필성과 형렬을 집으로 돌려보내실 때 두 사람이 증산께 여비로 드릴 돈이 없음을 송구스러워 하거늘 증산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들 가게.” 하시니라.
이에 증산께 작별을 고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 이는 청주를 떠난 지 꼭 이레 만이더라. 함께 종군하였던 이웃 사람들은 모두 생사조차 알 수 없거늘 오직 두 사람만이 기적적으로 생환하니 이는 증산께서 형렬과 필성을 죽음에서 구하여 주심이더라.
(증산도 道典 1:61)
그 뒤에 동학군은 11월 25일 원평 접전과 27일 태인 접전에서 연패하여 전군이 모두 흩어지니 이로부터 동학군이 전국에서 닥치는 대로 피살, 포살되니라.
증산께서 조선의 민중들에게 큰 시련과 좌절을 안겨 준 슬픈 겨울을 보내고 스물다섯 살의 봄을 맞으시니라. 그러나 따뜻한 봄날에 차가운 비극의 소식을 들으시니, 체포당한 김개남, 김덕명, 전명숙, 손화중, 최경선 등 동학의 거두들이 삼사십 대의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니라.
(증산도 道典 1:62)
을미(乙未 : 道紀 25, 1895)년 봄에 고부 유생들이 난이 평정되었음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 때 증산께서도 참여하시니 한 노인이 증산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증산께서 그 책을 통독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63)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國政)은 더욱 부패하여 벼슬아치는 오직 포학(暴虐)과 토색을 일삼고 모든 학(學)과 교(敎)가 참된 덕을 잃어 온갖 폐단을 낳아 선비는 허례만 숭상하며, 불교는 혹세무민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서교(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만 급급하니라. 이에 세상 인심이 날로 악화되고 백성들은 고난과 궁핍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여 곳곳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더라.
(증산도 道典 1:65)
27세 되시는 정유(丁酉 : 道紀 27, 1897)년에 이르러 다시 처남 정남기(鄭湳綺)의 집에 글방을 차리시고 아우 영학과 형렬의 아들 찬문(贊文)과 그 마을 학동들을 가르치시니라. 이 때 증산께서 개연히 광구천하의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 먼저 유·불·선, 음양 참위(讖緯)를 비롯한 모든 글을 읽으시고 “이것이 천하를 광구하는 데 일조(一助)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천하사(天下事)를 하는 자는 불고가사(不顧家事)가 공도(公道)니라.” 하시고 다시 세태와 인정을 체험하시기 위해 이 해 가을에 드디어 천하유력(天下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
(증산도 道典 1:67)
충청도 강경을 지나 연산(連山)에 이르러 향적산(香積山) 국사봉(國師峯)에 있는 김일부를 찾으시니라. 지난밤 일부의 꿈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옥경(玉京)에 올라오라.’는 명을 전하거늘 일부가 천사를 따라 올라가 ‘요운전(曜雲殿)’이라는 편액이 걸린 장려한 금궐에 들어가 상제님을 뵙고 내려왔는데 이제 맞이한 증산을 뵈니 간밤 꿈에 뵌 상제님과 그 형모가 같은지라 그 일을 아뢴 뒤에 ‘요운(曜雲)’이란 도호를 드리며 심히 경대하되 증산께서는 그 호를 받지 않으시니라. 증산께서 그곳에 머무르시며 영가무도의 교법을 관찰하시고 일부와 후천개벽의 천지대세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니라.
(증산도 道典 1:68)
연산에서 수일을 머무신 후, 행자(行資)가 떨어져 맨발로 걸어 공주 대통교(大通橋)에 이르시니라. 한 글방에 머무르시며 명리를 판단하시니 그 명성이 공주부에 널리 퍼져 운명을 묻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거늘 그 영묘(靈妙)하신 비판에 모두 경탄하더라. 이 때 추석절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소를 잡아 공양하니라. 공주에서 나오시어 태전(太田)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시고 그 길로 경기, 황해, 강원, 평안, 함경, 경상 각지를 두루 유력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69)
증산께서 천하를 주유하실 때, 하루는 어느 개울가를 지나시는데 한 아비와 딸이 드러누워 있거늘 잠시 후 딸이 일어나 물새우를 잡아 아비의 입에 넣어 주니 아비가 도로 꺼내어 딸의 입에 넣어 주는지라. 증산께서 그 광경을 애처로이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서 베풀어서 저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살려야 할 텐데…. 세상에, 오죽하면 저 어린것이 애비 입에다 넣어 주니 애비는 도로 자식 입에 넣어 주고 할꼬. 내가 어서 가서 저렇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널리 구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70)
천하를 주유하실 때 맨발로 먼길을 가시고, 산과 들에서 노숙하시고, 인가에서 걸식도 하시고, 굶는 때도 많으시니라. 농부를 만나면 대신 밭을 갈아 주시고, 곡식도 거두어 주시고, 시장에 가면 상인들을 도와주시고, 장인(匠人)과 함께 일도 하시니라. 또 누대에 올라 풍물을 들으시고, 노인을 만나 옛일을 말씀하시고, 관리를 만나 정치를 들으시는 등 만고(萬苦)를 체험하시고 만상(萬相)을 친히 둘러보시니 박학(博學)과 광람(廣覽)을 따라 혜식이 더욱 명철해지시므로 이르시는 곳마다 ‘신인’이라 하며 높이 칭송하니라.
이렇게 수년(3년) 동안 유력하시며 민심과 풍속을 살피시고 명산대천의 지운(地運)과 기령(氣靈)을 관찰하신 뒤에 서른 살 되시는 경자(庚子 : 道紀 30, 1900)년에 고향에 돌아오시니라. 하루는 전주에 들르시니 어떤 사람이 증산께서 신이하다는 소문을 듣고 기생 금희와 향춘을 자기의 딸이라고 속이며 시험하거늘 증산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이들은 기생이거늘 왜 나를 속이려 하느냐. 그대가 이러한 딸을 두었으니 천한 사람이로다.” 하시니 그 사람이 탄복하니라.
(증산도 道典 1:73)
증산께서 김제 반월리(半月里) 김한근(金瀚根)의 집에 머무시다가 다시 이치안의 집으로 가시니 이는 치안이 증산의 신이하심을 흠모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 옴이더라. 바로 옆집에 사는 치안의 당질 대규(大奎)는 그 마을 이장이라, 마침 관에서 호구 조사가 나왔거늘 진안에서 온 치안의 집안사람 이 훈장이 증산께 말하기를 “듣자니 당신이 아는 체를 잘한다는데, 이 동네 호구(戶口)가 몇인가 좀 봐 주시오. 남자는 몇이고 여자는 몇이오?” 하니라.
이에 증산께서 호수(戶數)와 남녀의 수를 자세히 일러 주시거늘 대규와 치안의 아들 직부(直夫)가 믿지 아니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온 동네를 돌며 호구수를 낱낱이 조사하여 보니 증산께서 말씀하신 여자 수는 맞으나 남자 수는 하나가 모자라는지라 직부가 “한 명이 모자랍니다.” 하고 여쭈니라. 이에 증산께서 “금방 세상 떠날 사람을 수효에 넣은들 무엇하리오.” 하시니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동네에서 초상이 나거늘 직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증산의 신성하심에 감복하니라.
(증산도 道典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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