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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봉선제

by 광명인 2025. 2. 28.

[진시황이 첫 통일 왕조를 열었을 때, 한 무제가 흉노 등 주변 여러 민족을 평정하고 통일된 중앙 정부를 세웠을 때, 후한 광무제가 잃어버린 한 왕실을 다시 회복하였을 때, 그들의 공통적 행위의 하나는 태산에서 봉선제를 행했다는 점이다. 그 목적이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간에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열면 으레 공을 이룬 제왕들은 천제를 통해 태산에서 하늘에 자신의 업적을 고하였던 것이다. 당 고종도 이 천제 행사를 통해 당 중심의 세계 질서를 확립하고, 당이 천자국임을 만방에 알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천제는 종교적이지만 또한 전형적인 정치적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면 동북아 문명의 정수인 이러한 천제 행위의 기원은 어디이며 철학적 근거는 무엇일까?]

서안에 남아 있는 수당 시대의 천단 유적

후한 광무제 이후 600년간 사라졌던 봉선제(封禪祭)가 다시 정치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수당 제국이라는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였다. 진시황이 첫 통일 왕조를 열었을 때, 한 무제가 흉노 등 주변 여러 민족을 평정하고 통일된 중앙 정부를 세웠을 때, 후한 광무제가 잃어버린 한 왕실을 다시 회복하였을 때, 그들의 공통적 행위의 하나는 태산에서 봉선제를 행했다는 점이다. 그 목적이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간에 이들 이전의 제왕들은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열면 으레 태산에서 하늘에 고하였던 것이다. 

당 초기에 봉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다. 고조 때부터 봉선 시행을 주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봉선 논의는 태종 때 더욱 활발하였다. 그 첫 봉선 이야기는 원정 5년이었던 631년 정월에 나왔다. 그 직전 당나라는 동돌궐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군주인 힐리가한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데 이어 이런 위세에 겁을 먹은 서북방 여러 이민족 추장으로부터 이세민은 '중원과 이민족을 통틀어 지배하는 자'를 의미하는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를 틈타 신하들이 천하가 통일되고 사이四夷도 스스로를 중국의 신하라고 선언하였으니 봉선을 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봉선을 주청하는 신하들과 달리 봉선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위징(580-643)이다. 그는 홀로 봉선이 불가함을 말하였다. 봉선을 둘러싼 당 태종과 위징이 나눈 이야기가 남아있다. 

태종이 말했다. "공公이 짐朕이 봉선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가 이룬 공이 높지 않기 때문이요?"
"높습니다."
"내 덕德이 두텁지 않아서인가"
"두텁습니다."
"중국中國이 안정되지 않아서인가."
"안정되었습니다."
"오랑케(夷)가 아직 복종하지 않아서인가"
"복중합니다."
"올해 농사가 풍년이 들지 않아서인가."
"풍년입니다."
"상서로운 징조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인가"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봉선할 수 없단 말이오"

위징이 말했다. "패하는 이 여섯 가지를 두루 갖추셨지만 수나라 말기의 큰 혼란한 뒤를 이어받아서 호구가 회복하지 않았고 곳간은 아직 텅 비어 있음에도 임금의 행차로써 동순하면 (그에 따르는) 천승만기는 비용을 공급받아야 하지만 이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폐하께서 봉선하시면 온 나라가 모두 모여야 하고 멀리서 오는 오랑캐 군장들도 모두 호종해야 할 터인데, 지금 이수와 낙수에서부터 동쪽으로 바다와 태산까지는 아직도 연기 나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니, 이는 곧 융적을 우리 뱃속 한가운데로 끌어 들여 그들에게 허약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상으로 주는 것이 넉넉하지 않으면 멀리서 온 자들이 바라는 바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부역을 면제해주는 것을 몇 해 계속하여도 백성들의 노고를 보상하지 못하는데 헛된 명성을 숭상하여 실제적인 해를 받게 되니, 폐하는 장차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태종이 높은 공, 덕의 두터움, 나라의 안정, 오랑캐의 복속, 농사 풍년, 길한 징조의 도래 등 여섯 가지를 들며 왜 봉선할 수 없는지를 물었다. 위징은 그러한 조건이 10년과 같이 상당한 기간 지속되어야만 하며, 특히 막대한 비용을 언급하며 반대하였다. 태종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봉선을 없던 일로 했다.

봉선이 이루어진 태산

정관 15년(641년) 4월에는 다음해에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한다는 선포가 있었다. 당시 당 태종은 그런 중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여러 조건들을 열거하였다. 이를테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왔고 온 천하에 평화를 회복하였으며, 수확도 좋았고 외국이 복종의 표시로 충성을 맹세하여 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늘로부터 길조까지 나타났다. ... 모든 준비를 갖추고 황제는 수도 장안을 출발해 낙양을 향해 출발함으로써 태산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낙양에 이르렀을 때 변괴가 생겼다. 군주의 남궁인 태미궁으로 알려진 별자리를 가로질러 혜성이 나타난 것이다. 당 태종은 이를 황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상서롭지 못한 전조라고 해석하여 결국 봉선 의례를 취소하였다.

646년 후반에 장손무기가 당 태종에게 봉선을 거행하라고 청하였다. 그는 당 태종이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하늘에 알려야 하는 다양한 이유를 적은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자 당 태종은 647년 정원에 명년, 즉 648년 중춘에 봉선을 거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 당 태종이 645년 요동 전쟁 때 걸린 병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고 646년에는 그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 당시 대규모 궁을 건설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 그해 8월 하북 지역의 큰 홍수 발생 등이 복합적으 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649년 5월, 당 태종은 봉선 의지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인 당 태종이 그의 업적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데 이처럼 실패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 태종 때 실현되지 못한 태산에서 상제를 향한 봉선제는 그 뒤를 이은 고종 이치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종의 태산 천제는 실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를 생생하게 밝힐 수 있는 사례가 666년의 태산 봉선이다. 이는 특히 한반도 3국 사절도 참여한 대규모의 천제로, 아래처럼 기록에도 남아있다.

"대당 인덕 3년(666) 세차 병인 정월 무진 삭에, 황제는 원일에 환구의 제단에서 예를 갖추어 땔나무를 태워 하늘에 고했고, 2일에 개병산 정상에 올라 봉 제사를 지냈으며, 3일에 와 사수산에서 선 제사를 지내고, 건봉 원년으로 개원하였다"

구당서는 당시 고종의 태산 봉선제를 이렇게 기록한다.

"인덕 3년 춘 정월 무진 초하루에 황제의 수레가 태산 꼭대기에 이르렀다. 이날 친히 봉 제사의 제단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제사지냈다."

황제가 태산에서 호천상제에게 봉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날의 기록에 의하면, 666년 정월 초하루에 고종은 태산 남쪽에서 호천상제에게 제사를 지냈고 다음날 태산으로 올라갔다. 3일에는 태산에서 내려와 사수산에서 선禪을 행하였는데, 당 고종이 초헌을 했고 측천무후아헌을 하였다. 5일에 조근단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조하朝賀를 받고 원봉元封으로 개원開元하였다. 그리고 19일에 태산을 출발한 황제의 행렬은 4월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 고종의 태산 천제에서 특징적인 점은 주변국들이 여기에 참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하였다는 점이다. 665년 10월에 주변국 사절들이 낙양에 모였다. 신라나 백제 및 고구려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병인일에 황상이 동도를 출발하였는데, ,,, 동쪽으로는 고려에서부터 서쪽으로는 파사(이란 고원)와 오장(인도 서북부)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조회朝會하고자 모인 사람은 ... " (자치통감)

"8월 임자일에 웅진성에서 동맹하였다. 유인궤는 신라, 백
제, 탐라, 왜국의 사신과 바다에 배를 띄우고 서쪽으로 돌아와 마침
내 태산에서 제사 지내는 일에 모이게 했다. 고구려도 태자 복남을 보내 와서 제사를 지내는데 시중들게 하였다." (자치통감)

그 대표적 인물이 신라의 김인문, 고구려의 태자 복남,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다. 한반도 3국의 참여는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김인문 열전, 고구려 본기, 고구려 태자가 당의 봉선에 참여한 이유]


"유인궤는 우리의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등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인문이 다시 당에 들어갔다. 건봉 원년에 당 황제를 모시고 태산에 올라 봉선하였다."
"임금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한다)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 신라의 김인문, 고구려의 태자 복남,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태산 천제에 참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나라가 봉선을 알리는 칙령을 통해 도독과 자사로 있는 모든 지관리들에게 태산 봉선에 참여하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663년신라를 계림대도독부에,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60년 여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항복했고, 소정방은 임금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및 대신과 장사 88명을 비롯하여 주민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로 호송하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백제에 웅진도독부 등 5개 도독부를 설치했는데, 특히 부여융을 웅
진도독으로 삼아 귀국시켰다. 그러므로 신라와 백제는 봉선제에 당연히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복남은 봉선 의례에 참여한 후 귀국하였고, 신라의 김인문은 우효위대장군과 식읍 400호를 받고 당에 머물다가 668년에 돌아왔으며, 부여융은 당에 머물렀다.

당나라는 이 천제를 통해 당 중심의 세계 질서를 확립하고, 당이 천자국임을 만방에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로 신라와 백제에 두었던 도독부의 도독주들을 천제에 참석시켜 천제를 통해 천자의 위상과 지배를 보여주려 하였다. 이는 지난날 황제들이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고 자신이 천자임을 보여주려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 고종의 천제종교적이지만 또한 전형적인 정치적 행위이다.

중국 역사 중 유일한 여성 황제 무측천武則天사郊祀를 행한 것은 물론, 봉선제를 거행했다. 그녀는 당 왕조를 개국한 세 황제 중 두 황제의 아내이자, 그 후 열일곱 명의 황제들 중 그녀의 자손이 아닌 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그야말로 당 왕조의 국모이자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황후로서 35년간 조정을 장악한 후 황제로 즉위까지 하였다.

무측천은 만세천통 원년(696) 12월에 봉선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태산이 아니라 무주의 수도인 낙양으로부터 가까운 숭산嵩山이었다. 측천무후는 기존의 관례를 깨고 숭산에서 봉선을 거행했다. 그리고 봉선 후에는 백성들로부터 그해 세금을 거두지 않고 9일 동안 연회를 베푸는 등 호천상제를 대행하여 천도를 구현하는 거룩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원 13년(725), 현종태산 원구단에서 호천상제에게 봉례를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도 신라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에서 사절단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당나라는 이를 통해 주변국에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출처: [책] 동북아의 문화코드 하늘 · 천天 · 상제上帝, 그 빅 히스토리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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