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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북부여기

가섭원 부여기-2

by 광명인 2024. 1. 19.

2세 금와 재위 41년
[고구려와의 대외관계와 유화 부인의 죽음]  

금와왕의 재위 원년은 갑술(환기 7151, 신시개천 3851, 단기 2287, BCE 47)년이다.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재위 24년 정유(단기 2310, BCE 24)년에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고구려에서는 위병衛兵 수만 명으로 호위하게 하여 영구靈柩를 졸본으로 모셔 와서 장사를 지냈다. 주몽 성제께서 황태후의 예로써 모후母后의 영구를 모셔와 능陵을 조성하고 그 곁에 묘사廟祝를 지으라 명하셨다. 
재위 41 년 갑인(환기 7191, 신시개천 3891, 단기 2327, BCE 7)년에 금와왕이 훙서하였다.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대소왕의 재위 원년은 을묘(환기 7192, 신시개천 3892, 단기 2328, BCE 6, 고구려 2세 유리명열제 14)년이다. 봄 정월에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자를 볼모로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 열제烈帝(2세 유리명열제)께서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셨는데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노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졸본성을 쳐들어갔으나 큰 눈이 와서 얼어 죽는 군사가 많아 물러났다. 
재위 19년 계유(단기 2346, CE 13)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대소랑의 죽음]
 
재위 28년 임오(단기 2355, CE 22, 고구려 대무신열제 5)년 2월에 고구려가 국력을 다하여 쳐들어왔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꿀고 나가 싸우다가 왕이 탄 말이 진구렁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었다. 이때 고구려 상장 괴유怪由가 곧장 나아가 왕을 죽였다.
부여군은 오히려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마침 짙은 안개가 7일 동안 계속되자 고구려 열제께서 밤을 틈타 군사를 비밀리에 움직여 포위망을 벗어나 셋길로 달아나셨다.
 
[대소왕 아우의 갈사국 건설]  

여름 4월, 왕의 아우가 추종자 수백 명과 더불어 길을 떠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悔頭國 왕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曷思水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다. 이 나라가 바로 갈사국(갈사부여)이다.
 
고구려 6세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단기 2401, CE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都頭왕(갈사국 3세)이 고구려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니, 시조로부터 3세, 역년 47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 열제께서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아 살 집을 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주어 동부여후東夫餘候로 봉하셨다.
 
[대소왕 종제가 고구려에 투항하여 연나부 왕에 임명됨]
 
이 해 가을 7월에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백성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선왕先王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고, 갈사국은 한쪽에 치우쳐 있어 안락하기는 하나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도다. 나 또한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여 살기를 도모하자"라고 하였다. 드디어 옛 도읍의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에서는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살게 하였다. 또 그의 등에 띠 같은 무늬가 있어 낙씨絡氏 성을 내려 주었다. 그 후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에서 백랑산白狼山 계곡으로 옮겨갔는데 연燕나라와 가까운 곳이었다. 

고구려 21세 문자열제文咨烈帝 명치明治 갑술(환기 7691, 신시개천 4391, 단기 2827, CE 494)년에 이르러 나라가 고구려에 굴복하여 들어가니 연나부의 낙씨는 마침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