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一]王滿者, 故燕人也[二].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三]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爲其逺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四],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五],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六],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七].
조선의 왕이었던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의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아전[吏]을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국(秦國)이 연국을 멸하고 요동 밖 요(徼)에 소속시켰다. 한국(漢國)이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국에 소속시켰다. 연국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과 만이(蠻夷)들을 복속하여 거느리고 연국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사기, 조선열전에 나타난 패수 위치 고찰]
[一]正義: 潮仙二音. 括地志云, 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정의에서 말하기를 朝鮮의 음은 조선(潮仙)이라고 하였다. 괄지지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본래 한국(漢國)의 낙랑군(樂浪郡) 왕험성(王險城)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하였다.
[二]索隱: 案, 漢書, 滿 燕人, 姓衛. 撃破朝鮮王而自王之.
색은에서 안을 내기를 한서(漢書)에서는 위만은 연국(燕國) 사람이고 성(姓)이 위(衛)씨인데 조선의 왕을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북부여기와 번한세가에 도적위만이 기준의 왕위를 찬탈한 내용이 나옴]
[三]集解: 徐廣曰, 一作莫. 遼東有番汗縣. 番音普寒反. 索隱: 始全燕時, 謂六國燕方全盛之時, 常略二國, 以属已也. 應劭云: 玄菟本眞番國. 徐氏云, 遼東有番汗縣者, 據地理志而知也.
집해에서 서광의 말을 인용하기를 眞番(진번)은 眞莫(진막)으로도 썼고 요동군에 번한현(番汗縣)이 있으며 番의 음은 반(普寒反)이라고 하였다. 색은에서는 기록하기를 始全燕時란 6국 연국(燕國)의 전성기를 말한다고 하였는데 항상 2국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고 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현도(玄菟)는 본래 진번국(真番國)이라고 하였다. 서씨(徐氏)가 말하기를 요동군(遼東郡)에 번한현(番汗縣)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한서지리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四]集解駰案, 漢書音義曰, 浿音傍沛反. 正義, 地理志云, 浿水出遼東塞外, 西南至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
집해에서 안을 내었는데 한서음의를 인용하여 기록하기를 浿의 음은 배(傍沛反)라고 하였다. 정의에서 기록하기를 한서지리지에서는 패수가 요동의 새(塞) 밖을 나와서 서남으로 낙랑현(樂浪縣) 서쪽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고 했고 浿(패)의 음은 배(普大反)라고 했다.
[五]正義命謂教令
[六]索隱案地理志, 樂浪有雲鄣.
색은에서 안을 내기를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에 운장(雲鄣)이 있다고 하였다고 했다.
[七]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 韋昭云, 古邑名. 應劭注, 地理志云,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 瓉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집해에서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는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다. 색은에서 위소가 말하기를 옛 마을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지리지에서는 요동군에 험독현이 있다고 했는데 조선 왕의 옛 도읍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會, 孝惠髙后時, 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無使盗邉,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一], 方數千里[二].
때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1]의 시대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다.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는 것을 약속하고 새(塞) 밖의 만이(蠻夷)들을 보호하여 변경에 도적이 들끓는 것을 없게 하였다. 모든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막지 아니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것을 듣고 허락하였으므로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 영토는 수 천리가 된다.
[一]索隱: 東方小國, 後以爲郡.
색은에서는 동방의 소국이며 후에 군(郡)이 되었다고 했다
[二]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北至靺鞨國千四百里.
정의에서 괄지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기록하기를 조선과 고려와 맥과 동옥저 등의 5개 국가의 땅인데, 땅의 크기는 동서로 1300리이고 남북으로 2000리이며 경사(京師)의 동쪽에 있고, 동으로 대해(大海)까지 400리, 북으로 영주(營州)까지 920리, 남으로 신라까지 600리, 북으로 말갈국까지 1400리라고 하였다.
傳 子至孫右渠[一],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渉何誘諭右渠[二],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三]朝鮮禆王長[四], 即渡, 馳入塞[五],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即不詰[六], 拜何為遼東東部都尉[七].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그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서는 유인하여낸 한국(漢國)의 망명인이 번성하여 많았다. 위만은 입견(入見)을 막아 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로써 천자와 통하고자 하였지만 통하지 못하였다. 원봉(元封) 2년(BC109)에 한국(漢國)은 사신 섭하(渉何)를 보내어 우거를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우거는 즐겨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국경 상의 임패수(臨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마중나온 조선 비왕(禆王) 장(長)을 찔러 죽이도록 하고 임패수[2]를 건너 새(塞)로 달려 들어간 뒤, 천자에게로 돌아가 조선장수를 죽였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였은즉 힐문하지 아니하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이를 원망하고 군사를 발하여 엄습하여 섭하를 죽였다.
[一] 正義其孫名也.
정의에서 그 손자의 이름이라고 기록하였다.
[二] 索隱: 誘一作譙, 說文云譙譲也. 諭, 曉也, 譙音才笑反.
색은: 誘(유, 유인하다)를 혹 譙(초, 꾸짓다)로 기록한 것도 있다. 설문에서 말하기를 譙는 譲(양, 사양하다)라고 하였다. 諭(유)는 曉(효, 타이르다)이다. 譙(초)의 음은 조(才笑反)이다.
[三] 索隱即送何之御也.
색은: 즉, 섭하를 배웅하러 온 자이다.
[四] 正義: 顔師古云, 長者, 禆王名也. 送何至浿水, 何因刺殺也. 按, 禆王乃將士長, 恐顔非也.
정의: 안사고가 말하기를 장(長)이라는 것은 비왕의 이름이다. 섭하(涉何)가 패수를 건넜으므로 죽인것이다. 안(案). 비왕은 장수인 장(長)이라고 하였고 안사고는 아니라고 하였다.
[五] 正義入平州榆林闗也.
정의: 평주(平州) 유림관(榆林闗)으로 들어갔다.
[六] 索隱有殺將之美名
색은: 죽인 장수의 이름이 미(美)이다.
[七] 正義地理志云遼東郡武次縣東部都尉所理也
정의.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료동군 무차현(武次縣) 동부도위가 다스리는 곳이다.
天子募罪人撃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撃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撃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為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 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莭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천자가 죄인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에 배를 띄웠다. 병사 50,000명을 거느리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출발하여 우거를 공격하였다. 우거는 병사를 발하여 왕험성을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종격(縱擊)하게 하였지만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만 도망왔으므로 법에 따라 죄를 물어 목을 베어 죽였다. 누선장군도 제(齊)의 병사 7,000명을 거느리고 왕험성에 먼저 도착하였다. 우거가 성을 지켰는데 누선의 군대가 적음을 염탐하여 알아내고 곧 병사를 성밖으로 출격시켜 누선을 치니 누선의 군대는 패하여 도주하였다. 장군 양복은 그 병사를 잃고 산으로 달아나 10여 일을 보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사를 거두어 들였다.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의 서쪽 군대를 공격하였지만 능히 깨뜨려 전진할 수가 없었다. 천자는 두 장군이 유리하지 않음을 알고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우거를 회유하려고 가게 하였다. 우거는 사신를 보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말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두 장군이 신(臣)을 죽이려 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제 신절(信節)[3]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태자(太子)를 사례(謝禮)하기 위해 보낼 때에 말 5,000필과 군량미도 함께 보냈다. 10,000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에 사신과 좌장군은 그들이 마음을 변할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라 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자도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왔다. 위산은 천자에게 돌아와 알리니 천자는 위산을 죽였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 군대를 깨뜨리고 나아가 왕험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였다. 누선 또한 왕험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므로 수 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乗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嘗持和莭. 左將軍急撃之, 朝鮮大臣乃隂間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尚未肯决,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間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决,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决.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 有便宜得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状. 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亦以爲然, 而以莭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 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并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좌장군은 본디 시중(侍中)인데 다행히도 연(燕)과 대(代)의 군사를 거느려 매우 세찬 기질이 있었다. 싸움마다 이겨 군사들이 많고 교만하였다. 누선장군은 제(齊)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海)로 들어갔지만 여러 번 패망하였으며, 그 병사들은 우거와의 전투에서 졌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장군은 마음에 부끄러워서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지속하였다. 좌장군이 조선을 맹렬히 공격하였을 때에 조선의 대신들이 몰래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하겠다는 조약의 말이 오갔지만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었다. 좌장군은 누선장군과 함께 전쟁할 날짜를 잡았으나 누선장군은 조선과의 약속을 이루려는 욕심에 모이지 않았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할 것을 듣기를 구했으나 조선은 그것에 기꺼워하지 않고 오히려 누선장군에 마음을 두었다. 그래서 두 장군들은 서로 능히 이룰 수가 없었다. 좌장군은 그 마음에 의심하기를 누선장군은 전에 전쟁에 진 죄가 있고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조선은 항복하지 않으니, 누선장군이 반역할 계략이 있음을 의심하였지만 감히 발설하지 못하였다. 천자가 말하기를 “장수들은 전쟁을 이룰 수 없고 전에 위산(衛山)을 보내 우거가 항복하기를 꾀어내어 그 태자(太子)를 보냈지만 위산은 결단을 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계략이 서로 맞지가 않아 계약을 망치고 말았다. 이제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서로 어그러지고 달라서 오랫동안 결판이 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그것을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제남태수가) 드디어 도착하자 좌장군이 말하기를 “조선이 당연히 오래전에 항복했어야 하나 항복하지 않은 것은 그 근거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누선장군이 약속한 전쟁날짜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평소에 가졌던 마음을 드디어 말하였는데 “지금 만약 누선장군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 두려움은 큰 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누선장군만의 일은 아니고 또한 조선과 더불어 우리 군사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손수도 그렇다 여기고 신절(信節)을 이용하여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군영으로 불러 일을 꾀하였다. 즉,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그 군사들도 합친 뒤에 천자에게 보고하였는데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
左將軍已并兩軍, 即急撃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隂, 尼谿相参, 將軍王唊[一]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并將, 戰益急, 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 隂, 唊, 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参乃使人殺朝鮮王右渠来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已[己]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二], 相路人之子最[三]告諭其民, 誅成已, 以故遂定朝鮮, 爲四郡[四]. 封参為澅清侯[五], 隂爲萩苴侯[六], 唊爲平州侯[七], 長爲㡬侯[八], 最以父死頗有功, 爲温陽侯[九]. 左將軍徴至, 坐争功相嫉, 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 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為庶人[十].
좌장군이 이미 두 군대를 병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相) 노인(路人)과 한음(韓隂) 그리고 니계상(尼谿相) 참(参) 또한 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이제 그는 잡혀 있고, 홀로 좌장군만이 병사들을 합하여 전쟁이 매우 격렬하여 싸움에 능히 이길까 두려운데 왕은 항복하지 않는다.” 한음과 왕겹과 노인 등은 모두 한국(漢國)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 니계상 참은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은즉, 우거의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반하여 다시 관리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강(長降)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꾀어 성이를 죽였다. 이에 조선은 드디어 평정되었고 4개의 군으로 하였다. 니계상 참을 봉하여 홰청후(澅清侯)로 삼았고, 재상 한음을 추저후(萩苴侯)로 삼았고, 장군 왕겹을 평주후(平州侯)로 삼았고, 우거의 아들 장강을 기후(㡬侯)로 삼았고, 노인의 아들 최는 아버지가 죽은 공이 있어 온양후(温陽侯)로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들여 놓고 공을 다퉈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그러뜨렸으니 기시(棄市)[4]하였다. 누선장군도 열구(列口)에 이르러 당연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제멋대로 먼저 나가서 많은 병사를 잃고 패하였으므로 당연히 죽여야 하나 속죄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一] 集解: 駰案, 漢書音義曰, 凡五人也. 戎狄不知官紀, 故皆稱相. 唊音頰. 索隱: 路人漁陽縣人. 如淳云, 相, 其國相, 路人名也. 唊一音協.
집해인안: 한서음의. 대략 5명이다. 융적의 벼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므로 대개 상(相)이라고 적었다. 唊의 음은 협(頰)이다. 색은: 노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 사람이다.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상(相)이란 그 나라의 재상을 말하며 노인은 이름이며 唊의 음은 협(協)이라고 하였다.
[二] 集解. 徐廣曰, 表云長䧄. 漢書表云, 長䧄, 音各. 索隱. 䧄音姑落反.
집해: 서광이 장각(長䧄)이라 하였다. 색은: 䧄의 음은 각(姑落反)이라고 하였다.
[三] 索隱最名路人之子也
색은. 최(最)는 이름이고 노인의 아들이다.
[四] 集解駰案、眞番臨屯樂浪玄菟也.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이다.: 원문에는 4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단지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두었다는 말만 있다. 그리고 사군을 두었다(爲四郡)는 내용도 후대에 변조한 것이란 추측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五] 集解韋昭曰屬齊. 索隠顧氏澅音獲.
집해: 위소가 말하기를 제(齊)에 속한다고 하였다. 색은: 고씨(顧氏)가 말하기를 澅의 음은 획(獲)이라고 하였다.
[六] 集解韋昭曰, 屬渤海. 索隠, 萩音秋, 苴音子餘反.
집해(集解) 위소(韋昭)가 말하기를 발해군(渤海郡)에 속한다고 하였다. 색은에서 말하기를 萩의 음은 추(秋)라고 하였다. 苴의 음은 져(子餘反)이다.
[七] 集解韋昭曰屬梁父
집해 위소가 말하기를 량부(梁父)에 속한다고 하였다.
[八] 集解韋昭曰屬河東索隱㡬縣名.
집해 위소가 말하기를 하동군(河東郡)에 속한다고 하였다. 색은에서 말하기를 㡬는 현(縣) 이름이라고 하였다.
[九] 集解韋昭曰屬齊索隱最涅陽侯.
집해 위소 말하기를 제(齊)에 속한다고 하였다. 색은 최는 열양후이다.
[十] 索隱蘇林云列口縣名度海先得之
색은 소림이 말하기를 렬구(列口)는 현(縣) 이름이라고 하였다. 해(海)를 건너면 먼저 닿는 곳이다.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狭[一], 及難離咎. 悔失番禺, 乃反見疑. 荀彘争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태사공이 말하기를 “우거는 견고함에 의지하다가 나라가 끊겼다. 섭하는 공을 무고하여 전쟁을 만들었다. 누선장군은 마음이 좁아서 어려움과 허물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여러 번 실패를 하였지만 반역을 의심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 공손수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두 군대가 함께 욕을 당하였으니 장수들 중에 제후가 된 자가 없다.
[一] 集解徐廣曰言其所將卒狭少.
장졸(將卒)이 협소함을 말하는 것이다.
【集解: 張晏曰,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為洌水. 疑樂浪, 朝鮮取名於此也. 索隱: 案,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집해에서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와 열수와 산수가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하여져서 열수가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낙랑이 조선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여기에서인 것 같다. 색은에서 안을 내었는데 朝의 음은 조(潮)인데 죠[直驕反]로 발음된다고 하였고, 鮮의 음은 선(仙)이다.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汕의 음은 산(訕)이다.
[1]한 (漢) 고조(高祖, BC206∼195)가 죽은 후 그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한 적자(嫡子)인 영(盈)이 즉위하였는데, 영(盈)이 곧 혜제(惠帝, BC195~188)이다. 혜제(惠帝)는 태자(太子) 때에 인약(仁弱)하다 하여 폐위(廢位)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즉위 때에 16살이어서 모후(母后)인 여후(呂后)가 섭정하였다. 고후(高后, BC188∼180)는 혜제(惠帝) 즉위 후 여태후(呂太后)로 존칭된 여후(呂后)의 시호(諡號)이니, 이는 ‘婦人從夫諡(부인종부시)’란 례(禮)에 따라 추존된 것이다. 고후(高后)는 혜제(惠帝)의 유자(幼子)인 소제(小帝) 공(恭, BC188~184)과 소제(小帝) 홍(弘, BC184~180) 때에도 섭정하였다. 따라서 ‘孝惠 高后時’를 BC195~180년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기(史記)에서 ‘孝惠 高后時’라는 용법(用法)이 단지 혜제(惠帝)의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惠帝 即位(B.C.195)~惠帝 死亡(B.C.188)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2] 수서(隋書)에 기록된 위군(魏郡)의 속현인 임수(臨水)와 임기(臨淇)가 아닌가 한다. 즉, 臨浿水의 浿는 淇의 오자이다. 이 부근에는 涉何를 연상시키는 섭현(涉縣)이 있다. 臨浿水를 ‘패수에 임하였다’고 번역 가능하나 去至界上臨浿水라 하였으므로 패수에 임하였다는 번역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국경에 어떻게 패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패수는 왕험성에 존재하는 강이다.
[3]천자(天子)의 사자(使者)가 갖는 신표. 거짓 없는 징표를 뜻한다.
[4]공개장소에서 참수 교수형을 집행하여,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고대 중국의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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