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흘러가는가, 아무런 목적없이 인과율로만 흘러가는가? 오래된 논쟁거리인데요. 인과율은 사실 우주변화의 근본 원리인데, 대우주 자연과 인간 세상은 엄정한 인과율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시공의 무대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각자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 인과에서 파생된 결과를 선택 또는 회피할 수 있는 자율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위 논쟁의 핵심은 주재자의 목적대로 이끌어가는 절대정신 내지는 신의 의지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느냐의 문제이지만, 이 대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움직여가는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로 본다면, 그기엔 당연히 목적을 가지고 시간의 질서를 조율하고 역사를 진보시켜가는 절대정신이 있다고 봐야겠죠. 그러니 역사는 절대정신의 조율하에 인과율의 파도를 타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위대한 대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절대정신의 목적은 인간의 사적인 욕망과는 다를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목적 없이 단지 식물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단순한 기계적 반응만 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결코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즉, 거대한 마음의 바다에서 인과의 파도에 휩쓸려 부평초처럼 떠다니든지, 목적을 향해 인과의 파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지는 개개인의 문제이지 인과론이란 법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 인과론은 성공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과도 깊은 연관관계가 있으며,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의 법칙이기도 하므로 각 종교의 수행관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우주의 근본 법칙입니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에서도 과연 아무런 목적없이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있을까요? 사실 목적은 모든 존재들이 존재하게 하는 존재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인과율과 목적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기독교의 목적론적 직선사관과 불교의 인과론적 순환사관을 총체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동양 우주론의 위대한 개념이라 생각하는데요. 아래 한동석 선생의 인과율과 목적율에 관한 소론은 개인적으로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글입니다.
우주론(Cosmologie)이란 본체가 어떠한 존재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은 어떻게 변화하느냐 하는 변화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만물이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생장(生長)하고 소멸(消滅)하며 또한 어떠한 법칙에 의하여 동(動)하고 정(靜)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려는 것이다.
변화(變化)라는 말은 만사나 만물의 부침소장(浮沈消長)하는 불가사의적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변(變)'이란 것은 만물이 화(化)하였다가 다시 내용을 충실시키는 과정[수렴]을 말하는 것이요. '화(化)'라는 것은 일정한 형태에서 다시 분열무화(分裂無化)[발산]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化)하는 과정에서는 생장을 촉진시키고 변(變)하는 과정에서는 성숙이 매듭을 맺는 것이다.
우주론은 이와 같은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시간적 계기(繼起)와 필연적 관계라는 두 개의 조건을 제시하였던 것이니 이것은 우주론의 연구에 있어서 진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만일에 이와 같은 요건이 발견되지 못하였더라면 저 인과율(因果律)이나 목적률(目的律)마저 제창할 수 있는 근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만물의 변화는 인과적이냐, 목적적이냐?
인과의 법칙으로서 인과율(law of causality)이 있다. 즉, 어떠한 결과는 반드시 그 결과 이전에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과 관계는 필연적 법칙 아래서 이루어진다고 보아서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한다. 그런데 흄(David Hume)은 이것을 객관적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두 개의 현상이 서로 계기(繼起)하는 것을 지각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칸트(Immanuel Kant)는 인과율을 선험적 오성(先驗的 悟性)의 형식에서 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과율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일하며 성립시키는 범주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는 인과개념의 필연적이며 종합적인 근거로서 이것을 '시간적 계기의 일반성'이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많은 학설들이 있으나 특기할 만한 논거가 없다.
인과율이 자연법칙에서 생긴 것이냐 혹은 인위적인 법칙이냐? 만일 이것이 인위적이라면 인간의 인식은 부정확한 것이므로 그 법칙의 진리성을 믿기 곤란할 것이고 이것이 자연법칙 그대로라고 하면 인간이 이것을 일일이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양)철학은 아직 이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심신(心身)관계라는 예에 있어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분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심신의 교호운동(交互運動)으로써 살고 있는가? 하는 것마저 규정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의학은 그 출발부터 우주변화의 기반인 상수학(象數學)에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우주의 본체 규정에 있어서나 그의 변화작용의 관찰에 있어서 자연법칙적인 엄격한 규범을 세워 놓고 출발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의 삼라만상도 동일한 자연법칙하에서 동정하는 것이므로 예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이 곧 우주의 법칙이며 인간과 만물의 법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간을 '소천지(小天地)'라고 하는 고대 철인들의 입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과관계를 우주의 동정법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과(因果)란 것은 動靜, 變化, 陰陽 등과 동일한 내용의 개념이면서 다만 관점을 달리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인과율이란 것은 '시간적 계승(繼承)의 일반적 필연성'인 것이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그렇게만 되는 원리)
그런데 인과론이 기계관으로 흐른 후에 이것이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것이 유물론이나 과학만의 법칙은 아니고 철학 자체의 법칙인 것이다. 또는 인과율은 자유를 말살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진실한 자유란 '시간이 일반적 계승작용'을 하는 인과법칙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란 것은 비방종적 일반성인 토화작용(土化作用)에만 있는 것이므로 자유의 기본인 인과율이 바로 자유의 모체인 것이다. 그런즉 인과율이란 것은 인위적인 법칙이 아니고 우주 자체의 운동법칙인 것이다.
인과관계란 '먼저 이러한 원인의 선행상태에서 후에 이러한 결과라는 후기상태로 전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목적관계는 미래에 일어날 후기상태인 목적을 위한 현재상태는 수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목적율(目的律)은 우주의 만상은 어떠한 목적 밑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데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신(神)이나 혹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목적에 의하여 만물이 생장된다고 하는 초월적 목적관(종교적 우주관과 같은 것)과 목적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만물자체 속에 내재한다고 하는 내재적 목적관(범신론과 같은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목적관(目的觀)을 세계해석에 최초로 도입시킨 학자는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였다. 그 뒤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과는 목적에 종속된다고 하였고, 칸트는 자연계를 기계관으로 보고 정신계는 목적관으로 보았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베르그송(Bergson)은 우주의 창조적 진화는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가능하며 생명의 비약은 순간순간 그 내면에 존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위에 소개한 제설(諸說)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칸트의 소론이다. 즉, 자연계를 기계관으로 보고 정신계를 목적관으로 본 점은 대철(大哲)의 관록을 여실히 나타냈다고 할 것이다. 우주의 변화현상을 대별하면 자연계는 다만 인과적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만 한서온냉(寒暑溫)의 영향에 의하여 생장소멸의 규칙적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뿐이고 개별적인 자기의지는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내경의 「소문(素問)」에는 이것을 기립지물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정신계는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도 절대적 요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의지, 즉 정신의 작용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생(生)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나 동물은 육체와 정신의 이대형상(二大形象)으로써 生을 영위하는 것이다.
무릇 형상(形象)을 보유하고 생활하는 인간이나 동물은 끊임없이 형상간에 모순과 대립을 나타내면서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니 이러한 육체와 정신의 공공생활(公共生活)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감정과 욕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동물이 육체와 정신의 이원적(二元的) 조직체이므로 여기에서는 욕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란 사욕의 주체이므로 무욕인 정신에 항상 도전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욕심은 목적의 원인이 되고 목적은 욕심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계는 기계적으로 정신계는 목적적으로 움직인다고 본 칸트를 숭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인과율과 목적률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전일개념 (全一槪念)이면서 다만 적용되는 대상에 차이가 있는 데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나 동물은 형상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과율과 목적률이 병행되는 것이고 자연계는 형체만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과율만이 적용되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자연계도 생명을 인정하는 한 약간의 정신이라도 있을 것이 아닌가 라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정신인 상(象)이 형체인 체와 서로 대립할 만한 실력이 없을 때에 그것은 동물이 될 수 없으므로, 즉 신기(神機)가 아니므로 욕심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인과율을 '시간적 계승(繼承)의 일반적 필연성(一般的 必然性)' 이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목적률은 '시간적 승계(承繼)의 이율적 우연성(二律的 偶然性)'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과율은 목적률에 종속된다고 말한 것에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과나 목적관계는 어디에 종속 된 것도 아니고 다만 전일개념으로서 그의 적용대상에 의하여 구별 호 칭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출처: 한동석 선생의 우주변화원리
'동양우주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려律呂-우주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순수 생명 에너지 (3) | 2024.06.11 |
---|---|
이理· 신神· 사事의 법칙 (0) | 2024.04.18 |
유교의 우주론, 세계관과 수행론 (0) | 2024.03.13 |
대산 김석진옹의 천부경(天符經)강론 (1) | 2024.02.02 |
수상(數象)-우주변화원리 (2) | 202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