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2024년 6월에 대한사랑이 주관한 대한국제학술문화제 4일차에 발표된 경북대 대학원 김택상님의 연구 과제인 "한국 근대사의 문을 연 세계변혁의 신"이란 제목의 논문 전체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유불선과 기독교를 포함한 동서양 신관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과 핵심 내용을 볼 수 있는 논문이라 생각됩니다. 조금 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독해서 다 읽어보시면 신이 인간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시점과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시간의 질서를 조율해 다스리는 우주의 주재자인 신의 역활은 무엇인지에 관한 깊은 이해를 얻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 생각됩니다.]
한국 근대사의 문을 연 세계변혁의 신(神)
< 목차 >
1. 머리말
2. 동서역사 속의 세계변혁의 신
1) 세계변혁의 신에 대한 정의
2) 동서 사상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세계변혁의 신
(1) 불가佛家의 미륵부처
(2) 요한계시록의 하느님
(3)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3) 세계변혁의 신들에서 드러나는 공통점
3. 한국 근대사에 등장한 세계변혁의 신
1) 동학의 핵심 가르침, 시천주侍天主
2) 선후천先後天개벽론과 개벽장開闢長으로서의 상제上帝
3) 천지공사天地公事는 세계변혁 신론의 결정판
4) 무극대도無極大道는 융합과 통섭의 문화
4. 동학의 신관과 기존 동서 신관의 비교
5.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서사상계의 두 얼굴
1) 서양에서의 신의 죽음과 마지막 신
2) 개천開天의 신과 개벽開闢의 신
3) 한류韓流와 무극대도
6. 맺음말
[한국 근대사의 문을 연 세계변혁의 신(神)]
1. 머리말
본 논문은 ‘세계변혁의 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세계변혁의 신’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 역사속에 나타나 근대사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르듯이 이 새로운 가르침은 동학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이 민족은 눈이 무언가에 가려져 있어서 태양빛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세계변혁의 신’이 우리 역사의 물길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우리 자신의 문화는 미신이고 사이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눈을 올바로 떠야할 때가 되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며 무언가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주기를 우리에게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부여해줄 수 있는 근본사상은 ‘세계변혁의 신’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세계변혁의 신’이 연구주제로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리고자, 적어도 그 개념이라도 드러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목적을 위해 2장에서 먼저 ‘세계변혁의 신’을 간단히 정의하고 동서사상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세계변혁의 신’ 세가지 유형을 살펴본다. 그리고 3장에서 한국 근대사에 등장한 ‘세계변혁의 신’의 기본 골격을 세웠고 이어서 4장에서 이 신관을 동서양의 대표적 신관 세 가지와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 근대사의 ‘세계변혁의 신’의 중요성과 연구가치가 두드러지게 하였다. 그리고 5장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동양과 서양의 사상계에 있어서의 대조적인 상황을 그려봄으로써 우리 세계변혁신관이 가진 역사적인 무게감을 강조하였다. 결론은 ‘세계변혁의 신’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변혁의 신’이 던지는 ‘개벽’, ‘상생’, ‘무극대도’ 등은 우리의 새로운 화두가 될 수 있다.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보물이 들어있다.
2. 동서역사 속의 세계변혁의 신
1) 세계변혁의 신에 대한 정의
세계변혁의 신이란 말 그대로 세계 전체를 혁신시키는 신을 말한다. 인간 세상의 일부분이나 인간세상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천체계와 지구의 자연 모두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신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 종교계에서 자주 언급되어온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워지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움이 총체적이며 근본적이다. 신이라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존재와, 어떤 인과적 원리에 의해 변화해가는 것으로 보이는 자연은, 같이 논하기 어려운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대의 사조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다루려고 한 ‘이신론(理神論)’도 창조는 신의 역할이며 창조 이후의 변화는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으로 구분짓고 있다. 그러나 ‘세계변혁의 신’은 자연의 변화와 신의 작용이 동시에 설명되고 있는 개념이다. 이것을 좀 더 엄밀하게 들어가면 이치를 집행하는 신이 그 이치에 따라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쪽으로 나갈 수도 있고, 이치가 있기는 하더라도 신이 개입해서 그 이치를 넘어서서 작용을 한다는 쪽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결국 궁극적 이치는 없고 신이 오로지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세계관으로 귀착할 것이다. 어쨌든 이 논문에서는 이치 또는 섭리를 집행하는 신만이 다루어지고 있다. 필자는 기독교의 신관 특히 ‘요한계시록의 신’도 이러한 개념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2) 동서 사상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세계변혁의 신
세계변혁의 신은 동서 사상사의 곳곳에 나타난다.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 사상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 메시아 사상은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는 물론이고, 칸트와 헤겔의 역사철학에도 그 원형적 사고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다양하게 많이 해석되어서 많은 종파가 형성되게 하였던 것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신’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모든 종교의 시원처라고 말하기도 한 인도에는 무수히 많은 신들이 있는데, 이 신들의 나라에서 불교가 탄생하였고, 이 불교에서는 하늘과 땅의 혁신과 더불어 이 땅에 낙원을 세운다고 예시된 ‘미륵부처’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 고대로 가면 서양철학의 실질적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는 플라톤이 『정치가』에서 언급한 ‘데미우르고스’가 있는데, 세계변혁의 신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요한 면모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조선말 가난한 선비의 처지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유학이념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조선사회를 흔들어 깨운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에 의해 제창된 ‘개벽을 집행하는 신으로서의 상제’가 있다. 여기서 동학이 언급될 때는 넓은 의미의 동학으로서 수운의 동학과 참동학을 표방한 증산사상이 함께 설명될 것이다. 2장에서 앞의 세 가지 논의를 먼저 살펴보고 3장에서 동학의 신관과 개벽관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불가佛家의 미륵부처
‘미륵’은 산스크리어로 ‘마이트레야(मैत्रेय, Maitreya)’이며 마이트레야는 『베다』에 등장하는 태양신 ‘미트라’에서 변화되어 나온 말로 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륵이라는 말은 태양이 떠올라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혀주는 것과 같이 세상을 어둠의 시대에서 밝음의 시대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는 자씨(慈氏)라 하여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 그 자체인 존재라고도 일컬어진다. 미륵불은 도솔천의 천주(天主)로 머물러 있다고 하는데, 「미륵상생경」은 이렇게 전한다. “여기가 바로 도솔천이고 도솔천의 부처님 이름이 미륵이시니, 그대는 마땅히 귀의해야 하리라.” 도솔천은 개인주의적인 수행자나 세속주의자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中의 자리를 지키는 곳으로, 보살이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 전에 머무르는 하늘로 잘 알려져있다. 석가모니도 인간으로 환생하기 이전에 도솔천에서 ‘호명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머물렀다고 전한다.
미륵불과 석가불의 분명한 차이점은 석가불이 출현한 시대는 모든 부분에서 탁하고 오염된 세계였으나, 미륵불이 출세할 세계는 자연환경과 세계 조직과 문화 그리고 구성원인 인간들이 전부 낙원세계에 걸맞게 맑고 깨끗한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미륵대성불경」에서 미륵불은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 탁한 악세[五濁惡世]에 출현하시어 가지가지로 꾸짖고 채찍질해 주시며 그대들을 위해서 법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으므로 다만 오늘날 나(미륵)를 만날 수 있도록 내세의 인연만을 심어 주시었느니라. 그리하여 내가 이제 그대들을 거두어 교화하는 바니라... 그때의 중생들은 부모와 사문과 바라문을 알지 못하고 도와 법을 알지 못하며 서로 헐뜯는 마지막 세상[刀兵劫]이 가까워오는 때여서... 오역(五逆)의 죄를 한없이 지어 고기 비늘처럼 죄가 잇달아 붙어 있지만 잠깐도 싫증내는 마음이 없으며, 구족(九族)과 친척 사이에도 서로 구제하는 일이 없는 말세였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거룩한 방편과 깊은 자비심으로 괴로움이 들끓는 저 중생계에 들어가시어 화평한 얼굴과 자비한 모습을 나투시고 묘한 지혜와 실다운 말씀으로 내(미륵)가 장차 그대들을 제도할 것을 미리 보여 주시었느니라.]
위의 인용문을 보면 석가불이 활동한 시기는 “서로를 헐뜯는 마지막 세상이 가까워오는 때” 또는 “말세”였다고 하며, 석가불의 교화는 미륵불의 교화를 미리 보여주고 예고한 것이라고 기술되어있다. 석가불이 법의 씨를 뿌렸을지언정 세계가 실제로 구원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상은 더 나빠져 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래시경」에는 “미륵불이 나오려고 할 때에는 지금 이 사바세계 안의 땅과 산에 있는 초목은 다 타버리고 사바세계 땅의 둘레가 60만 리며”라고 하여서, 미륵불 출세 바로 직전에 세계가 불에 의한 큰 재앙을 거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정작 미륵불이 세상에 나오는 때에는 자연과 문명과 인간들 개개인이 다 완전히 탈바꿈되어 있는 것으로 쓰여있다.
[기후가 화창하고 계절의 절기가 알맞으므로, 사람들의 백여덟 가지 걱정거리가 없어지며 탐욕·성냄·어리석음도 크게 염려할 것이 없어 사람들의 마음이 다 고르리라. 그때에는 사해(四海)의 수면이 삼천 유순이나 줄게 되고 염부제(사바세계)의 땅은 길이와 폭이 일만 유순이나 되며, 거울처럼 평평하고 깨끗하리라. 온 세상이 평화로워 원수나 도둑의 근심이 없고 도시나 시골이나 문을 잠글 필요가 없으며 늙고 병드는 데 대한 걱정이나 물이나 불의 재앙이 없으며 전쟁과 굶주림이 없고 짐승이나 식물의 독해가 없느니라.]
미륵불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는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다. 날씨와 기후가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이 살기에 딱 알맞아졌고 땅도 넓어지고 깨끗해지고 평탄해졌다. 그리고 양거(穰佉)라는 법왕이 있어서 세계를 무력을 쓰지 않고 통일하여 일체의 전쟁이 종식되고 자유와 평화의 정치질서가 실현되어 있다. 또한 각 개인의 마음이 밝아 번뇌가 쉽게 일어나지 않고 깨끗한 마음의 바탕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미륵불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대중들을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3회의 설법을 행함으로써 이 세계를 완전한 광명세계로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석가불의 예고이다. 이 내용에는 미륵불이 세계전체를 직접적으로 변혁시킨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석가불의 활동 이후에도 세계가 계속 더 안좋은 상태로 흘러가다가 어떤 큰 불의 재앙을 거치고서 새로운 낙원시대가 펼쳐지며 그 때 미륵불이 출세하여 세상을 광명세계로 완성시킨다는 흐름을 잡을 수 있다. 미륵불은 그 새 시대의 교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부처의 논리는 자연과 세계를 다스린다는 개념은 부족하고 다만 인간 각각의 마음을 밝혀준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미륵불이 새로운 자연과 문명질서를 열어놓는다는 논의까지는 펼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해보게 된다.
(2) 요한계시록의 하느님
기독교의 신관은 삼위일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필자는 삼위가 일체냐 아니냐를 떠나서 『신약』 특히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절을 그 구절에서 얻어지는 의미 그대로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을 말하였고, 「요한계시록」에는 아버지 하느님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고 직접 몇 가지 핵심적인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나는 또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아계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도 그 분 앞에서 사라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보좌에 앉으신 분이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하시고 이어서 “이 말은 진실하고 참되다. 너는 이것을 기록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요한이 받는 계시의 정점에 있는 보좌에 앉은 신은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기존 개역한글판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라고 선언하고 있다. 바로 세계변혁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신이 등장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고 선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되는 이 구절들이 짧지만 세계변혁의 신의 모습을 극명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의 다시 태어남은 신의 자의적인 행위로서 우발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내주는 구절들이 있는 데, 바로 ‘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들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고 세상을 망하게 하는 사람들을 멸망시킬 때가 왔습니다... 마귀는 제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몹시 화가 나서 너희에게 내려갔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왔으니 너희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샘을 만드신 분에게 경배하여라... 낫을 휘둘러 거두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날이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때가 찼다는 표현에서 세계가 흘러가고 급격한 변화를 겪는 데에는 시간 도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이 임의로 심판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도수에 따라 집행한다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심판이라는 것은 추수함으로 표현된다. 추수란 씨뿌리고 기른 후에 최종적으로 적절한 시기에 행해진다. 그렇다면 지금은 씨뿌려진 것이 길러지는 시기이고 앞으로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쭉정이가 분간되어 알곡이 추려질 것이다. 이 알곡을 추리는 것은 세계변혁과 함께 이루어진다. 여기서 특이한 점이 마귀에게도 자신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추수하기 직전까지가 마귀의 때인 것이다. 마귀들에게 활동의 자유가 주어진 때는 씨뿌리고 길러지는 시기이며 추수 때가 되면 그들의 때가 끝나게 된다. 이런 구절들의 내용들로 볼 때, 신이 인간 세상에 가하는 행위는 어떤 시간의 법칙 또는 섭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정확한 때는 알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에 예수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 당도하여 일어나는 세계변혁은 큰 재앙의 모습을 하지만 그 귀결점은 땅 위에 낙원이 건설되는 것이다.
[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에게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한이 받은 계시 내용은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의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그대로 상통한다. 「요한계시록」에 드러난 ‘세계변혁의 신’은 인간들 또는 인간세상을 씨뿌리고 길러서 추수하는 존재로서 어떤 시간변화의 도수에 맞추어서 추수 때가 되면 세계 대변국을 일으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고 이 땅에 낙원세계를 건설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3)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 『티마이오스』와 『정치가』를 보면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등장한다. 『티마이오스』의 신은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면모가 웅장한 스케일로 잘 그려져 있고, 『정치가』의 신은 ‘세계 변혁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우주와 인간세계를 창조하였으며, 인간세계의 역사에 개입하여 대변혁을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열기도 하는 존재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자신은 신에 의해 보냄을 받았고 신의 인도를 따라 살아왔다고 말한 그 신을 데미우르고스라고 본다면 데미우르고스는 역사의 현장에 위인들을 내려보내고 그들의 삶을 이끄는 존재도 된다고 하겠다.
『정치가』를 보면 젊은 소크라테스에게 ‘왕도적 치자’에 대해 설명하던 한 손님이 한 가지 신화를 이야기 한다. 그 이야기에는 이 우주가 반대되는 두 가지의 운동을 교대로 반복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우주의 운행이 때로는 지금 회전하는 방향으로 이동하지만, 때로는 반대방향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네...그 때 그것 안에 거주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변화들이 일어났다고 보아야만 하지...그때 그밖의 생물들의 엄청난 파멸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들 가운데서도 소수의 어떤 부류만이 살아남았네.]
우주는 꼭 낮과 밤의 변화처럼 정반대적인 운동을 번갈아서 하며, 그 운동의 전환이 일어날 때는 큰 재앙을 동반하여 많은 생명체들이 희생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순환의 변화가 단지 자연의 정해진 법칙에 의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 설명된다.
[우주가 한때는 다른 신적인 원인에 의해 인도되며, 그래서 다시금 생명을 덧붙여 갖게 되고 데미우르고스한테서 불사를 회복하지만 그러다가 방치될 때에는 우주는 스스로 나아가며, 그와 같은 적기에 방치됨으로써 가장 작은 발판에 올라서서 가장 크고 가장 균형잡힌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수많은 회전들을 되돌린다는 것이네.]
그러니까 한 번은 신이 직접 개입해서 신이 불사의 생명을 부여하면서 변화를 이끌어 나가고, 한 번은 신이 우주를 방치해서 우주가 스스로 자기 변화를 만들어서 그 전과 반대적인 성격의 운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이 직접 개입하는 변화와 신에게서 방치된 변화 두 가지의 운행이 반복되는 것이다. 신이 개입하여 불사의 생명이 부여되는 시기는 크로노스의 치세라고 하며, 지금은 세계가 신에게서 방치된 시기인데 이를 제우스의 치세라고 말한다. 이것은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서 과거의 황금시대는 크로노스의 치세였다고 말한 내용과 연결된다. 『정치가』에서 크로노스 치세의 사람들은 이렇게 묘사된다.
[크로노스의 자손들이, 그들은 많은 여가와, 비단 인간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짐승들에 대해서도 말을 통해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짐승들과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교제하면서 모든 자연에서 특유의 능력을 지닌 것이 지혜를 증가시키기 위해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어떤 것을 지각했는지를 배워서 철학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사용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요즈음 사람들보다 행복에 관한 한 몇천 배 능가했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네.]
크로노스 치세의 사람들은 동물과도 소통하고 다른 많은 이들과 소통하여 다른 이들의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 지혜들을 철학을 위해 사용하여 지극한 행복의 상태에서 살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우주의 순환변화에서 ‘우주의 키잡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데미우르고스가 변혁의 신으로서 등장하는 시점은 언제인가? 그것은 우주가 신에게서 방치되어서 자기 스스로 회전운동을 해나가는 그 시기가 다 끝나가는 지점이다. 우주는 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그 무질서가 극에 달해 온갖 문제들을 일으키고 자멸의 벼랑끝으로 달려나가게 된다. 그 극한 위기의 순간에 신이 등장하여 우주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 근원으로부터의 새로운 질서를 지어낸다.
[세계가 키잡이한테서 떠나게 되면 그것은 방임의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는 언제나 모든 것을 가장 훌륭히 조종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것 안에 점점 더 망각이 생겨 옛날의 부조화의 상태가 지배하게 되고,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면 그게 만개하게 되어 선한 것들은 적지만 반대되는 것들이 많이 혼합됨으로써 그것과 그것 안에 있는 것들의 파멸의 위험에까지 이르렀네. 그리하여 그때에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신은 그게 혼란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폭풍우를 만난 상태에서 소란에 의해 해체되어 닮지 않음의 무한한 바다에 가라앉지 않을까 염려해서, 다시금 그가 키들의 자리를 차지해 병들고 해체된 것들을 자신에 의한 앞선 회전으로 돌림으로써 조종하고 또한 바로 잡음으로써 세계를 불멸하고 늙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네.]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신은 세계가 스스로 굴러가도록 방치한다. 그런데 세계는 물질의 성질로부터 오는 무질서의 영향을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강하게 받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 파멸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신은 그 순간에 세계에 직접적인 개입을 해서 빛으로 충만한 새 시대를 열어놓는다. 이러한 형태의 대순환론은 엠페도클레스의 순환론과도 유사하다. 세계는 미움이 지배하는 시기와 사랑이 지배하는 두 시기로 나뉘고 미움이 지배하여 분열이 가중되어가던 시기의 끝에 사랑의 힘이 등장하여 조화와 통일의 정신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를 연다. 이러한 구도는 「요한계시록」의 마귀의 때와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는 때와도 유사성이 있다.
플라톤의 우주관과 신관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한다면 지금은 우주가 신에게서 방치되어 있는 제우스의 치세라고 볼 수 있고, 무질서가 많이 증가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세계변혁의 신들에서 드러나는 공통점
앞에서 살펴본 세가지 신관을 보면, 세계를 혼탁한 시기와 지극히 정화된 시기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오탁악세의 때에 등장한 석가불은 교화를 펼치긴 하지만 계속 더 악해지는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미륵불은 극적인 변혁을 통해 맑고 투명해진 세계에 등장하여 전방위적인 모든 면에서 해탈한 지상의 극락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에서는 세계가 마귀가 활동하는 때와 하느님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때로 나뉜다. 예수의 구원활동도 세상이 악에 물들어 있는 현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오히려 악은 더 깊고 강렬해진다. 결국 근본적인 변화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며 일어난다. 그때 쌓여있는 모든 문제들이 청산되고 인간세상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낙원세계로 변화한다. 플라톤의 우주관은 세계가 두 시기로 나뉜다는 것을 더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드러낸다. 세계변화를 신에게서 방치되어 세계가 스스로 운동하며 무질서가 증가하는 시기와, 신이 직접 개입하여 세계에 불사의 생명을 불어넣고 평화가 깃드는 황금시대 두 시기로 구분하며, 이러한 변화는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한다. 불가에도 ‘성주괴공’이라 하여 순환적 사고가 있기는 하지만 낮과 밤처럼 규칙적인 역사변화에 대한 논의로까지 구체화되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에는 인간세상에 대한 신의 역할을 농사짓는 농부에 비유하고 추수의 때를 말하기 때문에 사계절의 자연변화법칙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일환론(한 번의 큰 순환)으로 귀결되고 계속 거듭되는 순환론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세가지 다 자연의 변화의 때가 있고, 극명하게 갈리는 두 시기가 있으며, 그 시대전환의 순간에 어떤 절대적 존재가 등장하며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새롭게 열린 광명시대의 주인이 된다. 그 광명의 새 시대는 저 허공의 상상의 나라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인간들이 살아가는 현실공간에서 실현된다.
3. 한국 근대사에 등장한 세계변혁의 신
조선말에 등장한 동학은 500년간 유교이념의 독주로 인해 심각하게 경직된 조선사회를 흔들어 깨웠다. 동학의 태동은 조선을 넘어 삼국시대 이래 2000여년 역사동안 외래사상에 잠식되어 본연의 자태를 계속 잃어왔고 결국은 그 생명력이 거의 소진된 한국의 고유정신을 다시 일깨운 기적과도 같은 파천황적인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가 우주최고신인 상제上帝(천주天主, 한울님)와 직접 문답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최고신과의 문답이 모든 동학사상과 활동의 원천이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수운과 상제의 문답사건이 중심주제가 되어 전체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동학에 등장하는 상제는 세계변혁의 신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참동학임을 표방하는 증산사상에서는 세계변혁의 신이 도달할 수 있는 절정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 동학의 핵심 가르침, 시천주侍天主
수운이 최고신인 상제上帝와 문답을 함으로써 시작된 동학의 핵심 가르침은 각각의 종파와 각 학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지배적 해석에 구애받지 않고 원전에 입각해서 그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학적 태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동학하면 인내천人乃天을 말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큰 곡해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동경대전』, 『용담유사』, 『도원기서』 어디에도 ‘인내천’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경전에 그런 용어 자체가 없다. 그러나 “동학의 핵심 가르침은 시천주侍天主다.”라고 한다면, 동학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천주天主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수운은 자신이 만난 최고신을 천주, 상제, 한울님 등 다양하게 호칭하였는데, 수운이 그 최고신을 음성으로 처음 만나는 그 순간에 최고신이 스스로를 일컬은 호칭은 상제上帝였다.
*수운이 최고신으로부터 받아내린 주문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였다. 그리고 수운은 자신이 직접 지은 『용담유사』에서 ‘한울님’이라는 호칭을 많이 쓰고 있다.
驚起探問則 曰勿懼勿恐 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놀라 일어나 물어보니,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일컬어 상제라고 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수운 최제우, 윤석산 주해, 「포덕문」, 『동경대전』, 동학사, 1996, 21쪽.)
수운이 만난 신은 수운 자신 내면의 본성의 소리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나를 상제라고 일컫는다는 것은 ‘나를 상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속에서 불러왔고 제천행사를 거듭거듭 거행해왔다’는 의미다. ‘네가 상제를 모르느냐’하는 말은 ‘나는 그 만큼 역사적인 존재이고 네가 유가와 도가의 경전들을 통해서 접했던 그 존재’라는 뜻이다. 상제의 이 첫 일성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다. 각 사람이 다 상제다. 동물도 식물도 다 상제고 한울님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일원론적 사고 일변도로 무조건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예수를 다른 인간들과 분리시켜서 그만이 신의 아들인 것으로, 더 나아가서 아버지 신 자체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원론적 사고와 대조적인 것으로, 두 가지의 치우친 사고방식 모두 문제점을 갖고 있다. 경전의 이해와 적용은 원전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제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서 통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전제와 편견, 경향성을 적용해서 내용과 의미를 왜곡해선 안된다.
수운이 상제를 우주의 조화옹 또는 통치자로 인식한 것은 바로 이어지는 다음의 말 “曰然則西道以敎人乎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들을 가르칠까요?’”에서도 나타난다. 지금 말로 쉽게 하면 ‘천주교를 세상에 전파하고 가르쳐야 합니까’와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수운은 상제를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절대자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황이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신앙대상을 상제로 번역해서 퍼뜨리고 있기도 하였다. 수운 이전에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의 영향으로 유가서적의 상제를 새롭게 인식하여 상제의 인격성과 주재성을 부각시키는 사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수운의 위 물음은 이런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운이 자신이 만난 신이 ‘서교에서 말하는 상제인가’라고 생각한 것이 그냥 그때 잠깐의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曰與洋道 無異者乎 曰洋學 如斯而有異 如呪而無實 然而 運則一也 道則同也 理則非也
묻기를 “서학과 더불어 다른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양학은 이와 같으나 다름이 있고, 비는 듯하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다.” (*수운 최제우, 윤석산 주해, 「논학문」, 『동경대전』, 동학사, 1996, 71쪽.)
수운은 동학이 서학과 운運이 하나이고 도道가 같다고 하였다. ‘운’은 ‘때’나 ‘시간대’로서 바로 ‘새 시대가 열리는 대변혁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도道는 천주를 모시는 가르침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동학이나 서학이나 그 핵심은 ‘천주를 모셔서 새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합쳐서 말할 수 있다. 수운은 본주문本呪文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에서 천주의 주主를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주主’라는 것은 존경하여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천주님을 인간들은 자기 부모와 같이 섬기고 모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운은 실제로 상제로부터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명을 받기도 한다.
上帝又曰 汝吾子爲我呼父也 先生敬敎呼父
상제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선생이 공경스럽게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라고 불렀다. (윤석산 역주, 『도원기서道源記書』,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2, 24-174쪽.)
수운이 실제 체험한 내용과 가르친 바를 보면 상제(천주, 한울님)는 결코 인간의 본성과 같은 것일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하는 이런 구절을 보고도 어떻게 인내천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해석자들이 사인여천事人如天, 양천주養天主, 향아설위向我設位 등을 주장한 최시형의 생각을 이어받아, 손병희가 주장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연결시키는 데 쓸만한 몇 개 구절을 살펴봐도, 역시 인내천이 도출될 수는 없다. 「논학문」의 “吾心卽汝心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니라.” 이것은 상제께서 수운에게 도를 전하면서 하신 말씀이고 널리 도를 펴면 수운으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겠노라고 격려한 내용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 구절로 어떻게 수운이 곧 상제가 되고 모든 인간이 상제가 되겠는가? 그리고 『용담유사』 중 「교훈가」의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너희라 무슨 팔자 불로자득不勞自得 하단 말가. 하염없는 이것들아 날로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네 몸에 모셨으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닦아서 한울님을 직접 체험해야지 수운 선생에게 의존하여서 선생만 바라보고 스스로의 수련에 게을러서는 안된다는 경계의 말이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한울님이라는 내용이 아니다. 또한 『용담유사』 「교훈가」에는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玉京臺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 한나라 무고사巫蠱事가 아동방 전해와서 집집마다 위한 것이 명색마다 귀신일세 이런 지각 구경하소.”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당시 깊은 이치가 없이 세속화 되고 타락한 무속의 일부 행태를 비판하면서 나온 말이지, 이 문구를 가지고 수운이 최고신인 상제의 존재를 부정한다고까지 해석할 수 없다. 수운은 『용담유사』 중 「안심가」에서 두 번이나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외치고 있다. 거룩한 하늘의 황금 궁궐에 임어해 계신 상제님을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내용이 거듭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속적인 것과 관련해서 비판한 한 구절만 가지고 수운이 최고신으로서의 상제의 위격을 부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수운이 말한 상제(천주, 한울님)는 천지조화를 쓰는 최고신이며 수운에게 직접 계시를 주셨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수운은 무엇보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동경대전』의 첫 머리인 「포덕문」의 첫 구절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盖自上古以來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 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상고로부터 지금까지 봄과 가을이 서로 갈아들고, 네 계절이 성과 쇠에 의하여 바뀌는 것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역시 한울님 조화의 흔적이 천하에 밝게 나타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며, 다만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수운 최제우, 윤석산 주해, 「포덕문」, 『동경대전』, 동학사, 1996, 3~6쪽.)
2) 선후천先後天개벽론과 개벽장開闢長으로서의 상제上帝
수운은 자신이 만난 신을 상제, 천주, 한울님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부름으로써 그 신이 유가와 도가, 서교, 민족 고유의 신앙 대상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는 의미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 각 종파, 지역에서 받드는 절대자가 그 문화와 사상의 차이 때문에 호칭과 속성이 다를지라도 사실은 같은 한 분을 각자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체험해온 것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높게 평가하지도, 서교가 동학과 같은 도道인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와 더불어 한울님이란 호칭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한울님의 개벽과 관련한 말씀을 수운은 이렇게 전한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의 집안 운수로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무극대도無極大道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수운 최제우, 윤석산 주해, 「용담가」)
『용담유사』 곳곳에 ‘개벽’이란 용어가 나오지만 이 세 구절이 개벽시간론을 이해하는 핵심 구절들이다. 위 세 구절을 적용하면 이렇다. 개벽이 지금으로부터 5만년 전에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개벽이 일어난다. 그 새로운 개벽으로 열린 새 세계가 5만년을 내려간다. 이것이 보통 선천개벽, 후천개벽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운이 선천先天, 후천後天이란 용어를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수운이 선천개벽 후의 세상과 후천개벽 후의 세상이 어떠한 질서로 이루어져있는지 밝히지도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증산사상에 들어가야 나오는 것이다. 다만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연천年淺해서 억조창생 많은 사람 태평곡 격양가擊壤歌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傳之無窮 아닐런가”라 하여, 개벽 후에 무극대도에 의한 태평시대가 펼쳐질 것이란 걸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개벽은 천개지벽天開地闢의 줄임말이다. 개벽은 기본적으로 하늘과 땅이 새롭게 열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동학의 개벽사상에 대한 연구가 기본적인 천지변혁에 대한 부분은 빠지고 정신이나 사회를 크게 개혁하자는 데만 쏠려있는 면이 있다. 이돈화의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이나 원불교의 물질개벽·정신개벽이 그러한 예이다.
개벽의 기본과 전체 의미를 견지하면서, 선후천개벽론의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를 만나고자 한다면 증산사상으로 들어서야만 한다. 증산 강일순은 자신의 신원을 수운에게 계시한 바로 그 상제라 하고 동학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선언이 진실이냐를 떠나서 필자는 ‘세계변혁의 신’이라는 주제와 관련한 사상적 함의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의 가르침과 행적을 집대성한 『도전道典』에는 ‘세계변혁의 신’을 세 글자로 간명하게 표현한 구절이 있다.
시속에 어린아이에게 ‘깨복쟁이’라고 희롱하나니 이는 개벽장(開闢長)이 날 것을 이름이라.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도전道典』 4편 3장 2절, 대원출판사, 2003, 433쪽.)
개벽開闢은 자연의 변혁을 말하는 것이고 장長은 그 변혁을 주관, 집행하는 권한을 가진 인격적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벽장’은 ‘세계변혁의 신’을 가리킨다. 플라톤이 말한 ‘질서를 부여하는 신(키잡이)’, 「요한계시록」의 ‘만물을 새롭게 하는 신’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증산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개벽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와 신의 활동이 조화되어 있는 표현이다. 자연의 이치를 믿을 것이냐 신의 존재를 믿을 것이냐 이렇게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는 신의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신의 활동은 자연의 이치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신이 자연의 이치를 주재主宰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이치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긍정되는 것이다.
증산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계의 변화는 순환의 길을 가는 것인데, 전반부 5만년을 선천, 후반부 시간대 5만년을 후천이라 명명한다. 선천을 지배하는 질서가 상극이고 후천을 지배하는 질서가 상생이다. 후천 상생의 질서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상생의 도가 세상에 나옴으로써 후천이 상생의 세계가 된다. 이 상생의 도道가 나오게 하는 그 정점에 상제上帝가 계신다.
[나의 도는 상생(相生)의 대도이니라. 선천에는 위무(威武)로써 승부를 삼아 부귀와 영화를 이 길에서 구하였나니, 이것이 곧 상극의 유전이라. 내가 이제 후천을 개벽하고 상생의 운을 열어 선(善)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리라. 만국이 상생하고 남녀가 상생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화합하고 분수에 따라 자기의 도리에 충실하여 모든 덕이 근원으로 돌아가리니 대인대의(大仁大義)의 세상이니라. 선천 영웅시대에는 죄로 먹고 살았으나 후천 성인시대에는 선으로 먹고살리니 죄로 먹고사는 것이 장구하랴, 선으로 먹고사는 것이 장구하랴. 이제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 먹고살 도수(度數)를 짜 놓았노라. 선천은 위엄으로 살았으나 후천세상에는 웃음으로 살게 하리라.]
선천의 운運 또는 질서가 상극相克이라는 것은 서로 이겨야 되는 구조라는 것, 경쟁의 세계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자기 자신과 싸워야 되고 자연환경과 싸워야 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되며 다른 집단과 힘의 우위를 겨뤄야 된다. 세계를 이끄는 변화의 원리가 분열이므로 역사의 진행은 개별화, 전문화, 세분화가 가속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근원에서 멀어져가는 변화이기 때문에, 순수직관이 살아있는 영적 사회에서 물질적 의식이 커가면서 영적 의식을 압도해가는 쪽으로 세상은 흘러간다. 이에 비해 후천의 운運은 상생相生이다. “선善으로 먹고 산다”는 표현처럼 상생이란 남들이 잘 되도록 살려야 내가 살 수 있는 문화를 의미한다. 남이 잘 되도록 하는 만큼 내가 잘 되는 사회, 그 사회는 경쟁이 있다면 남이 잘 되도록 돕는 경쟁이 있을 것이다. 남이 잘 되게 하는 만큼 내가 높은 지위를 얻고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며,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의 덕德을 키우기 위한 공부에 항상 전념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지위와 역할에 대한 불만도 딱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증산은 “천지대운이 이제서야 큰 가을의 때를 맞이하였느니라.”라고 하여, 역사의 발전에 사계절의 원리를 적용하기도 한다. ‘큰 가을’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 크게 네 마디로 나뉠 수 있고 각 마디에 사계절의 개념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지의 만물 농사가 가을 운수를” 맞이 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만물 농사’에서 나타나듯이 ‘농사’의 개념 또한 여기에 적용이 된다. 이것은 어떤 목적성을 가진 순환의 변화인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큰 봄과 여름이 선천의 시기이고, 큰 가을, 겨울이 후천의 때라고 할 수 있다. 해방후 1946년에 우주일년 도표가 처음 그려지고 1981년 『증산도의 진리』 출간 이후 체계화되어온 증산도 사상에서는 우주의 일년은 129600년이요, 봄, 여름 선천이 5만년, 가을이 5만년, 겨울이 약 3만년으로 겨울은 과학에서 말하는 빙하기에 해당한다고 정립하였으며, 많은 과학적인 자료들로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 상극相克과 상생相生이란 두 용어야말로 시대변화를 읽어주는 핵심열쇠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무엇이 세상을 상극의 투쟁장으로, 상생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물론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일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심법과 사상에 입각해서 상극으로 살거나 상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여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세상이 상극으로 돌아가거나, 상생으로 돌아가는 근본원인은 자연에 있다. 자연이 운행하는 틀, 체계가 상극을 조장하기도 하고 상생의 터전을 열어주기도 한다.
선천에는 천지도수와 음양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라... 후천에는 항상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니 편음편양(偏陰偏陽)이 없느니라...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이르나니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세상이 어찌 알리오.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도전道典』)
자연을 단순히 3차원에 국한한 물질성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인 기氣의 측면에서 보면, 선천의 천체 운행은 분열의 기운에 따른 것이고 분열의 기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자라는 인간과 만물은 본질적으로 상극적인(치우치고 부족한) 체질로 태어나고 상극적인(편협하고 투쟁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상극의 환경속에 살면서 고통을 숙명으로 알게 되었고 비극에서 인생의 참모습을 깨우쳐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항상 상생을 염원했고 상생에 근접한 인간을 추앙하였다. 이러한 선천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원한寃恨의 살기殺氣를 축적할 수 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패배자들과 억울하게 고통받고 죽은 원혼들, 좌절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 수많은 인간과 신명들의 분노와 슬픔, 고통의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고 천지자연의 허공에 기운으로 박혀서 쌓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생의 새로운 자연환경과 사회질서가 열리는 것은 그냥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고 천체운동의 틀이 바뀌는 큰 파국의 과정을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運)이라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하늘과 땅에 전란(戰亂)이 그칠 새 없었나니 그리하여 천하를 원한으로 가득 채우므로 이제 이 상극의 운을 끝맺으려 하매 큰 화액(禍厄)이 함께 일어나서 인간 세상이 멸망당하게 되었느니라. 상극의 원한이 폭발하면 우주가 무너져 내리느니라. 이에 천지신명이 이를 근심하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고자 하였으되 아무 방책이 없으므로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호소하여 오매 내가 이를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내가 큰 화를 작은 화로써 막아 다스리고 조화선경(造化仙境)을 열려 하노라.]
지금까지의 선천세상의 질서 또는 원리는 상극이고 상극속에서 살아온 인간들은 원한의 살기를 축적한다. 이 원한의 살기는 누군가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어느 한 사람이 희생을 하였다고, 어떤 절대자가 일방적으로 명령한다고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밀양’이란 영화는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내 보여주었다. 원한은 그 종류가 다양할 것이며, 그 각각 해소되는 방식이 다를 것이고, 해소의 과정에서 또다른 고통이 수반될 수도 있고,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원한의 고를 풀어내는 것이 즐거움이나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재앙(禍)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해지고 있다. 우주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큰 화를 작은 화로써 막아다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증산사상의 가장 독특하고 특출난 내용인 천지공사天地公事다.
3) 천지공사天地公事는 세계변혁 신론의 결정판
『도전道典』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이제 온 천하가 큰 병(大病)이 들었나니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경(仙境)을 건설하려 하노라... 현하의 천지대세가 선천은 운(運)을 다하고 후천의 운이 닥쳐오므로 내가 새 하늘을 개벽하고 인물을 개조하여 선경세계를 이루리니 이 때는 모름지기 새판이 열리는 시대니라. 이제 천지의 가을운수를 맞아 생명의 문을 다시 짓고 천지의 기틀을 근원으로 되돌려 만방(萬方)에 새기운을 돌리리니 이것이 바로 천지공사니라...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놓았으니 제 한도(限度)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천지공사天地公事란 하늘과 땅의 공적인 일, 즉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서 새 세계를 열어놓는 천지개조사업이다. “이제 인존시대를 당하여 사람이 천지대세를 바로잡느니라.”라는 구절이 의미하듯이 이제는 인간이 하늘과 땅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이고, 인간이 하늘과 땅을 바로잡는 일이 천지공사다. 물론 증산은 상제의 위격에 있음으로 이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상제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나타나셨으며 인간의 몸으로 천지를 바로잡음으로써 인간이 이 천지공사에 참여하는 것에 의해 천지를 바로잡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늘과 땅을 어떻게 뜯어고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의해 어떻게 상생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삼계대권’ 즉 하늘과 땅과 인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큰 권능을 주재하여 조화력을 발휘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조화력의 핵심은 만물의 밑바탕 자리인 신도神道를 움직이는 것이다.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신도(神道)로써 다스리면 현묘불측(玄妙不測)한 공을 거두나니 이것이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라는 구절은 신도를 움직임으로써 그 조화의 힘으로 현실세계를 뜻대로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무위이화라는 것은 눈에 보이게 현실적으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감을 뜻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은 무형의 마음을 움직이면 유형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무형의 신도를 다스릴 수 있으면 물질로 드러난 현실세계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데, 이것은 이 세계를 삼중구조로 보는 시야를 가짐으로써 그 이해의 문을 열 수 있다. 『도전道典』 8편 25장에는 “색色·기氣·영靈을 모르면 선배가 아니니라.”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세계는 크게 물질계(色), 기운계(氣), 신명계(靈) 세 개의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순환의 원리는 그 핵심이 기氣의 변화원리로 설명되고, 현실을 주재하고 움직이는 근본자리는 신神의 활동으로 설명이 된다. 과학은 물질의 변화법칙을 다루는 것이다. 이 각각의 세계는 철학과 종교와 과학에서 각기 탐구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완전히 별개가 아니다. 이것들이 종합적으로 설명되어야 현실계의 구조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위와 같은 배경 위에서 그렇다면 어떠한 원리와 내용으로 상극의 역사를 청산하고 상생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놓을 것인가?
[대개 예로부터 각 지방에 나뉘어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의 분란쟁투는 각 지방신(地方神)과 지운(地運)이 서로 통일되지 못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이제 각 지방신과 지운을 통일케 함이 인류 화평의 원동력이 되느니라. 또 모든 족속들이 각각 색다른 생활 경험으로 유전된 특수한 사상으로 각기 문화를 지어내어 그 마주치는 기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큰 시비를 이루나니 그러므로 각 족속의 모든 문화의 진액을 뽑아 모아 후천문명의 기초를 정하느니라.]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들로 얼룩져 있는 데, 그것은 민족신(지방신)들끼리의 대결과 땅기운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와 각 민족들이 만들어낸 문화들끼리의 충돌 세 가지로 그 요인을 크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생의 새로운 질서는 이 세 가지를 상극적인 데서 상생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열릴 수 있다. 천상 신도에 쌓인 문제를 해결하고 신도를 통합적으로 새로이 구성하기 위해 ‘조화정부造化政府’라는 것이 결성되고, 상극적인 땅기운을 바로잡아 조화롭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지운과 관련한 공사들이 집행되었으며, 동서인류의 다양한 문화의 진액을 뽑아모아서 미래적인 새 문화의 길을 닦아나갈 수 있는 인재들이 출현하도록 역사의 도수를 구축한 내용이 『도전道典』에 담겨 있다.
4) 무극대도無極大道는 융합과 통섭의 문화
수운은 자신의 도가 무극대도無極大道인 것으로, 또 앞으로 무극대도가 출현할 것으로도 말하였다.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이 두 가지 구절이 두 가지 다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수운은 또한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運이 역시 다했던가”, “이 도道는 유불선儒佛仙 세 도를 겸하여 나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동안 있어왔던 부분적이고 치우친 가르침들은 그 생명력이 다 하였고, 융합적이고 입체적인 무극대도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역설하고 있다. 『도전道典』은 이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모든 술수(術數)는 내가 쓰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니라... 선도와 불도와 유도와 서도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근원이 되었나니...모든 도통신(道統神)과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려 각 족속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의 정수(精髓)를 뽑아모아 통일케 하느니라. 이제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의 삼도(三道)를 통일하느니라.]
여기서 지향되고 있는 무극대도는 최고의 다양성과 완전한 통일성 두 가지가 다 긍정되는 것이다. “모든 술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놓은 것”이라는 구절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모든 문화의 내용들이 다 의미가 있는 것으로 긍정되고 있다. 그리고 합하여 쓴다는 것과 통일한다는 데서 그 모든 것들이 모순없이 그 핵심적인 것을 살리면서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통일은 동양의 학문이나 가르침만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과 종교도 전체적으로 아울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문화의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류의 근원문화, 시원문화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 “천지의 기틀을 근원으로 되돌려 만방(萬方)에 새기운을” 돌린다는 말처럼 근원을 드러내야 또는 근원의식이 열려야 조화로운 통합의 새 정신이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은 “원시반본原始返本” 이라는 증산사상의 핵심이념이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문구의 뜻은 시원, 첫 시작처를 밝혀야 근본으로 돌이킬 수 있다, 근본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뿌리를 드러낼 때 혁신적인 새 미래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 한국문화의 뿌리 그리고 인류문화의 뿌리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풍류風流라는 두 글자에 있다.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 지혜로 집을 찾아드소서... 너는 선불유(仙佛儒)의 근본을 찾아 잘 수행하여 무극대도의 앞길을 천명(闡明)하라... 風流酒洗百年塵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노라.]
한국 역사의 뿌리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환국桓国(환인 통치), 신시神市(환웅 통치), 조선(단군 통치)시대로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의 지혜란 삼성조 시대에 꽃 피웠던 원형문화의 지혜를 뜻한다. 이 문화는 이후 삼국으로의 분화과정을 거치면서 신라에서 풍월도, 화랑이란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이를 ‘풍류風流’라고 칭하였다. 풍류는 유불선 삼교의 가르침을 이미 다 내장하고 있는 근원적인 문화로 최치원에 의해 묘사된다. 『도전』의 구절들은 유불선의 근원인 풍류정신을 드러내면 무극대도의 길이 열리며 세상의 어둠과 오염된 정신을 씻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4. 동학의 신관과 기존 동서 신관의 비교
서양문화의 두 기둥이라고 일컬어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두 문화에 모두 세계변혁의 신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것들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지만 그 차이점과 함께 상당한 유사성도 갖고 있다.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두가지의 시간대로 나눈다는 것,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전에 큰 재앙을 동반하는 변혁이 있다는 것, 그 변혁과 새로운 시대의 개창의 중심에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다는 것, 낙원의 시대가 지구상에 구현이 된다는 것 등이다. 불가의 미륵불과 기독교의 백보좌의 신은 낙원시대에 인간세상에 머물며 사람들을 직접 돌본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수운과 증산을 연결시킨 동학사상은 기존 동서의 세계변혁의 신 논의의 공통점을 그대로 갖고 있다. 두 시간대에 대한 논의는 플라톤의 사상과 비교해볼 만하다. 플라톤의 신이 세계를 주관하되 방치하는 시간대와 신이 세계에 직접 개입해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서 직접 끌고 가는 시간대의 차이는 동학사상의 선후천변화와 천지공사의 집행과 매우 유사하다.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의 미움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정신을 각각의 시간대의 변화의 정신으로 적용한다면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상극과 상생이란 역사정신은 미움과 사랑 이 두 가지와 매우 흡사한 원리다. 여기에 칸트는 ‘자연의 의도’로, 헤겔은 ‘이성의 간계’로 설명하는, 역사가 투쟁의 원리에 의해 진보해왔다는 독일관념론의 역사철학을 가지고 온다면 이것은 상극의 역사정신의 일면을 드러내주는 훌륭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역사발전의 또다른 측면을 밝혀준다. 그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진보가 아닌 근원으로부터 멀어져온 퇴락의 역사로 드러내주고 있다. 서양사를 중심으로 볼 때, 이제까지 인류는 존재를 망각해온 역사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 현대인들은 신이 죽은 깜깜한 어둠의 상황에 처해서 새로운 신을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신의 농사라는 생각은 『도전』에서도 그대로 보이고 있으며, 백보좌 신의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선언은 천지공사의 선언인 ‘하늘과 땅을 뜯어고친다’는 구절과 상통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의 공통점과 연결점이 있지만, 분명한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기존의 것들은 신화 또는 전설의 양식이거나, 하나의 이론 제시이거나, 예언 또는 계시의 기록이지만, 동학의 사상은 현실적으로 당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며 그러한 일을 실제로 집행한다는 것이다. 이론이나 예고보다는 현실적인 것이 더 무게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론과 예언은 존중을 받지만 현실적인 것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외면당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몰리게 된다. 그것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그 속에 담긴 사상적 함의를 냉철하게 읽어내지 못한다. 실은 읽어내려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5.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서사상계의 두 얼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은 동서양을 통틀어 사상적으로나 실제 역사적으로나 큰 변혁의 시기였다. 서양은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하여 종교와 철학의 영향력과 지위를 압도하고 있었고, 동양은 서구문물의 물결을 접하고 그 위력과 생소함 앞에 당황과 혼란의 격랑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서양문화가 동양문화를 물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집어삼키는 형국이었는데, 사상계의 핵심부에 들어가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사상계에서는 그동안 본질세계, 절대계로 여겨왔던 것들 진리, 영혼, 신 등이 그 가치를 상실하고 땅밑으로 파묻히거나, 허공의 뜬구름처럼 흩어져서 사라져가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반해 동양에서는 최고신의 직접 계시사건을 통해 동학이 일어나 유불선과 서학까지 아우르는 무극대도와 상생의 새 세계로의 개벽이 선포되고 있었다. 이 모습은 가장 더워지기 시작할 때 음기운이 태동(하지)하고 추워지기 시작할 때 양기운이 태동(동지)되는 음양의 상대성원리를 보는 듯 하다.
1) 서양에서의 신의 죽음과 마지막 신
니체는 『즐거운 학문』의 「광인」편에서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에게 사명을 부여해서 그 삶을 인도한 신,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로 말했던 신, 예수를 내려보내고 예수를 통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 데카르트에게 학문을 위한 보증을 서준 신, 서양 2500여년의 사상사에 나타난 모든 신들은 효력을 잃었으며 수명이 다하였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것은 니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유럽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서구 형이상학에 의해 억압되어온 생生의 온전한 가치를 일깨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육체’와 ‘대지’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강조하였다. 절대적 또는 최상의 가치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으며 육체에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반드시 대지는 구원의 전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 초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한다.” 그는 이러한 절규를 하면서도 뚜렷한 답을 구해내지는 못하였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니체를 서양사상사에서 최후의 형이상학자로 평한다. 그가 보기에 니체의 사상은 서양사에서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이데거는 서양정신이 어둠속에 빠져드는 상황을 목도하고 역사의 대전환이 일어날 다른 시원처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신에 대해 언급하였다.
[마지막 신은 종말이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 신은 우리 역사의 저 수용적으로 측정되기 어려운 가능성들의 다른 시원이다. 이 다른 시원을 위해 이제까지의 역사는 종결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그것의 종말에로 가져와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의 본질적인 근본태도들의 거룩한 현현을 [다른 시원을 위한] 이행移行에로 또한 [다른 시원을 위한] 준비갖춤에로 운반해 가야 한다... 마지막 신은 가장 오랜 역사를 위한 최단 궤도에서 그 가장 오랜 역사의 시원이다... 오히려 마지막 신은 ‘시원이 자신에게로 내적으로 공진함’이고, 또한 이로써 완강한 거부의 최고의 형태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마지막 신은 새로운 시작점으로 제시되지만, 그 새로운 시작점은 기존 역사의 종말이나 그 역사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역사들의 내용들과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변형시키는 데서 형성되는 것이며, 가장 오래된 시원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하이데거의 마지막 신과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세계변혁의 신’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갖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 이후로 인간이 존재망각이 심화되는 길을 걸어왔다는 그의 논의를 생각하면, “가장 오랜 역사의 시원”이란 경이로운 감정 속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신과 만났던 태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헤시오도스가 『일과 날』에서 청동의 시대와 철의 시대 이전에 은의 시대 그 이전 황금의 시대 사람들은 광명으로 충만한 신적인 삶을 살았다고 진술한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마지막 신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는 서구사회와 사상계에서 여전히 어떤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2) 개천開天의 신과 개벽開闢의 신
동학의 신은 개벽의 신이다. 세상을 개벽시키는 신이다. 증산사상에 따르면 상극의 세상을 상생의 세상으로 뒤엎어놓은 신이다. 지금은 상극에서 상생으로 변형되어가고 있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시기, 즉 ‘난법해원시대’다.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의 살기를 풀어내면서 동시에 상극으로 돌아가던 세상을 상생으로 돌아가는 세상으로 구조개혁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구조개혁은 신의 세계와 자연속의 기운체계까지 변혁해서 인간계를 대혁신하는 근본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사의 문을 열어놓은 ‘세계변혁의 신’의 천지개조의 사업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 역사의 시원처를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통해 압축적으로 만난다. 그 내용의 핵심은 ‘개천開天의 신’이다. 환웅은 하늘의 뜻을 편다는 징표(천부인)를 갖고 태백산(백두산)에 등장하여 神市(신의 도시)를 건설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으로 정치와 교화의 덕을 베풀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보면 “천계에서 내려와 광명 세상을 열고자 하셨다. 期欲天降 開一光明世界于地上”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에 따르면 환웅은 세상을 완전히 탈바꿈시켜서 지상에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에 따라 열렬한 활동을 하셨다. 이러한 시원사에서 비롯한 시원문화에 대해서는 ‘풍류’라는 이름으로 최치원의 낙랑비서에 간략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동학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인 개벽과 무극대도의 가르침이지만, 그 바탕에는 시원문화의 부활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시원사에는 개천의 신이 있고 근현대사의 근원에는 개벽의 신이 있다. 그러나 역사망각증에 의해 시원사와 시원문화는 은폐되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서 형성된 자학적 사고방식 때문에 동학의 개벽과 상생문화는 무관심과 생소함의 감정 속에서 미개봉 상태로 놓여져 있다. 하이데거는 “하나의 민족은 자기 민족의 신을 발견하는 가운데 자기 민족의 역사를 할당된 그대로 정성껏 간수할 때만 비로소 민족이다...민족의 본질은 신에게로의 귀속성에 입각해 자신에게 속하는 자들의 역사성에 근거한다.”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소속된 민족공동체 또는 국가공동체의 본질을 체험하고 있는가?
3) 한류韓流와 무극대도
대한민국은 동학이 일어난 이후 많은 고난들을 압축적으로 겪어왔고, 지금은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올라서 있다. 대한민국은 단지 독립적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경제를 운영하며 국방력을 다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갖가지 생산품이 세계사람들의 삶의 편의와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은 세계사람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고, 흠모의 대상이 되고, 본받고 싶어하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 때 동학도였던 백범 김구가 「나의 소원」에서 말했던, 온인류가 한 가족처럼 행복하게 살게 하는 성숙한 정신문화를 창조하여 세계에 보급하는 것은 아직까지 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여전히 자기정체성 조차 바로 세우지 못하였다. 그런데 누구를 일깨울 수 있겠는가?
필자는 개벽과 상생의 문화, 무극대도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념과 가치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AI 등 과학문물을 성숙하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자연관과 인간관을 필요로 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무극대도’는 한국인들에게는 우리가 걸어가야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화두가 되어야 한다. 포용과 융합, 무궁한 창조성, 다양성과 근원성 등 지금 세계사회에 절실히 있어야 하는 많은 요소들이 ‘무극대도’ 네 글자에 들어있다. 무극대도에 집중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학문과 도덕성과 창조적인 역량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지적 바탕이 빈약하고 체험의 깊이도 얕은 데 게으르기까지 한 상태에서 적은 분량으로 너무 크고 방대하고 심각한 내용을 다룬 감이 있다. 동서양 세계변혁의 신 세 가지 유형과 우리 근대사의 세계변혁의 신은 더욱 구체적으로 면밀하게 연결시켜서 설명할 수 있으나 많이 생략하여 독자들이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백으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우리 근대사의 ‘세계변혁의 신’의 실감나는 모습은 『도전』을 통하여 직접 확인하는 수 밖에 없다. 논문으로 표현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필자는 인간의 문화사라는 것이 결국 밑바탕은 이야기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 한 민족, 한 대륙을 장악한 이야기는 그 사로잡힌 이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지배한다. 서양은 무미건조한 과학의 이야기가 통치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세계전체를 지배권에 넣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근대사의 ‘세계변혁의 신’은 서양문물이 오직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궤도를 이탈하게 만들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개발해온 모든 다양한 문화의 정수를 살려서 조화시키고 통합할 수 있는 무극대도 이야기를 이미 갖고 있다. 이 이야기를 흡수해서 개벽과 상생을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사회 곳곳에서 상생이란 말을 쓴다. 그리고 상생을 염원한다. 그러나 그 상생이 어디서 온 말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정확한 의미도 알지 못한다. 상생은 바로 한국 근대사의 문을 연 세계변혁의 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변혁의 신’의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야기부터 먼저 바르게 알고 방황하는 세상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자가 되어 보는 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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