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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중국과 일본의 합작품, 한사군

by 광명인 2024. 11. 21.

[사마천은 사기의 조선열전한나라위만조선간의 전쟁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지만, 조선을 점령한 후 설치했다고 하는 한사군의 명칭과 지명을 상세히 열거하지 않았다. 단지 한무제의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과 내부세력을 꾀어서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죽이고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고만 전한다. 그리고 전쟁후 한나라의 장수들은 대부분 죽거나 기시형을 당하거나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오히려 우거를 죽이고 위만조선을 몰락시킨 조선인들이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유추해보면, 조한전쟁은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으로 보기 힘들다.

북부여기는 한나라가 우거를 죽이고 번조선에 사군을 설치하려고 할 때 그 지역에 살던 유민 고두막한 의병들을 규합해 한나라와 맞서 싸워서 한나라 군사들이 폐했다는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하였다." 당시 위만은 번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일뿐, 단군조선의 적통해모수의 북부여가 이어 단군조선의 정신은 지속되었던 것이며,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중화사관을 완성하려는 사마천의 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사군은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역사의 뿌리를 밑둥이까지 들어낸 이마니시 류는 한민족사의 중간 역사도 가위질하여 고대 중국와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과거 중국이 조작 왜곡한 한국 고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사군 대동강설이다. 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귀신도 하지 못할 땅 뜨는 재주’를 부려서, 고대 요서에 있던 지명을 대동강변에 옮겨놓은 것이다. 거기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군이라 이름을 붙인 그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 되어 점제현신사비 같은 가짜 유물을 대동강변에 묻어놓고 한나라 4군의 유물이 나왔다고 사기극을 벌였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진조선이 망하고(BCE 238), 40여 년 후 번조선도 중국 사람 위만에게 탈취되는(BCE 194) 동안, 진조선 땅에서 일어난(BCE 239) 북부여가 고조선의 대통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강단사학자 대부분은 이러한 북부여를 무시하고, ‘한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이 위만정권 멸망 이후 한민족을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중국 사서에서 한사군에 대한 기록은 『사기』「조선열전」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그런데 저자 사마천(BCE 135~BCE 90)은 한사군이 설치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 ‘한 나라와 고조선(위만정권) 사이의 전쟁’(BCE 109년)을 목격하였지만, ‘조선을 평정하고 군을 설치했다’고 할 뿐, 4군의 구체적 이름과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을 현장 답사로 꼼꼼히 확인했다는 사마천이 한사군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4군의 구체적 명칭은 사마천이 죽고 백 년이 더 지나서, 중화中華사관이 뚜렷한 반고가 쓴 『한서』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서』의 기록도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명확하지 못하다.

중국 사서의 일관성 없는 기록은, 한사군에 대한『사기』의 그 짤막한 기록이 과연 사마천 자신의 서술인지 의문마저 들게 한다. 『사기』의 이 구절은 후대의 역사학자가 삽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사군이란 것이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그 진실을 우리는『환단고기』에 수록된 『북부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한사군은 한나라의 희망사항이었지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그 실존 사실조차 의심스러운 한사군을 한국 강단사학계는 확고부동한 사실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위치를‘ 낙랑-대동강 유역, 현도-압록강 중류, 진번-황해도, 임둔-함경남도’등으로 비정한다. 하지만 이 한사군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내용일 뿐이다. 일제는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한사군 → 임나일본부 → 조선총독부’로 연결시키고, ‘조선의 역사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니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것을 해방 후에 등장한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주의란 미명 아래 한국사의 주류 학설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를 재야사학자로 몰아 강단사학계에서 추방하였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에 나온 앞 뒤 안 맞는 고조선 멸망 이야기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일명 해우루) 재위 [원문보기 클릭]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澈(무제)* 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郡을 설치 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
이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海夫婁 즉위하였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원문보기 클릭]

9 左將軍已并兩軍, 即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陰, 尼谿相參、

   좌장군이병양군, 즉급격조선.  조선상로인, 상한음, 니계상참
將軍王唊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并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 王又不肯降. 
장군왕갑상여모왈: 시욕항루선,  루선금집, 독좌장군병장,  전익급, 공불능여, (전) 왕우불긍항. 
陰, 唊, 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음, 겹, 로인개망항한. 로인도사.  원봉삼년하,  니계상참내사인살조선왕우거내항.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왕험성미하, 고우거지대신성사우반, 복공리.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為四郡
좌장군사우거자장항,  상로인지자최고유기민, 주성이,  이고수정조선,  위사군.
封參為澅清侯, 陰為荻苴侯, 唊為平州侯, 長為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為溫陽侯。
봉참위환청후, 음위적저후, 갑위평주후,  장위기후.   최이부사파유공, 위온양후.

좌장군이 이미 두 군대를 병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相) 노인(路人)과 한음(韓隂) 그리고 니계상(尼谿相) 참(参) 또한 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이제 그는 잡혀 있고, 오직 좌장군만이 병사들을 합하여 전쟁이 매우 격렬하여 싸움에 능히 이길까 두려운데 왕은 항복하지 않는다.”
한음왕겹노인 등은 모두 한국(漢國)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
니계상 참은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은즉, 우거의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반하여 다시 관리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 우거의 아들 장강(長降)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꾀어 성이를 죽였다. 
이에 조선은 드디어 평정되었고 4개의 군[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무제와 동시대를 살았고 조한전쟁을 직접 목격했던 사마천이 4군의 구체적인 명칭과 지역명을 명시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500여 년이나 지난 후에 배인의 사기집해에서 한사군의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은 이 명칭들은 날조된 것이며, 한사군이 실제하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니계상 참을 봉하여 홰청후(澅清侯)로 삼았고, 재상 한음 추저후(萩苴侯)로 삼았고, 장군 왕겹 평주후(平州侯)로 삼았고, 우거의 아들 장강 기후(㡬侯)로 삼았고, 노인의 아들 최는 아버지가 죽은 공이 있어 온양후(温陽侯)로 삼았다. 

* 사기에는 유명한 주석서가 세 권 있다. 배인이 쓴 사기집해, 사마정이 쓴 사기색은, 장수절이 쓴 사기정의가 세 주석서다.
배인은 송나라 사람이다. 이 송은 조광윤이 세운 송이 아니라 남북조 시대 남조 나라 중 하나였던 송이다. 배인은 생몰연도가 불분명하다. 대략 서기 430년에 활동했다고 본다. 배씨 집안은 위진남북조 시대 때 사학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다. 배인의 아버지 배송지삼국지 주석서를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배인은 '사기집해' 여든 권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사기집해에 처음으로 사군四郡의 명칭에 대해 아래와 같이 나온다. 
集解駰案, 眞番臨屯樂浪玄菟也.
집해인안, 진번임둔낙랑현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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