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덕문 원문 및 김용옥 한글 번역본]
元亨利貞, 天道之常; 惟一執中, 人事之察. 故生而知之, 夫子之聖質; 學而知之, 先儒之相傳.
원형이정 천도지상 유일집중 인사지찰 고생이지지 부자지성질 학이지지 선유지상전
雖有困而得之, 淺見薄識, 皆由於吾師之盛德. 不失於先王之古禮.
수유곤이득지 천견박식 개유어오사지성덕 불실어선왕지고례
余出自東方, 無了度日. 僅保家聲, 未免寒士. 先祖之忠義, 節有餘於龍山. 吾王之盛德, 歲復回於壬丙.
여출자동방 무료도일 근보가성 미면한사 선조지충의 절유여어용산 오왕지성덕 세복회어임병
若是餘蔭, 不絶如流. 家君出世, 名盖一道, 無不士林之共知. 德承六世, 豈非子孫之餘慶!
약시여음 부절여류 가군출세 명개일도 무불사림지공지 덕승육세 기비자손지여경
원·형·리·정은 늘 그러한 모습인 하느님의 길이요. 오로지 한결같이 중용을 잡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살펴야 할 도리이다. 그러므로 애써 배우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은 공부자孔夫子의 성스러운 바탕(기질)이요, 애써 배워 아는 것은 옛 선비들이 서로 전해 가면서 축적해온 문명의 자산이다. 비록 여기 보통사람이 있어 애써서 어렵게 배운다고 할지라도, 그 배운 바가 또한 천견박식淺見薄識(얕은 견해, 엷은 인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우리의 스승인 공부자의 성스러 운 덕성에 힘입은 문명의 자산이다. 그리고 그러한 보통사람들의 노력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창출한 작자, Culture-hero인 선왕先王의 고례古禮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바르게 노력만 하면 공자나 선왕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 하며, 동시에 문명의 주체는 곤이득지得하고, 천견박식을 지닌 보통사람임을 천명하고 있다.)
나는 동방의 조선에서 태어나 무료하게 세월을 보낸, 특출한 인물이 아니었다. 근근히 집안의 명예를 유지했을 뿐, 빈한한 선비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나의 선조 최진립 장군(7대조 할아버지 최진립, 1568-1637)의 충의忠義와 절개는 민중의 숭앙을 받는 경주 용산서원의 찬란한 모습에 원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최진립 장군을 기린 임금들의 성덕盛德으로 인하여, 세월이 끊임없이 임진년과 병자년을 맞이하여도 양란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최진립 장군과도 같은 사람들의 희생은 되새겨지고만 있는도다(순조 당대에는 16년이 병자년, 32년이 임진년).
이와같이 자손에게 남겨준 음덕蔭德이 물 흐르듯 단절되지 아니하고, 나의 아버님 최옥 선생이 이 세상에 나와 최진립 장군의 전통을 잇고. 그 학문이 뛰어나 이름이 경상도 일대의 유림세계를 휘덮었다. 우리 아버지의 명성은 경상도 사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덕성은 6대조 최진립 할아버지의 덕을 이었으니, 이 어찌 자손에게 내려오는 여경餘慶이 아닐 수 있겠는가? (*「주역」 「곤괘 문언」에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는데 불교가 말하는 인과응보를 단지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가家"라는 집단의 단위에서 얘기했다는 데 동아시아문명의 특이성이 있다.)
噫! 學士之平生, 光陰之春夢. 年至四十, 工知笆籬之邊物, 心無靑雲之大道.
희 학사지평생 광음지춘몽 연지사십 공지파리지변물 심무청운지대도
一以作歸去來之辭, 一以詠覺非是之句. 携笻理履, 怳若處士之行; 山高水長, 莫非先生之風.
일이작귀거래지사 일이영각비시지구 휴공이리 황약처사지행 산고수장 막비선생지풍
龜尾之奇峯怪石, 月城金鰲之北; 龍湫之淸潭寶溪, 古都馬龍之西.
구미지기봉괴석 월성금오지북 용추지청담보계 고도마룡지서
園中桃花, 恐知漁子之舟, 屋前滄波, 意在太公之釣.
원중도화 공지어자지주 옥전창파 의재태공지조
檻臨池塘, 無違濂溪之志; 亭號龍潭, 豈非慕葛之心!
함림지당 무위염계지지 정호용담 기비모갈지심
難禁歲月之如流, 哀臨一日之化仙. 孤我一命, 年至二八, 何以知之, 無異童子.
난금세월지여류 애림일일지화선 고아일명 연지이팔 하이지지 무이동자
先考平生之事業, 無痕於火中; 子孫不肖之餘恨, 落心於世間. 豈不痛哉! 豈不惜哉!
선고평생지사업 무흔어화중 자손불초지여한 낙심어세간 기불통재 기불석재
아아~ 슬프도다! 우리 아버님, 학사學士(공부에만 전념한 선비라는 뜻)의 평생은 그 광음光陰이 춘몽처럼 흘러갔다. 나이 40세에 이르매, 젊은 날 과장科場에 뜻을 두었던 모든 꿈은 사라지고, 손재주란 대나무 울타리 밑의 화초를 가꾸는 정도에 그쳤고, 그 울울한 가 슴에는 이미 청운의 대도는 사라지고 말았세라. 한편으로는 벼슬의 번거로움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연명陶淵明, 365~427(강서성 구강시 사람. 동진東晋 말에서 유송劉宋에 이르는 시기의 걸출한 시인.)의 「귀거래사」(AD 405년 11월에 지음)와 같은 시를 짓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향촌에 돌아오니 지금 이 생활이 옳고 어제 관리생활 했던 시절은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하는 구절을 읊어대기도 하였다.
대나무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은 아버지의 모습은 벼슬의 꿈을 다 버린 산림처사의 행색과도 같았고, 산이 높고 물이 길게 뻗쳐 있는 것과도 같은 거대한 인품은 교육자로서 존경받는 학자의 풍도였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은 동한 광무제 때 사람 엄자릉의 고사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송나라 사람 엄자릉의 인품을 표현하여 산고수장이라 했다. 지금도 산고수장은 학교선생님의 높고 그윽한 인품을 나타내는 말로써 중국인들이 상용하는 표현이다).
구미산의 기이한 봉우리와 괴이한 바위들은 월성(경주 분지 중앙에 있는 반월성, 경주를 상징) 금오(경주 남산의 별칭)의 북쪽이요. 용추(용담정 앞을 흘러 내리는 물)의 맑은 옷과 보석과도 같은 계곡은 고도 마룡馬龍(동현국면의 한 마을 이름인데 고도로서 높여 표현함)의 서쪽에 있다. 정원 속의 복숭아꽃 은 낚시꾼의 배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집 앞의 푸른 물은 그 뜻이 강태공의 낚시에 있었더라.
용담정의 난간이 그 앞의 연못을 굽어보고 있으니, 그것은 「애련설愛蓮說」(연꽃의 견정한 품격을 찬양한 글. 더러운 물속에서도 고결하게 피어오르는 모습을 묘사)을 쓴 철학자 주렴계周濂溪, 1017~1073(실제로 송명 이학의 개산조)의 큰 뜻을 생각나게 하고, 그 정자의 이름을 "용담龍潭"이라 한 것은 제갈량을 사모한 마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원래 수운의 할아버지 최종하가 원적암이라는 절터를 매입하여 새롭게 정자를 지었을 때의 이름이 "와룡암"이었다. 또 유비가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사마덕조를 만났을 때 덕조가 제갈공명을 가리켜 "복룡"이라 하였다.).
세월이 유수 같이 지나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신선이 되시는 슬픈 일을 당하고 보니, 외로운 나의 한목숨은 겨우 나이 열여섯이라(실제로는 열일곱이었다. 근암공이 돌아가신 것은 1840년 2월 20일이었다). 내가 과연 무엇을 알았겠는가?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님 평생의 사업은 불 속에서 자취마저 사라지고 말았다(*삼년상을 치르고 19살에 울산 유곡동의 밀양 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가정리로 옮겨 살았는데 20세 경에 화재를 당하여 집에 있던 것이 홀라당 다 타버렸다. 그런데도 이 사람 저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긁어모아 근암집과 근암유고를 만들었다. 수운이 얼마나 지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는지 이러한 작업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묘지문, 상량문은 다 찾아다니면서 정서했다고 한다.) 이 불초자손의 여한조차 세간에 굴러떨어져 희망을 잃고 말았으니, 어찌 가슴아프지 아니하랴!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
心有家庭之業, 安知稼穡之役? 書無工課之篤, 意墜靑雲之地. 家産漸衰, 未知末稍之如何.
심유가정지업 안지가색지역 서무공과지독 의추청운지지 가산점쇠 미지말초지여하
年光漸益, 可歎身勢之將拙. 料難八字, 又有寒飢之慮.
연광점익 가탄신세지장졸 요난팔자 우유한기지려
念來四十, 豈無不成之歎? 巢穴未定, 誰云天地之廣大; 所業交違, 自憐一身之難藏.
염래사십 기무불성지탄 소혈미정 수운천지지광대 소업교위 자린일신지난장
自是由來, 擺脫世間之紛撓, 責去胸海之弸結. 龍潭古舍, 家嚴之丈席; 東都新府, 惟我之故鄕.
자시유래 파탈세간지분요 책거흉해지붕결 용담고사 가엄지장석 동도신부 유아지고향
率妻子還捿之日, 己未之十月; 乘其運道受之節, 庚申之四月. 是亦夢寐之事, 難狀之言.
솔처자환처지일 기미지시월 승기운도수지절 경신지사월 시역몽매지사 난상지언
察其易卦大定之數, 審誦三代敬天之理. 於是乎, 惟知先儒之從命, 自歎後學之忘却.
찰기역괘대정지수 심송삼대경천지리 어시호 유지선유지종명 자탄후학지망각
修而煉之, 莫非自然. 覺來夫子之道, 則一理之所定也; 論其惟我之道, 則大同而小異也.
수이연지 막비자연 각래부자지도 즉일리지소정야 논기유아지도 즉대동이소이야
去其疑訝, 則事理之常然; 察其古今, 則人事之所爲
거기의아 즉사리지상연 찰기고금 즉인사지소위
마음속으로는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나는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으니 어찌 그것을 생짜로 지금 습득할 수 있겠는가? 학문으로 말해도 책을 읽은 것이 대학자들의 독실한 수준에는 미칠 바가 아니었으니, 벼슬길 따위의 청운의 꿈은 내동댕이쳐버린 지가 오래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가산은 점점 쇠락해져 가고, 나의 생애 끝장이 어떤 모습이 될지 예상키도 어려웠다.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데 신세가 점점 졸렬해져 가는 꼴을 탄식만 하고 있었다.
험난한 내 팔자를 헤아려보아도 그 속에는 또한 춥고 배고픈 우려가 새겨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 나이 벌써 40이었다. 어찌 아무것도 뚜렷하게 성취한 것이 없는 내 인생을 한탄치 아니할 수 있겠는가?
내 몸 하나 뉘일 보금자리 하나도 아직 마련하지 못했으니(수운은 생계가 어려워 거처를 계속 옮겼다). 그 누가 이 천지가 너르고 크다고 말했는가?(천지가 광대하다 한들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다는 절절한 표현). 하는 일마다 빠그러져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이 한 몸 둘 곳 없어 스스로를 연민하게 된다.
세간에 얽힌 복잡한 일들을 다 떨쳐 벗어버리고, 또한 가슴에 맺혀 응어리진 일들을 꾸짖어 과감히 내버렸다. 가자! 가자! 용담으로 돌아 가자! 용담의 옛집이야말로 우리 아버지 근암공께서 장석丈席(학문을 강론하는 자리) 하시던 곳이요. 동도東都(경주를 가리킴. 그때 울산에서 되돌아왔기 때문에 동도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의 새마을이야말로 오로지 나의 고향이다.
처자를 거느리고 옛 보금자리로 돌아온 것이 기미년(1859) 10월이요. 운을 타서 도를 받은 때가 경신년(1860) 4월이다. 이 모든 나의 신비로운 체험이 꿈결과 같은 일이었고,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체험에 즉하여 나는 주역 괘상을 만드는 대연지수大衍之數를 살펴보기도 했고(*본문에 "대정지수大定之數"라고 말한 것은 「주역」 「계사」상에서 언급 한 "대연지수大衍之數"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연지수는 하늘의 수인 1.3.5.7.9의 기수를 합친 25와 땅의 수인 2.4.6.8.10의 우수를 합친 30을 합한 55인데 실제로 점에서 쓰는 시초의 개수는 50개이다. 왜 55가 50이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50개의 시초에서 하나를 빼는데, 그것은 태극을 상징하며 시종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실제로 역점에 쓰이는 시초는 49개이다. 49개의 시초를 무념무상으로 양손에 갈라 힘으로써 역점이 시작되는데 그 자세한 서법에 관해서는 내가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수운이 대정지수, 즉 대연지수를 살폈다는 것은 역점을 쳐서 자기 운세에 해당되는 괘상을 만들어 보았다는 뜻이다.). 하·은·주 삼대의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치를 살피어 계속 암송하다시피 했다(그러니까 주로 「상서」의 경천사상을 상고詳考하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우리의 앞선 대유大儒들이 하느님의 명命을 잘 이해하고 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그러니까 자기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여 깨달은 바가 특수한 개인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선유先儒들의 공통된 깨달음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보편성의 차원을 공감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후대의 학인들이 하느님을 망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개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내 몸에 실제로 적용하여 닦아 보고 연마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랬더니 그 모든 것이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여기 "자연自然"이라는 것이 키워드인데 이것은 노자 25장의 "도법자연道法自然"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수운에게는 유儒와 도道가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공부자孔夫子의 도(유교의 도)를 깨닫고 그 전체를 생각하여 보면 하나의 이치에 의하여 관통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 "일리지소정一理之所定"을 "나의 이치와 같은 이치로 정해진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유교 나름대로의 일관적 세계관이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공자가 "여일이관지予一以貫之, 나는 하나로써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다" [위령공2]라고 말한 것이라든가, 「이인」15에서 "오도는 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고 말한 것을 놓고 그것이 하나의 정합적 세계관을 표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하나를 하나의 덕목으로써 규정해 들어가면, 그것은 일자의 덕목에 의하여 제약되고 한정되는 도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자의 도를 "충서忠恕"일 뿐이라고 말한 증자의 논의는 심히 유치한 것이다. 공자의 "일一"은 결코 총서에 의하여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일一은 "한개(one)"를 의미할 수도 있고 "전체(the whole)"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 수운이 말하는 "일리一理"의 뉘앙스에는 하나의 정합적인 세계관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 개의 좁은 도덕적 사상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맥락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증자류의 도덕주의는 공자의 사상을 수운이 말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음의 수운의 메시지가 매우 강렬하게 어필된다).
공자의 도에 비하여 나의 도를 논구한다면, 크게 보면 양자가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내면에 깔린 의미체계는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여기 원문은 "대동이소이大同而小異"로 되어있다. 이것을 보통 역자들이 번역하듯이 "크게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라는 식으로 번역할 수 없다. 여기 우선 "공자의 도"와 "나의 도"를 대비시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운은 자신을 공자와 동급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사상은 분명 공자의 사상을 뛰어넘는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이소이大同而小異"는 다르다는 데 역점이 있는 것이지, 같다는 데 역점이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대동이소이"는 겸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유교가 초월주의를 거부하고 주역적 세계관을 포섭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수운의 세계관과 대강이 통하 기는 하지만 그 디테일에 들어가면 차원이 다른 사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체험을 되씹는 일 년의 검증과정을 통해 의아스러운 것들을 다 제거해버렸다(신비적 체험의 신화적 외형 mythological settings을 다 제거해 버렸다. 수운은 예수와 달리, 자신의 신비적 체험 mystic experience을 스스로 비신화화 Demythologization 하였다). 그랬더니 남는 것은 모두 사리事理의 항상 그러한 상식적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을 고금의 역사적 체험에 다 견주어 보았다. 그랬더니 검증되는 모든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不意布德之心, 極念致誠之端. 然而彌留, 更逢辛酉. 時維六月, 序屬三夏. 良朋滿座, 先定其法.
불의포덕지심 극념치성지단 연이미류 갱봉신유 시유유월 서속삼하 양붕만좌 선정기법
賢士問我, 又勸布德. 胸藏不死之藥, 弓乙其形; 口誦長生之呪, 三七其字.
현사문아 우권포덕 흉장불사지약 궁을기형 구송장생지주 삼칠기자
開門納客, 其數其然; 肆筵設法, 其味其如. 冠子進退, 怳若有三千之班, 童子拜拱, 倚然有六七之詠.
개문납객 기수기연 사연설법 기미기지 관자진퇴 황약유삼천지반 동자배공 기연유육칠지영
年高於我, 是亦子貢之禮; 歌詠而舞, 豈非仲尼之蹈! 仁義禮智, 先聖之所敎; 修心正氣, 惟我之更定.
연고어아 시역자공지례 가영이무 기비중니지도 인의예지 선성지소교 수심정기 유아지갱정
一番致祭, 永侍之重盟; 萬惑罷去, 守誠之故也. 衣冠正齊, 君子之行; 路食手後, 賤夫之事.
일번치제 영시지중맹 만혹파거 수성지고야 의관정제 군자지행 노식후수 천부지사
道家不食, 一四足之惡肉; 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
도가불식 일사족지오육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
有夫女之防塞, 國大典之所禁; 臥高聲之誦呪, 我誠道之太慢. 然而肆之, 是爲之則.
유부녀지방색 국대전지소금 와고성지송주 아성도지태만 연이사지 시위지즉
나는 애초부터 포덕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뜻을 두지 않았다. 나의 존재에 깃들어 있는 우주적인 성실함에 도달하고자 하는 내성적 단초를 극진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극념치성지단極念致誠之端"의 원래적 의미를 생각치 아니하고 그냥 "치성 드린다"는 조잡한 의미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서 나는 포덕할 마음을 계속 유보시켰다. 그러다가 신유년(1861)을 맞이하였다. 때는 유월이요. 절기는 삼복더위의 여름이었다. 자연스럽게 훌륭한 친구들이 내 집에 가득차게 되니 나는 먼저 수도하는 법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입도하는 제식과 수도하는 절차를 먼저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궁금한 점을 물으니 나는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또한 혼자 듣기 아깝다고 사람들에게 널리 그 덕을 펼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포덕이라는 말은 수운의 오리지날한 용법으로 간주 되어야 한다.)
가슴에는 불사의 약을 감추어 두고 있으니, 그 형상은 궁을弓乙이요. (*부적의 형태로서 "궁을"의 형상은 여기 처음 출현한다. 「포덕문」에는 "궁궁弓弓"이라 했 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부적의 형태도 약간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운이 말하는 궁궁이나 궁을은 모두 태극의 형상이고 우주의 이법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고, 마음에 내재하는 성리性理라는 것이다. 그의 모든 논의는 현실개벽이요, 가치개벽이요, 나의 몸의 개벽이다. 수운은 모든 미혹됨을 거부한다).
입으로는 장생長生의 주문을 외우나니 그 글자는 스물한 자니라
나는 드디어 용담의 문을 개방하고 손님들을 맞기 시작하였는데, 몰려 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펼쳐놓고 그 위에 앉아 사람들에게 법을 설파하니 그 재미 또한 그럴듯하였다(*기연其然이니 기여其如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만 보아도 수운은 포덕 그 자체가 주는 재미에 자기도취적으로 빠지는 그런 인품의 인물이 아니었다. 수운은 포덕 이후에 주변현상에 대하여 매우 냉철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부작용이 생겼을 때 과감히 자리를 떠서 남원으로 갈 수도 있었다.).
상투를 틀고 관을 쓴 성인들이 예를 갖추어 용담에 와서 가르침을 받고 또 물러가곤 하는 모습이 마치 공자 밑에 삼천 제자들이 반열을 갖추어 들락거리는 것과도 같고, 어린아이들이 와서 두 손 모아 절하는 모습은 마치 증석曾晳(증자의 아버지. 공자의 나이 많은 제자. 이 이야기는 「논어』 「선진」25에 나온다)이 십대의 동자 6.7인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한 후 노래 읊으며 돌아오는 모습과도 같다.
용담에 찾아오는 도인들 중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 또한 자공이 공자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했던 것과 같은 자세로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남만성이 자공이 공자보다 나이가 많다고 터무니없는 주석을 달았는데, 사기, 니제 자열전」에 단목사端[공]는 공자보다 31세 연하의 인물로 명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삶의 행적을 보면 그러한 나이 차이가 확연하게 입증된다. 자공은 요즈음 말로 하면 탁월한 비즈니스맨이었으며 공자학단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죽기 직전 에도 자공을 애타게 기다렸다. 안회와 자로가 이미 세상을 뜬 후였기 때문이다. 자공은 공 자의 무덤 옆에서 6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다. 그는 거부가 되어 공자의 사상을 천하에 펼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자공의 공자에 대한 로열티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또 용담에 모인 사람들은 같이 노래를 부르고 같이 춤을 추기도 하였는 데 이것 또한 공자의 학단에서 행하여지던 노래춤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영가무도의 전통은 후에 김일부의 '정역사상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발현된 영가무도로 전승되었다. 김일부는 "응아어이우"라는 모음["음'은 실러빅 콘소넌트ayllabic consonant이다]을 궁상각치우의 음계에 맞추어 계속 불렀다. 그러나 일부 본인은 자기의 도를 "영가무도교"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것은 다 일부를 빙자한 후대의 종교활동이다).
인의예지는 앞선 성인(공자, 맹자)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修心正氣는 오직 내가 새롭게 창안한 덕목이다. (*공자와 수운을 대등하게 견주어 말한 이 과감한 발상과 발언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따라서 "수심정기"의 내용은 평범한 한자풀이의 의미체계로 논의되어서는 아니 되고, 유교의 총강령과 비견할 만한 동학의 독특한 사유체계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일단 입도식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영원히 하느님을 모시겠다는 엄중한 맹서를 하는 것이요. 만 가지 의혹을 다 깨쳐 버리는 것은 우주적인 성실함 Cosmic Sincerity(「중용」의 성론 참조)을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의관을 항시 정제하는 것은 군자다운 행실이요. 길거리에서 질겅질겅 씹어먹거나 뒷짐을 지고 걷는 것은 천한 놈의 짓이다. 네발 달린 짐승의 오육惡肉은 우리 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먹기를 삼가한다.(*"惡肉"은 오육으로 읽어야 한다. 혐오스러운 고기라는 뜻이다. 이것을 도내 관습에 따라 모두 "개고기"라고만 얘기하는데 실상 사족의 고기는 소고기, 돼지 고기에도 다 해당된다. 문제는 고기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기의 질에 있는 것이다. 옛날에 쥐약 먹고 죽은 개고기를 내장 발라 먹곤 하였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 하여튼 어떤 고기든지 혐오스러운 고기나 상한 고기는 먹지 말라는 당부일 것이다).
그리고 차거운 물에 급히 들어가 앉어(새벽에 얼음을 깨고 들어가 냉수마찰을 하는 수도방법이 유행하곤 했다. 나도 젊은 날 도사들의 충고에 따라 그런 짓을 많이 해보다) 수도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따뜻한 몸을 해치는 일이다. (*이 구문은 제1권 '대선생주문집'의 해설에서 해월의 대각의 계기와 관련하여 논의된 바 있다. 3월에 경주에 잠시 가서 해월을 만났다면, 이 「수덕문」은 6월에 쓰여졌지만 구상은 이미 3월에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지 않고 행실이 단정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경국대전」에도 다 적혀있는 상식이다(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유부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사례가 발생하게 된다. 수운은 성문란을 동학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해 극도로 경계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드러누운 채 고성으로 주문을 외곤 하는 짓은 우리의 정성스러운 도를 태만한 것으로 만드는 악습이다. 이런 짓들은 모두 삼가야 할 것이다(*여기 지적하는 것들이 동학의 율장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감추지 않고 내가 명백히 드러내 보이노니 (*"사肆"는 "현시顯示"의 의미가 있다. "연然" "but"이 아니라 "accordingly"의 뜻이다), 이것을 우리 도의 준칙으로 삼을지어다.
美哉! 吾道之行. 投筆成字, 人亦疑王羲之迹; 開口唱韻, 孰不服樵夫之前.
미재! 오도지행 투필성자 인역의왕희지적 개구창운 숙불복초부지전
懺咎斯人, 慾不及石氏之貲; 極誠其兒, 更不羨師曠之聰. 容貌之幻態, 意仙風之吹臨; 宿病之自效, 忘盧醫之良名.
참구사인 욕불급석씨지자 극성기아 갱불선사광지총 용모지환태 의선풍지취림 숙병지자효 망노의지양명
雖然道成立德, 在誠在人. 或聞流言而修之, 或聞流呪而誦焉, 豈不非哉?
수연도성입덕 재성재인 혹문유언이수지 혹문유주이송언 기불비재
敢不憫然! 憧憧我思, 靡日不切; 彬彬聖德, 或恐有誤. 是亦不面之致也, 多數之故也.
감불민연 동동아사 미일부절 빈빈성덕 혹공유오 시역불면지치야 다수지고야
遠方照應, 而亦不堪相思之懷; 近欲敍情, 而必不無指目之嫌. 故作此章, 布以示之. 賢我諸君, 愼聽吾言.
원방조응 이역불감상사지회 근욕서정 이필불무지목지혐 고작차장 포이시지 현아제군 신청오언
아름다워라! 우리 도가 이 세상에 행하여지는 모습이여! 도인들이 모이면 서로 붓을 들어 글씨를 쓰는데(*주석가들이 언급을 하지 않는데 문집을 잘 살펴보면, 도인들은 모이면 글씨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주문뿐만 아니라 가사나 여타 문장을 쓰는 서도공부로써 마음공부를 했던 것 같다) 타인들이 보면 왕희지의 필적 같다고 칭송하곤 한다. 뿐만이랴? 입을 열어 운을 내놓으면 그에 맞추어 시를 짓는데, 나무꾼과 같이 초라하게 보이는 서민이 시를 지어도 그 앞에서 감복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허물을 뉘우칠 줄 아는 정도의 사람("사인斯人"은 사도斯道의 사람)은 석숭石崇(중국 서진의 부호, 249~300)의 재물에도 마음이 끌리지 아니하고, 우주적 성실함을 가슴속에서 극대화시킬 수 있는 순결한 인간은 사광師曠(*춘추 진晉나라의 악사. 소리를 분별하는 귀재, 세상의 모든 이치에 밝다는 의미를 내포)의 총명함을 부러워할 건덕지가 없다.
우리 도인들이 도를 닦아 용모가 훤하게 환골탈태하는 모습은 신선들의 노래가 바람 타고 들려오는 것과도 같다. 오래된 질환들이 약을 안 쓰고도 저절로 사라지니 노의盧醫(춘추시기 명의인 편작의 별칭)의 그 신묘한 의술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가 이루어져서 덕을 굳건히 세운다는 데 그 중요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가 이루어져서 덕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경진초판본이 나오기 전에는 이곳의 표현만 유일하게 "도성덕립道成德立"으로 되어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도 경진판에는 "도성입덕道成立德"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용담유사에도 일관되게 "도성입덕"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수운은 "도성입덕"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했고, 일관되게 그 표현을 고집했다. 도가 이루어짐으로써 덕을 세운다는 의미인데, 수운은 "입덕立德"이라는 능동적, 주체적 과정을 "입"을 타동사화 함으로써 강조한 것이다.) 결국 성誠(우주와 인간의 마음의 성실한 본체)에 있는 것이요. 그 사람人(여기서 수운은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도성입덕은 결국 인간의 성실한 노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불성실하게 흘러다니는 유언비어를 듣고 도를 닦는다 말하는가 하면, 혹자는 또 흘러다니는 주문을 주워듣고 그것을 암송하고 다닌다 하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리오?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닐 까보냐!(당시 이미 가짜 동학이 많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나의 심사는 하루도 절절하지 아니한 날이 없고, 빛나고 또 빛나는 우리의 성스러운 덕(여기 "성덕聖德"은 유교의 덕으로 해석하면 아니 된다. 성덕은 곧 동학을 가리킨다)이 왜곡되고 오해될까 걱정이라!
이러한 모든 나의 걱정은 내가 그대들과 같이 대면하며 생활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요(남원에서 쓴 글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이어지는 분위기가 대체로 그러하다), 도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난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마음은 서로 조응한다지만, 서로 그리워하는 회포를 견디기 어렵고, 가까이 만나서 정감을 나누고자 하나 필시 지목받을 혐의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이 글을 지어 펴서 보이니, 나의 현명한 제군들이여! 나의 말을 신중히 들을지어다.
大抵此道, 心信爲誠. 以信爲幻, 人而言之. 言之其中, 曰可曰否, 取可退否, 再思心定.
대저차도 심신위성 이신위환 인이언지 언지기중 왈가왈부 취가퇴부 재사심정
定之後言, 不信曰信. 如斯修之, 乃成其誠. 誠與信兮, 其則不遠.
정지후언 불신왈신 여사수지 내성기성 성여신혜 기측불원
人言以成, 先信後誠. 吾今明諭, 豈非信言! 敬以誠之, 無違訓辭.
인언이성 선신후성 오금명유 기비신언 경이성지 무위훈사
대저 이 도는 그 마음이 신험할 수 있게 되어야 천지대자연의 성실함과 합하여지는 성誠(Cosmic Sincerity)을 이루게 된다. (*동학을 말하는 자들이 가장 오해하고 곡해하는 글자가 바로 이 "신信"이라는 글자이다. 신信은 어느 경우에도 현대어의 기독교류에서 파생된 믿음Belief의 번역어로 생겨난 종교적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전어에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신信은 "신험하다." "신뢰가능하다." "사실로서 입증된다.""증명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belief" 아니라, "reliability," "verifiability," "provableness"를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을 이해 못하고, 천도교를 서구적 종교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천박한 사람들에게 이 단락은 이해될 길이 없다).
신信이라는 글자를 파자破字하여 변환시켜 보면(여기서 "환幻"이란 글자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인데, 한국식 한문용법인 것 같다) 사람 인人 자와 말씀 언言 자로 이루어져 있다(*파자하는 분석이 대부분 엉터리이고 문자학의 지식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 경우는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맞는 말(신험할 수 있는 말)도 있고 틀린 말(신험할 수 없는 말)도 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무조건 다 취하는 것이 아니고, 맞는 말을 취하고 틀린 말을 버림으로써 재삼재사 생각해보고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정한 이후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함부로 타인의 말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당시 가짜 동학이 있었다) 오히려 그 말이 신험한 것이다(입증 가능한 신험한 말로써 이루어져 있다). 이와같이 자기 마음을 닦아 나가야만 그 우주적 성실함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성誠(Cosmic Sincerity)이라는 것과 신信(Verifiability)이라는 것은 그 근본원칙이 멀리 있지 아니하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먼저 신험한 후에(즉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험할 수 있는 참된 말만 한다는 것이다) 성실할 수 있는 것이다.
아~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명명백백한 것만 가르치고 있노라! 어찌 내 말이 신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리오! 일관된 주의력(경敬: 주일무적主一無適)으로 성실함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라! 이 나의 가르치는 말을 어기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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