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고유문화의 핵심엔 일관되게 최고신(最高神)에 대한 개념이 들어있다. 일신(一神)·천신(天神)·천주(天主)·천제(天帝)·제(帝)·상제(上帝)·삼신(三神) 등의 호칭은 모두 최고신을 의미한다. 동서 제왕문화의 이념적 토대인 천자사상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최고신의 대행자라는 의미로 천제의 화신이라 불린 단군왕검조에서 정립된 홍범구주의 황극 사상이 중국으로 전수되면서 서토로 전파된 것이다. 서양의 왕권신수설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된다. 한민족은 고유정신이 약화되었던 고려 말부터 조선까지를 제외하면 정치와 교화의 첫머리에 언제나 최고신을 섬기며, 천자의식을 바탕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려 노력해왔던 것이다.
최고신과 연관된 한민족의 문화로는 제천문화, 천자사상, 조천문화와 삼랑문화 그리고 후신라의 미륵불 신앙, 고려의 팔관회, 그리고 조선말 동학사상 등이 있다. 한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과 위대한 건국이념인 홍익인간도 그 밑바탕엔 신교의 삼신 사상, 최고신 사상이 깔려 있다. 9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민족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아버지로 여기는 아브라함에 의해 유대민족의 틀이 형성되기도 훨씬 이전부터 하늘에 계신 천주님, 상제님과 소통을 하고, 친견하며 생활속에서 삼신상제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실천해온 천손민족이다. 원시반본하는 때, 뿌리를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아래는 대한사랑 교육위원 이주희 강사가 발표한 논문을 정리한 것이다.]
한민족사에서의 최고신(最高神) 관념에 대하여
< 목 차 >
Ⅰ. 머리말
Ⅱ. 상고시대의 최고신
1. 환국
1.1. 건국사와 함께 등장하는 일신(一神)과 제천문화
1.2. 통치자에게 투영된 최고신 관념
1.3. 생활문화로 나타난 최고신에 대한 인식과 체험
2. 배달
2.1. 최고신의 권능의 증표, 천부인(天符印)
2.2.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전하는 최고신 관념
2.3.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 삼랑(三郞)
3. 조선
3.1. 초대단군의 여덟 가지 조칙의 첫머리에서 나타난 친견(親見)사상
3.2. 천제의 가르침을 받고 구서지회를 결성한 구물단군
Ⅲ. 열국과 삼국시대의 최고신
1. 열국
1.1. 동부여 개국 과정에 개입된 최고신 관념
1.2. 천자사상의 계승
2. 삼국
2.1. 최고신과 관련된 백제의 문화
2.2. 최고신과 관련된 고구려의 문화
2.3. 최고신과 관련된 신라의 문화
Ⅳ. 남북국시대의 최고신
1. 통일신라
1.1. 천상을 왕래하며 왕과 천제 사이를 중재한 표훈대사
1.2. 미륵에게 직접 증표를 전수받은 진표율사
Ⅴ. 고려와 조선의 최고신
1. 고려
1.1. 왕조교체의 추동력이 된 최고신의 계시
1.2. 신교문화의 전승 예식인 팔관회(八關會)
1.3. 제후국으로 격하된 고려의 최고신과의 단절
2. 조선
2.1. 조선 초기부터 보이는 최고신에 대한 인식 부재
2.2. 천부(天父)의 계시를 받은 김호연
2.3. 신교문화의 재생의 문을 연 동학의 출현과 고종황제
Ⅵ. 맺음말
[한민족사에서의 최고신(最高神) 관념에 대하여]
Ⅰ. 머리말
한민족의 고유사상과 문화가 상고시대부터 존재했음에도 이는 역사의 굴곡과 함께 약화되어 소실되다시피 하였다. 필자는 한류라는 새로운 역사흐름은 한민족의 고유정신인 풍류정신이 역사의 맥과 함께 변화를 거듭하며 현대에 이르러 표출된 문화현상임을 고찰한 바 있다. 지금은 우리의 고유정신이 되살아나는 과정에 놓여있다. 우리에게는 이를 인식하고 이 흐름을 크게 살려나가야 하는 역사적인 과제가 있다.
한민족의 고유문화에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신(最高神) 즉 지고신(至高神)에 대한 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신(一神)·천신(天神)·천주(天主)·천제(天帝)·제(帝)·상제(上帝)·삼신(三神) 등의 호칭은 모두 최고신을 의미하며 어느 관점을 적용하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불러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 조명되고 드러나고 있지 않기에 필자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을 통해 우리 민족문화 속에서 최고신 관념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이는 한(韓)사상의 중요한 요소였던 최고신 관념에 대한 연구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되고, 동학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한류문화가 새로운 역사흐름으로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 새로운 신관(神觀) 정립에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Ⅱ. 상고시대의 최고신
한민족사에 있어서 최고신 관념은 상고시대의 인식이 원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고신에 관한 당대의 직접적인 체험과 인식을 사료를 통해 살펴보면서 최고신 관념에 대한 원형적 사고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1. 환국
『삼성기(三聖記)』는 신라 진평왕 시절, 신라 십성(十聖)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도승(道僧) 안함로(安含老)가 저술한 사서로 환인의 환국, 환웅의 배달, 단군의 조선 그리고 해모수의 북부여와 고추모의 고구려로 이어지는 상고 역사의 맥을 전하고 있다. 삼성(三聖)은 세 분의 성인으로서 우리의 국조이신 환인·환웅·단군성조를 뜻하는 말로, 『삼성기』는 태곳적 삼성조(三聖祖)시대의 역사와 역사정신을 굵직한 줄거리로 전하고 있다. 실로 이 사서는 근세조선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세조 때 팔도 관찰사(八道 觀察使)에게 내려진 수서령(收書令)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처(私處)에 간직하는 것을 금하고 거둬들이는 내용으로 보아 많은 이들이 소장하고 읽었던 실존 사서임을 알 수 있다. 세조·예종·성종에 이르기까지 유교이념에 어긋나는 사서 및 문헌을 대대적으로 수거했던 수서령의 목록에 올랐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삼성기』가 성리학에 위배되는 우리 상고역사의 원형적 모습을 간직한 사서임을 반증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상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신관(神觀)을 살펴보기에 『삼성기』가 중요한 사료임을 인지하고 인용하는 바이다.
1.1. 건국사와 함께 등장하는 일신(一神)과 제천문화
『삼성기』의 첫 구절을 살펴보면,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 하느님(一神)은 사백력(斯白力, 대광명)의 하늘에 계시며 홀로 우주의 조화를 부리는 신이시다. 광명으로 온 우주를 비추고, 대권능의 조화로(權化)로 만물을 낳으며, 영원토록 사시며(長生久視), 항상 즐거움을 누리신다. 지극한 조화기운(至氣)을 타고 노니시고 스스로 그러함에 오묘하게 부합하며, 형상 없이 나타나고 함이 없이 만물을 지으시며 말없이 행하신다. 『삼성기』, 吾桓建國最高 有一神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光明照宇宙 權化生萬物 長生久視 恒得快樂 乘遊至氣 妙契自然 無形而見 無爲而作 無言而行.]
인상적이게도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는 한민족사의 첫머리와 더불어 일신(一神)의 존재를 선언하며 역사기술을 시작하고 있다. 일신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유일신(有一神)은 원문 그대로 한 분의 신이 계셨다는 뜻으로 근원적이고 궁극적이라는 의미의 일 자를 씀으로써 최고 높은 근원적인 한 분의 신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환족의 나라 세움인 건국사와 함께 최고신의 존재인 일신을 먼저 언급한 것은 최고신이 역사의 근본 바탕이자 국가를 세우는 데 있어 사상적인 근간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례문화가 꽃피었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의 「환국본기(桓國本紀)」와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따르면, 환인과 환웅은 모두 ‘주제천신(主祭天神)’하였다고 전한다. 환인과 환웅이 직접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였고, 제천문화가 국가의 대사(大事)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천신은 『삼성기』에서 말한 일신과 연결될 수 있다. 최고 높은 지존의 한 분이라는 뜻에서 일을 붙여 일신이라 한 것이고, 천신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분이라는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서양 기독교가 유입될 때도 신을 의미하는 God을 하느님 혹은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뜻으로 천주(天主)로도 널리 쓰이던 용어이다. 일신이 하나님이고, 천신이 하느님이며, 천주 또한 하느님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1.2. 통치자에게 투영된 최고신 관념
상고시대의 통치자의 호칭에서도 최고신 관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환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 칭했는데, ‘천제’는 하늘의 한 분의 신을 대행하는 권력과 권능을 가지고 다스림을 펴는 통치자의 면모를 나타내며, ‘환인’은 광명의 어진 분으로서 세상을 진리로서 교화하는 뜻을 담고 있기에 정치와 교화를 아우르던 당대의 제정일치(祭政一致) 문화를 잘 보여준다. 최고신에 제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바로 통치자였던 것이다. 여기서 천제(天帝) 역시도 일신·천신·천주와 상통하는 의미로 천상의 최고신을 뜻하지만 환인천제의 호칭에서 천제란 최고신의 대행자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겠다. 제사장은 제사를 이끌었다는 형식적인 명분 차원을 넘어 천지의 주재자와 교감하는 권능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천신의 대행자로서 지상을 다스리는 천자(天子)로 받들어진 것이다. 실제 환국과 조선에서는 환인과 단군을 천제의 대행자를 넘어 천제의 화신(化身)으로까지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나라의 지도자를 최고신이 인간으로 직접 화육(化肉)해서 나타난 존재로 신성시했음을 나타낸다. 고대에는 이처럼 근본자리에 최고신을 두었고, 통치자는 최고신에게 올리는 제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최고신의 화신처럼 절대시되는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1.3. 생활문화로 나타난 최고신에 대한 인식과 체험
상고시대의 최고신에 대한 인식과 체험은 통치 계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맥(李陌) 선생이 저술한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기사를 보면 백성들도 생활 속에서 최고신과의 교감을 했던 문화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태백일사』의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맥 선생은 『단군세기』를 집필한 이암(李嵒)의 현손으로 중종 14년(1519)에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撰修官)이 되어 세조 때부터 3대에 걸쳐 수거해 깊이 비장해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수서령 시행 당시 예종 때는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전교를 내릴 정도였는데 우리의 손으로 우리 역사문화의 혼을 말살했던 이 역사적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맥 선생이 ‘태백의 잃어버린 역사’라는 『태백일사』를 집대성하게 된 역사적 계기가 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환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이다.
그 중 「환국본기」는 환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백성들의 삶이란 것은 결국 하루 생활에 집약이 되어있다. 하루가 인간 삶의 가장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루 생활을 어떻게 시작하고 마무리하는가가 당대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 풍속에 광명을 숭상하여 태양을 신으로 삼고, 하늘을 조상으로 삼았다. 만방의 백성이 이를 믿어 서로 의심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경배함을 일정한 의식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모인 곳으로 삼신(三神)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그 광명을 얻어 세상 일을 하면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여,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모두 함께 동산(東山)에 올라 갓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절하고, 저녁에는 모두 함께 서천(西川)으로 달려가 갓 떠오르는 달을 향해 절하였다. 『태백일사』 「환국본기」, 朝代記 曰 古俗 崇尙光明 以日爲神 以天爲祖 萬方之民 信之不相疑 朝夕敬拜 以爲恒式. 太陽者 光明之所會 三神之攸居 人得光以作 而無爲自化 朝則齊登東山 拜日始生 夕則齊趨西川 拜月始生.]
환국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해를 맞이하고 저녁이 되면 달을 향해 절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해맞이와 달맞이가 특정한 날에 행하는 의식이 아니라 날마다 행하는 일정한 의식행위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바탕에는 태양에 삼신(三神)이 임어해 계신 걸로 믿었고 삼신의 능력이 드러난 것이 태양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삼신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태백일사』 제 일편의 「삼신오제본기」에서 인용된 『표훈천사(表訓天祠)』에 이르기를 “자상계 각유삼신 즉일상제(自上界 却有三神 卽一上帝)”라 하여 천상 세계의 삼신이 곧 한 분의 상제임을 전한다. 이어 “주체즉일신 비각유신야 작용즉삼신야(主體則一神 非各有神也 作用則三神也)”는 주체가 일신 한 분이고,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라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즉 한 분 일신이 세 가지 작용을 하는 것을 일컬어 일신을 곧 삼신이라고도 칭하는 것이다. 세 가지 작용이라 함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조화(造化), 진리를 깨우쳐 가르침을 펴는 교화(敎化), 질서를 잡아 다스리는 치화(治化)를 일컫는다. 최고신의 세 가지 역할을 기술한 심도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표훈천사』의 저자로 추정되는 표훈대사는 『삼성기』의 저자인 안함로와 마찬가지로 신라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으로 신라 경덕왕 때 고승이다. 그의 저작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불교를 닦은 승려였지만 한민족의 상고 역사로부터 이어져 온 최고신 관념에 깊은 통찰을 지녔던 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천상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최고신과 경덕왕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역사적 행적이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지는데 이 또한 최고신 관념에 관한 중요한 사료이기에 남북국시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 것이다. 결국 신의 특성 중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일신을 삼신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일신(一神)·천신(天神)·천주(天主)·천제(天帝)·제(帝)·상제(上帝)·삼신(三神)은 모두 한민족의 원형 사상에 자리한 한 분의 최고신에 대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환국시대 생활상으로 돌아가면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최고신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을 하고 해와 달을 매일 경배했다. 최고신은 통치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직접 뵙는다는 친견(親見)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해와 달을 최고신의 두 눈처럼 그 분이 머무르는 거주지로써 생각하고 그 분을 모시는 것을 실천했다는 기록은 일상에 최고신 관념이 매우 밀접하게 스며들어 있었기에 삶 자체가 최고신과 하나가 되어서 어우러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우리의 최고신에 대한 기록물 중에 가장 원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배달
2.1. 최고신의 권능의 증표, 천부인(天符印)
환국 이후 초대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정통을 이어받은 증표인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도읍을 신시(神市)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한 신시개천(神市開天) 시대가 열리게 된다. ‘신의 도시(神市)’를 세웠다는 점에서 건국의 근본에 최고신을 두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환웅천황이 정통계승의 상징물로 가지고 왔다고 전해지는 천부인(天符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환웅이 천부인을 지니고 왔다는 기록은 『삼성기』 뿐 아니라 『태백일사』 「신시본기」 그리고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천부와 인을 별개로 보고 천부경과 도장 혹은 부적과 도장으로 보기도 하며 천부인을 하나의 성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형상이 무엇이든 간에 하늘의 원리, 하늘의 이치와 권능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초대환웅이 환인에게 천부인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곧 최고신과 관련된 하늘의 부(符)를 갖고 온 것이며 이것은 최고신의 정신과 권한을 집행하는, 그 이념을 실행하는 자로서 정통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환웅 자신이 최고신의 가르침과 권능을 이 지상 위에서 집행하는 자라는 걸 표상한다.
2.2.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전하는 최고신 관념
그리하여 신시(神市), 즉 신의 도시를 세우게 되는데 이는 환국의 정통을 이어서 천부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 신은 일신에서 이어온 것이라 얘기할 수 있다. 초대환웅은 신의 가르침을 펴서 백성을 교화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가르침의 내용은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나타난다. 『삼일신고』의 옛 판본은 장이 나뉘어 있지 않았으나 행촌 이암 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 1장은 허공(虛空), 2장은 일신(一神), 3장은 천궁(天宮), 4장은 세계(世界), 5장은 인물(人物)이라 하였다. 『삼일신고』는 총 366자로 쓰여있는데 내용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을 통해 전해지며 그 중에서도 2장 일신 장이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장이다.
[제2장 일신(一神) 51자: 하느님(상제님)은 위 없는 으뜸 자리에 계시어 큰 덕과 위대한 지혜와 무한한 창조력으로 하늘을 생겨나게 하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를 주재하시느니라. 많고 많은 것을 지으시되 티끌만 한 것도 빠뜨림이 없고, 무한히 밝고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 지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소리와 기운으로 서원하고 기도하면 마침내 일신을 친견할 수 있으리니 너의 타고난 본성에서 진리의 씨를 구하여라. 일신이 너의 머리에 내려와 계신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神 在無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 生天 主無數世界 造兟兟物 纖塵無漏 昭昭靈靈 不敢名量 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2장 일신 장을 살펴보면 51자의 짧은 글귀이지만 상고 역사의 신관이 함축적으로 집약된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신 재무상일위(神 在无上一位)”라 하여 일신이 더 이상의 위가 없는, 가장 지존의 높은 자리에 계신 분으로서 인격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최고신의 위격임을 설하고 있다. 가장 높은 신위라는 것은 다른 신 역시 존재함을 전제하는 것인데 여러 인격신과 자연신 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최상의 위격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어 “유대덕대혜대력(有大德大慧大力)”이라 함은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세 가지의 권능의 측면을 강조할 때는 일신을 삼신이라고도 했는데, 삼신의 신성을 조화·교화·치화가 아닌 덕·혜·력의 3가지 덕목으로 얘기하고 있다. 생명을 창조하여 품는 덕성, 진리를 일깨워 교화하는 지혜, 질서를 잡아 통치하는 힘으로 이 3가지 덕목은 삼신의 조·교·치 본성과도 상통하고 인간이 본받아 양성해야 할 덕목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 다음 이어지는 구절이 “생천 주무수세계(生天 主無數世界)”이다. 우주를 낳으시고 무수한 세계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최고신 관념의 창조성과 주재성을 함께 전하고 있다. 동서양의 신관을 큰 틀에서 조망해보면 서양은 창조성에 치우쳐져 있고 동양에서 전하는 상제관은 주로 주재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서양은 신이 만물을 지어서 만들어낸다는 창조의 역할을 강조하며, 동양은 이 우주에는 이치(理)가 있고 상제가 그것을 맡아 다스린다는 주재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허나 『삼일신고』는 상고 시대 때 우리가 인식하고 모셔왔던 본래의 최고신에 대해 창조와 주재의 양면성을 모두 겸한 존재로 균형 있게 전하고 있다. 이렇듯 生天과 主無數世界는 최고신의 창조성과 주재성을 잘 나타내는 구절이며, 「삼신오제본기」에서 인용한 『표훈천사』의 기사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삼신 유인출만물 통치전세계지무량지능(三神 有引出萬物 統治全世界之無量知能)”이다. 삼신은 만물을 빚어내고 전세계를 통치하는 무량한 지혜와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뜻으로 생천은 유인출만물과 통하고 주무수세계는 통치전세계지무량지능과 대구를 이룬다. 표훈대사는 신라 경덕왕 때 인물이지만 그의 저작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여러 내용으로 보아 『삼일신고』와 같은 신교 시대의 보서를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접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창조성에 관해 좀 더 논하자면 ‘生天’은 우주가 생겨나는 데 최고신이 근원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말하고, 이는 삼신의 3대 신성 중에 조화신으로서 면모를 드러내준다. 이것은 서양의 창조개념과는 사뭇 차이가 있는데 서양 기독교문화에서 말하는 창조성은 한 글자로 정의한다면 ‘작(作)’에 가깝고 한민족의 신교경전인 『삼일신고』에서는 ‘생(生)’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신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느낌의 창조자이고 동양은 작위적으로 지어내는 게 아니라 탄생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서양의 관점에서는 조물주가 피조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원화(二元化)된 관계로 신과 우주는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생生’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최고신과 우주가 하나임을 뜻하며, 하나에서 분화되어 갈라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창조적 관점에서 보면 生과 作의 차이는 신과 만물의 관계성에 많은 차이를 낳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주가 처음 생기는 창조의 사건이 물건 만들 듯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창조자 외에 피조물을 만들기 위한 선행되는 별개의 재료가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모순에 부딪힌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작作’은 조물주와 피조물이 이원화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가 생겨나는 최초의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한민족이 우주 절대자 신의 조화신으로서의 면모를 ‘生天’이라 함은 최고신의 오해를 바로잡는 데 있어 단초가 될 수 있다.
일신 장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이는 곧 ‘소리와 기운으로 서원하고 기도하면 마침내 일신을 친견할 수 있으리니 너의 타고난 본성에서 진리의 씨를 구하여라. 일신이 너의 머리에 내려와 계신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환국 시절 제례를 올리고, 해맞이와 달맞이를 하며 날마다 일신을 친견하는 문화가 있었다면 신시 배달시대의 신교경전인 『삼일신고』는 소리와 기운으로 서원하고 기도하면 일신을 친견할 수 있다고 전한다. 실제 소리를 내며 수행하는 주문수행을 하거나 노래와 춤으로 일신과 교감하는 문화가 발달하였다. 환웅이 수도하실 때 주문을 읽고 공덕이 이뤄지기를 기원하였음을 전하는 『삼성기』의 기록과 배달 시대에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노래를 불러 삼신을 크게 기쁘게 해 드리고, 나라의 복과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기원하였다는 「소도경전본훈」의 기록 또한 이와 관련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부루단군 때는 어아지악(於阿之樂)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시의 옛 풍속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삼신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노래와 춤은 일종에 신과의 교감을 하는 행위로 신을 친견하는 문화양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3.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 삼랑(三郞)
나라를 이끄는 핵심 인사조직도 최고신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데 바로 신시 배달시대에 삼랑(三郞)이라 불렸던 낭가(郎家) 조직이다.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郞)이라 하고... 『태백일사』 「신시본기」, 護守三神 以理人命者 爲三侍郞 本三神侍從之郞 三郞 本倍達臣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 高麗八觀雜記 亦曰 三郞 倍達臣也...主敎化威福者 爲郞.]
삼랑은 신시 배달의 신하로 나라의 핵심 중추가 되는 인재조직이었다. 신라시대 화랑(花郞)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삼랑은 인명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절대적 존재였다. 죽고 사는 근원적인 문제를 관여하는 이들이었는데, 삼랑의 실제 뜻은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이라 하여 삼신을 모시고 따르는 낭도들의 모임이요, ‘삼신호수지관(三神護守之官)’이라 하여 최고신을 수호하는 직책이라는 뜻으로 최고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관하는 활동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강화도에 위치한 삼랑성(三郞城)은 「신시본기」에도 기록이 남아 이 성은 삼랑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라 전하는 것으로 볼 때,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마리산 참성단과 함께 초대단군 때 쌓은 성이라 할지라도 삼랑의 의미를 취하여 쓴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삼랑을 뿌리로 하여 신라시대에는 화랑이 등장하는데 진흥왕은 풍월도를 우선으로 하여 화랑을 재편하였기에 우리 고유의 사상적 기반 위에 조직화한 것이지만 당시 신라는 불교 공인 이후였기 때문에 불교를 습합한 양상을 보인다. 화랑 출신의 승려가 다수 배출된 점, 최고신 관념이 미륵불로 옮겨간 것, 진평왕 19년(597)에 삼랑사(三郞寺)라는 절을 창건한 일 등이다. 삼랑이라는 절 이름을 쓰게 된 유래에 관한 적확한 사료를 찾아보긴 어려워 세 사람의 화랑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짐작하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우리의 원형시절 배달의 삼랑이라는 말을 차용한 게 아닌가 추정한다. 23대 법흥왕 때 불교 공인이 된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사찰이 많지도 않았던 그 시기에 굳이 세 명의 화랑이라는 뜻으로 사찰이름을 지었다기엔 막연하다. 실제로 화랑 중에서 삼성조라든지 삼성현과 같이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인물을 특정 짓기 어렵다. 또한 24대 진흥왕이 풍월도를 부흥시켜 화랑도를 재건한 이후 26대 진평왕 때 세워진 사찰이기 때문에 풍류와 관련된 삼랑이라는 말의 전통과 의미를 되살려 쓴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3. 단군 조선
3.1. 초대단군의 여덟 가지 조칙의 첫머리에서 나타난 친견(親見)사상
조선시대의 최고신 관념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작업에 있어 중요한 사료로는 행촌 이암(杏村 李嵒)의 『단군세기』가 있다. 이암 선생은 고려 말 여섯 임금을 섬긴 대학자로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역임한 인물이다. 또한 홍건적의 난 때는 최고사령관이 되어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친 공적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가 저술한 『단군세기』는 2,096년 동안의 고조선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하여 47대 단군의 역사와 신교의 다양한 풍속을 전하고 있다.
먼저 초대 단군 때 최고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단군왕검이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직접 내린 여덟 가지 조칙을 전한다. 그 중 첫 번째 가르침이 최고신을 친견하는 조천사상을 가장 서두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천(朝天)은 문자 그대로 하늘을 조회함이며 이것은 하늘에 임어해 계신 최고신을 직접 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조: 하늘의 법도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이 오직 순수한 정성으로 다져진 일심을 가져야 하느님(상제님)을 뵐 수 있으니라(朝天). 『단군세기』, 詔曰 天範 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 一爾心 乃朝天.]
통치자인 단군 뿐만 아니라 백성 누구라도 순수한 정성으로 다져진 일심을 가진다면 하늘의 최고신을 직접 뵐 수 있음을 최우선에 두고 있다. 최고신을 섬겨야 되고 종국에는 각 개인이 직접 친견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머지 조칙에서도 하늘의 법도를 근본으로 하여 사람들과 잘 융화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능히 최고신을 경배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임을 설하며 충효의 정신을 전한다. 또한 하늘의 법을 항상 잘 준수하여 만물을 사랑하고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을 잘 간직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덟 가지 가르침의 성격이 모두 하늘의 법도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신교문화의 원형 정신을 잘 드러내주는 조항이라 할 수 있다.
3.2. 천제의 가르침을 받고 구서지회를 결성한 구물단군
이후 신교문화가 융성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큰 가르침이 실마리가 많아 능히 행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하니, 문화의 성격이 종합적이고 입체적이라서 가르침의 골수를 전체적으로 함양한 이들이 적어지게 됨을 말한다. 그로인해 나라의 집단 무의식과도 같은 문화정신이 약화되면서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되고 국력이 약화되면서 고조선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국난의 시기에 최고신의 가르침을 받고 나라를 대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데 44세 구물단군 때 일이다. 구물단군은 꿈에서 천제의 가르침(夢敎)을 직접 받고 아홉 가지 계율을 맹세하는 모임인 구서지회(九誓之會)를 결성하여 백성을 교화하였다. 이는 우리가 다시 대일신하자는 정신혁명이자 정치개혁의 움직임으로 국력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구물단군의 의지에 감응한 최고신과의 조우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의 신교문화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하는 최초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는데 부여라는 국호가 중요하다. 부여라는 국호에는 우리의 근원적인 문화를 회복한다고 하는 정신이 담겨있는 것이다. 최고신을 꿈에서 친견하여 신교를 받으면서 아홉 가지 계율을 등불 삼아 구서지회를 열고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했으니, 부여에서 그런 역사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러한 구물단군의 국정쇄신의 움직임은 그 이후 역사에 큰 파급 효과를 준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멸망 이후 해모수만 하더라도 근 2천 년간 썼던 조선이라는 국호를 이어받지 않고 근 2백 년간 지속된 대부여의 북쪽을 차지하였다 하여 북부여라는 국호를 삼았다. 그리고 후기 북부여 시대를 여는 고두막한은 자신을 동방의 광명이라는 뜻으로 동명(東明)이라 하였고 동명부여를 열게 된다. 밝은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정신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다물(多勿)정신은 고토(古土)의 회복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강성했던 본래의 옛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구서지회의 정신과 통한다. 박혁거세의 건국 사건도 그 역사정신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유민으로 떠돌던 사람들이 정착하여서 이 세상을 광명의 세상으로 다시 밝혀보겠다는 부흥과 시원문화의 회복정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구서지회의 광명정신, 부흥정신, 회복정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던 국가였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국력이 약화되고 백제 말기에는 신라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몰락의 위기에 빠졌을 때 과거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남부여라는 국호를 쓴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여에는 벼랑 끝, 위기에 몰렸을 때 시원의 정신을 회복해서 다시 일어나야한다는 재생의 의지, 불굴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처럼 고조선의 말기 구서지회의 부흥 운동의 역사정신은 이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Ⅲ. 열국과 삼국시대의 최고신
1. 열국
1.1. 동부여 개국 과정에 개입된 최고신 관념
열국시대에 들어서는 동부여 개국과 관련된 기사에서 최고신과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삼국유사』 ‘북부여’조의 기록을 살펴보자.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작이다. 『삼국유사』 ‘북부여’, 古記云 “前漢書 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乗五龍車立都, 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移都于東扶餘, 東眀帝継北扶餘而興立都于卒夲州爲卒夲扶餘, 即髙句麗之始見下.”]
위의 기사에 따르면 북부여의 역사 흐름에서 해부루를 위시한 북부여의 기존 세력이 상제의 명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동부여를 개국하는 과정이 나온다. 왕이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세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상제의 명인 것이다. ‘북부여’조 외에 『삼국유사』 ‘동부여’조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해부루의 대신인 국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天帝) 또는 천신(天神)의 존재가 강림하여 “장차 내 자손을 시켜서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희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 동해 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할 것이다.”라고 하여 동쪽으로 건너 가 동부여를 세우게 되었음을 전한다. 상제·천제·천신으로 불리는 존재가 동부여 개국 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범장(范樟)이 저술한 『북부여기』는 동일한 사건을 기술하면서도 역사의 한 인물이 힘을 행사하여 해부루의 세력이 밀려나 동부여를 개국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였다. 동명왕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어 계속 위협하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몹시 난감하였다. 이때 국상 아란불이 주청하기를 “통하 물가에 가섭원이란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권유하여 마침내 도읍을 옮기니, 이 나라를 가섭원 부여, 혹은 동부여라 한다. 『북부여기』, 甲午三十四年十月 東明國高豆莫汗 使人來告曰 我是天帝子 將欲都之 王其避之 帝難之 是月 帝憂患成疾而崩 皇弟解夫婁立 東明王 以兵脅之不已 君臣頗難之 國相阿蘭弗 奏曰 通河之濱 迦葉之原有地 土壤膏腴 宜五穀 可都 遂勸王 移都 是謂迦葉原夫餘 或云東夫餘.]
상제·천제·천신으로도 불린 최고신의 명이 역사 속 실존인물인 고두막한이라는 인물로 대체되어 전해진다. 고두막한은 우리 역사상 가장 숨겨진 인물로 당대에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구국의 영웅이자 후기 북부여를 실제 통치한 단군이다. 역사를 복원함에 있어 우리 고유의 사서를 경시하고 중국 사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고두막한은 가장 감춰진 인물이지만 『북부여기』는 이를 소상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주요 논제에 따라 고찰하면 동부여 탄생의 결정적 인물인 고두막한은 스스로 천제의 아들(天帝子)임을 주장하며 자신이 북부여를 통치할 정통성을 지닌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권위를 최고신으로부터 갖고 와서 북부여를 통치할 권위를 부여받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동부여 개창과 관련된 기사에 있어서 직접적인 원인이 상제의 명이든 고두막한의 외압이든 상관없이, 최고신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거나 혹은 최고신의 권위를 이양 받은 형태로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2. 천자사상의 계승
자신을 최고신의 대행자로서 인식했던 천자사상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인 고주몽 성제에게도 이어진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엄수(淹水)에 다다랐을 때 앞으로는 건널 길이 없고 뒤로는 기병들이 추격해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我是天帝子).”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현재 처한 상황을 수신(水神)에게 고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후 장수왕이 세운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고구려의 창업조인 추모왕을 천제지자(天帝之子) 그리고 황천지자(皇天之子)라 하여 하늘 최고신의 아들인 고추모가 왕이 되고 고구려를 건국함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임을 공고히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왕가의 혈통은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뚜렷이 하였던 이유는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에서 “천자는 동이와 북적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천자라고 부른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천지를 부모로 섬기는 천지부모사상의 발로이다.
2. 삼국
2.1. 최고신과 관련된 백제의 문화
열국을 거쳐 삼국에 이르러 나라가 분열됨에 따라 최고신과 관련된 원형적 문화 양상은 나라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백제는 천지(天地)와 오제(五帝)에 제를 올렸다. 하늘과 땅에 제를 올렸다는 것은 천신과 지신이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최고신을 천신으로 삼고 지신을 함께 모신 것이다. 하늘뿐만이 아니라 땅에도 제사를 지내는 천지제사(天地祭祀)와 더불어 오제에 제를 올린 것은 고구려·신라와 구별되는 백제만의 특징으로, 오제는 신교문화의 삼신오제(三神五帝)사상에 근거하여 현실 변화를 주도하는 오방의 신들을 모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고신(三神)을 가장 근간으로 삼으면서도 현실의 작용을 주관하는 다섯 가지 방위의 오령(五靈)을 모시는 제천의식이라 할 수 있다.
2.2. 최고신과 관련된 고구려의 문화
고구려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조천사상이 두드러진다. 고구려에 영석(靈石)이라는 신령스러운 돌이 있었는데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으로 불렸으며 성제가 이 돌을 밟고 올라가 천상의 상제를 조회하였다고 전한다. 천상의 최고신과 지상의 제왕이 만나는 일종의 매개물로써 고인돌처럼 기도를 올리거나 일종의 신교의례가 행해지던 돌일 것이다. 당나라 도사들이 도교를 전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이름난 산천의 기운을 제압하고 조천사상의 상징물인 영석을 파괴한 행위는 실로 고구려의 천자의식을 훼손하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최고신과 인연이 있는 또 다른 인물로는 수 양제의 침공을 물리쳤던 을지문덕 장군을 꼽을 수 있다. 을지문덕은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고 전한다. 성령체험의 형태로 최고신을 접하고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은 실제로 해마다 3월 16일 대영절이 되면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 제물을 바쳐 경배하였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신시 배달의 환웅과 고조선의 단군으로부터 이어져오던 신교의 풍속으로 을지문덕이 해마다 연간 두 차례에 걸쳐 최고신을 모시는 정성을 보인 것은 이를 중요한 예식으로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인물 중에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을파소(乙巴素)이다. 을파소는 은둔한 현인이었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이의 천거로 고국천왕 때 국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따로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고구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원래 알려지지 않은 은둔자였고 갑작스러운 등용에 여러 반대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을 삼가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외(中外)에 일이 없었다.
『삼국사기』 「열전」 ‘을파소’, 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그럼에도 ‘명정교(明政敎)’, 이 세 글자가 알려주듯이 을파소는 나라의 정치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바른 삶의 길로 이끌 교화의 푯대를 세워 나라 안팎으로 근심이 없게 하였다. 국정운영의 큰 두 축이 되는 정치와 교화를 밝혔다는 것은 실로 지대한 공덕을 세운 것이다. 국가 발전의 양대 축을 새롭게 하여 다스림의 체계를 구축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가르침을 널리 폈기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으나 그 세밀한 내용을 함께 접하기 어려운 것은 중화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정신문화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배제시켜버린 김부식의 역사 기술도 한 몫 할 것이다. 이런 한계 속에서도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따르면,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參佺)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神市) 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寒盟)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乙巴素 爲國相 選年少英俊 爲仙人徒郞 掌敎化者 曰叅佺 衆選守戒 爲神顧托 掌武藝者 曰皂衣 兼操成律 爲公挺身也 嘗言於衆曰 神市理化之世 由民開智 日赴至治 則有所以亘萬世 不可易之標準也 故 參佺有戒 聽神以化衆 寒盟有律 代天行功也 皆自立心作力 以備後功也.]
인재를 뽑아 선인도랑으로 삼고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고 문무의 경계 없이 무리에게 신시 시대로부터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으로써 전해져 온 참전의 계율을 권하고 있다. 선생이 일찍이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다가 천서(天書)를 얻었는데, 이것이 『참전계경』이다. 『참전계경』은 을파소가 전하여 내려온 경전으로 을파소가 처음으로 저술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내려오던 가르침을 계시를 통해 집대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366개의 절목으로 이루어진 『참전계경』과 환웅의 시절에 ‘범주 인간 360여사’라 하여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을 견주어 볼 때 신시 배달시대부터 이미 이러한 체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 을파소 선생이 자신의 견해를 글로 남긴 부분을 보면, “배달 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리던 시절에는 팔훈을 날줄로 삼고 오사를 씨줄로 삼아 교화가 크게 시행되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정신으로 만물을 구제하였으니, 『참전계경』의 내용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바가 없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이 전계(佺戒)로 더욱 힘써서 자신을 수양한다면,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공덕을 실현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상고시대로부터 참전의 계율이 있어 왔고 이로 인해 교화가 크게 행해졌으니 이것을 다시 수양의 지침으로 삼고자 했던 그의 내심을 확인할 수 있다.
『참전계경』의 내용 중 최고신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첫 번째 장인 정성(誠) 장은 6體 47用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데 그 중 1體에 해당하는 경신(敬神)을 말할 때 가장 우선하여 천신을 언급하고 있다.
[경(敬)은 지극한 마음을 다함이며 신은 천신(하느님)이다. 해·달·별·바람·비·벼락 이들은 유형의 하늘이요, 보지 못하는 사물이 없고 듣지 못하는 소리가 없는 하늘은 무형의 하늘이라. 무형의 하늘은 하늘의 하늘이요, 하늘의 하늘은 곧 천신이로다. 사람이 하늘을 공경치 않으면 하늘도 사람에 응답치 않으리니, 풀·나무가 비·이슬·서리·눈을 받지 못함과 같음이로다.
敬者 盡至心也 神 天神也 日月星辰 風雨雷霆 是有形之天 無物不視 無聲不聽 是無形之天 無形之天 謂之天之天 天之天 則天神也 人不敬天 天不應人 如草木之不經 雨露想雪.]
천신을 가장 첫 가르침으로 두어 비중 있게 기술하고 있다. 천지자연의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천지자연의 주재자로서 천신을 전하는데,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 「포덕문」 첫 장의 ‘천주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이 비 내리고 이슬이 내려 자연만물이 생장하는 것을 천주의 조화의 작용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자연현상인 줄로만 안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변함없이 둥글어 가는 사시(四時) 변화의 자연 질서는 다름 아닌 천주의 조화의 흔적임을 말한 것이 일맥상통한다.
또한 『참전계경』은 최고신에 대한 올바른 기도법으로 취하여 적용할만한 내용을 전한다. 순천(順天)·응천(應天)·청천(聽天)·락천(樂天)·대천(待天)·두대천(頭戴天)·도천(禱天)·시천(恃天)·강천(講天)으로 아홉 단계에 걸쳐 기도를 할 때의 마음가짐과 방법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기도법은 단지 절대자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거나 기복 차원에서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소원하는 행위를 넘어서,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에 근본하고 자연의 이치를 바탕으로 최고신께 기도를 드리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아홉 단계 중 순천(順天)·응천(應天)·청천(聽天)에 해당하는 앞의 3단계는 기도에 들어갈 때 근본 바탕으로 다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말한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염원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에 순하고 응하여 오히려 하늘의 명령을 들으려는 마음가짐을 다져서 ‘이치에 기반한 정성’을 일으켜야함을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락천(樂天)·대천(待天)·두대천(頭戴天)의 중간 3단계에서는 사고방식이나 감정체계를 하늘의 뜻에 맞게 조율해감을 말하는데, 정성의 깊이를 더함에 따라 점점 기뻐지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성에는 하늘이 반드시 감응할 것이라는 믿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머리에 하늘을 얹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가 비로소 하늘의 시각에서, 우주적인 시각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욕(私慾)이 공욕(公慾)으로 전환되고 제대로 된 기도에 들어갈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마지막 도천(禱天)·시천(恃天)·강천(講天)의 단계는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단계로 어려운 일 뿐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고, 의존심으로 그저 기대는 것이 아니라 큰 정성과 믿음을 일으켜 자신의 중심은 잃지 않되 온전히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는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고신과 나와의 관계가 기도를 받는 자와 기도를 하는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의 대변자가 되어 하늘의 이치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다. 이 현실계를 재세이화 홍익인간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최종 단계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아홉 단계의 기도법이 매우 체계적으로 단계를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깊이 있는 기도법이자 고대 선조들이 최고신과의 발전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마음공부법이라 생각한다.
2.3. 최고신과 관련된 신라의 문화
이제 신라에 관해 논해보도록 하겠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처럼 천자사상을 내세워 천자국임을 주장하진 못했는데 부여의 정통을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백제와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는 그 선계가 본래 진한종(辰韓種)이라는 기록이 말하듯이 신라인은 조선의 진한 사람들이 떠돌다가 경주 일대에 정착한 유민이다. 천자사상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더라도 신라인이 삼한의 중심인 진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내적으로 문화의 정통은 우리가 가지고 왔다는 일종의 자부심은 있었으리라 본다. 화랑을 재정비할 때 진흥왕이 풍월도를 우선해야함을 말한 것도 신교문화의 원형적 가르침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 문화의 힘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라의 최고신과의 관계성은 신궁제사(神宮祭祀)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신궁의 주신(主神)은 천신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신궁의 제관을 맡은 이들이 화랑이었고 낭가 문화의 흐름으로 볼 때 화랑의 뿌리는 삼랑이며, 삼랑은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이었다. 실제 신궁에서 모시는 주신이 누구인가에 관해 박혁거세설, 김씨 시조설, 천지신(天地神)설 등이 있으나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를 필자의 논문에서 정리한 바 있다. 본고에서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신라 특유의 제례 공간을 신이 거하는 궁궐이라는 뜻에서 신궁이라 칭한 점, 화랑이 삼랑에 뿌리를 두고 군사조직이자 제관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최고신을 주신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선에서 정리를 하겠다.
신라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사건이라는 극심한 진통을 겪으면서 불교를 공인하게 된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도 반발력이 심했던 것은 신라에 주체적인 문화의식이 강렬했다는 걸 의미한다. 불교문화를 유입할 때 기존 문화와의 유사점과 연결성을 찾음으로써 습합하게 되고, 신라에서는 특히 미륵신앙(彌勒信仰)이 강성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에 모셔진 주불(主佛)은 석가불이 아닌 미륵불이고, 화랑에 관련된 일화 중에는 미륵이 화랑으로 화현하였다고 하는 미시랑(未尸郞)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에 관한 내용의 대략은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의 하생을 간절히 기원한 끝에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만나게 되고, 진자가 그를 인도하여 왕을 뵙게 하니 왕이 그를 존경하고 받들어 화랑의 수장인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미륵이 화랑으로 화현(化現)하였다고 하는 미시랑이다. 그는 화랑도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와 풍교(風敎)가 보통 사람과 달랐고 풍류(風流)가 세상에 빛났다고 전한다. 여기서 화랑의 수장인 미시랑으로 인해 풍류가 세상에 빛났다고 전하니, 미시랑의 가르침의 성격은 불교에 가깝다기보다 화랑도의 원천적인 바탕인 풍월도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풍월도의 최고신과 미륵은 이질적인 성격이 아니라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불과 미륵불의 차이는 무엇일까. 석가불의 가르침은 이 현실세계 그 자체를 고(苦), 고통의 바다(苦海)로 보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서 극락왕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즉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인 윤회를 끊는데 수행의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개인 수행자’로서 얻는 깨달음에 그친다. 불법이 전해지고 수행을 통해 각 개인이 부처가 되지 않는 이상 세상은 여전히 혼란 무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미륵신앙은 앞으로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미륵부처를 신앙하는 것인데, 미륵부처가 장차 이 땅에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한다는 것에 핵심이 있다. 지상세계를 낙원으로 만들어 모두가 깨달은 자, 부처가 되게 하고 이는 가정이라는 작은 단위부터 국가라는 큰 단위의 조직 틀을 모두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륵부처는 석가불과 구별되는 미래불이요 희망의 부처로 일컬어지며 사유하고 행동하는 부처로 묘사되는 것이다. 또한 지상에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으로 볼 때 현실을 떠나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건국이념이자 핵심사상인 재세이화 홍익인간과도 딱 들어맞는다.
이러한 미륵신앙의 영향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이기도 했던 김유신(金庾信)은 자신이 영도하는 낭도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 이름 하였다. 용화향도란 용화세상을 여는 무리를 뜻하는 말로 미륵불의 용화낙원 세계를 신라에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죽어서 극락왕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지상 위에 용화낙원을 건설하겠다는 미륵사상은 우리 고대 신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풍월도의 최고신 관념이 불교의 미륵불로 옮겨가거나 투영이 되어 최고신과 미륵불 관념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미륵불이 이 세계의 주인이었다는 내용이 민간에 창세신화의 형태로 계속 전해지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Ⅳ. 남북국시대의 최고신
1. 통일신라
1.1. 천상을 왕래하며 왕과 천제 사이를 중재한 표훈대사
통일신라 경덕왕 때 최고신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표훈대덕(表訓大德)이 최고신과 경덕왕 사이를 중재하였던 일인데 이는 이례적이면서도 신비적 체험이 많이 담겨 있는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역사연구자의 입장에서 쉽게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신라 역사의 추이를 살펴보면 이 사건을 계기로 혜공왕 이후로는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신라의 국운이 쇠하고 신라에 더 이상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이후에 불길한 징조들이 출현하고 다수의 반란이 발발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며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은 신라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신라 왕실에서 존경을 받은 한 고승의 체험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실제 신라 중/후대 역사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에 고찰할 필요성이 다분하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시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했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가 말했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이곳에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었다. 표훈대사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왕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임을 당했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삼국유사』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참조.]
표훈은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의 10대 제자에 속하는 고승이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 표훈에 대해 기록하길, 표훈은 상시로 천궁(天宮)을 왕래했다고 전한다. 아들이 없어 근심이 깊던 경덕왕의 왕명을 받고 표훈대사는 천상으로 올라가 상제에게 왕에게 아들을 내려주실 것을 고하고,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상제의 전언을 왕에게 전달하였음에도 나라의 안위보다는 아들을 얻어 대를 잇고자 했던 경덕왕의 욕심에 결국 아들을 얻게 되지만 실제로 혜공왕 때부터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천기누설을 이유로 천상의 왕래마저 끊긴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는 기사이다.
상고시대의 신교문화권은 제정일치 사회로 왕이 최고신과 교감하고 교류하는 주체였으나 정치와 교화가 갈린 이후 왕은 최고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성인이나 신인을 대신 보내어 교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최고신과 왕의 관계변화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훈대사는 진정 천제를 친견할 수 있는 경지에 있었던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의 저작이라 추정되는 『표훈천사』의 일부 내용을 앞에서 다루었듯이 최고신에 대하여 이르기를, 일신이 계신데 한 분 신을 작용적 관점으로 볼 때 삼신이라고 하고, 창조와 주재의 능력을 모두 갖추어 만사와 만물에 관여하고 있다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최고신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만큼 이 분은 우리가 고대로부터 섬겨 온 최고신 관념에 대해서 정통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왕을 대신하여 천상을 왕래한 표훈대사였지만 경덕왕의 무리한 요청으로 인해 표훈마저 하늘 길이 막히고, 천제가 경고한 바대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고 이후 신라에 다시 성인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로 볼 때, 이는 최고신과의 관계성이 우리 역사의 변천에 밀접하게 영향을 준 사화(史話)라고 할 수 있다.
1.2. 미륵에게 직접 증표를 전수받은 진표율사
경덕왕과 같은 시기, 고승 진표(眞表)가 미륵을 직접 친견하여 증표를 받아내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만 하더라도 ‘진표전간’조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 두 곳에서 다뤄지고 있다. 유식론(唯識論)의 창시자인 인도의 아상가 보살이 미륵보살을 직접 친견했다고 전하는 기록 이후 최초로 우리 역사에서는 진표가 미륵을 친견한 것으로 되어있다. 진표율사는 돌로 몸을 희생시키며 참회하는 법인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를 구하던 중 지장보살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으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그가 본래 뜻을 두었던 미륵의 감응을 받게 된다. 도솔천의 여러 천중들을 이끌고 나타난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그의 지극한 구도의 정성을 인정하는 증표로 『점찰경』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전하였다. 신라 때 최고신 관념이 미륵신앙으로 연결이 되었다는 것으로 볼 때 진표도 최고신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로 파악할 수 있다.
Ⅴ. 고려와 조선의 최고신
1. 고려
1.1. 왕조교체의 추동력이 된 최고신의 계시
고려의 창업자이자 후삼국 통일의 과업을 이루어 낸 태조 왕건은 918년에 홍유 ·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우기 전, 그 해에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명분이 될 만한 도참(圖讖)을 얻게 된다. 정황을 대략 정리하면, 왕창근(王昌瑾)이라는 상인이 어느 날 차림새가 수상한 노인으로부터 거울을 샀는데 이를 담벽에 걸어놓으니 일광이 옆으로 비쳐 그 속에 새겨진 글귀가 나타난다. 그 글은 삼수중과 사유(동서남북)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고 이 인물이 중흥위업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다. 왕창근이 이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궁예에게 바쳤고 궁예는 거울 판 사람을 찾게 하였는데 그 모습이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의 치성광여래 불상 앞에 놓여진 토성(土星)을 맡은 신의 옛날 소상과 같음을 깨닫고 기뻐하여 이 사실을 자세히 써서 올리니 궁예는 경탄하고 이상히 여겨 글을 잘 아는 송사홍·백탁·허원 등에게 글을 해석하게 한다. 그 참서(讖書)를 해석한 결과 ‘옥황상제가 진마(진한과 마한)에 아들을 내려보냈고 궁예를 멸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는 것은 곧 왕건을 두고 이른 말임을 깨닫고, 세 사람은 사실대로 고한다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꾸며 궁예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해 6월 왕건은 여러 장군들과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도참을 얻게 되는 사건은 왕건이 천손으로 새 왕조의 창업조로 등극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심지계조’조에는 『왕대종록(王代宗錄)』을 인용하며 신라 말년의 고승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전한다. 진표율사의 고행 끝에 미륵불에게 직접 전수받은 계간자 189개가 왕건에게까지 전해짐으로써 이것은 건국의 증표요, 왕이 될 수 있는 증표로도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표방했듯이, 고주몽이 ‘내가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한 것처럼 왕건도 ‘옥황상제의 아들이 새 왕조를 연다’는 도참을 추동력 삼아 새 왕조를 연 것으로 볼 때, 황제로서의 지위는 천제로부터 자신의 정통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역사와 최고신의 관계는 밀접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건국사건으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미륵불의 증과간자를 통해 미륵불과 최고신과의 관련성을 느낄 수 있다.
1.2. 신교문화의 전승 예식인 팔관회(八關會)
고려에서 팔관회(八關會)가 대표적으로 최고신을 모시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때 처음 행해졌지만 태조로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정기 행사로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고려조이다. 태조는 원년에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고 해마다 하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태조 26년에는 후대에게 남기는 유훈으로 <훈요 10조>를 내리는 데 그 중 팔관회에 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내가 지극하게 바라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 있으니,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天靈)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하라. 나도 처음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연등회‧팔관회를 하는 날짜가 국가의 기일[國忌]을 범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겠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이대로 시행하라. 『고려사』 世家 卷第二, 太祖 26年 4月, 其六曰, 朕所至願, 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姦臣建白加減者, 切宜禁止. 吾亦當初誓心, 會日不犯國忌, 君臣同樂, 宜當敬依行之. …]
태조는 후대에 이 행사를 가감(加減)하는 것을 엄금하고 국가의 기일을 범하지 않고 해마다 시행하기를 당부하였다. 실제 태조의 뜻을 받들어 후대 임금들은 팔관회를 연례행사로 개경에서는 11월 즉 중동(仲冬)에, 그리고 서경에서는 10월에 열게 된다.
팔관회의 성격을 보면 불교 색채를 띠는 연등회와 달리, 하늘의 신과 용신 및 산천을 모시는 전통적인 우리 문화의식이라 할 수 있다. 최고신을 중심으로 해서 자연신에 대한 제례를 행하는 의식으로 부처를 섬기는 연등회와 그 성격이 다름을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팔관회는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최고신을 모시던 신교 제천문화에 더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종 22년(1168)에 정치를 쇄신할 방안을 담은 교서를 내릴 때 팔관회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있는데, 이 또한 팔관회의 성격이 신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선풍(仙風)을 준수하고 숭상하라. 옛날 신라에서는 선풍(仙風)이 크게 행하여져서 이로 말미암아 용천(龍天)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백성과 만물이 안녕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조종(祖宗) 이래 그 선풍을 숭상한 지가 오래되었다. 근래에 양경(兩京)의 팔관회(八關會)가 날로 예전의 격을 잃어 유풍(遺風)이 점차 쇠하고 있다. 지금부터 팔관회에서는, 양반(兩班)으로 가산(家産)이 풍족한 자를 미리 골라 정하여 선가(仙家)로 삼고 고풍(古風)대로 행함으로써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모두 기쁨을 다 누리도록 하라. 『고려사』, 世家 卷第十八 毅宗 22年 3月, 遵尙仙風. 昔新羅, 仙風大行, 由是, 龍天歡悅, 民物安寧. 故祖宗以來, 崇尙其風久矣. 近來, 兩京八關之會, 日減舊格, 遺風漸衰. 自今八關會, 預擇兩班家産饒足者, 定爲仙家, 依行古風, 致使人天咸悅.]
이 교서에 따르면 신라에서 선풍(仙風)이 크게 행하여졌는데 이는 조종(祖宗) 이래 숭상한 지가 오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어 팔관회 역시도 그 유풍을 이었는데 그 격을 잃어 점차 쇠하고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풍이라 함은 중국에서 유입된 선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본래 선이요, 다른 말로 풍류라 할 수 있는 한민족 고유 사상을 의미한다. 팔관회를 이러한 역사정신에 따라 고풍(古風)대로 행한다면 하늘과 사람이 소통하고 모두 기뻐하는 축제의 장이 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조에서 팔관회 행사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987년에 성종은 재상 최승로가 건의한 <시무 28조>에서 언급된 팔관회 관련 내용을 받아들여 팔관회를 중지하게 된다. 최승로는 <시무 28조> 내용을 기반으로 유교를 중심으로 한 통치 체제를 확립하려 했던 인물로 그의 정치관과 사상으로 비추어 볼 때 팔관회의 성대한 의례는 그저 백성으로 하여금 고역을 치르게 하는 번거로운 행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팔관회의 역사성과 그 성격이 함의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정신을 읽어내지 못한 유학자의 주장을, 중화(中華)의 풍습을 따르길 즐겨하던 성종이 받아들여 팔관회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런데 성종 12년(993)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략했을 당시, 성종이 서경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줌으로써 강화(講和)를 시도하려고 하자 여러 신하가 말리는 가운데,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이르기를 “경솔히 국토를 분할하여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께서 설치하신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괴이한 법을 본받지 말며,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여기신다면 먼저 천지신명께 고하시고 그 후에 싸우거나 강화하는 것은 오직 주상께서 결정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고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성종도 이를 옳은 말이라 여겼으나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6주를 확보하게 되자 성종 때 팔관회를 다시 열지는 않고 1010년 현종에 이르러 행사를 재개하게 된다. 외세의 침입을 받은 국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등회 및 팔관회 그리고 선랑 등의 예식을 다시 복원하여 천지신명께 고하고 위기를 타개할 향방을 결정지어야 한다는 이지백의 간언은 제례의식을 통해 최고신을 위시한 여러 신들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돈독히 하는 것이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성업을 이루는 가장 근간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고신과의 관계성을 중요시하는 사유체계가 이 때까지만 해도 고려인들에게 계속 살아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충선왕과 충숙왕 그리고 공민왕 때 팔관회가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재개를 거듭한 것으로 볼 때, 일시적인 중단은 있었으나 팔관회가 고려조 전기에 걸쳐 시행된 국가적 제천의식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1.3. 제후국으로 격하된 고려의 최고신과의 단절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여러 차례 외세 침입을 받게 되는데 특히 원(元)나라의 내정간섭 이후 원의 속국이 되면서 고려의 천자국으로서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충렬왕부터 충정왕에 이르기까지 6명의 임금은 원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왕호 앞에 ‘충(忠)’을 붙였으며, 관제가 2성 6부에서 1부 4사로 격하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충목왕과 충정왕을 제외하고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원나라 공주를 고려의 왕비로 삼으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이는 원의 간접 지배 수단이 되었고 제도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황제의 칭호를 쓰지 못하면서 고려는 천자국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 11월 경진 본궐(本闕)에 행행(行幸)하여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금오산(金鼇山)의 액호[額]인 ‘성수만세(聖壽萬年)’ 4자를 고쳐 ‘경력천추(慶曆千秋)’라 하고,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팔방의 상표(上表)가 전정(殿庭)에 이르니 천하가 태평하다[其一人有慶 八表來庭 天下太平].’ 등의 글자도 모두 바꾸었다. 만세(萬歲)라 외치던 것을 천세(千歲)로 외치게 하였고, 어연이 가는 길[輦路]을 황토(黃土)로 포장하는 것을 금하였다. 『고려사』 「志」 卷第二十三, 禮 十一, 가례잡의, 중동 팔관회 의식, 忠烈王元年十一月庚辰 幸本闕, 設八關會. 改金鼇山額, ‘聖壽萬年’四字, 爲‘慶曆千秋’, ‘其一人有慶, 八表來庭, 天下太平’等字, 皆改之. 呼萬歲, 爲呼千歲, 輦路, 禁鋪黃土.]
위의 기사는 충렬왕 원년(1275)의 일인데, 충렬왕이 팔관회를 열면서 금오산 편액의 글 내용을 고치기를 ‘성수만세(聖壽萬年)’를 ‘경력천추(慶曆千秋)’로 바꾸고, ‘만세(萬歲)’라 외치던 것을 ‘천세(千歲)’라 불렀고, 임금의 행차 길을 황토로 포장하는 것을 금하였다. 황제국의 위격으로 치렀던 팔관회의 의례도 아울러 제후국의 격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6대 성종 외에는 중단된 적이 없던 팔관회가 충렬왕 이후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때 중지되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후국은 하늘에 제를 지낼 수 없으며 그것은 곧 한민족이 고대로부터 국가존립의 근본바탕으로 여겨왔던 최고신과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한다. 최고신과의 관계가 끊어짐은 우리의 자주성을 잃어버린 것이고, 국가운영과 생활문화 전반에서 표출되던 민족의 정신적 토대가 붕괴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이러한 역사정신의 몰락이 고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2. 조선
2.1. 조선 초기부터 보이는 최고신에 대한 인식 부재
조선은 어떠한가. 원의 지배로 시작된 여말선초는 성리학이 확산되고,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유교이념의 일변도를 걷게 된다. 그 결과 조선 초기부터 천자의식은 사라지고 최고신에 대한 인식 부재는 고려조보다 더 심화되어 고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래로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祀典)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圜壇)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21일 무자 2번째기사, 禮曹啓曰: "吾東方自三國以來, 祀天于圓丘, 祈穀祈雨, 行之已久, 不可輕廢. 請載祀典, 以復其舊, 改號圓壇.” 上從之.]
태조 3년(1394) 실록의 기사를 보면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문화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제도를 회복하여 원단이라 칭하였지만, 조선에서 원단에 제를 올리는 주된 목적은 주로 가뭄을 해소하기 위한 기우제로 행해진다.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壇)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비를 빌었는데, 천제를 올리는 의미도 이미 축소되었지만 원단의 제사는 천자만이 권한이 있는 것이고 제후가 행할 예식이 아님을 강조하며 점차 제천문화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주로 땅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의 제사가 행해지게 된다.
[원단(圓壇)의 제사는 곧 환구(圜丘)이니,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는 예(禮)입니다. 제후(諸侯)는 상시로 제사지내는 법이 없사온데, 우리 나라에서는 옛적부터 이를 행하였사오니 예(禮)가 아니었삽고, 또 그때 쓰는 음악도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만을 사용했사오니 전혀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2월 19일 경인 5번째 기사, 圓壇之祭, 卽圜丘祀上帝之禮也. 諸侯無常祭之理, 我朝舊行之, 非禮也. 又其用樂, 堂上堂下, 皆用大蔟宮, 全非也.]
위의 기사는 세종 12년(1430)에 박연이 상서한 내용이다. 원단 제사의 대상이 최고신임을 말하고 있고 이는 천자의 권한임을 분명히 하여 조선의 원단 제사는 예에 어긋남을 설파하고 있다. 유교이념에 지배되어 명나라를 대중화로 섬기는 의식이 팽배하면서 천자국과 제후국이 역전되어버린 정치적 역학 관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게 되고, 최고신을 첫머리에 두고 정치와 교화의 푯대를 세웠던 한민족의 정신사의 흐름으로 볼 때 근세조선은 중심체를 잃어버린 암흑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2. 천부(天父)의 계시를 받은 김호연
하지만 아주 짙은 어둠 속에서도 일말의 빛이 비쳐오듯이 세종 18년(1436)에 최고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한 인물에 관한 기사를 주목해볼만 하다. 「세종실록」은 12월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김호연(金浩然)이라는 인물에 관해 기록을 전하는데, 그는 자신에게 계시를 내린 대상을 천부(天父) 또는 천신(天神)이라 칭하며 “너를 명하여 북쪽 오랑캐를 다스려 임금이 되게 한다.”는 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프랑스 왕실에 혜성같이 나타난 평범한 시골 소녀가 계시를 전하고 프랑스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잔 다르크를 연상시킨다. 김호연의 사례에서 특징적인 점은 최고신에 대해 정형화된 호칭을 쓰기보다는 ‘하늘의 아버지’라 하여 다소 체험적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신교문화의 핵심은 최고신과의 교감인데 신교문화의 체험양식이 나타나고 있고, 북쪽 땅을 수복하라는 계시는 곧 우리 민족의 고토인 만주 땅을 회복하라는 의미로 고대에 한민족사의 중심무대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마냥 허황된 낭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고려할만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만약 김호연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잔 다르크에 비견할만한 극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으로 회자되었겠지만 당시 유학자들의 기준에선 광망(狂妄)한 난언(亂言)에 불과하였다. 결국 김호연을 의금부에 가두어 추핵하게 되고 호연의 언동이 처음에는 미치고 요망한 듯 했으나 신문하여 국문하니 조금도 미친 태도가 없었다는 점, 의금부등에서 김호연을 능지처사하여 삼족을 멸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고 참형으로 시행한 점, 광인(狂人)의 한낱 소란으로 치부하기엔 임금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고 그의 생사판단에 세종이 관여했으며 실록에 기록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김호연은 신교문화의 재생의 불씨를 피우려다 한 줌 피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져버린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2.3. 신교문화의 재생의 문을 연 동학의 출현과 고종황제
조선 말엽,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것처럼 조선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놓였을 시기, 신교문화의 재생의 문을 활짝 여는 미증유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경주의 몰락한 양반인 수운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구도의 길을 걷던 도중 1860년 음력 4월 5일,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과 문답을 하게 되는 천상문답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두려워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어찌 상제를 모르느냐. 『동경대전』 「포덕문」, 勿懼勿恐 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최고신의 존재를 음성으로 친견하게 된 공전(空前)의 사건이었다. 이름 없는 한 구도자를 통해 일어난 최고신과의 관계성 회복은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한민족사에서 신교문화의 부활을 의미한다. 선생은 평소에 항상 도인들에게 “개벽(開闢) 이후로 세상에 혹 상제를 친히 모시고 문답하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있었느냐?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그가 체험한 양식이 바로 최고신을 친견하고 그 가르침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신교문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사에서 최고신과의 관계성이 약화되고 단절된 지 오래된 시점인데다, 왕이나 왕을 보필하는 성인이 아닌 출세하지 못한 서자 출신의 이름 없는 한 선비에게 신교문화의 서광이 비친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그 내용으로 볼 때 한민족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될 만하다. 『도원기서』에 따르면 천상문답은 단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근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는데 문답으로 받아 내린 내용의 골자는 옛날에도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비교대상이 없는 새로운 법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말하며, 동학의 핵심 가르침은 때의 정신을 깨쳐 무극대도를 잘 닦아야 하고, 천주를 잘 모셔야 한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이러한 동학의 정신은 이후 부조리한 세상을 혁파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고, 대일항쟁기에는 3.1혁명으로까지 이어져 민족 암흑기를 이겨낸 힘의 원천으로 작동하게 된다. 잠들어있던 조선을 뒤흔들어 깨우는 동학의 정신은 그 핵심에 최고신과의 친견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최고신의 위상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고종이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며 원구단을 쌓아 천제를 봉행함으로써 잃어버린 천자국의 위상을 되찾는 정치적 복권을 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호인 대한민국의 ‘대한’의 유래는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비롯되었는데, 대한의 국호는 천제문화를 복원하면서 나온 국호인 것이다.
Ⅵ. 맺음말
한민족사의 고유 사상의 핵심처에는 최고신이 자리하고 있다. 왕가의 혈통이나 건국의 당위성, 국가의 안녕과 국난을 타개하는 법, 백성을 교화하는 가르침까지 그 근본 뿌리를 하늘에 두고 있고, 막연한 자연의 하늘을 넘어 천상의 주재신으로서 최고신을 모셔온 것이다. 우리 고유의 문화정신이 약화되어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다시피 한 고려 말부터 조선까지를 제외하면 정치와 교화의 첫머리에 최고신을 두고 섬기며, 이 세상을 재세이화 홍익인간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 변천은 최고신에 대한 인식과 아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상고시대의 최고신은 최고신 관념에 대한 원형적 사고를 보여준다. 일신에 대한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제천문화가 꽃 피었고, 통치자에게 투여된 최고신 관념으로 인해 지도자는 절대시되고 신성하게 여겨졌다. 백성들의 생활문화에도 최고신 관념은 깊이 녹아들어 날마다 해맞이와 달맞이를 할 때 최고신을 친견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환인이 환웅에게 정통을 전할 때 전수된 천부인만 하더라도 하늘의 원리를 담은 최고신의 권능의 상징물로 여겨진다. 이는 건국사에 있어서 하늘의 인증을 받는 것이 중요한 명분임을 알게 한다.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들의 인명을 좌우하는 핵심 인재들은 신시 배달에선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이라 하여 삼랑이라 불렀다. 이처럼 상고시대는 각계각층의 구분 없이 최고신을 삶의 중심에 두었던 시대였다. 고조선 역시 초대단군 때부터 백성을 교화할 때, 최고신을 친견하는 조천사상을 가장 염두 해야 할 첫머리로 강론했으며 조선이 쇠락하여 멸망의 길로 접어들 무렵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구서지회를 결성하여 분연히 일어난 구물단군의 활동의 중심에도 최고신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열국과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면서 최고신 관념의 원형적 사고도 나라마다 특색 있는 문화 양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백제는 천지와 오제에 제사를 지냈고 고구려는 영석과 관련한 조천사상이 나타난다. 신라는 신궁제사를 모신다는 것과 특히 미륵신앙이 확산되면서 최고신 관념이 미륵불과 연결되는 모습을 보인다.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 때는 표훈대사가 천상을 왕래하며 왕과 천제의 사이를 중재하는데 이는 신라의 이후 역사의 흥망에 관련된 사건이라 흥미롭다. 신비적 체험이 서술되었을 뿐 역사적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시대에 참 구도자의 상징으로 불리는 진표율사는 미륵불에게 직접 증과간자를 전수받게 되고 이는 후에 태조 왕건에게도 전해져서 왕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상징성을 띠게 된다.
고려 조선에 이르러서 태조 왕건은 새 왕조를 도모하기에 앞서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는 도참을 얻게 되고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대사를 거행하게 된다. 하늘에 뿌리를 둔 인물은 왕이 될 자격을 얻고, 한민족사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려만 하더라도 신교문화의 전승 예식이라 할 수 있는 팔관회가 해마다 거행되었지만 이내 원나라의 제후국으로 몰락한 이후부터는 최고신과의 관계성이 단절되고, 이는 유교 일변도의 조선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고 고착화되었다. 천부의 계시를 받은 김호연이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신교의 불씨를 피워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갔고, 조선 말엽에 마침내 신교문화의 재생의 문을 활짝 여는 천상문답사건이 일어나면서 최제우가 최고신과의 연결성을 회복하고 시천주 사상을 핵심 가르침으로 삼은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아울러 고종은 칭제건원을 하게 되고 원구단을 쌓아 천제를 올린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한’도 최고신께 올린 천제문화를 바탕으로 유래한 것이다.
이처럼 한민족의 고유사상의 중심에 자리한 최고신과 한국사의 관계성을 살펴보았다. 신비적 체험이 담겨있는 사료에 대한 접근을 주저하는 학문적 연구 태도 때문에 최고신에 대한 연구는 매우 지지부진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최고신에 대한 연구는 신비적 체험과 함께 할 수밖에 없고, 실제 그것이 한국사의 변천에 영향을 주었다는 면에서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 고유사상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최고신에 대한 사유와 인식에 대해 깊이 파고들 때 우리 역사 속에 흐르는 역사정신을 제대로 깨칠 수 있으리라 본다.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삼국사기』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참전계경』
『화랑세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동경대전』
『도원기서』
『양서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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