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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문화

증산(甑山) 상제님의 탄강과 유년기

by 광명인 2024. 8. 14.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성신(造化聖神)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
(증산도 道典 1:1
[* 우주의 조화성신인 무형의 조물주 삼신과 하나되어 우주를 다스리는 분을 환단고기에서는 인격신인 삼신일체상제님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국 천단공원 기년전 내 모셔진 황천상제 위패

서양 사람 이마두(마테오 리치 신부)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대법국 천개탑, 바티칸 성당
금산사 미륵전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
(증산도 道典 2:30)

[* 이 성구는 삼신일체 상제님이 인간땅에 강세하시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하추교역기에는 반드시 우주의 절대자이신 상제님이 세상에 개입을 해야만 합니다. 그 이치가 화생토해서 토생금으로 넘어가는 오행의 이치인데, 이 성구는 그 이치가 인사로 실현된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인간으로 강세하신 증산상제님 어진

상제님께서 하늘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의 간곡한 기도와 하소연을 들으시고 새 우주를 열어 도탄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건지시기 위해 새 역사의 태양이 떠오르는 동방 땅에 강세하시니 환기(桓紀) 9070년, 배달국 신시개천(神市開天) 5769년, 단군 기원 4204년, 조선 고종 8년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1일) 자시(子時)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古阜郡 優德面 客望里)에서 탄강하시니라.

상제님의 존성(尊姓)은 강(姜)씨요, 성휘(聖諱)는 일(一) 자 순(淳) 자요, 아명(兒名)은 학(鶴) 자 봉(鳳) 자요, 자(字)는 사(士) 자 옥(玉) 자요, 도호(道號)는 증산(甑山)이시니 천지공사를 행하시어 우주의 무극대운(無極大運)을 여신 무극상제(無極上帝)시니라.
(증산도 道典 1:11)
[* 강증산 상제님께서 신미(辛未, 1871)년에 탄강했습니다. 이 때 조선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하고, 서양의 세력이 동양을 유린하던 혼란한 시기로 6월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를 보내 신미양요가 일어난 해입니다.]

상제님께서 태어나신 후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외가와 진외가(陳外家)로 자주 옮겨 사시니라. 객망리 집은 사립문도 없이 작은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데, 부엌은 볏짚으로 두르고 문은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더라. 점차 자라시매 얼굴이 원만하시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시며 지덕(知德)을 겸비하시어 총명과 혜식(慧識)이 출중하시므로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이 어린 학봉을 ‘영아(靈兒)’라 부르며 경애하니라. 어리실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많아 마당 구석에 화초를 심어 아담하게 가꾸시고 밭둑에 나가 나무를 즐겨 심으시며 또 자라나는 초목을 꺾지 않으시고 미물 곤충이라도 해치지 않으시며 위기에 빠진 생명을 보면 힘써 구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18)

우주의 율려음을 담은 풍물과 사물놀이

여섯 살 되시는 병자(丙子 : 道紀 6, 1876)년풍물굿을 보시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려 장성한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않으시나 풍물굿은 자주 구경하시니라. 이 해에 성부께서 가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 학봉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려고 태인 장군리(泰仁 將軍里) 황씨 집성촌에서 황준재(黃俊哉)라는 이름 있는 훈장을 구하여 들이시거늘 훈장이 어린 학봉께 “도령, 공부해야지?” 하고 하대하니 학봉께서 물끄러미 훈장을 쳐다보시다가 스스로 천자문을 펼치시어 ‘하늘 천(天)’ 자‘땅 지(地)’ 자를 집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읽으시고는 책을 덮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시니라. 

훈장은 그 신이하신 기운에 눌려 어린 학봉이 노시는 모습만 바라볼 뿐이더니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공밥을 얻어먹기도 민망하여 다시 학봉께 “도령, 공부하셔야지요?” 하고 조심스레 여쭈거늘 “하늘 천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 자에 땅 이치를 알았으면 되었지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습니까? 노시다가 시간이 되면 가시지요.” 하시는지라 성부께서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보내시매 이로부터 스스로 밖으로 다니시며 글을 깨치시니라. 여러 서당으로 다니실 때 한 번 들으신 것은 곧 깨달으시고 한 번 읽으신 것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으시니 글을 읽거나 시를 읽으실 때 모르시는 것이 없더라.
(증산도 道典 1:19)
[* 고종 13년(1876) 병자년큰 가뭄으로 방죽이 말라붙어 건(乾)방죽이라고 하였는데요. 방죽은 원래 물을 가득 담고 있어야 하는데, 마른 방죽이 되어버린 건(亁)방죽은 자기 역할을 전혀 못 하는 셈입니다. 이걸 보고, 제 역할을 못 하면서 나대는 사람을 '건(亁)방죽이다' 라고 비꼬아 불렀다고 합니다. 이해는 큰 가뭄으로 농사를 짓는 민초들의 삶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곱 살 때 어느 글방에 가시어 훈장으로부터 ‘놀랄 경(驚)’ 자 운(韻)을 받고 글을 지으시니 이러하니라.

遠步恐地坼이요 大呼恐天驚이라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
멀리 뛰려 하니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

학봉께서 서동(書童)들과 더불어 시를 지으실 때 “글도 배운 바 없는데 무슨 시를 짓겠느냐.” 하고 겸양하시되 항상 장원을 하시니라. 하루는 훈장이 주위의 미움을 받을까 하여 이번에는 문장이 다음가는 다른 아이에게 장원을 주리라 마음먹고 그 아이의 글씨를 눈여겨보아 두었으나 또 학봉에게로 장원이 돌아가거늘 이는 훈장의 그런 뜻을 미리 아시고 문체와 글씨를 평소와 다르게 하여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영기(靈氣)가 넘치고 혜명하시니 보는 이마다 ‘신동(神童)’이라 부르며 경탄하더라.
(증산도 道典 1:20)

이 해에 하루는 손바래기에서 동무들과 놀이를 하시다가 갑자기 고사리 손으로 마당 한쪽 구석을 파시거늘 같이 놀던 아이들이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물으니 학봉께서 쳐다보지도 않으시며 그저 “샘을 판다.” 하시니라.
학봉께서 처음에는 맨손으로 긁으시다가 이내 복찌깨로 땅을 파시며 연신 “어서 물 나라, 물 나라.” 하시니 물이 날 만한 자리도 아니고 그리 깊이 파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에 정말로 샘물이 솟아나거늘 이를 본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하며 손뼉을 치니라. 후에 그 샘물은 동네 우물로 쓰이니라.
(증산도 道典 1:21)

한번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흥덕 부안면(興德 富安面) 하오산(下鰲山) 앞의 알미장(卵山場)에 이르시니 어떤 사람이 지필묵을 내어 놓고 글을 청하거늘 어린 학봉께서 조그만 손으로 붓을 꽉 잡고 먹을 듬뿍 묻히신 뒤 종이 위에 굵게 ‘한 일(一)’ 자 한 획을 힘껏 그으시며 큰 소리로 “나는 순이다!” 하고 외치시니 순간 한 일 자가 마치 누에처럼 꿈틀꿈틀 기어가거늘 구경하던 장터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더 자세히 보려고 서로 몸을 밀치고 당기고 하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니라. 이 때 학봉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 땅은 한 일 자 누에와 같다.”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22)

증산 상제님의 탄강하신 객망리 시루산

아홉 살 되시는 기묘(己卯 : 道紀 9, 1879)년에 부친께 청하여 집 뒤쪽에 초막을 짓고 홀로 거처하시니라. 이 때 외인의 출입을 금하시고 하루건너 암꿩 한 마리와 비단 두 자 다섯 치씩 구하여 들이시더니 두 달 후에 홀연히 어디로 나가시거늘 방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
어려서부터 집에 계시기보다는 즐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니 종종 시루산에서 매봉과 망제봉동죽산을 타고 두승산에 올라 고산준령을 향해 크게 외치시고 또 밤이면 큰시루산에서 작은시루산으로 뛰어다니며 산하정기를 호흡하시고, 산 속의 고요에 젖어 깊은 명상에 드시니라. 집에 돌아오시면 초막에 드시어 조용히 사색에 잠기시니라.
(증산도 道典 1:23)

객망리 전경

이 해에 성부께서 정읍 읍내 박 부호에게 수백 냥 빚을 졌더니 빚 독촉이 심하므로 늘 근심 가운데 지내시거늘 하루는 학봉께서 부친께 50냥을 청하니, 부친께서 이상히 여기면서도 아들의 비범함을 익히 보아온 터라 어렵게 돈을 변통하여 주시니라. 
이에 박 부호에게 가서 돈을 주고 그 집 사숙(私塾)에 드시니 훈장이 운을 불러 학동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고 있는지라 학봉께서도 함께 운을 달아 시를 지으시니 웅장한 서필(書筆)에 시격(詩格)이 절묘하거늘 훈장이 매우 놀라고 박 부호도 크게 경탄하니라. 이에 박 부호가 자기 집에 머물며 그 자질(子姪)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거늘 학봉께서 못 이기는 척 며칠 동안 머무르시다가 하루는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박 부호가 모든 일에 크게 감복하여 드디어 채권을 포기하고 증서를 불사르니라.
(증산도 道典 1:24)

어리실 때부터 이토록 영명(英明)하고 비범하시므로 성부께서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하시니라. 

하루는 아버지로서 위엄을 갖추고자 짐짓 엄중하게 대하시거늘 학봉께서 예를 갖추어 말씀하시기를 “제가 아들이라고 함부로 대하시거나 제 말씀을 가벼이 여기시면 아니 됩니다.” 하시니 이후로 성부께서 한평생 아들의 행동을 간섭하지 않으시니라. 부자간에 정이 애틋하시되 이렇듯 서로 예로써 대하시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친구 같은 부자지간’이라 일컬으니라.
(증산도 道典 1:25)

이 해 겨울에 부모님을 따라 서산리 외가로 옮겨 사시다가 이듬해 다시 손바래기로 돌아오시니라.
하루는 학봉께서 서당 벽에
明朝有客是何人고 必是西來柳瑞九라
명조유객시하인     필시서래류서구
내일 아침 손님이 있으리니 그는 누구인가
틀림없이 서쪽에서 오는 류서구이리라.
라고 써 붙이셨거늘
훈장이 이를 보고 “이 글을 누가 썼느냐?” 하매 다른 아이들이 학봉이 썼다고 대답하더니 과연 다음날 아침에 류서구가 찾아온지라 이후로 훈장이 학봉 앞에서는 언사를 조심하니라. 여러 서당으로 드나드실 때 이처럼 지혜가 밝으시므로 어느 훈장도 학봉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더라. 또 학문이 비범하시므로 혹 누가 글 쓸 일을 부탁해 오면, 반드시 글줄마다 끝에 한두 자 쓸 만한 자리를 비워 두고 써 주시니라.
(증산도 道典 1:26)

하루는 성부께서 벼를 말리실 때 새와 닭의 무리를 심히 쫓으시니 이를 만류하며 말씀하시기를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시되 성부께서 듣지 않고 굳이 쫓으시거늘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비가 쏟아져서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매 한 알도 건지지 못하게 되니라.
(증산도 道典 1:27)

해마다 부친과 함께 서산리에 자주 가시어 농사일을 돕고 이엉을 엮기도 하시니 이는 손(孫)이 없는 외가의 일손을 도우시기 위함이라. 열 살이 넘어 가족이 다시 서산리 외가에 가서 얼마 동안 사실 때 성부께서 객망리 앞에 작은집을 얻어 주막을 경영하시니 학봉께서 홀로 계신 모친을 위하여 송산(松山) 도득골에 가시어 솔가지와 낙엽을 긁어다가 불을 때기도 하시니라. 학봉께서는 효심이 돈독하시고 부지런하시며 매사에 범절이 뚜렷하시니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시니라.
(증산도 道典 1:28)

학봉께서 갑신(甲申 : 道紀 14, 1884)년에 금구 환평(金溝 環坪) 사람 김형렬(金亨烈)을 처음 만나시니라.
형렬은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도(道)에 뜻을 품고 동무를 구하던 차에 ‘고부에 강가(姜哥)로서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으니라. 하루는 형렬이 ‘내가 한번 그 사람을 만나 보리라.’ 결심하고 고부로 향하는데 날이 저물어 우연히 태인 매당(梅堂) 불출암(佛出庵)으로 발길이 이끌려 들어가니라.
형렬이 암자에 이르매 갑자기 부엉이가 요란하게 울어대거늘 중에게 “부엉이가 어찌 저렇게 우는가요?” 하고 물으니
그 중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예사 사람이 아닌가 보오.” 하니라.
이에 형렬이 “예사 사람이 아니면 내가 허신(虛神)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하니
중이 “어디를 가시는 길에 여기까지 오시었소?” 하고 묻거늘
형렬이 “내가 찾을 곳이 있어 길을 가다 나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왔는데, 오자마자 저렇게 부엉이가 울어대는 게 참 이상하오.” 하니라.

이 때 학봉께서 들어서시더니 별 모양의 누런 별전(別錢) 여섯 닢과 바둑알 같은 검은 돌을 가지고 돈치기놀이를 하시는데 가운데 있는 것을 맞추려 하시되 자꾸 다른 것이 맞으니 “이것도 소용없다.” 하시며 형렬이 있는 쪽을 바라보시니라.
형렬이 “어디 사시오?” 하며 말을 건네니
“나 어디 사는 것을 왜 묻소?” 하시거늘
형렬이 “내가 이제 강가를 찾으러 고부에 가는 중이오.” 하니라.
이에 학봉께서 “무슨 일로 찾으려고 하오?” 하고 물으시니
형렬이 말하기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이 있지 않소. 큰사람이 될지 작은 사람이 될지 본 연후에 내가 외돌토리라 동무 삼으려고 그러오.” 하니라.
이 때 마침 학봉과 한 고을에 사는 은양덕(殷陽德)이 다가와 “이 도령이 바로 그 도령이오.” 하고 일러 주거늘
형렬이 크게 놀라 “아, 그러하오?” 하며 얼른 몸을 추슬러 기꺼이 재배를 하는지라
학봉께서 “한 번 하면 되었지, 내가 죽었는가, 재배를 하게.” 하고 하대하시거늘
형렬이 “내가 세 살만 더 먹었어도 존장(尊長)이 되려 했는데, 내 나이 몇이라고 그리 않겠소?” 하며 다시 일어나 절을 하니
학봉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법줄은 아는구나.” 하시니라.
이 때 학봉께서는 성수(聖壽) 열넷이요, 형렬의 나이는 스물셋이더라.

은양덕이 형렬에게 이르기를 “나이는 적지만 무슨 일이든지 다 아는 지혜가 있어 이사를 가려 해도 고을에서 못 가게 한다오.” 하니 학봉께서 “우리 부모님 영혼이 금방 뜨시게 생겨서 내가 지키느라고 안 가지, 못 가게 한다고 내가 못 갈 사람이오?” 하시고 형렬을 바라보시며 “내가 땅위에 서 있다고 아무리 땅을 파 보아라. 나는 공중에 뜬 사람이다. 한번 떠 봐라!” 하고 목침 위에 올라서시니라. 형렬이 자못 의심스러워하며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학봉의 발을 받쳐드니 몸이 공중에 붕 뜨시거늘 크게 놀라 손을 더 올리니 더 높이 뜨시고, 그렇게 손을 들면 드는 대로 위로 떠오르시더라. 이로부터 학봉께서 형렬과 친면으로 지내시니라.
(증산도 道典 1:30)

김제 금산사 심원암의 봄

학봉께서 집이 워낙 가난하여 열다섯 살 무렵에 글읽기를 중단하시고 짚신을 삼아 팔기도 하시며 사방으로 유랑하시니 정읍 남이면 거슬막에서 머슴으로 일하며 보리를 거두기도 하시고 정읍 내장산 아래 부여곡(夫余谷)에서 산판꾼이 되어 나무를 베기도 하시니라.
이 때 틈틈이 고부 궁동면 도천리(宮洞面 道川里) 종문(宗門)에 가시어 여러 서적을 읽으시니라.
열여섯 살 되시는 해에 하루는 금산사 심원암(深源庵)에 이르시어 깊이 사색에 잠기시니라.
(증산도 道典 1:31)

내장산 가을풍경

사옥께서 이곳저곳으로 유랑하시다가 열아홉 살 되시는 기축(己丑 : 道紀 19, 1889)년 가을내장산에 가시니라. 저녁 노을에 물결치는 단풍을 바라보며 산에 오르시어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해 눈시울을 적시다가 바위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시니라. 날은 저물고 사위(四圍)가 고요한데 어디서 목탁 소리가 들려오거늘 소리를 따라 청수암(淸水庵)에 이르시니 한 젊은 여인이 홀로 불공을 드리고 있는지라 사옥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시기를 “어인 일로 이 적적한 암자에 혼자 계시오?” 하시니
그 여인이 아뢰기를 “저는 본래 고향이 전주인데 발을 잘못 들여 수월(水月)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사옵니다. 지금은 정읍 부호 박인상의 첩으로 들어가 있사온데 두 해가 되도록 아직 혈육이 없사와 두 달째 정성을 들이고 있습니다.” 하니라.

사옥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령신(先靈神)을 잘 받들고 정성을 지극히 하면 소원성취할 것이오.” 하시니 수월이 “조상신이 참으로 있사옵니까?” 하고 여쭈거늘 말씀하시기를 “허허, 무슨 말씀을. 있고 말고!” 하시니라. 
이윽고 밤이 깊으매 사옥께서 밖에서 밤을 지샐 수 없어 불 때지 않은 빈방에 드시니라. 한밤중에 수월이 사옥께서 계신 방으로 들어와 자신을 거두어 주십사 애원하거늘 “그런 생각을 마시오. 부인에게는 주인이 따로 있으니 집에 가 있으면 좋은 배필을 만나리다.” 하며 타일러 돌려보내시고 이른 새벽에 암자를 떠나시니라.
(증산도 道典 1:33)

객망리로 돌아와 계실 때 시루산에서 큰 소리로 진법주(眞法呪)를 읽으며 공부하시니라. 시루산에는 큰 소나무가 우거지고 학이 수두룩이 날아드는데 그곳에서 공부하시며 스스로 호(號)를 증산(甑山)이라 하시니라.
증산께서 수년 동안 객망리에서 진독골(盡讀谷)로 돌아 샘이너머를 거쳐 시루산 상봉을 주야로 오르내리시는데 이 때 근동 십여 리 산천이 울리도록 크게 소리를 지르시니 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밤에는 집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니라.
증산께서 하루는 성모께서 길어오신 물을 동이에 붓고, 마당 가운데 짚으로 삼발 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그 위에 동이를 놓으신 뒤 많은 백지에 글을 써서 그 앞에 놓으시고 저녁내 소리내어 천지에 기도하시니라. 기도를 마치시매 글 쓴 종이를 청수 위에서 불사르시어 그 청수를 동이째 다 들이켜시니라.
또 증산께서 종종 꽹과리를 치며 마을을 돌아다니시니 한번은 허리끈을 풀어서 휙 던지시매 순간 허리끈이 구렁이로 변하여 기어가더라. 스물한 살 때 가족이 잠시 중학리(中鶴里)로 이사하여 사시거늘 이 마을에 사는 열일곱 살 난 김흥락(金興洛)이 증산을 따르니라.
(증산도 道典 1:34)

진법주 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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