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종교는 신비의 세계는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 치부를 하고, 이것을 믿음의 문제로 돌립니다. 그러나 동학을 창도한 최수운 선생은 특이하게도 불연기연不然其然이란 개념을 사용해 비록 그것이 신비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모든 현상은 신의 창조력, 즉 우주의 일정한 법칙속에 있는 것이므로 궁리를 해들어가면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이것이 동학이 서구의 타 종교들와 구별되는 특이한 점인데요.
기연其然은 설명 가능한 질서이며, 불연不然은 인간의 이성으로 즉각 이해되지는 않는 신비이지만, 천주의 조화 속에서 결국 일정한 질서안으로 통합되는 것이죠. 결국 동학은 ‘불가해성’을 신의 영역으로 넘겨서, 믿음의 문제라는 이유로 그 신비를 묻어두지 않고, 사유와 감응을 통해 그 신비의 근원에 다가서려는 동양적 지혜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동학은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포용하는 실천적 영성철학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논학문 원문 및 김용옥 한글 번역본]
歌曰: 而千古之萬物兮, 各有成, 各有形. 所見以論之, 則其然而似然; 所自以度之, 則其遠而甚遠.
가왈 이천고지만물혜 각유성 각유형 소견이논지 즉기연이사연 소자이도지 즉기원이심원
是亦杳然之事, 難測之言. 我思我, 則父母在玆; 後思後, 則子孫存彼.
시역묘연지사 난측지언 아사아 즉부모재자 후사후 즉자손존피
來世而比之, 則理無異於我思我; 去世而尋之, 則或難分於人爲人.
내세이비지 즉이무이어아사아 거세이심지 즉혹난분어인위인
噫! 如斯之忖度兮. 由其然而看之, 則其然如其然; 探不然而思之, 則不然于不然.
희 여사지촌탁혜 유기연이간지 즉기연여기연 탐불연이사지 즉불연우불연
노래의 형식으로 이르노라! 천고의 만물이어! 제각기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요, 제각기 스스로 형체를 갖춘 것이로다(일단 우리 고유의 세계관을 대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감각적으로 우리가 파악하는 바로써 이야기한다면 감성적으로 그러한 것은 어떠한 사태라도 그럴듯하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점에서 수평적으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발전하여 온 유래를 수직적으로 파악한다면, 멀고 또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 된다. 그러한 일들은 또한 모연한 것이요, 또 말로써 헤아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여기서 “소견所見”과 “소자所自”가 대비된다. 소견은 수평적이요, 소자는 수직적이다. 소견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비근한 사태이며 소자는 존재의 근원을 캐어 들어가는 것으로써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다. 소자所自의 자自는 “유래”를 의미한다.)
내가 나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이 나의 감성세계 속에 엄존하시고, 뒤로 이어질 나의 후손들을 생각하면 같은 원리에 의하여 나의 자손이 후세에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오는 세상(미래)을 비교적으로 헤아려보면, 이치가 내가 나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같은 법칙으로 후손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지나간 세상(과거)을 소급해 올라간다면 그 까마득한 옛날에 사람이 어찌 사람이 되었는지 실로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아! 이와같이 양쪽 사태를 전체적으로 헤아려 보자! 우리 상식에 그러한 것을 통해 보면 그러한 것은 또 그러하나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하지 아니한 것을 탐색하여 생각해보면 그러하지 아니한 것이 그러하지 아니한 것 위에 쌓여갈 뿐이로다.
何者? 太古兮! 天皇氏, 豈爲人, 豈爲王? 斯人之無根兮! 胡不曰不然也?
하자 태고혜 천황씨 기위인 기위왕 사인지무근혜 호불왈 불연야
世間, 孰能無父母之人? 考其先, 則其然其然, 又其然之故也.
세간 숙능무부모지인 고기선 즉기연기연 우기연지고야
然而爲世, 作之君, 作之師. 君者, 以法造之; 師者, 以禮敎之. 君無傳位之君, 而法綱何受?
연이위세 작지군 작지사 군자 이법조지 사자 이례교지 군무전위지군 이법강하수
師無受訓之師, 而禮義安效? 不知也! 不知也! 生以知之而然耶? 無爲化也而然耶?
사무수훈지사 이예의안효 부지야 부지야 생이지지이연야 무위화야이연야
以知而言之, 心在於暗暗之中; 以化而言之, 理遠於茫茫之間.
이지이언지 심재어암암지중 이화이언지 이원어망망지간
이게 도대체 웬일인가? 아주 태고太古의 천황씨를 생각해보자!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람이 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임금이 되었을까? 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든 족보의 뿌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세간에 부모되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 사람이든지 그 선조를 캐어 들어가면 그러하고 또 그러하고, 또 그러한 연유에 의해 그 상식적인 계보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세상이 만들어졌고, 또 임금이 만들어졌고, 또 스승이 만들어졌다. 군주라 하는 것은 법으로써 그 지위를 얻은 것이요, 스승이라 하는 것은 그가 예로써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최초의 군주를 생각해보면, 그에게 그 자리(위位)를 전해주는 군주가 선재先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자리의 위세를 주는 법강法綱은 어디서 받는단 말인가? 또 스승이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선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예의禮義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알았기 때문에(생이지지生而知之) 그렇다고 말해야 할까? 함이 없이 저절로 그렇게 생겨났기 때문에(무위이화無爲而化. 지수를 맞추기 위해 “이而”가 빠짐) 그렇다고 말해야 할까? 생이지지라고 말한다 해도 우리의 마음은 암담함 속에서 헤맬 뿐이요, 무위이화라고 말한다 해도 그 이치는 아득하고 망망한 사이에서 멀어져갈 뿐이다.
夫如是, 則不知不然, 故不曰不然, 乃知其然, 故乃恃其然者也. 於是而揣其末, 究其本,
부여시 즉부지불연 고불왈불연 내지기연 고내시기연자야 어시이취기말 구기본
則物爲物, 理爲理之大業, 幾遠矣哉! 況又斯世之人兮, 胡無知, 胡無知?
즉물위물 리위리지대업 기원의재 황우사세지인혜 호무지 호무지
數定之幾年兮, 運自來而復之. 古今之不變兮, 豈謂運, 豈謂復! 於萬物之不然兮, 數之而明之, 記之而鑑之.
수정지기년혜 운자래이복지 고금지불변혜 기위운 기위복 어만물지불연혜 수지이명지 기지이감지
四時之有序兮, 胡爲然, 胡爲然! 山上之有水兮, 其可然, 其可然! 赤子之穉穉兮,
사시지유서혜 호위연 호위연 산상지유수혜 기가연 기가연 적자지치치혜
不言知夫父母, 胡無知, 胡無知? 斯世人兮 胡無知?
불언지부부모 호무지 호무지 사세인혜 호무지
대저 총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사실 불연不然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연不然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기연其然을 안다고만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인 기연其然의 세계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기연에 의지하여, 그 말초적인 것을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근본을 탐구할 수 있으니, 사물이 사물이 되고, 법칙이 법칙이 되는 대업大業(이 세상의 총체적 조화의 법칙)이 어찌 우리에게서 멀리 있어 불가사의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모른단, 모른다고만 말하고 있는가? 천지운행의 역수曆數(calendar system)가 정해진 것이 몇 만 년이냐? 운運(천지운행의 운movement이다)이 스스로 왔다가 스스로 돌아가지 않느냐? 이러한 움직임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스러운 것이다. 이 변함이 없는 천지의 운행을 놓고 운運이니 복復이니 할 건덕지도 실상 없는 것이다.
만물의 그러하지 아니함(불연不然)의 신비로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법칙에 따라 밝힐 수도 있는 것이요, 그것은 기술하여 대조함으로써 명료하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시의 순서가 있음이여! 그것은 어찌하여 그렇게 될까? 어찌하여 그렇게 될까? 그것은 역법에 의하여 규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호수가 있음이여! 그것은 어찌하여 가능한가? 어찌하여 가능한가? 갓난아이의 어리고 어림에 갓난아기는 말을 못해도 부모를 이내 알아본다. 어찌하여 갓난아기가 무지하다, 무지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사람들이여, 어찌하여 그렇게도 무지한고!
聖人之以生兮, 河一淸千年, 運自來而復歟? 水自知而變歟? 耕牛之聞言兮! 如有心, 如有知.
성인지이생혜 하일청천년 운자래이복여 수자지이변여 경우지문언혜 여유심 여유지
以力之足爲兮! 何以苦, 何以死? 烏子之反哺兮! 彼亦知夫孝悌. 玄鳥之知主兮! 貧亦歸, 貧亦歸.
이력지족위혜 하이고 하이사 오자지반포혜 피역지부효제 현조지지주혜 빈역귀 빈역귀
是故難必者, 不然; 易斷者, 其然. 比之於究其遠, 則不然不然, 又不然之事;
시고난필자 불연 이단자 기연 비지어구기원 즉불연불연 우불연지사
付之於造物者, 則其然其然, 又其然之理哉
부지어조물자 즉기연기연 우기연지리재
성인의 태어나심이여! 그 흙탕물인 황하가 천년에 한 번 맑아지면 성인이 태어난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운運이 스스로 와서 스스로 돌아가기 때문일까? 황하의 물이 스스로 알고 변하는 것일까? 밭가는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음이여! 소는 분명 마음이 있고 인지가 있다. 힘으로 말하자면 충분히 사람을 이기고도 남는다. 그런데 왜 저토록 충직하게 일하면서 고생을 하고, 저렇게 충직하게 죽음을 향해 가는고! 까마귀는 어렸을 때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다가 커서 그 어미가 늙어 움직이지 못하면 먹이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 반포反哺의 현상을 까마귀가 효제孝悌를 안다고 하는 것일까? 제비(현조玄鳥는 “시경”, “초사” 등에 용례가 있다)가 주인을 알아봄이여! 주인집이 가난해도 그곳으로 돌아온다. 가난해도 그 정감을 지키는 것일까?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불연不然일 뿐이고, 우리가 일상경험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을 기연其然이라 하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떠나면 형이상학적 세계에 비정하여 규명하려고 하면, 모든 것이 불연이고 또 불연이고 또 불연의 사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또 한편 그것을 사물이 생성되어가는 조화의 세계에 의탁하여 생각하면 모든 것은 그러하고 그러하고 또 그러한 이치일 뿐이다!
'영성관련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경대전-수덕문修德文 (2) | 2025.05.04 |
---|---|
동경대전-논학문論學文 (0) | 2025.04.27 |
동경대전-포덕문布德文 (5) | 2025.04.27 |
최후의 만찬,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 비평 (0) | 2024.08.01 |
신교총화神敎叢話가 전하는 개벽 소식 (0) | 2024.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