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는 43명이 통치한 단군조선과 이후 4명이 통치한 대부여까지 총 2,096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여를 제외하면 고조선은 1,908년간인데, 이것은 또다시 전기조선, 후기조선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전기조선은 21세 소태단군까지 21명이 다스린 1,048년간이며, 후기조선은 22세 색불루 단군부터 43세 물리단군까지 22명이 다스린 860년간입니다. 후기조선은 후손이 없었던 소태단군이 보좌를 서우여에게 선양하려고 했지만, 이에 반대한 우현왕 색불루가 정변을 일으킴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로인해 시조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개국한 이후 소태 52년(BC1286년)까지 1,048년간의 전기조선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동사강목, 응제시주, 세종실록 등의 역사기록이 ‘시조 단군께서 1,048년을 사셨다’고 기록한 것은 색불루 단군의 제위 찬탈사건으로 전기조선이 끝난 것을 표현한 것이죠. 소태 맞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퇴짜를 맞는다는 뜻으로 소태단군의 쓰린 역사를 담은 속담이라 봅니다. ]
소태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진(환기 5818, 신시개천 2518, 단기 954, BCE 1380)년이다. 은나라 왕 소을(小乙 21세)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재위 47년 경인(단기 1043, BCE 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 22세)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삭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재위 49년 임진(단기 1045, BCE 1289)년에 개사원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일군, 양군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 고등이 대군을 장악하고 서북 지방을 경략하니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고등이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이 되기를 주청하였다. 임금께서 꺼리시며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거듭 청하므로 윤허하시고, *두막루라 불렀다.
재위 52년 을미(단기 1048, BCE 1286)년에 우현왕 고등이 홍서하고,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을 계승하였다. 임금께서 나라를 순수하시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크게 모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셨다. 이때 오가를 모아 놓고 옥좌를 양위할 일을 함께 논의할 때 “내가 이제 늙어 일하기가 고달프다”라고 말씀하시고, “서우여에게 정사를 맡기겠노라”하셨다. 이에 살수 주위의 땅 백 리를 분봉하여 섭주로 삼고 기수라 하셨다.
우현황이 소식을 듣고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멈추시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고 우현왕이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에서 단군으로 즉위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부득이 옥책과 국보를 우현왕에게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임금께서 아사달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최후를 마치셨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를 사양하고 달아나 동해 쪽 물가에 살면서 스스로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
*귀방: 지금의 중국 산서성 북쪽 내몽골의 음산산맥 일대에 살던 족속임
*고등: 22세 색불루단군의 할아버지
*두막루: 북사에서 “두막루국은 물길에사 북쪽으로 1천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날의 북부여이다.”라고 하였다.
*섭주와 기수: 섭주는 단군을 대행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24세 연나단군 때 나오는 섭정과 같은 뜻인 듯하다. 기수는 섭주가 관할하는 지역 이름이거나, 섭주의 보직 명칭일 것으로 추정한다.
*부여신궁: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지금 만주 농안일대)에 있던 궁전이다.
38) 소태단군
21세 소태단군은 고조선 역사에서 혁명으로 말미암아 최초로 제위에서 물러난 분이다. 지금부터 3천여 년 전 상(은殷이라는 국호는 BCE 14세기경 상나라 19세 반경盤庚왕이 은이라는 지역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쓰임)나라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후세에 전해 주는 사료史料로 현재 갑골문甲骨文 기록이 남아 있다. 갑골문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 22세 무정武丁왕 (BCE 1324~ BCE 1266)은 수많은 정벌 전쟁을 벌여 주변의 귀방(북쪽)· 강방· 촉방(서쪽)· 고방· 토방(서북쪽)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고 하였다. 귀방은 북방족이 산재했던 섬서성, 산서성 서북 일대이다(윤내현, 상주사, 41~87쪽 ; 푸쓰녠, 이하동서설). 이와 같이 단군세기의 21세 소태단군 47년 조의 기록이 초기 갑골문 기록에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와 신빙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39) 좌·우현왕 제도의 기원
이 제도는 천자를 좌 · 우에서 보필하는 제도이다. 고조선 초기의 국가 통치제도는 진한의 천황(대단군)을 중심으로 번한과 마한의 왕(부단군)이 좌 · 우에서 각각 보좌하는 비왕椑王 제도였다. 또한 삼한에도 각기 좌 · 우 비왕을두었는데 이를 좌 · 우현왕이라 한다. 비왕 제도는 이미 배달국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초대 단군왕검께서도 14세에 비왕이 되어 섭정하신 바 있다. 사기의 조선열전에도 비왕 제도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섭하가 떠나서 국경에 이르렀는데, 패수에 당도해서 마부를 시켜 자신을 전송한 조선 비왕 장을 장을 살해하고 곧바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변방으로 들어갔으며, 마침내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습니다’ 라고 아뢰었다[사기] 조선열전.
이 제도는 신교의 삼신 사상을 기초로 해서 성립된 것으로, 흉노로 전파되었다. 특히 흉노의 우현왕은 좌현왕과 더불어 선우 아래 최고 직책이었다. 좌현왕을 좌도기왕이라고도 하였는데, 항상 선우의 태자를 좌현왕으로 임명하였고, 선우의 유고有故시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백제의 전성기에도 좌·우현왕 제도가 있었다. 송서宋書 이만전에는 "그리하여 행관군장 군우현왕 여기餘紀를 관군장군으로 임명하고,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과 행정로장군 여훈을 함께 정로장군으로 임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사기의 흉노열전에는 “좌우현왕, 좌우곡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일러 '도기’라고 하기 때문에 항상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40) 두막루
'북사'에서는 "두막루국은 물길에서 북쪽으로 1천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날의 북부여이다."라고 하였다 고구려 문자열제 때 부여가 멸망한 뒤 그 유민이 북으로 이동하여 두막루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도 두막루라 하였다. 막루는 마을 또는 고을의 우두머리[首長]라는 뜻이 있고 두頭는 최고를 나타내는 접두어로 최고의 나라, 또는 고을을 통솔하는 총수 격에 해당하는 관직, 최고 지도자라는 의미인듯하다.
41) 서우여徐于餘
21세 소태단군이 해성海城 욕살 서우여에게 제위를 선양하려 하자, 우현왕 색불루가 극력 반대하므로 마침내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이에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으로 돌아가 수천 명과 모의하여 기병하였다. 그 후 색불루단군이 친히 삼한의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려 할 때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하고, 비왕裨王으로 봉할 것을 약속하였다. 서우여가 이를 따르자 30세 번한 왕으로 임명하여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다.(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 번한세가 하 참조)
42) 부여신궁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지금의 만주 농안農安 일대)에 있던 궁전이다. 규원사화에서는 “부소, 부우 및 막내아들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해졌는데, 구려·진번·부여 등의 나라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단군왕검께서 넷째 아들 부여夫餘에게 서쪽 땅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 땅이 바로 부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군조선 초기에는 제후국이었으나 22세 색불루단군 때 고조선의 도읍지가 되고, 44세 구물단군 때는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긴 뒤 국호를 개칭하여 대부여라 하였다. 대부여가 망한 뒤 옛 백악산에서 북부여가 건국되었다.
43) 백이伯夷 · 숙제叔齊
백이의 름은 윤允,자字는 공신公信이고, 숙제의 이름은 지智 또는 치致,자는 공달公達, 성은 묵태墨胎이다. 백이 · 숙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하북성 난하 유역)의 왕자로서 동이東夷족이다. 주周나라 무왕이 은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쳐들어오자 백이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서 "왕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文王]가 돌아가시고 아직 상尙 중에 있는데 전쟁을 하려 하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으며, 또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침탈하려 하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사기의 '백이열전')하고 직언하였다. 그러자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군사軍師 강태공이 의인의 말이라 하여 처벌을 면하게 해 주었다. 마침내 무왕이 은을 쳐서 천하의 반을 차지하자 백이 · 숙제는 이 역성혁명을 인정할 수 없다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최후를 마쳤다. 훗날 성삼문이 서장관의 임무를 띠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수양산을 지나가며 백이 · 숙제의 묘비를 보고 그 앞에서 시를 한 수 지었다. 당년(은나라를 치러 갈 때)에 말고삐 붙잡고 그릇됨을 말할 때는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초목도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먹고 자란 것이거늘 부끄럽게도 그대들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가? 이 시를 묘비에 붙여 놓고 왔는데, 그 후로 묘비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고 한다. 뒷날 한 선비가 그래도 후세의 사표가 될 분들인데 너무 곤란함을 겪는다고 생각하여 백이 · 숙제를 변명하는 글을 지었다. 잎은 주나라 때 잎이라 먹지 않았고 뿌리는 은나라 때 뿌리이기에 캐어서 먹었노라. 이 글을 묘비에 붙이자 그때부터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백이 · 숙제는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한 BCE 1122년 당시의 인물이다. 그런데 본서 "단군세기"에는 소태단군 52(BCE 1286)조에 실려 있으므로 은나라 멸망 시점과 약 160년 차이가 난다. 지금까지도 단군조선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고집하며 '소한사관'인 반도사관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사대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고죽을 황해도 해주의 옛 이름이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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