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열제는 고구려의 19세 태왕으로 22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국시인 다물多勿주의를 완성한 위대한 황제이다. 광개토열제는 비록 38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배달· 단군조선 시대의 광대했던 한민족의 영토와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회복하려고 노력한 황제이며, 거란· 평량(감숙성)· 후연· 백제· 신라· 왜(일본) 등 동북아 국가를 조공국으로 복속하여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일본 전역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신교 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초유의 대제왕이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은 고구려의 이러한 찬란했던 역사를 담고 있으며, 그 시대 고구려의 강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1880년 광개토태왕릉비문이 발견된 뒤, 중국과 일제의 불순한 세력에 의해 이 비석의 중요 내용들은 훼손되었고, 심지어 왜곡 변조되어 지금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광개토태황릉비문은 거란· 후연· 백제· 왜를 정벌한 업적을 상세히 기록해 놓아 고구려의 다물정신을 밝혀주는 한민족의 귀중한 유산이다.
광개토태왕릉비는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보여준다. 즉 비문에 있는 광개토대왕이 17세손이라는 기록이 그것인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주몽으로 부터 13세손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기존사학계에서는 19대왕에서 6번의 형제상속 또는 종손상속을 제외하면 주몽의 13세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로부터 4세손이 고주몽이므로 고구려의 역사를 해모수 단군을 시조로 따져보면 광개토대왕은 해모수로부터 17세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고구려 900년 역사의 미스테리도 풀린다. 기원전 232년에 해모수가 단군이 되고, 해모수의 적통을 이은 고구려가 기원후 668년에 망했으므로 정확히 9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것이 중국사서 중의 하나인 신당서이다. 신당서에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려 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의 가언층이 고구려는 漢대로부터 나라를 가져 오늘날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김부식의 오판인 것이고, 오히려 당의 가언충이 올바르게 봤다는 것을 우리는 환단고기를 통해 알수 있다.
광개토열제는 고대 일본을 정복하여 임나任那(지금의 대마도)· 일기도一岐島와 큐슈九州 전체를 10개국 연방체 (임나 연방)로 만들어 다스렸고, 기내機內 지방에 위치한 야마토大和 왜倭를 속국으로 지배하였다. 임나는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이 결코 아니다. 환단고기는 임나任那가 지금의 대마도임을 명확히 밝힌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단에 위치 했으며, 고대 일본이 이 임나(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날조하여, 일본의 한반도 강점强占은 옛 땅의 회복이라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 합리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활용한 것이 광개토태왕비문이다. 그 중 가장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내용이 영락樂6년 (396) 조에 있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口口口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이라는 기사이다. 신묘(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정벌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묘년 기사 내용은 사실 사코오 중위에 의해 변조됐다는 것이 후에 이진희 · 이형구 등 여러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또 비문에 나오는 많은 간지干支에는 '신묘년'과 같이 년年 자가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므로 변조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부분은 이형구 저,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80년 광개토태왕릉비문이 발견된 뒤 곧바로 중국 측과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 의해 중요한 부분이 모두 깎여 버렸고, 내용마저 일부 변조되어 본래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당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첩자에 의해 만들어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비문이나 탁본에 종이를 대고 그린 후 먹을 칠하여 탁본처럼 만든 것)에는 "왜가 신라성에 가득차고 그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100년 뒤 1981년 중국 주운대周雲代의 정밀탁본에는 “신라성에 들어온 왜구가 (고구려 원정군에게) 크게 궤멸되었다"라고 되어 있어, 쌍구가묵본과는 전혀 다른 글자가 확인된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왜곡했던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석회가 떨어져 나가게 되자 원래의 글자가 되살아난 것이다. 쌍구가묵본을 만들 때 원래의 글자인 '왜구대궤倭寇大潰'를 석회를 발라 왜倭(일본)에 유리하도록 '왜만왜궤倭滿倭潰'로 바꾸어 놓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236쪽). 신묘년 기사에 대한 민족사학자들의 대표적인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인보의 해석: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 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이진희의 해석: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서, 고마쓰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가 쓴 「고려고비고추가」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형구의 해석: 1981년 이형구는 비문 자형의 짜임새,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왜구, 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
삼가 생각건대, 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께서 우리 고구려를 창건하셨다.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출생하셨고, 아버지는 천상의 상제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수신神)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뜨리고 탄생하여 날 때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추모왕이 길을 떠나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경유하시게 되었다.
이때 추모왕이 나룻가에서 외치시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我是皇天之子],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의 떼를 띄워서 물을 건너게 하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을 무렵에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홀본성忽本城 동쪽 언덕에서 황룡黃龍이 왕을 업고 하늘로 올라갈 때, 세자인 유류왕儒留王을 돌아다보고 명령하여 당부하기를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리라 [以道與治]"하셨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선왕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려 왕업을 계승 발전시키셨다.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世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십팔 세 (391)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하셨다. 호태왕好太王은 그 베푼 은택恩澤이 하늘에 미치고 불의不義를 바로잡는 위무威武는 사해四海를 뒤덮었다. 부정한 무리를 쓸어 없애시니 백성은 직업에 안정되었다.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은성股盛하고 오곡五穀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아니함인지 삼십구 세(412)에 세상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셨다. 갑인甲寅(414)년 9월 29일에 옮겨서 산릉山陵에 모시고 비碑를 세우고 훈적勳積을 새겨 기록하여 뒷세상에 보이려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락 5년 을미永樂五年乙未에 패려稗麗가 순종하지 않아 왕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정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빈산貧山을 지나서 염수鹽水 위에 이르러 그 구丘에 있는 부락 육, 칠백의 영營을 깨뜨리고 소, 말, 양 등을 사로잡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서 수레를 돌려 □평도平道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성城과 역성力城, 북풍北豊에 돌아오며 여러 지방을 왕이 고루 순수巡狩하셨고, 관경管境을 순행하고 사냥을 하며 돌아오셨다.
(영락 6년 병신永樂五年內申에) 백잔百殘(백제百濟)과 신라新羅는 본시 속민屬民으로서 옛적부터 조공朝頁을 바쳐 왔다. 왜倭가 신묘년辛卯年 이래以來로 매양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과 □□와 신라新羅를 파破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하므로 이에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영락 6년 병신永樂六年內申에 태왕이 직접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왜적倭賊과 잔국殘國(백제百濟)을 토벌討伐하심에 군대軍隊가 먼저 왜적倭賊의 과구窠臼(소굴)에 이르러 십팔 성十八城을 공격攻擊하여 취하셨다. 그리고 구모로성城, 각모로성城, 간저리성城, □□성城, 각미성城, 모로성城, 미사성城, 고사조성城, 아단성城, 고리성城, □리성城, 잡진성城, 오리성城, 구모성城, 고모야라성城, 수□□, □성城, 개이야라성城, 전성城, □□성城, 두노성城, 비□□리성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대산한성城, 소가성城, 돈발성城, ~~~~ 구천성城, □□□□□기국성其國城. 잔殘(백제百濟)은 정의正義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모든 싸움에 나섰다. 왕이 진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서 성城을 압박하시니 백제의 군대가 제 소굴로 도망치므로, 이어 그 성을 에워싸 공격하셨다. 백제 왕은 당황하고 다급하여 남녀男女 포로 일천一千 명과 세포細布 천필千匹을 바치고 왕에게 귀순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는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은 그들이 처음에 잘못한 허물을 널리 용서하시고, 뒤에 순종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고 기록하셨다.
그리하여 58개 성 五十八城 700개 마을 七百村을 얻고, 백잔百殘 임금의 아우와 대신大臣 열 사람을 데리고 군대를 철수하여 수도首都에 돌아오셨다.
8년 무술八年戊戌에 일부의 군대를 파견하여 식신息愼(숙신肅愼)의 토곡土谷의 정황을 탐색하고 바로 공격을 개시하여 막莫□라성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에서 남녀男女 삼백여 인三百餘人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식신息愼은 조공朝頁을 바치고 복종하여 섬겼다.
9년 기해九年己亥에 백잔百殘이 고구려와의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하여 친선을 맺었다. 왕(호태왕好太王)이 순시 차 평양에 가셨는데 신라新羅에서 사절을 보내와 왕에게 고하기를, "왜인倭人이 그 영토(신라新羅)에 가득히 들어와서 성城과 못을 파괴하고 노객奴客(신라인新羅人)을 왜의 민民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고告하며 호태왕好太王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호태왕好太王은 그들의 충성을 동정하여 사절을 다시 보내어 그 요청을 허락하셨다.
10년 경자十年康子에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오만五萬을 파견하여 신라新羅를 구원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경유하여 신라성新羅城에 들어가니 그 안에 왜병倭兵이 가득했는데 관군官軍이 도착하자 왜적倭賊이 퇴각하였다. □□□□□□□ 왜의 뒤로 돌아 급히 추격하여 임라가라任那加羅에 까지 이르러 계속하여 성城을 함락하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안라인 수병戍兵으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관군이 신라성新羅城, 신성晨城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성내城內 [이하원십육자결以下原文十六字缺] 십구十九, 왜적과 함께 모두 물리치고 신라인 수병에게 맡기어 안돈安頭시켰다. [...원문오십여자原文五十餘字缺(이도 역시 관군이 백잔百殘과 왜구를 공파攻破한 기록으로 추측된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이 두 번 나온 것으로 보아 삼三면 이二행에 나오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도 같은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옛적에 신라新羅의 임금이 친히 와서 영사聆事(잘 따르며 섬기는 행위)를 한 적이 없었는데 □□□□광개토경호태왕廣開土境好太王이 □□□□(오만五萬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도와준 연고로) 신라 임금이 친히 가복을 데리고와 고구려왕(호태왕)에게 조공하였다.
14년 갑진十四年甲辰에 왜倭가 부당不當하게 대방帶 지역을 침입함에 잔병(백제의 군대)과 화통,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침입해 오니, 호태왕은 몸소 군대 를 이끌고 가셔서 토벌하매, 평양平穰□□□에서 만나 격전을 하게 되니 왕의 군대가 들이치시니 왜구倭寇가 궤패潰敗하여 흩어지고 전사한 자가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17년 정미十七年丁未에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오만五萬명을 파견하여 □□□□□□□□□왕사王師(광개토태왕의 군대)가 □□와 합전合戰하여 적군을 섬멸하여 죄다 없애시고 갑옷 일만一萬여 벌을 위시하여 군수물자와 장비를 노획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면서 사구성沙灌城, 누성婁城, 우유성牛由城, □성城, □□□□□□성城을 깨뜨렸다.
20년 경술庚戌 동부여東夫餘는 옛적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래서 호태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셨다. 군대가 부여성夫餘城에 도착하니 부여夫餘의 온 나라가 놀라 □□□□□□□을 헌납하였다. 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오는데 또 그들 중에서 왕王의 덕화德化를 사모하여 관 따라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은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 卑斯魔鴨盧, 타사루압로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이다.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城의 수가 육십사六十四이고, 촌村의 수가 일천사백一千四百이다.
능묘陵墓를 지키는 연호烟戶(가구家口)는 매구여賣句余의 백성 중에서 국연國煙이 이가二家, 간연看煙이 삼가三家요,,,,
,,,,,
여리성於利城은 팔가八家가 간연看煙이요, 비리성比利城은 삼가三家가 간연看煙이요, 세성細城은 삼가三家가 간연看煙이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생존시에 말씀하시기를 "조왕祖王과 선왕 국강상광개토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 선왕先王께서는 원근遠近의 여러 지방에 사는 구민舊民(본토인)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기었으나, 나는 이들 구민舊民이 차차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무덤을 편히 수호할 자들은, 내가 돌아다니며 직접 데리고 온 한족韓族이나 예족穢族이니 그들에게 수호하고 소제하는 일을 맡게 하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한족韓族과 예족穢族 이백이십가二百二十家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법을 잘 모를 것을 염려하여 다시 구민舊民 일백십가一百十家를 데려왔다. 새로 온 사람과 전부터 있던 자를 합하면 수호하는 호수戶數는 국연國煙이 삼십가三十家, 간연看煙이 삼백가三百家, 모두 합하여 삼백삼십가三百三十家이다.
상조선왕上祖先王 이래로 능묘陵墓 위에 비석碑石을 갖추지 못하여 무덤을 지키는 가호家戶들이 잘못하는 사태가 생기게 되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은 조선왕祖先王의 무덤 위에 모두 비석碑石을 세워서 그 가호家戶들로 하여금 잘못하는 일이 없게 하셨다. 또 제도를 제정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이후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고,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 가지 못 하게 하셨다. 만일 법령을 위반하고 파는 자는 형벌에 처하고, 사는 사람도 법을 마련하여 그로 하여금 무덤을 수호하게 하셨다.
천제지자: 광개토태왕비에서는 고구려 추모왕이 천제의 아들임을 천하에 공표하였다. 고구려가 환국 아래로 내려온 신교의 광명사상에 입각한 천손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추모왕 : 1세 고주몽 성제(재위 BCE58~BCE19)
유류왕: 2세 유리명제(재위 BCE19-CE18)
대주류왕: 3세 대무신열제(재위 CE 18~44). 유리명제의 셋째 왕자, 휘 무휼, 대해주류왕, 북국신왕北國神王, 태무왕太武王이라고도 한다.
'환단고기 > 환단고기 해제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본래 천자국天子國 (2) | 2024.04.27 |
---|---|
신교의 낭가사상 (0) | 2024.04.10 |
동방 한민족의 신교문화 (3) | 2024.04.02 |
환단고기 유사역사학 위서 바이러스 비판 (0) | 2024.02.15 |
3. 수메르에서 뻗어 나간 서양 문명과 인도 문명 (1) | 2024.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