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와 동명왕 고두막한-삼성기 상
임술(단기 2095, BCE 239)년 진왕秦王 정政 때 신인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정미(단기 2140, BCE 1940)년 한나라 혜제惠帝때 연나라 유민의 우두머리 위만衛滿이 서쪽 변방 한 모퉁이를 도적질하여 차지하였다. 이에 번한의 왕, 준準이 맞서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에 속한 백성들은 대부분 한수(한강)" 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한때 여러 영웅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힘을 겨루더니, 계유(단기 2226, BCE 108)년 한무제 때 한나라가 쳐들어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하였다. 이때 서압록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 칭하였다. 을미(단기 2248, BCE 86)년 한나라 소제昭帝때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점령하고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칭하시니, 이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고추모(고주몽)의 북부여 계승과 고구려 건국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4. 北夫餘의 始祖解幕漸와 東明王高豆莫仔
壬戌秦始時에 神人大解慕漱가 起於熊心山하시니라. 丁未漢惠時에 燕酋衛滿이 窃居西鄙一隅할새
番韓準이 爲戰不敵하야 入海而亡하니 自此로 三韓所率之衆이 殆遷民於漢水之南하고
一時群雄이 競兵於遼海之東이러니 至癸酉漢武時하야 漢이 移兵하야 滅右渠할새
西鴨綠人高豆莫汗이 倡義興兵하사 赤稱檀君하시고
乙未漢昭時에 進據夫餘故都하사 稱國東明하시니 是乃新羅故壤也라.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 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詞解慕漱하사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하시니 是爲高句麗始組也시니라.
대해모수大解慕漱: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시조.
웅심산熊心山: 길림성 만주 서란 소성자
혜제惠帝: 한나라 2대 황제(재위 BCE 194~BCE 188).
준왕準王은 황해를 건너 금강 유역에 이르렀다. 전북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와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의 경계에 '어래산御來山'이 있다. 준왕이 익산 금마에 마한을 세우고 나포 포구에 자리 잡고 있던 공주公州(또는 공주公主, 공주산)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위만衛滿: 위만은 연나라 왕 노관의 부하이다. 노관은 일찍이 한고조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친구였다. 유방을 도와 장안후에 봉해졌고, 후에 연왕이 되었는데 진희의 난 때 역적으로 몰려 흉노로 달아났다. 노관이 도망가자 위만은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북부여 해모수단군 45(BCE 195)년에 번조선의 75세 마지막 왕 기준(BCE 221~ BCE 194)에게 망명하였다가, 이듬해에 간교한 술책으로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에 이르기까지 86년간 고조선의 서쪽 변방 한 모퉁이를 빼앗아 지배하였다 (BCE 194~BCE 108).
삼한三韓: 여기서 삼한은 삼한관경제로 다스리던 단군조선의 전삼한(진한· 마한· 번한)을 말한다. 진한은 지금의 만주, 번한은 요하 서쪽에서 하북성에 이르는 일대, 마한은 한반도 지역이다. 단군조선의 대륙삼한(또는 북삼한, 전삼한) 체제가 무너진 후 진조선(진한)· 번조선(번한)의 유민들이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여 축소된 형태로 삼한을 재건하였다.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 이주하여 자리 잡은 것이 소위 반도삼한 즉 남삼한으로 '중삼한' 이라고도 하며, 후삼한 시대로 넘어가는 '열국 분열 시대'라는 과도기를 형성하였다. 후대에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를 부정하고 말살함으로써 지금은 교과서조차도 한강 이남의 삼한만을 말하면서, 그것이 본래부터 자생한 것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요해遼海: 요하와 발해, 지금의 요하는 요나라 건국 이후에 불린 이름이고, 이전에는 백하, 난하 등을 가리켰다. 여기서는 난하를 말한다.
우거右渠(?~BCE 108): 위만정권의 마지막 왕
서압록: 압록강은 동압록(지금의 압록강)과 서압록(지금의 서요하) 둘이 있다.
고두막한高豆莫汗: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다. 한나라 무제가 쳐들어왔을 때 구국 의병을 일으켜 이를 격퇴하였다. 졸본에서 동명국을 세우고 즉위하여 동명왕이라 불렸으며, 북부여의 4세 고우루 단군에 이어 단군의 위에 올랐다(북부여기).
동명東明: '동방의 광명(밝음)'이란 뜻을 지닌 동명은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예인 고두막한이 세운 나라이다. 졸본부여, 동명부여(BCE 108~ BCE87)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동명을 고주몽이라 했으나 동명과 고주몽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고주몽은 북부여 고무서 단군을 계승하여 고구려를 세웠다(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 고구려를 세운 것은,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의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찾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므로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한다).
신라의 옛 땅: 여기서 말하는 신라의 옛 땅은 곧 지금의 만주 길림 지역으로 이유립은 선춘령 이남과 토문강 이북 사이의 2천리 땅이라고 하였다. 청나라 건륭제의 명에 따라 지은 흠정만주원류고 서문에 건륭제의 유지가 나오는 데 "당나라 때 계림으로 일컬었던 곳은 마땅히 지금의 길림이란 말이 와전된 것이요, 신라. 백제 등 여러 나라도 역시 모두 그 부근에 있었다"라고 하여 신라가 지금의 길림성 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북부여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때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시라(신라)·고례(고구려) • 남북옥저 • 동북부여 • 예 ·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 부여의 옛 도읍은 고조선의 두 번째 수도인 백악산 아사달로 지금의 만주 농안, 장춘 지역이다.
대부여: 44세 구물단군 때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꿨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 부여를 서쪽 땅에 봉해 그곳을 부여한 것에서 '부여'라는 국호가 유래했다고 한다. 부여는 어둠을 헤치고 먼동이 부옇게 밝아온다는 의미로 광명의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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