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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을지문덕 살수대첩

by 광명인 2024. 3. 29.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너무도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일어났던 살수(薩水)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고구려가 망해서 역사서가 불태워지고, 이후 유교의 영향으로 민족의 역사관이 한반도로 축소되면서 그 기억이 점차 상실되고 왜곡되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김부식은 살수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살수를 청천강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후 이병도는 살수 충북 괴산설과 평안도 청천강설을 주장했고, 정구복은 살수를 박대천(충북 괴산)으로 비정했다. 이들은 모두 살수가 한반도 내의 강이라는 '살수 한반도설'을 따르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1차 사료인 삼국사기중국의 사서들을 고찰해보면 복기대의 '살수 혼하설'이 훨씬 더 설득력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원문엔 "(우문술 등은)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에서 30리(里) 떨어진 곳에다 산을 의지하고 진(陣)을 쳤다."라는 기록과 "살수(薩水)에 이르러 신세웅(辛世雄)을 죽이니, 이에 여러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 없었다. 군의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하여 돌아가는데, 하루 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鴨淥水)에 이르렀으니, 행군한 거리가 450리였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압록수살수의 거리가 450리(180Km)이고 압록수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야 평양성이 있으며, 살수평양성의 거리는 최소30리(12Km) 정도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재 청천강살수로 본다면, 압록강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고, 구글 지도상 압록강에서 청천강까지는 약 340(135Km)정도인데 중간이 산악지역이라 군대가 하루 밤낮으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반도로 축소되기 시작한 시점은 유교가 득세하면서, 정당성이 약했던 이씨조선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었고, 그 뿌리가 완전히 잘려나간 것은 일제 강점기때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완결되었다고 본다. 역사는 일종의 해석학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의 사명은 1차 사료를 참조해 올바른 해석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살수대첩을 떠올리면 을지문덕 장군이 수공을 써서 적들을 섬멸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원문을 보면, 사실 도망가는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고구려 군이 주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인 듯하다. 한민족의 뿌리역사가 많이 망실되었지만, 지금은 민족혼들이 점차 깨어나고 있으니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한민족에게 다가올 미래는 매우 밝다고 본다.

출처: 우리 역사넷

[1. 살수 한반도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살수를 안주(지금의 청천강)으로 보았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라고 하였다. 이만응은 '홍재전서 경사강의'에서 정조에게 청천강의 다른 이름이 살수라고 했다. 살수에 대한 후대 기록으로 『세종실록』에도 나오는데 "평양의 패강과 안주의 살수가 뱃길로 서로 통한다고 하고, 수나라 병사 백만 대군이 고기가 된 곳이 즉 안주이고 이곳을 살수"라 말한다고 했다. 

이병도는 살수를 신라 상주 삼년산군에 있는 살매현(縣)이나 충북 괴산 청천면, 청원 미원 일대로 비정했다. 그런 주장을 하다가 살수의 '살'이 청백(淸白)을 뜻하는 '햘(Hsial)'을 표기한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면서 오늘날의 청천강으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를 흐르는 강으로도 비정을 했 다. 이와 같이 이병도는 '충북 괴산설'과 '평안도 청천강설'이라는 두 가지 주장을 했다.

정구복은 살수를 청천천(靑川川: 박대천)으로 보았다. 정구복은 청청천이 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지나고 충주로 들어가는 달천의 상류인데, 옛 지명이 살매현(薩買縣)이라고 했다. 이곳은 신라 경덕왕부터 고려 시대에도 청천현(靑川縣)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사카이카이조(酒井改藏)는 살수를 옛 지명인 살매(薩)와 같은 의미로 보았고, 살수와 살매, 청천이 모두 같은 의미라고 했다.

남의현 교수의 지도

[2. 살수 혼하설]

이에 반해 요양의 수계(水系)에 해당하는 혼하가 살수라는 '살수 혼하설'이 있다. 이 학설은 삼국사기 중국 사서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서 살수를 반 정도 건너는 수나라 군사의 뒤를 공격해서 신세웅辛世雄을 죽이고 괴멸시켰다고 했다. 그때 수나라 군사가 하루 밤낮 도망쳐서 450리를 지나 압록수에 도달했다고 했다. 위 사료로 볼 때 살수와 압록수(鴨綠水) 거리는 450리(약 180Km)라는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동일한 내용으로 『북사北忠」에서도 구군(九軍)이 패퇴하면서 하루 밤낮으로 도망가는데 450리를 지나서 압록수에 도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九軍敗續,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裏, 『북사北史』, 「卷77」「列傳 第65」)

그리고 『수서隋書』, 『북사』에서도 살수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 보인다. 그것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으로부터 30리(12Km) 떨어진 곳에 산을 기대고 진을 쳤다"는 내용이다.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수서書』『列傳第26」)

『대명일통지』에서는 살수의 서쪽은 압록수이고 동쪽은 평양성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그곳에서 신세웅이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명일통지 권29 <요동도지휘사사> '산천'조)

『전요지』, 『요동지」의 두 문헌은 명나라의 관찬 지리서이자 병서인데 여기에서 살수를 '요양(遼陽)의 산천'으로 분류하고 있다. 명나라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서인 『대명일통지』 권25 요동도지휘사사 "산천"조에 살수는 요동도사(遼東都司) 관할지역의 산천으로 소개하고 요양 인근의 하천으로 설명한다. 이런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평양, 살수의 위치를 재 비정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김진경은 고구려를 공격하는 수나라 군사가 요수(遼水)를 건너야 했다는 것에 주목을 하여 요수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요동성과 압록수를 지나 450리를 가야 살수가 나오고 살수를 지나 최소 30리를 가야 평양성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진경, 「고대 요수의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천안, 2012), 207~208쪽))

고광진은 살수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압록수(鴨綠水)에 대한 논문으로 사료에 서 나온 압록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라고 했다.

남의현은 『고려도경』의 사료를 바탕으로 현재 압록강은 '강을 건널 수 있는 큰 배가 정박되어 있고 배로 건넌다'라는 기록의 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반도의 압록강은 수심의 깊이와 유량의 변화가 심하고 자갈이 많아서 거선을 타고 건넜다는 기록이 없다고 했다. 북한의 압록강은 배가 아니더라도 현재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 남의현은 살수는 만주에 있다고 보았으며, 수. 당 시대의 요서 지역에 요수와 요동성이 있다고 했다. (남의현, 「중국의 중조변계사를 통해 본 한중 국경문 제」, 『인문과학연구』 57,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34쪽. 47~48쪽)

복기대살수가 현재 중국 요녕성 무순시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내려가는 물줄기인 혼하(渾河)라고 하였다. 현재 혼하라는 상류를 명나라 시대 기록에서는 살수라고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사한 곳이라고 명확히 지적하면서 혼하를 살수로 비정한다. (복기대,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선도문화』 25권, (2018), 257~258쪽)

[3. 살수 청천강설의 문제점]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는 내용을 볼 때 살수와 평양성은 서로 위치 비정을 하는데 깊은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천도를 7~8번 정도 하는데 그중에서 평양의 이름이 4회 정도 나온다. 평양이란 지명은 평(平)이란 '평평한' 또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양(壤)이란 '땅, 토지, 경작 지'란 뜻이다. 즉 '평평하고 넓은 경작지 토지'라는 뜻으로 고유명사이면서도 보통명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구려의 평양은 일정한 장소가 아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넓은 지역의 경작지인 수도'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면서 사료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평양이 왜 중요하냐는 평양의 위치가 비정이 되면 살수의 위치가 비정이 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사료에 나오는 평양을 모두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도표가 된다.

평양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위치로 비정한다면 '똑같은 자리'로 계속 천도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살수 청천강설'로 본다면 수나라 군사가 청천강인 살수를 지나 나온 평양은 현재 북한의 평양이다. 그런데 청천강이라고 하는 살수를 지나 나오는 평양을 북한의 평양으로 인식할 때 다음과 같은 모순점이 발생한다.

동천왕이 북한의 평양으로 천도한 시기가 247년이고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나와 환도산성으로 나간 연도가 342년이다. 95년 동안 북한 평양에 고구려 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나라의 낙랑군이 BCE 107년부터 AD 313년까지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낙랑군한무제가 BCE 108 년에 위만의 손자인 우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세운 한사군 중 하나이다. 식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낙랑북한의 평양이고 그 낙랑 옆에 패수가 있기에 대동강 패수설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고구려 북한 평양설'과 '낙랑 북한 평양설'은 다음과 같은 모순이 발생한다.

식민사학계에서 15대 미천왕 313년에 멸망 당했다고 주장하는 낙랑이 B.C 107년부터 A.D313년까지 약 420년 동안 지금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북한의 평양(낙랑군이 있는)으로 동천왕이 A.D247년에 천도를 했다는 황당한 사실이 일어난다. 즉, 동천왕이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하는 북한의 평양에 다시 도읍을 정한다는 비상식적인 학설이 된다.

그 이유는 일본 학자와 일부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한사군의 '낙랑군 북한 평양설'과 '고구려 북한 평양설' 둘 다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 학설에 대해 복기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동천왕이 도읍을 옮긴 것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데, 위나라 행정구역 안에 있는 낙랑군 바로 옆에다 고구려의 도읍을 정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출처: 깨복이 블러그

위 그림에서 보여주듯이 북한 평양에 낙랑군과 고구려 수도가 같이 있었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런 모순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살수', '고구려 수도 평양'의 지명을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려고 하는 반도사관인 식민사관의 한계점에서 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을지문덕]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략(智略)과 술수가 뛰어났다. 글을 읽고 지을 수 있었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살수대첩의 진실)


수(隋)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양제(煬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아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가, 9군(軍)과 함께 압록수(鴨淥水)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이 왕명(王命)을 받고 그〔수나라〕 진영(陣營)에 나아가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수나라 진영의〕 허실(虛實)을 살피고자 한 것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에 앞서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만약 〔고구려〕왕과 을지문덕이 와서 만나면 그들을 붙잡으라는 것이었다. 중문 등이 장차 잡아두려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완고하게 만류하므로, 마침내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을지문덕이 돌아가자, 〔중문 등이〕 깊이 후회하였다.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에게 속여 말하기를, “다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또 오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마침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돌아갔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이미 놓쳐버리고 내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우문술은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우중문이 이르기를 “정예 병력으로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문술이 그를 만류하자, 우중문이 노하며 말하기를, “장군은 10만 병력을 거느리고 얼마 되지 않은 적군(賊軍)조차 깨트리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우문술 등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압록수를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만들고자 하여 매번 싸울 때마다 〔패하는 척하며〕 번번이 달아났다. 우문술 등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 등은〕 이미 여러 차례 승리한 것을 믿고, 또한 〔안으로는〕 여러 사람의 뜻에 압박을 받아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에서 30리(里) 떨어진 곳에다 산을 의지하고 진(陣)을 쳤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詩)를 보내 이르기를,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신묘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다 헤아렸고
기묘한 계획은 지리(地理)를 모두 통달하였도다.
싸움에 이겨 이미 공로가 드높으니
만족할 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라고 하였다. 우중문은 답서(答書)를 보내 〔을지문덕에게〕 훈계(訓戒)하였다.

을지문덕이 또한 사자(使者)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군사를 되돌리면, 마땅히 왕을 받들어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황제를〕 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지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음을 보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을 핑계 삼아 〔군사를〕 되돌렸는데, 방진(方陣)을 치고 행군(行軍)하였다. 을지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방에서 포위하여 습격하였다. 우문술 등은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살수(薩水)에 이르러 수나라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군사를 진격시켜 그 후군(後軍)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을 죽이니, 이에 여러 부대〔諸軍〕가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 없었다. 군의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하여 돌아가는데, 하루 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鴨淥水)에 이르렀으니, 행군한 거리가 450리였다. 처음 요하(遼河)를 건널 때 군의 군사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遼東城)으로 돌아왔을 때에 이르러서는 겨우 2,700명 이었다. (*참고로 100리를 40킬로로 본다면 450리는 180킬로미터이다.)

참조 자료: 환단고기 사료로 살펴본 살수의 위치 고찰 

참조 자료: 압록수와 평양의 위치 재비정에 따른 살수 위치 연구(신민식)

참조 자료: 살수대첩의 위치에 관한 진실(이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