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남방지역의 역사, 특히 가야사를 왜곡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서기'가 그 근거를 제공한다. 일본 초기 문명을 만든 이들은 원래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로, 왜는 7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660년 백제가 망하고,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의 원군 4만 여 명이 나당 연합군에 패망한 후, 왜는 국명을 일본으로 바꾸고 본토와는 교류를 완전히 단절을 하게된다. 이후 8세기 초에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을 편찬하여 일본 역사를 자생 왕조사로 날조한 것이다.
일본 학자 요시노 마코토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낸 속사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서기』가 천황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서였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과 관련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관계가 있다. 천황이 천황이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국가들을 복속시킨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서기는 날조한 역사라는 것이며, 임나일본부설은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기이한 일은 일본 사학자들도 믿지 않는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한국의 사학자들은 가야사에 임나일본부를 덧칠하고 있다는 것이다.]
8세기에 일본의 첫 역사서를 만들면서 가공한 남선경영론(임나일본부설)은 19세 기 말 일본의 조선침략 명분으로 다시 악용되었다.
백제가 망한 후 일본은 자기네 역사를 자생 역사로 만드는 한편, 모국인 한민족의 역사를 오히려 식민지사로 변조하였다.
‘4세기 후반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 가야지역의 소국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2백 년 동안 다스렸다’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을 날조한 것이다.
8세기에 일본의 첫 역사서를 만들면서 가공한 남선경영론(임나일본부설)은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침략 명분으로 다시 악용되었다. 과거에 자기네 조상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지배하였으니, 근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일이라 하였다. 일본은 심지어 만주의 광개토대왕비를 위조하여 일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를 모두 일본의 식민지사로 전락시켰다.
일본 역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일본사는 한민족의 이민사’라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이 주장과 같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한민족의 선조들은 바다를 건너 가서 일본 역사를 개척하였고, 고대 일본 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특히 삼국 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왜倭 조정은 백제의 분조分朝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백제가 망한 후(660), 왜는 ‘친정집’인 한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에 사용하던 왜라는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670), 왜왕을 천황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 역사를 자생自生 왕조사로 변색시킨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를 편찬하였다. 일본은 첫 역사서에서 천황가를 백제와 무관한, 신대神代로부터 시작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조로 조작하였다. ‘일본 왕실이 만세 동안 한 계통으로 내려왔음’을 주장하는 ‘만세일계’ 사상은 일본 황국사관의 핵심이다. 이것은 그 후 메이지 유신 때 ‘막부 대신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옹립’하는 존황주의尊皇主義의 뿌리가 되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마코토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낸 속사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서기』가 천황통치를 정통화하기 위한 역사서였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과 관련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관계가 있다. 천황이 천황이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국가들을 복속시킨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요시노 마코토 저, 한철호 역,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114쪽).
문제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역사의 진실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 프렌티스 홀에서 간행한 『세계 문화World Cultures』(2004)에 “BCE 400년경, 일본은 몇 개의 씨족들이 연합해 야마토라고 불리는 구역에 정착했다. 그들은 일본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한국 남부의 작은 지역을 통치하기까지 했다”라는 서술이 보인다(이길상, 같은 책,47쪽).
참고할 기사: 이완연 대한사랑 수석본부장
이땅의 주류사학계는 왜 가야를 부정하고 임나일본부를 옹호하는가? (1부 보기 클릭)
이땅의 주류사학계는 왜 가야를 부정하고 임나일본부를 옹호하는가? (2부 보기 클릭)
정한론의 모티브 역사인 “신공황후의 임나정벌 이야기" [일본서기 원문보기 클릭]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249) 봄 3월에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 ·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곧바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른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장군이다】에게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가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지바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한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 왕 부자와 황전별⋅목라근자 등이 의류촌(意流村)【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 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았다. 백제 왕이 맹세하며 말하기를,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만년 영원토록 늘 [백제를]서번(西蕃)이라고 칭하며 봄가을로 [일본 황실에] 조공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보좌하여 보냈다. 『일본서기』권9, 「신공황후」 49년
그리고 신공황후가 공략한 임나의 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임나는 쓰쿠시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임나의 위치는 세가지가 성립되어야 한다. ①축자국에서 2천리가 떨어져있어야 하고(筑紫國二千餘里) ②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어야 하고(北阻海) ③계림(신라)의 서남쪽이어야 한다.(鷄林之西南)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문구는 "北阻海"다. 阻는 막힐 조다.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기에 한반도 남부는 절대로 임나가 될 수 없다.
"임나 4현이 “백제와 가까이 이웃하여, 아침저녁으로 다니기 쉽고 닭과 개 주인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 『일본서기』 게이타이 6년(512) 12월조
"닭과 개 주인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은 국가 수준이 아니라 '동네'나 '마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마도나 일본열도의 일부를 나누어서 정착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이야기라고 봐야 무방하다.
위의 역사 기록을 보면 신공황후가 공략한 임나는 결코 한반도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임나=가야라는 공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결코 위의 정사기록을 인용하지 않거나 왜곡 해석한다.
참고로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신공황후 49년(249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첨해 이사금, 고구려는 중천왕의 재위기간이다.
일본서기 신공 55년(서기 255년)조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조에 “겨울 11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신공 9년과 신공 49년 신공황후의 황당무계한 삼한정벌론과 임나일본부설 기사에 맞추기 위해 120년 끌어올려 연대를 조작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황당하게도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 가야를 정벌하고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마한을 완전 복속시켰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어느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근초고왕 24년 기사 (원문보기 클릭)’를 보면 더욱 확실하다. 참고로 초고왕은 백제 5대 왕 (원문보기 클릭)으로 제위 기간이 48년(166~214)이고, 근초고왕은 백제 13대 왕으로 제위 기간은 29년(346~375)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사대사전’의 기년대조표를 잘 살펴보면 서기 369년은 일본서기 인덕 57년에 해당한다. 신공 49년(서기 249)에다가 이갑자 120년을 더하면 서기 369년이 되는데, 그렇다면 인덕 57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조작하고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이 물려받은 식민사관을 21세기 대한민국 각 대학의 역사 교수와 한국사 박사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회, 교육부 관료들 모두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처절하게 왜곡되고 조작 날조되었건만 역사학자를 자처하는 어느 누구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앵무새처럼 잔악한 일제가 남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따라 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원문보기: 영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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