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은 중화주의 역사관을 완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는 철저히 지워버리고, 사기의 송미자세가에 주나라 무왕에 의해 기자가 조선의 제후로 봉해졌다는 표현을 덧붙여 기자조선이란 왜곡된 역사의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조선열전에서 위만을 서두에 내세워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틀을 깔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이는 당연히 역사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고려에 유학이 전파되면서 이때부터 공맹을 따르는 유학자들에 의해 유교적 사관이 형성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도 고조선기에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인용했으니, 이후 한민족의 고대사는 사마천이 심어놓은 왜곡된 역사의 씨앗으로 점점 더 심하게 단절되고 왜곡되어졌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민족 고대사의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은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다.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완전히 뽑기위해 숨겨진 사서들을 찾아 약 20만권을 불태우고, 오해할 소지가 있는 사료들, 즉 '삼국유사'와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사료들을 철저히 악용해서, 조선의 역사를 더욱 왜곡하고 날조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이 사기에 서술된 위만이 건너온 패수는 고대 문헌이나 정황상 하북성의 조백하나 난하에 위치한 것이며, 왕험성은 발해만의 창려현에 위치한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에게 망한 이 왕험성을 한반도 안에 위치한 대동강의 평양으로 옮겨놓아 반도사관을 구축한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과연 어떠한 미래가 펼쳐지게 될까?]
위만정권은 조선의 한쪽 변방을 강탈한 도적이며 침략자에 불과함에도 일본은 위만조선으로 격상하고 이를 조선역사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위만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인 연나라왕 노관의 부하로 숙청을 피해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된 위만은 한족망명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키워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인 복장을 하였다 하여 조선의 유민이라 하였는데, 현행 국사학계에서 이를 정론으로 받아들여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엉터리 교육을 하고 있다.
손자 우거右渠가 한무제에게 망할(BCE 108) 때까지 약 90년간 존속한 이 위만정권을 일본은 위만조선으로 격상시키고 이것을 조선 역사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게다가 일본은 위만조선의 위치를 요동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 이북으로 비정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일본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일본은 위만조선이 망한 후의 한국사도 뜯어고쳤다. 우거를 멸하여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한무제가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조선인을 식민 통치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위만조선에 한사군 설이 결합되면서 고대 조선은 결국 중국이 세운 나라로, 나아가 중국의 식민지로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에서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된 지금 위만조선의 망령은 깨끗이 사라진 것일까? 마땅히 그러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만조선의 망령은 한국 교과서에 여전히 살아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가 위만을 말하고, 위만을 언급한 역사 교과서 전부가‘ 위만이 고조선 말기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심지어‘ 위만이 집권하면서 고조선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하여 위만을 조선인의 구세주로까지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위만이 연나라 출신이란 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집권하였다’고 하거나 ‘유이민 집단 중에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왔다’고만 한다. 조선의 한쪽 변방을 강탈한 도적이며 침략자에 불과한 위만에 관한 이러한 기록은 반드시 역사 정의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 [북부여기 전문 보기 클릭]
재위 45년 병오(단기 2139, BCE 195)년에 연燕나라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衛滿이 우리나라[번조선]에 망명을 구하였다. 임금(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 들어 능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운장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25년]
중마한의 시조 탁과 경향분수법 제정
후에 기준箕準이 떠돌이 도적 위만[流賊]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오가의 무리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고 대규모로 여정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곳이다. 이를 일러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때 변한과 진한도 각각 그 백성과 함께 백 리 땅에 봉함을 받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변한弁韓, 진한辰韓은 모두 마한馬韓의 정령政令을 따라서 그대로 행하고 세세토록 배반하지 않았다.
재위 2년 무신(단기 2141, BCE 193)년에 임금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을 보내 평양平壤에 성책城柵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
사마천 사기의 조선열전 [조선열전 전문 보기 클릭]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조선의 왕이었던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의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아전[吏]을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국(秦國)이 연국을 멸하고 요동 밖 요(徼)에 소속시켰다. 한국(漢國)이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국에 소속시켰다. 연국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과 만이(蠻夷)들을 복속하여 거느리고 연국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사기, 조선열전에 나타난 패수 위치 고찰]
* 패수는 현재 북경 근처를 흐르고 있는 조백하가 가장 유력하게 패수가 될 수 있다. 현재까지 패수에 대한 위치 비정은 전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한다. 당대의 문헌들을 중심으로 해야지, 후대의 지명은 자꾸 바뀌게 되므로, 변형된 지명을 가지고 패수의 위치를 보아서는 안된다. 당대의 모든 문서들은 이 패수 방향이 전부 중국의 하북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당대 문헌에 따라서 패수를 하북성에서 찾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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