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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우주론

자연수(自然數)-2. 수(數)의 성립(成立)

by 광명인 2023. 12. 28.

2.  수(數)의 성립(成立)


象이란
것은 物이 자체의 내용을 기미로써 표현하는 것이요, 數란
象의 내용을 표현하며 또는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數는 象의 거울[鏡]이므로 象이 비록 우리의 감관(感官)에 잘 영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象의 근저에 흐르는 數로 인하여 그것을 능히 포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자연수의 數列은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으로 구성되는 것인 바 그것은 인위적인 구성이 아니고 자연질서 자체의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에 거짓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하나 둘 셋 하는 數는 옛적부터 그렇게 정(定)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관례에 의하여서 이것을 계산의 표준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즉 옛적부터 하나 셋 다섯 하고 계수(計數) 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습관상의 數를 정당한 數의 개념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므로 그렇게 될 수도 없거니와 또한 수열(數列)이 그와 같이 임의로(아무런 진리도 없이)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즉 자연수는 자연법칙이 움직이는 그대로 성립된 것이므로 자연의 분합(分合)과 동정(動靜)하는 象이 數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數는 어떠한 象에 의하여 표시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도(河圖)에 의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數는 하도가 내포하고 있는 바의 象에서 그 象 자체가 발전과 통일을 반복하는 모습의 반증으로써 나타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희(代義) 때에 용마(龍馬) 등에 지고 나온 그림의 象을 상찰(詳察)한 결과 그 그림의 뜻을 알아내고 또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하도다. 그렇다면 數의 象이 하도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한다.

하도를 잘 살펴보면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이 一二三四五라고 하는 수(生數)가 전부 속에 내포되어 있고 六七八九十이라는 성수(成數)전부 표면에서 생수를 포위하고 있은즉 이것이 바로 우주를 생성하는 생성작용이 數의 생성수로써 그의 저의(底意)를 표현하고 있는 象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우주의 목적無目的的인 목적이다.

무목적적인 목적이란 말은 공욕이 있을 뿐이고 사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一水가 二火로 발전하였다가는 다시 一水로 귀장(歸藏)하고 一水는 또다시 二火로 발전하는 일을 반복하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자연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는 이와 같은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一과 二로써 주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水와 火로써 주체를 이룬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數의 성립이란 것은 바로 수화운동(水火運動)의 성립동일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一과 二의 반복운동이란 것은 바로 水와 火의 반복운동이므로水火의 象一二의 數는 동일치로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數의 연구란 것은 바로 五行의 연구이며 五行의 연구란 것은 또한 하락(河洛)의 연구인 것이다. 그런즉 數의 성립을 연구한다는 것은 곧 하도의 성립을 연구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도란 것은 一水의 통일과 二火의 분열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근거에서 數가 성립하는 모습을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一은 陽이고 陽은 一이다. 그런데 그 이라는 것은 전체를 의미하며 또한 통일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일의 본체가 바로 一이다. 란 것은 통일의 방조자이며 또한 분산의 주체인데 이것은 그의 작용하는 면에서 볼 때에는 전체의 半面에 불과하다. 그러나 一과 二라는 것은 다만 동일한 주체의 兩面이므로 본질적으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런즉 二라는 것은 다만 통일의 본체인 一이 분열하여서 二가 되고 二가 통일하면 一이 되는 중간과정인즉 一은 二의 목적이고 二는 一의 목인 것뿐이다. 그러므로 一과 二는 우주조화의 공동주체인즉 주체가 아닌 여하한 것도 一의 차위(次位)에 올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그러나 一과 二 두 개로서만 보면 一이 주체가 되고 二는 객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二火가 一水를 만드는 작용의 본원이므로 자연수의 서열은 一  다음에 二가 놓이게 되는 것이니 一二를 우주작용의 부모라고 하는것도이 때문이다. 그러나 一이 二로 발전하려면 三의 협조가 절대로 필요하다. 왜 그런가 하면 三이란 것은 一과 二의 합성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一은 순수한 陽이지만 三은 一에다가 二를 가(加)한 것이므로 이것은 一과는 달라서 음양(陰陽)의 혼성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잘 검사해 보면 三이란 것은 陰으로써 動하는 一을 유폐(幽閉)한 數이다. 그런즉 一과 三의 차이를 말한다면 一은 순수한 陽인 반면에 三은 음양의 혼성으로써 이루어진 陽(假陽)이라는 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三을 가리켜 一이 二를 生하는 방조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一이 순수하다고 하는 것은 독양(獨陽)이라는 뜻이다. 독양은 그 작용면에서 보면 陰을 얻지 못하는 陽이므로 발전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陽의 분열이란 것은 절대적으로 陰의 통일적인 압력 아래에서만이 자기의 성질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발전, 즉 一의 발전이란 것 ‘1+2 = 3’ 이라는 음양합성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음양합성을 이루지 못하는 독양은 반드시 혼성체인 三을 얻음으로써만이 우주변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三은 一이 二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의 방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연수는 二의 次位에 三이 오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二의 작용을 협조한 것은 三이었던 바 이것은 분산작용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운동에서 분산작용이 끝나면 그 다음으로는 통일작용이 시작하는 것인데 통일이란 것은 一로 돌아가는 작용이다. 그러나 一도 역시 二에서와 같이 어떠한 방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 때에 一의 통일작용을 도와서 통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四다. 四는 五行의 金이므로 당연히 水로 통일하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二는 三의 방조를 얻고 一은 四의 방조를 얻음으로써 순환작용이 이루어지므로 一二三四의 서열이 결정된 것인즉 이것이 바로 水(一), 火(二), 木(三), 金(四)의 서열(序列)이다. 여기서 우주의 목적은 水火(­二)의 반복인데 이것을 방조하는 것이 木金(三四)이라는 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수는 이러한 순서로 배열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하도가 동서남북의 내부에 이러한 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우주운동의 四大原質의 기본인 生數의 발전순서가 이러하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五는 어떻게 하여서 五位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니 그것은 五가 土化作用을 하는 중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三四의 발전을 설명하였지만 그것만으로써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주운동의 실질적인 변회는 발전과 통일작용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조절하는 작용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므로 土(五)가 들어오는 것이다. 土는 그밖에 직접 통일도 매개하는데 그것은 五(土)가 아니고 十(土)인 바 그러한 十(土)은 여기에서 五가 자화(自化)된 것이다. 

그런데 土는 위에서 말한 바의 사원질처럼 독립된 것이 아니고 다만 一二三四의 十數(一二三四의 合數가 十이다) 자체에서 일어나는 순수정기(純粹精氣)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부(一夫)는 ‘무무위(無無位)’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無無位 60數는 九九中에 배열(排列)’ 이라고 한 바 그것이 바로 土化作用의 60수는 九九中 즉, 자연수가 一에서 九까지 운행하는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五라는 것은 이와 같이 생겨난 것이므로 하도(河圖) 자체에도 그와 같은 象이 잠복하고 있다. 만일 이것을 생수에서 보면 또한 二와 그것을 방조하는 三을 합하면 五가 되고 一을 방조하는 四를 합하여도 五가 된다. 또 성수에 있어서는 七과 七을 방조하는 八을 합하면 十五가 되고 또는 六과 六을 방조하는 九를 합하면 15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生成數의 사원질(四元質) 속에 각각 土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土라는 것은 바로 四元質의 순수정기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하도 자체의 象에 의해서 볼 때에 一二三四의 다음에 五가 올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성된 생수는 만물의 명수(命數)이다. 그러나 만물의 명수란 것은 만물이 生할 수 있는 기본 즉 核이나 精의 명수인 것뿐이고 그것만으로써 만물 자체가 될 수는 없으므로 자연은 이와 같은(생수와 같은 기본이) 生數가 생기게 한 다음에는 물수(物數)가 거기에서 자화(自化)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즉 다음에는 물수 즉 六七八九十의 成數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기로 하자. 

모든 물(物)은 생수(生數)와 성수(成數) 즉 명수(命數)와 형수(形數)가 합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수가 성립되면 거기에서 형수가 자화되기 마련이다. 이것을 바꿔서 말하면 모든 생명력은 形을 이룰 수 있는 조건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생명력의 화생(化生)은 바로 形의 화생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발전에 있어서도 각각 形을 생화(生化)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수가 一三(陽) . 二四(陰)의 이질적인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수는 성수(形)로 발전하는 것인 바 그 발전의 기본은 이질적인 木火金水의 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수정기인 五土에 있는 것이다. 그런즉 五는 생수(生數)의 종점인 동시에 성수의 시점이며 또한 만물의 中인 것이다. 그러므로 中의 개념을 만물이 종시(終始)하는 절대경계의 일점一點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의 形을 상징하는 성수는 五(土)에서 어떻게 자화되는 것일까? 五는 모든 생수(生數)의 순수정기다. 정기라는 개념은 생명과 정신을 얽어매는 요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수는 또다시 五에 얽어멜 수밖에 없다. 그런즉 소위 성수라는 것은 생수의 대표(즉 순수정기) 인 五(土)에 의하여 유폐당한 생수의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성수의 구성은 5+1=6 , 5+2=7 , 5+3=8, 5+4=9, 5+5=10의 순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정신은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거니와 (7장 ‘정신론’ 에서 상술) 진실로 모든 변화는 이와 같은 생성수의 변화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런즉 數가 성립된 이유에 밝으면 밝을수록 그의 변화에 밝을 것이고 또한 만물의 변화를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런즉 상수원리가 바로 변화원리라고 하는 것도 역시 저변(這邊)의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이다.

원문출처: [한동석선생의 우주변화원리 p194~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