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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단군세기

단군세기: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by 광명인 2023. 8. 8.

[전기조선의 국가 통치원리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였습니다. 즉 나라의 강역을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원리에 따라 진한(人), 번한(地), 마한(天)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인데, 진한은 만주일대에서 단군왕검이 직접 다스리고, 요서와 한반도에 자리 잡았던 번한과 마한은 각기 단군을 보좌하는 부단군이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해 재위에 오른 22세 색불루단군은 송화강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후기조선 시대를 열고 국정쇄신을 위해 삼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체제로 바꾸게 됩니다. 삼조선 체제에서도 여전히 병권은 진조선만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가 아니게 된 것이죠. 색불루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는데, 8조금법은 여덟 가지 죄의 종류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 시대 최초의 성문법입니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색불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병신(환기 5913, 신시개천 2613, 단기 1049, BCE 1285)년이다. 임금께서 녹산鹿山(백악산 아사달)*의 성을 개축하게 하고 관제를 개혁*하셨다. 가을 9월에 장당경에 행차하여 종묘를 세우고 (조부) 고등왕高登王에게 제사를 재내셨다[立廟祀高登王*]. 11월에 친히 구환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은나라 수도를 함락하고 잠시 강화하였으나, 또 다시 싸워 크게 격파하셨다. 

은허(殷墟) 유적의 원경. 36㎢의 넓은 지역에 은(상)나라 말기 궁전과 제사터, 왕릉 등이 조성돼 있으며 15만편의 갑골이 확인되기도 했다. 중국 100대 고고학 발굴사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출처: 경향신문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 지금까지 은허에서 확인된 갑골은 15만편에 이르는데, 1936년 YH 127 갑골갱에서만 무려 1만7000여편의 갑골이 쏟아졌다. 은(상)은 갑골에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의 신령에게 왕실과 나라의 길흉을 점친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경향신문


이듬해 2월에 황하 상류까지 추격하여 대첩의 하례를 받으시고, 회수와 태산 지역에 변한(번한)백성을 이주시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시어 국위를 크게 떨쳤다. 

재위 6년 신축(단기 1054, BCE 1280)년에 신지 육우가 주청하기를, “아사달은 천 년 제업의 땅이나 대운이 이미 다 했고 영고탑은 왕기가 농후하여 백악산보다 나으니, 청하옵건대 그곳에 성을 쌓고 천도하시옵소서”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새 수도에 이미 자리를 잡았거늘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기리오”하셨다. 

재위 20년 을묘(단기 1068, BCE 1266)년에 이르러 남국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왕과 더불어 모든 도적을 쪽아 버렸다.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에 이르러 머무르니 그 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 

임금께서 여파달로 하여금 병력을 나누어 빈, 기 땅으로 진격하게 하시고, 그곳 유민과 서로 단합하여 나라를 세워, 그 이름을 *여黎라 하셨다. 이들은 서쪽 융족과 더불어 은나라의 제후국들 안에 뒤섞여 살게 하셨다. 남씨의 위세가 매우 강성해지고, 임금의 덕화가 멀리 항산 이남의 땅까지 미쳤다. 

재위 36년 신미(단기 1084, BCE 1250)년에 변방 장수 신독이 난을 일으켜 임금께서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시니 많은 백성이 뒤를 따랐다. 

재위 48년 계미(환기 5960, 신시개천 2660, 단기 1096, BCE 1238)년에 색불루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아홀께서 즉위하셨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아사달: 지금의 하얼빈 완달산을 말한다. 

*녹산: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

*관제개혁: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의 마한세가 하에 “22세 색불루단군 재위 원년 5월에 제도를고쳐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셨는데, 조선은 관경(영토의 관할)을 말한다. 정치는 천왕을 경유하여 삼한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명령을 받았다. 여원홍을 마한 왕(20세)으로 삼아 막조선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 왕으로 삼아 번조선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를 총칭하여 단군 관경이라 하니, 이것이 곧 진국이다. 역사에서 일컫는 단군조선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입묘사고등왕: 주서周書와 북사北史에는 “부여의 별종인 고구려인들이 신묘를 세워 고등신高登神에게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다. 

고죽국孤竹國: 중국 상말주초商末周初 시기에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 알려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기의 백이열전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는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다. 부친은 작은 아들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자 숙제는 왕위를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는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달아났다. 숙제 또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달아나자 중간 아들中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둘은 주周 문왕文王을 만나러 서쪽으로 가던 중 은나라를 토벌하러 가는 무왕武王을 만났다. 그들은 무왕에게 신하로서 군주를 살해하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며 만류하였다. 그 후 무왕이 주나라를 세우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죽국은 상대商代 제후국으로서 북경北京 및 하북성 연산燕山 일대를 세력권으로 춘추시대까지 존속했다고 이해한다. 사기의 '주본기周本紀'에서는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룡현에서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성은 묵태씨다"라고 하였다. 

여黎: 치우천황때 구려九黎의 약칭. 상서尙書에 "구려는 치우의 백성이다"라고 하였고, 왕동령도 중국 민족사에서 "구려는 치우의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일사의 삼한관경본기를 보면 신시배달 13 세 사와라환웅 때 웅녀군熊女君의 후예를 '여黎'라 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이 되었다고 하였다. 구려는 아마도 그 이름을 딴 것으로보인다. 14세 치우천황 때 청동기를 사용한 우리나라는 ‘구리(구려)’라 불렸는데, 동銅을 '구리’라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구려는 구환九桓, 구이九夷라고도 불렸으며 고구려(고려 · 고리 · Korea)의 어원이 되었다. 한편 남국의 여파달이 빈 · 기에 웅거하며, 하나라 말기부터 그곳에 거주해 오던 고조선 사람들과 힘을 합해 여黎국을 세운 사실은 한漢족 고대 사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사기의 주본기周本紀에 의하면 주나라 선조인 고공단보는 당시 빈邠에 거주하고 있었다. 훈육과 융적이 공격해 와 재물과 땅을 요구하자 고공단보는 싸우고자 하는 백성들을 만류하며 기산岐山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백성들 역시 따랐다고 한다. 사기의 주본기의 주석인 사기정의에서는 "기국은 여국의 별칭이다"라고 하였다. 

전설의 왕조 은나라, 동이족 일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