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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단군세기

단군세기: 23세 단군 아홀 재위 76년

by 광명인 2023. 8. 8.

아홀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환기 5961, 신시개천 2661, 단기 1097,  BCE 1237)년이다. 아우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시고, 웅갈손을 보내어 남국藍國 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는 군대를 살피게 하셨다.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할 때, 은나라 사람과 서로 다투어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병력을 진군시켜 이를 격파하셨다. 
가을 7월에 임금께서 신독을 베고 환도하여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라고 명하셨다.

출처: 영화 안시성 스틸컷
출처: 안경전역주 환단고기

재위 2년 을유(단기 1098, BCE 1236)년 남국 왕 금달이 청구국 왕, 구려국 왕과 더불어 주개에서 만나 몽고리의 군대와 합세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오지로 깊숙이 들어갔다.아홀단군께서 회대淮垈(회수와 태산)땅을 평정하고 포고씨를 엄淹에, 영고씨를 서徐에, 방고씨를 회淮에 봉하시니 은나라 사람이 이것을 보고 겁내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재위 5년 무자(단기 1101, BCE 1233)년에 임금께서 이한二韓(번한, 마한)과 오가五加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의논을 중지시키셨다. 

재위 76년 기해(환기 6036, 신시개천 2736, 단기 1172, BCE 1162)년 아홀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연나延那께서 즉위하셨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낙랑홀樂浪忽: 고대의 낙랑은 여러 곳이 있는데 본래 단군조선 시대의 제후국이었다. 단군조선 때 습수濕水에 낙랑홀을 두었다. 홀은 성城을 의미한다. 습수는 지금의 하북성 북부를 흐르는 영정하이다. 

*북애노인은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상나라와 크게 싸워 이기고 잠시 화해를 하였으나,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이기고 그 국경 안까지 쳐들어갔다. 마침내 해상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이 다시 옮겨와 살았다"라고 하였다.  

고조선 제후국의 은나라 정벌: 후한서의 동이열전의 기록23세 아홀단군 2년(BCE 1236)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동이열전'에는 "무을武乙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쇠폐해지자, 동이東夷(단군조선)가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회수淮水와 태산 지방으로 옮기고 점차 중국 본토를 점거하여 살게 되었다. 소위 서이徐夷가 바로 이것이다"라고하였다. 그런데 이 후한서의 기록은 은나라 27세 무을武乙(BCE 1196년경)왕 때 것이고 단군세기의 23세 아홀단군 2년(BCE 1236)은 은나라 24세 조갑祖甲왕 23년에 해당하므로 약 40년의 차이가 난다.  

서徐:  서徐는 남국의 제후가 회수와 태산 지방을 점령하여 회북淮北, 서주徐州에 세운 나라이다. 사기정의의 주본기周本紀에는 '괄지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주 서성현 북쪽 30리에 있는 옛 서국은 바로 회이淮夷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안휘성 사현지방이다. ‘사주泗州’는 본래 ‘사수泗水’로 되어 있었으나 후대 학자들의 교감에 의해서 '사주泗州'로 고쳐졌다. 서국은 그 후 점차 강성해져서 서언왕(?~BCE 985) 때에는 주周나라 5세 목왕(BCE 1001~947)과 일대 격전을 벌여 주나라의 동쪽 지역을 할양 받아 황지潢池(지금의 하남성 개봉부 봉구현 서남) 동쪽에 군림하면서 36개국 제후들에게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하였다. 후한서의 동이열전에는 "목왕은 그의 기세가 한창 왕성함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를 나누어 주고 서언왕이 주인 노릇을 하게 하였다. 언왕은 황지의 동쪽 사방 5백 리에 거처하면서 인의의 정치를 행하자 육로로 해서 조근하는 곳이 서른 여섯 나라였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언왕이 알에서 나왔다고 하는 난생卵生설화가 있다. 중국 은나라· 진秦나라의 시조와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東明王(후에 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이 됨),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야의 김수로왕 등도 모두 난생 설화의 주인공이다. 난생 설화는 우리 동이족 고유의 것으로서, 이러한 왕조(중국 지역의 은 · 진 · 서나라)를 세운 민족이 만주 내몽골 방면에서 중국 본토에 진출한 동이족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중국 학자들도 지적한다(박시인, 알타이 인문연구, 545- 582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