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경합하는 다양한 세계관들끼리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중립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없을까? 불교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아울러 통합하고 각각의 편견이나 아집을 깨우치고 확장할 수 있는 균형된 기준은 과연 없는 것일까? 무시무종과 유시유종은 조화될 수 없은 것일까? 연기설과 목적론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이 하느님과 동일한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죄사함과 해탈은 과연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인가?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개념인가? 자타불이를 깨닫고 그 공감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더욱 충실히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제행무상을 깨닫고도 시시각각 변해가는 우주의 창조력과 아름다움을 느끼는게 불가능한 것인가? 지금은 모든 것이 융합과 통일로 돌아가는 시대, 한민족의 우주론(천부경, 하도, 낙서)과 환단고기의 내용은 각종 문화권의 다양한 이념과 세계관들을 충분히 통합해, 분열된 인류 의식을 통일할 수 있는 한민족의 위대한 정신 유산이라 생각한다.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모든 존재의 근원을 마음으로 보았기에 수행을 통해 청정한 마음을 깨쳐 스스로 해탈할 것을 강조한다. 반면 기독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신(GOD)으로 보고, 신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했다고 믿기에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죄는 오직 신으로부터만 사함을 받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신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 구원될 것을 강조한다. 그에 비해 이상세계 건설이 목표인 유교의 성리학은 만물 변화의 근원을 이기(理氣)의 변화로 간주하고 인간은 정(情)에 이끌린 인심(人心)을 다스려 인간본연의 순수한 성(性)에 부합하는 도심(道心)을 회복해서 세상을 위한 대인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각각의 종교가 바라보는 세계관과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다양한 세계관과 목표는 결코 하나로 통합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열린 마음으로 동방 한민족 신교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본다면, 왜곡된 진실이 바로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통합된 세계관과 목표점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한민족의 신교문화가 곧 모든 종교와 영성문화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종교의 결론은 결국 나는 누구이며, 나의 밝은 본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그리고 자연과 신명 그리고 인간, 이 모두가 조화로운 밝은 세상을 어떻게 구현할 것이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 실천해서 널리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는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 고대 도통한 한민족의 제왕들이 추구한 통치이념이었던 것이다. 유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이상적 인간상이 곧 홍익인간인 것이라 생각한다.
Key Words: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본심본 태양앙명(本心本 太陽昻明),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유약개벽이존(有若開闢而存)하고, 유약진화이재(有若進化而在)하며, 유약순환이유(有若循環而有)하니라. 도지대원(道之大原)은 출호삼신(出乎三神)이라. 일신강충(一神降衷), 성통광명(性通光明),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
불교는 우주관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는 원으로 표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주는 원래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는 그냥 우주일 뿐, 그 우주 자체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주의 의미나 가치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불교에 독화살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아 죽어 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고 누가 쏘았느냐 이런 것을 묻는 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짜로 물어야 할 질문은 사느냐, 죽느냐? 즉 삶의 문제죠. 불교는 이렇게 우주의 기원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지 말고, 삶의 문제,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도 우주론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우주는 무한히 큽니다. 삼천 대천 세계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세계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1천 곱하기 1천 곱하기 1천개 이상으로 많은 (무한한) 세계가 있다. 이런 뜻입니다. 또 불교에서 시간은 무한히 깁니다. 불교에는 겁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는데요. 1겁은 대충 4억 3천만년 정도(우주의 나이 138억년으로 추정) 된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해탈하는데 걸린 시간 3 아승기 겁년, 3곱하기 10의 56승 겁년이라고 하니, 시간이 대체 얼마나 긴 것입니까? 이처럼 불교에서 우주는 무한히 크고, 시간은 무한히 길다. 이것이 불교의 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역사관, 불교에서 우주는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무한히 윤회가 반복되기 때문에 불교의 역사관은 순환적 역사관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속에서 만물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합니다. 현재 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도 제가 죽은 뒤에는 다른 사람의 몸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가 내가 아닌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만물은 과정중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죠. 그래서 어떤 사물의 형상도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불변하는 신체, 이런 것은 없는 것이지요.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모든 사물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다른 사물들과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만물의 불완전성은 일종의 고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합니다. 우주 안에 마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비현실이 되고, 또 비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시 현실이 됩니다.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합니다. 역사는 이러한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불교의 인간관, 불교에서 윤회는 육도, 즉 6가지 길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극락,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 이 6가지 길로 계속해서 윤회한다는 것이지요. 이중에서 인간으로 환생한 것은 극락환생 다음으로 큰 복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존귀한 존재라고 할 수가 있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는 인간과 사물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부정합니다. 모든 생명은 다 똑같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본래 윤회는 인도의 브라만교나 힌두교의 것입니다. 그런데 브라만교나 힌두교에서는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윤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전생에 선업을 많이 행한 사람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많이 행한 사람은 수드라라고 하는 낮은 개급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라만 계급이 특권을 누리는 것은 정당하고, 수드라는 순응해야 된다 뭐 이런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의 경우, 이런 식의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는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씨앗, 즉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깨달으면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만인불(萬人佛)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이러한 사상은 급진적 평등주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은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 불교의 평등주의는 우주적으로 확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기독교 우주관은 유시유종(有始有終), 즉 우주가 시작과 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이 되죠.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창조 신앙은 단순히 우주의 기원이 어떠한 지에 대한 우주론적 설명이 아니다. 창조론에 핵심은 하나님이 우주보다 크시고 우주는 하나님 보다 작다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 있는 그 어떤 피조물도 신이 될 수 없다는 유일신 신앙이 창조론의 핵심입니다. 우주는 원래부터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는 디자이너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우주는 맹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목적적입니다. 우주는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굴러 가야 합니다. 우주가 그렇게 굴러갈 때 우주는 아름다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주를 기독교에서는 Good Universe, 선한 우주다, 이렇게 가르치죠. 창조에서 시작된 우주는 심판으로 끝납니다. 끝난다고 해서 무슨 뭐 우주가 사라진다 이런 뜻이 아니고 창조주의 창조 목적이 완전히 성취된다 이런 뜻입니다. 창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기나긴 과정을 통과해서 종국에는 완성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 기독교에서는 역사를 직선적 역사관으로 봅니다. 역사는 태초에 창조로 부터 시작해서 종말을 향해 직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인간과 세계의 구원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에 완성을 향하여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세력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저항 세력은 하나님의 뜻을 뒤틀고 왜곡시킵니다. 이것은 죄와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죄와 악을 이기시고 끝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역사는 목적이 완성할 때까지 직진하는 중입니다.
기독교의 인간관, 기독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 하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릅니다. 이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왕, 즉 통치자의 존엄을 듯합니다. 하여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세상의 통치를 위임 하셨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그러나 지극히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린다고 했을 때, 이를 환경파괴나 자연착취의 정당화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요. 환경파괴나 자연착취는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일어난 모습이지 타락 전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모방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통치는 돌봄, 섬김, 사랑의 통치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의 통치 역시 그런 식이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인간 아담과 이브는 어느나라 사람일까요? 이스라엘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이 아담과 이브는 민족이나 인종이 나누어지기 전의 인간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이스라엘 민족주의와 무방합니다. 모든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 귀천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고로 만민은 차별 없이 평등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우주적 스케일의 가족주의적 평등주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에 관해서 중요하게 다루는 물음 중에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문제가 무엇이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문제는 인류 의식의 미성숙기인 선천 상극의 이치로 인해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원한의 부정적 에너지 혹은 엔트로피, 해법은 개벽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류의식의 성숙과 후천 상생 시대의 도래)
불교에서 이 세계의 문제를 뭐라고 볼까요? 윤회라고 봅니다. 윤회가 문제입니다. 끊임없이 윤회하는 운명이 저주이고 고통입니다. 그런데 윤회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개 그리고 나, 내 것,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환영 같은 거에요. 마야, 미망과 같은 그런 것이에요. 이 세계의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여서 나, 내 것, 여기에 집착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윤회가 문제라면 치유책은 무엇일까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으면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주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행위를 그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중심성을 초월할 수 있겠습니다.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이처럼 세상에 남은 없어집니다. 다 나와 관계되는 사람이 됩니다. 모두 다 나와 관계 되기 때문에 모두를 착하게 대할 수 있고, 보편적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탈을 할 수 있을까요? 뭐 여기에는 여러 교리가 있다고 합니다만, 통상 해탈을 위해서는 속세를 떠나 불가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어 수도 정진하면 됩니다. 길고 긴 수도 정진 과정 중에 해탈하는 스님도 계시겠지만 또 그렇지 못한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면 그 분은 다음 생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해서 이러한 불교의 구원은 [자력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이 세계의 문제를 뭘로 볼까요? 죄로 봅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뜻 합니다. 앞서 세계는 하나님의 디자인에 의해서 선하고, 의미있고, 가치있게 창조되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하나님의 디자인, 의도가 왜곡 되고 뒤틀린 것이 바로 죄입니다. 어떻게 뒤틀리게 되었을까요? 선악과 이야기가 보여주 듯,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뒤틀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왕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불순종은 그냥 한 개인의 불순종이 아니에요. 왕의 불순종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반역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는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질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죄가 문제라고 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죄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엄중합니다. 모든 범죄는 사람에게 지은 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범죄는 다 추적됩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죄가 말소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공소 시효가 없습니다. 죄는 죄며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덮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크든 작든 다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인은 반드시 자신이 지은 죄값을 치뤄야 합니다. 즉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를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죄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겁니다. 이를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타력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해결하실 수 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죄를 죄 없어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지않겠습니까? 죄는 죄입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에 상응하는 응분의 댓가가 필요합니다. 이 응분의 댓가가 뭐냐? 무죄한 생명의 피,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메달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게 됨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관 입니다.
불교도는 불교적 세계관이 더 우월하다고 볼테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더 우월하다고 하겠지요. 사실 경합하는 세계관들끼리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중립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1. 삶의 여러 번 반복된다는 윤회가 자칫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있게 하지않을까 하는 의심, 저는 인간의 삶이 단 한 번 뿐이며 그 한 번의 삶에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독교 세계관을 선호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 존재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삶의 유일성, 책임성을 일깨우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의미나 가치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는 불교의 가르침, 제가 볼 때 우주는 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식별 가능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 안에는 아름다움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제 마음이 그렇게 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우주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는 창조주의 창조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믿습니다.
3. 불교에서는 만물이 인과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만물의 상호 연관성이 있긴 있으나 그것은 창조주 한 분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생각합니다.
4. 불교에서는 나와 너, 인간과 사물,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不二)사상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는 빛과 어둠, 낮과 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구분하고 구별함으로써 생겨났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이 창조를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곧 카오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의 공통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마도 이 주제에 있어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대화의 자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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