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도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한류의 꽃을 점점 더 화려하게 피우고 있는 한국 문화의 뿌리 정신, 그 문화의 사상적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주영채 회장은 그것이 곧 동학이며, 동학 정신의 뿌리는 무속이 아니라 한민족 고유의 '하늘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 선생은 을묘년(1855)에 금강산 유점사의 한 승려로 부터 천서(天書)를 받아 사흘만에 그 뜻을 깨치고 본격적인 구도에 정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용옥 교수는 그 천서가 아마도 마테오리치 신부가 저술한 '천주실의'였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주영채 회장은 그것이 '천부경'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많은 주요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동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윤봉길 의사가 형장에서 외웠던 '염불 같은 것'이 동학의 주문, '시천주주'였을 것이란 주장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정신까지 먹으려면 동학쟁이들의 종자를 없애야 한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는 한국인 보다 동학의 본질을 더 정확히 알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은 변하며, 변화의 차원과 속도도 시대마다 다 다르다. 지금과 같이 변화가 빠른 대변혁의 시간대엔 변화의 대세를 인지하고 변화의 속도에 발 맞추는 것이 생존을 위한 지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시대정신이 구한말 다시 개벽으로 선언된 동학을 통해 한민족의 뿌리 정신인 신교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크게 드러내려고 하는 듯 하다.]
기사원문보기: 시신들이 거름이 되어 풍년이 들었다오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여덟번째는 주영채(75)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이다. 그의 교명은 주선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삶의 이유를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인간다운 삶을 부르짖으며 정의와 평등을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던지기도 한다. 일제의 신무기 앞에서 죽창을 든 채 산화해간 동학도들의 모습이 그랬다. 동학혁명을 필두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민초들의 외침은 3·1운동과 4·19혁명, 광주 5·18민주화운동, 87년 민주항쟁,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이런 저항과 시민의식은 외세와 독재와 부패 권력자들에 의해 산으로 가는 한민족호의 항로를 바로잡아 전진하게 하는 돛이었다.
주 회장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4대째 동학(천도교)을 신봉해온 뿌리 깊은 동학도 집안의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철퇴를 맞고, 다시 남북분단으로 교세가 꺾이고, 최덕신 교령과 오익제 교령의 월북 사건으로 이른바 한가닥씩 하는 신자들이 천도교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는 개인 사업으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한순간도 천도교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천도교 교화관장과 종무원장, 감사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동학도들은 이름 없이 스러져갔지만, 그들의 피가 곳곳에 스며들어 변화를 이끄는 씨앗이 됐다고 본다.
“학자들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망자가 20~30만명이라고 하는데 현재 정부 조사 등을 통해 유족들이 남아 집계된 참여자는 3천700여명에 불과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정신까지 먹으려면 동학쟁이들의 종자를 없애야 한다’며 1894년 7월에 한양부터 3개 대대를 이끌고 아예 살육 타작을 하면서 내려왔다. 결혼도 하지 않은 18살, 19살, 20살 청년들이 앞장서 이름도 없이 죽고 방치돼 새와 짐승의 밥이 되고 거름이 되었다. 동학도는 3족을 멸한다니 산 자들도 족보를 불태우고 고향을 떠나 절에 가고, 천주학에 달려가고, 산속이나 타지로 숨어 이름도 성도 감춘 채 사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그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전라남도 나주 출신인 주 회장은 “논에서 썩은 시신들이 거름이 되어 그해 논농사가 풍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회고했다. 동학혁명군의 피와 살이 산하에 스며든 그 산하에 우리가 살며 먹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영혼엔 동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백범 김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청년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동학의 접주로 활동했다. 당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는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하는 민보군이었나 김구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지켜주었고, 김구는 나중에 안 진사 집안사람들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챙겼다. 또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을 큰며느리로 들였다. 윤봉길은 15살에 배용순과 결혼했는데, 동학도인 장인을 멘토로 삼았고, 우물가에서 청수를 떠놓고 시천주(동학의 핵심 사상이 담겼다는 21자 주문)를 읊었고, 천도교에서 발간한 <개벽지>를 보고 영향을 받아 농민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윤봉길이 일본군 대장을 척살하고 총살을 당할 때 형틀까지 20여m를 당당하게 걸어가며 염불 같은 것을 외웠다. 눈가리개도 필요 없다고 거부했다는데, 그 광경을 당시 목격한 일본인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외운 것은 염불이 아니라 시천주 주문이었을 것이다. 몽양 여운형도 동학도들의 마을로 최초의 한글 <용담유사>(동학 경전)가 편찬된 충북 단양 샘골에서 태어나 동학의 영향 아래에서 자랐다.”
그는 “손병희(1861~1922·천도교 3대 교주)가 동학농민혁명 25년 뒤 3·1운동을 주도했을 때 독립선언 서명자 33명 가운데 9명이 실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였다. 동학은 좌절된 게 아니라 다시 횃불을 들어 3·1운동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김구, 윤봉길, 이봉창, 여운형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평했다. 그는 3·1독립선언서가 바로 한민족의 정신이자 동학의 정신이라고 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하노라’는 3·1독립선언서의 핵심인 자주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마지막 조선총독이던 아베 노부유키가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다고 찬양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 교육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라며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것’을 천명했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하며 신문사도 만들고, 이병도 같은 사학자를 시켜 식민의식을 심었다. 미국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란 이름으로 들어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까지도 미국에 의지하는 비자주민으로 남았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남북 분단 상황을 방기해 민족 대의를 위해 살신성인한 독립운동가들이 꿈꾸던 자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주 회장은 3·1운동의 자주적이며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하늘신앙’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는 이를 연구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한국의 전통사상으로서의 유학 사상과 동학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민족 근대정신의 씨앗으로만 알던 동학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꾼 것은 청년 시절에 만난 안호상(1902~1999) 박사의 영향이 컸다. 해방 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고 훗날 대종교 총전교를 역임한 안 박사는 성균관대 정문 앞에 살았는데, 성균관대에 재학하면서 천도교 청년회 중앙본부위원장을 하던 그가 가끔 찾아갔을 때 ‘수운 최제우는 뛰어난 유학자면서도 이미 우리의 고유사상과 불도, 선도에도 다 통달하셨던 분’이라고 했다고 한다.
“안 박사님이 ‘기독교에선 예수 이후 신학이 나왔지만, 구약의 연결로 본다. 그런데 왜 동학은 최제우 이후만 보느냐. 최제우의 동학은 우리 민족에게 원래 있던 고유의 하늘신앙을 이은 것이다. 그것을 구동학이라고 하고, 최제우 이후를 신동학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의 한민족 고유사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주 회장은 한민족의 고유사상과 정신사 연구를 통해 한민족 정신의 뿌리가 무교(무속)라는 주장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동예의 제천의식 무천과 부여의 영고 등, 북을 치고 춤을 춘 목적은 하느님을 모시기 위함이지 무당 풍속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속은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들어온 것이다. 우리 고유의 하늘신앙은 세종대왕 때까지는 유지가 되었으나 왕위를 찬탈해 정당성이 없는 수양대군 세조가 명나라에 아부하기 위해 고기(古記·옛 기록)를 모두 거둬 불태워버리고 엄금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해월 최시형(1827~1898·천도교 2대 교주)은 한민족의 원조가 무당 풍속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호통을 치면서 개탄을 했다. 수운 최제우도 천도를 깨닫고 찾아온 유학자들에게 ‘당신에게 천령(하느님의 영)이 강림했다고 하는데 그게 뭐냐’는 첫 질문을 받고, ‘무왕불복지리(無往不復之理·갔으면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이치)’라고 답했다. 즉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늘신앙을 때가 와서 다시 세웠다는 의미다.”
따라서 수운이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받은 천서가 천주교 교리 해설서인 마테오 리치(1552~1610)의 <천주실의>일 것이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주장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수운 최제우가 본 천서가 천지인 사상을 담은 <천부경>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하느님과 우리가 사는 땅과 인간을 하나로 보았던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인내천 사상이 한류에 담겨 위기의 세상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땅과 인간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이기적인 서구 문명으로 인간의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지구는 황폐화하고 있다. 하늘마음을 회복해서 인간과 지구와 우주를 모두 하느님처럼 대하며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심(人心)개벽’이 인류와 지구를 구원하는 길이자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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