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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수행법/마음공부

배경자아, 경험자아, 기억자아

by 광명인 2024. 6. 19.

[김주환 교수는 그의 저서 '내면소통'에서 인간의 자아를 배경자아, 기억자아, 경험자아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삼신오제본기에서 설명되는 영혼, 각혼, 생혼의 삼혼의 개념과 매우 흡사하다. 배경자아는 모든 것을 아는 신령한 영식을 바탕으로 한 영혼과 같으며, 기억자아는 과거로 부터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각혼과 흡사하다. 그리고 경험자아는 현재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생혼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본다. 그러나 결국 이 3가지 자아 또는 삼혼三魂은 모두 하나의 근원인 우주의 원신元神, 즉 빛으로 충만한 우주의 자연신인 망량, 다른 말로 삼신三神에서 출현한 것이다. 한민족의 삼신사상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더럽게 왜곡되어 잘못 세뇌된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비스럽고 저열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삼신사상천부경의 삼수논리를 바탕으로 한 인류 영성문화의 최상위의 메타언어인 것이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오직 하늘의 한 분 주재신[天一神=三神上帝]이 깊고 깊은 하늘에 계시어 하늘 · 땅 · 인간의 웅대함[三大]과 원만함[三圓]과 하나됨[三一]을 삼신의 신명한 근본 법도[靈符]로 삼으시고, 이를 영원무궁토록 세계의 모든 백성에게 크게 내리시니, 만유는 오직 삼신三神께서 지으신 것이다.

'마음과 기운과 몸[심기신 心·氣·神]'은 반드시 서로 의지해 있으나 영원토록 서로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영식과 지식과 의식[영지의 靈·智·意]의 세 가지 앎의 작용[삼식三識]은 영혼과 각혼과 생혼의 삼혼三魂을 생성하지만, 이 또한 삼식三識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뻗어 나간다.

생명의 집인 육신과 목숨과 혼이 주위 환경과 부딪히면 사물과 접촉하는 경계를 따라 ‘느낌과 호흡과 촉감[感·息·觸]'작용이 일어나고, 삼진三眞[性·命·精] 삼망三妄[心 ·氣·身]이 서로 이끌어 삼도三途[感·息·觸]작용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삼진三眞의 작용으로 영원한 생명이 열리고, 삼망三妄으로 소멸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과 만물의 생명은 모두 진리의 한 본원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삼신오제본기 전문보기]

[명상은 마음근력 훈련이다.]

마음근력을 강화하는 것은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동일자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는데 어떻게 '나'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면 소통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안에 '자아'가 여러 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과학과 심리학은 이미 다양한 자아에 대해 개념화하고 이론화했다. 여러 자아에 대한 분류법은 몇 가지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법은 '지금 여기서 특정한 경험을 하는 경험자아'와 '경험한 것을 일화기억으로 축적하는 기억자아'로 구분하는 것이다. 기억자아는 개별자아 혹은 에고(ego)라고도 불리며 일상적인 자아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험자아나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지금 음악을 듣고 있다. 이때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참 좋다고 느끼는 것은 경험자아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예전에 누구와 어디에서 이 음악을 들었었지'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기억이다. 이러한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배경자아다. 다양한 형태의 내면소통 중에서도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배경자아의 알아차림이다.

배경자아의 존재는 조용히 늘 우리의 의식 저편에 있기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 존재를 잊고 지낸다. 그저 경험자아기억자아가 나의 본 모습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이기에 묘사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늘 느낄 수 있다. 창문을 닫으면 방 안은 어두워지고, 창문을 열면 환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창문이 빛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단지 햇빛을 통과시켜줄 뿐이다. 경험자아는 마치 창문과도 같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햇빛을 통과시켜 주는 존재다. 그 창문 위에 덧입혀진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커튼기억자아에 비유할 수 있다. 커튼은 제한된 개성과 정체성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창문이나 커튼은 빛의 원천인 태양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배경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경험자아를 통해 드러나고 기억자아에 의해 제한되거나 가려지지만, 배경자아는 늘 그대로 있다. 배경자아를 '나'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다양한 명상 수행이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주체이며 경험자아기억자아를 늘 알아차리는 존재다. 배경자아는 그저 텅 비어 있고 고요하다. 그래서 평온하고 온전하다.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은 모두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일종의 소음이다. 감정도 생각도 경험도 넘어선 곳에, 모든 소음이 사라진 그곳에 고요함은 떠오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없었던 고요함이 새로 떠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고요함은 원래 거기 그렇게 변함없이 있었고, 다만 소음이 고요함을 잠시 가렸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내면소통 명상은 "나는 왜 지금 이 무거운 돌을 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악착같이 이 돌을 들고 있어야겠다는 집착은 어디서 왔는가? 이 돌을 내려놓는 것이 마치 삶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당연히' 이 돌을 꼭 들어야만 한다는 당연함은 어디서 왔는가? 사회적 통념? 주변의 시선 확실한 것은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배경자아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반드시 이 돌을 들어야만 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기억자아이고. "돌이 너무 무거워서 고통스럽다라고 느끼는 것은 경험자아다. 배경자아는 이러한 집착과 고통을 조용히 알아차릴 뿐이다. 무거운 돌을 들고 있겠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돌을 내려놓는 힘이 곧 마음근력이다. 명상은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이다. 
 

[자아의 세 가지 범주]

내면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체적이고도 물질과도 같은 존재가 기억자아이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순수의식이 배경자아이며, 그 둘을 연결해 주는 것이 경험자아라 할 수 있다. 봄과 퍼스의 삼자관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아(self)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억자아(remebering self)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라고 칭하는 것이다. 기억자아의 다른 이름이 바로 에고(ego)인데 이는 다른 사람과의 구분과 비교를 통해서만 존재 하는 '나'다. 특정한 성향과 성격을 가진 존재이며, 특정한 이력과 개인사를 지닌 존재다. 그래서 개별자아(separate self)라고도 불린다. 다른 사람과의 구별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기억자아가 지닌 것이 바로 자의식이며, 끊임없이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해 '반응'하고 '저항'한다. 저항함으로써 구분 짓고 반응한다. 끊임없이 타 인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낌으로써 존재 의의를 찾고자 한다. 생각이나 감정의 에너지가 뭉쳐지고 들떠서 기억의 덩어리로 집적된 존재다. 늘 과거에 얽매이고 과거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불안해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을 해나가기 위해서 발달된 몸의 움직임들을 조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도들이 강화된 결과가 곧 기억자아다.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
현재 벌어지는 일을 경험할 때 작동하는 자이다. 카너먼이 직장내시경 실험 등 여러 연구를 통해서 그 존재를 밝혀낸 '경험하는 자아'는 현재의 고통이나 즐거움을 경험하는 경험자아다. 경험자아는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몸의 통증을 느끼거나 혹은 편안함을 느낄 때, 또 는 즐거운 일로 행복감을 느낄 때 경험자아는 전면에 드러난다. 행복감은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이야기하는 '몰입(flow)'의 경험이 대표적인 사례다. 격렬한 운동, 공연예술, 엄청난 자연, 깊은 대화, 진정한 사랑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말하는 절정경험(peak experience)의 주체가 바로 경험자아다

배경자아(background self)
기억자아나 경험자아를 알아차리는 존재다. 배경자아는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과 같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다. 순수한 의식으로 배경자아는 알아차림의 주체일 뿐 대상이 아니다. 모든 사물 뒤에 그것이 점유하는 텅 빈 공간이 있고, 모든 소리 뒤에 그것이 점유하는 고요한 침묵이 있는 것처럼 모든 기억자아나 경험자아 뒤에는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 기억자아는 내가 가진 어떠한 것들의 총합에 불과할 뿐 나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존재가 배경이다. 경험자아가 어떤 것을 경험하는 순간에 '아, 내가 지금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구나'를 알아차리는 존재가 배경자아다. 기억자아가 실체로서의 자아라면 배경자아는 순수한 에너지로서의 자아다.

순수에너지의 형태로 우리의 내면을 가득 채우는 투명한 존재가 바로 순수의식이며 배경자아라 할 수 있다. 에너지 일부가 좌충우돌하여 뭉치고 들뜨는 것이 입자가 되는 것처럼, 의식의 일부가 뭉치고 들뜸으로써 마치 입자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곧 생각과 감정이고, 이러한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 경험자아를 이룬다. 이러한 생각들이 스토리텔링이 되어 일화기억으로 쌓이는 것이 '자의식'이고 그것의 집적물이 '기억자아(ego)'다.

에너지와 물질을 연결해주는 것이 의미인 것처럼. 배경자아와 기억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경험자아다. 물질 에너지에서 나오는 것이고 에너지의 특별한 한 형태인 것처럼 기억자아 역시 배경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고 배경자아의 특별한 한 형태다. 물질-의미-에너지라는 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고, 대상-기호-해석체라는 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다양한 기호현상이듯이, 기억자아-경험자아-배경자아라는 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내면소통 현상이다.

내면소통 훈련의 목표는 기억자아를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 세 가지 범주로서의 자아는 하나의 너지의 세 가지 측면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문제는 기억자아만 존재한다고 확신하거나 기억자아가 곧 나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기억자아(ego)가 곧 나라고 믿을 때 온갖 고통과 번뇌와 괴로움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자아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기억자아는 우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진화한 결과로 탄생한 매우 유용한 기제다. 다만 기억자아는 배경자아의 특수한 한 형태이고 에너지가 뭉치고 들뜬 일시적인 상태이며, 끊임없이 변해가는 나라는 존재의 한 측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적 의미의 나는 순수의식으로서의 배경
자아다. 기억자아배경자아를 연결해주는 것이 경험자아다. 배경자아경험자아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알아차림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경험자아를 통해서 우리는 배경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내면소통 훈련의 목표는 기억자아, 경험자아, 배경자아가 모두 하나의 에너지 흐름의 세 가지 측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자아의 세 측면이 조화롭게 어 우러지도록 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삼자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질: 의미: 에너지(matter: meaning: energy)
= 지시체: 해석체 : 기호체(referent interpretant: representamen)
= 일차성: 이차성 : 삼차성(firstness: secondness: thirdness)
= 개별자아: 경험자아: 배경자아(separate self: experiencing self: background self)

[출처: 김주환의 내면소통 페이지 16~18, 319~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