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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북부여기

북부여기 상(北夫餘紀 上)-3. 3,4세 단군 고해사, 고우루 재위 49, 34년

by 광명인 2023. 10. 21.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 재위 49년
번조선 유민 최승의 낙랑국 건설

고해사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신(환기 7029. 신시개천 3729. 단기 2165, BCE 169)년이다. 정월에 낙랑  최숭崔崇이 해성에 곡식 3백 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에 이르러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이 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BCE 195)년 겨울이었다.

재위 42년 계축(단기 2206, BCE 128)년에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셨다.

재위 49년 경신(환기 7077, 신시개천 3777, 단기 2213, BCE 121)년일군국一群國에서 사절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이 해 9월에 고해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高于婁께서 즉위하셨다.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일명 해우루) 재위 34년

위만정권 우거왕의 침략과 해성 수복

고우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유(환기 7078, 신시개천 3778, 단기 2214, BCE 120)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게 하셨는데, 고진이 점차 병력을 증강시키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을 세웠다. 고진의 벼슬을 높여 고구려후高句麗候로 삼으셨다. 

재위 3년 계해(단기 2216, BCE 118)년에 우거의 도적떼가 대거 침략해 왔다.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전부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재위 4년 갑자(단기 2217, BCE 117)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공격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재위 6년 병인(단기 2219, BCE 115)년에 임금께서 친히 정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격파하고, 계속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셨다. 이로써 구려하九黎河(지금의 요하) 동쪽이 전부 항복하였다.

재위 7년 정묘(단기 2220, BCE 114)년에 임금께서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려南閭에 군대를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澈(무제)* 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郡을 설치 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
이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海夫婁즉위하였다.

해부루의 가섭원 부여 건국
동명왕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어 계속 위협하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몹시 난감하였다. 이때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주청하기를 “통하通河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권유하여 마침내 도읍을 옮기니, 이 나라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혹은 동부여東夫餘라 한다.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왕검성王儉城: 마한 왕검성(백아강)은 낙랑 왕 최숭이 도읍했던 곳으로 지금의 대동강 평양을 말한다.

남려성南閭城: 한서 무제기 원식 원년(BCE 128) 조에 "가을에 ,,, 동이의 예군 남려 등이 28만 명을 데리고 투항해 와서 창해군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창해군은 지금의 하북성 창주시 일대로 보고 있다. 그런데 북부여와 창해군 사이에는 우거정권이 막고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한나라에 투항한 남려와 구분되는 북부여의 제후국으로 추정 할 수 있다.

고진高辰: 북부여 2세 모수리단군의 아우이다.

서압록西鴨綠: 고대에는 지금의 압록강 뿐 아니라 요하와 송화강, 흑룡강도 압록으로 불렀다. 삼국유사의 순도조려에 "요수는 일명 압록이었는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라고 밝히고 있다. 동압록은 지금의 압록강이고, 서압록은 지금의 요하로 동서 압록은 삼한의 경계를 흐르던 강이다.

살수薩水: '물이 살살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네 곳이 있다.
1. 요동반도에 있는 개평현 주남하
2. 요동반도의 대양하,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살수를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라 주장하였다(<조선일보>, 1980. 12. 14).
3. 청천강
4. 청주 무심천: 여기서는 네 곳 가운데 요령성 개평현 주남하를 말한다(최동, 조선상고민족사, 살수고)

좌원坐原: 위당 정인보는 좌원을 남만주 관전현 성동산과 통화현 홍석납자의 중간에 있는 긴 평원이라 하였다(정인보 조선사연구 122쪽). 그러나 BCE 115년에 이미 요하 동쪽이 모두 항복했다 했으니 이 좌원은 요하의 서쪽 대릉하 상류 능원현 지역으로 추정된다.

유철劉澈(BCE 156-BCE87): 전한의 7세 황제 무제(재위 BCE 141~BCE87). 아명은 체, 자는 통이고, 호는 세종, 시호는 효무황제이다. 경제와 효경황후 왕지의 열째 아들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 위만정권 등을 멸망시켜 당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중국 역사상 진시황제 · 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평나平那: 지금의 하북성 창려이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이 말은 종래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아란불에게 한 것으로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아란불阿蘭弗: 동부여의 재상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 동부여'에도 보인다.

가섭원迦葉原: 가섭원의 전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조에도 보인다. 가섭원은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