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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

고구려국본기-22

by 광명인 2024. 3. 3.

22. 백제의 시조와 건국 과정 

소서노와 두 아들의 자립

고주몽 성제가 재위하실 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서노召西努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 다가, 경인庚寅(단기 2292, BCE 42)년 3월에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辰, 번番(옛 진한과 번한)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소서노의 어하라 피봉과 비류의 계승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 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朱蒙帝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어하라 재위) 13년 임인(단기 2315, BCE 19)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온조의 백제 건국

이때 마려馬黎 등이 온조溫祚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 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馬黎, 오간烏干 등 신하 열 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황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백제사람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패대浿帶: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지역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 일대이다.

어하라於瑕羅: 백제 건국 과도기에 고주몽 성제가 책봉한 왕의 호칭. 백제의 시초는 고구려의 제후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그 뒤에도 계속 백제 왕을 어하라라 불렀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임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주서周書의 백제전을 보면 "백제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왕호王號는 어라하於羅瑕인데, 백성들은 건길지楗吉支라 불렀다 [王姓夫餘氏號於羅瑕, 民呼為鞬吉支, 夏言竝王也]"라고 하여, 본서의 어하라와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백제 왕을 부르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시조가 1. 소서노, 2. 비류, 3. 온조라는 세가지 설이 있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국호를 백제라 칭한 온조왕을 백제의 정식 시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한산漢山: 지금의 서울 지방.
부아악負兒岳: '동국여지승람'에는 북악산이라 하였다.
한수漢水: 한강을 말함.

하남 위지성: 하남 위례성, 위지성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위지성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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