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기』를 지은 범장范樟 (?~?) (북부여기 전문 보기)
고려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였다고 한다. 호는 복애伏崖이고, 복애거사로도 불리었다.
범장의 호인 복애伏崖가 '휴애休崖'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증손 범석희范錫熙가 필사한 범장의 저서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는 복애를 범장의 호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간행한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1937)에도 "자는 여명보汝明甫, 호는 복애伏崖"라 기록되어 있다. (범석희는 고려말에 참지參知를 지냈다. 그러므로 범석희는, 조선시대 초까지 산 증조부 범장과 상당 기간을 함께 산 것이다. 생전에 함께 생활한 증손자가 증조부의 호를 잘못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의 표지에 "범복애저范伏崖著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라 적혀 있고, 도입부에 "범장 복애가 쓴 『화동인물총기』를 증손인 범석희가 천순(명나라 6세 영종英宗의 연호) 무인년(1458 : 조선 세조 3 년) 2월에 한성 왕십리에서 옮겨 적다[范伏崖著 話東人物叢記 曾孫錫熙 天順戊寅二月 漢城往十里移記]"라고 기록되어 있다.)
범장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는 남송 때 예부시랑禮附侍郞을 지냈는데 원에게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하였다. 조부 범유수范有睢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 범씨가 되었다.
범장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의 관직 생활이 전부이다. 범장은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郞舍의 수장인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1335년에 천보산에서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로부터 비서를 전수받은 지 30년이 더 지나 뒤늦게 관직에 발을 들인 것이다.
낭사는 고려의 핵심 관청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관리로, 임금에게 건의와 충언을 드리는 직책이었다. 그러한 낭사 중에서도 최고위인 간의대부로서, 임금의 처사에 대하여 간언하고 이미 내린 조칙이라도 부당하면 되돌리는 일을 행하려면 얼마나 해박하고 강직하여야 했겠는가. 간의대부라는 직책만으로도 범장의 성품과 학식을 짐작할 수 있다. (낭사가 되기 위한 자격은 매우 엄격하여, 문벌귀족 출신이면서도 청렴하고 덕망이 있어야 임명될 수 있었다. 때문에 낭사는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범장은 벼슬에서 물러나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과 함께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으로 내려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중국 서적 『고려사사적개요高麗史史籍槪要』에 의하면, 고향에 돌아온 범장은 자신이 즐겨 노닐던 곳인 '복암伏岩'을 따서 호를 '복애'라 하였다. (고려사사적개요는 2007년 중국 감숙인민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으로 『복애실기伏崖實記』를 수록하고 있다. 복애실기는 그 저자와 저술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고려말 인물인 범장의 사적과 그에 관련된 기념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책),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 (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범장은 조정에 출사하기 34년 전 젊은 시절(1335)에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로부터 고서를 전수받았다. 그때 세 사람은 국호만 살아 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며 반드시 한민족사를 되찾을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이 '3인의 결의 사건' 덕분에 한국사회복의 길에 서광이 비치게 된 것이다.
이후 범장이 쓴 책이 바로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 이다. 출사하기 전에 썼는지, 고려가 망한 후에 낙향하여 썼는지 그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여 고조선 → 북부여(열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사국 시대)→ 대진· 신라(남북국 시대)→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맥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에서 부여사를 저술하였음은 분명하다. 이암, 이명, 범장, 이 세 분이 우리 역사의 참 모습을 드러낸 공덕은 천추만대에 길이 남을 것이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범세동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아버지는 통찬(通贊) 범후춘(范後春)이며,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69년(공민왕 18)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 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편집하고,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을 편찬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가 고향인 나주(羅州: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로 돌아왔으며, 조선태종(太宗)이 여러 번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금성 범씨 대동보에 범세동의 <북부여기>가 실려있다는 것입니다.
금성 범씨 대동보에 실린 <북부여기>
퇴계 선생이 이르기를 "국가만세에 마땅히 복애와 운곡의 말을 좇아야 한다" 하였고 상촌 신申선생이 이르기를 "우왕과 창왕의 사실은 마땅히 원천석과 범세동으로서 신사(信史)를 삼아야 한다" 하였다.
<금성 범씨 대동보>
범세동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범세동 선생이 쓴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또한 조선 500여 년동안 금서로써 금성 범씨 문중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온 책입니다.
"들키면 멸족 당하니, 비장(秘藏)의 풍토가 생겼다"
"정치 탄압이 심할 때는 자고로 비기(秘記)로 하여 비장(秘藏)하였다"
<화동인물총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포은(圃隱)과 목은(牧隱)의 대도론(大道論)을 운곡(耘谷)이 나에게 주었다가 누설되면 화가 두 집의 자손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야사(野史)로 하여 세상에 내놓지 아니하고 간직하게 되었다."
"정사(正邪)를 가리려는 오등의 야필(野筆)이 언제인가는 시원하게 서술되고 사기(史記)될 것을 바란다."
"정도전(鄭道傳)은 제가(諸家)의 화해전(華海全), 비지(秘誌)를 거두어 불살랐는데 癸酉 겨울 깊은 산속까지 뒤져 감추어진 것을 하나하나 몰수하여 태웠다고 했다. 또 진자성(陳子誠)의 무리가 史의 기록을 뒤적여 모두 다 불질렀다."
<화동인물총기>
여말선초의 혼란기를 틈탄 분서 사건들은 대체적으로 정적간의 싸움에서 비롯되어 역사를 단절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출처] <삼성기> 下의 저자 '원동중'은 '원천석'이다.|작성자 흑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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