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 교수는 우리의 자아를 크게 나누어 분류해 보면, 지금 여기서 특정한 경험을 하는 경험자아와 경험한 것을 기억으로 축적하는 기억자아, 그리고 이 둘을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배경자아는 마치 태양과 같이 밝으며 또한 텅 빈 고요한 상태인데 명상 수행이란 이 배경자아를 나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설명하는데요. 환단고기의 삼신오제본기의 진아편을 보면, 그와 유사한 개념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삼신의 원리에 따라 영혼과 각혼과 생혼의 삼혼三魂이 있으며, 이 삼혼은 영식靈識과 지식智識 그리고 의식意識인 삼식三識에 뿌리를 두고 뻗어 나간다는 가르침인데요. 고대 우리 선조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배경자아를 해석해보면, 배경자아란 영식靈識에 뿌리를 둔 영혼靈魂의 개념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명상은 마음근력 훈련이다]
마음근력을 강화하는 것은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동일자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는데 어떻게 ‘나’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면소통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안에 '자아'가 여러 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과학과 심리학은 이미 다양한 자아에 대해 개념화하고 이론화했다. 여러 자아에 대한 분류법은 몇 가지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법은 '지금 여기서 특정한 경험을 하는 경험자아'와 '경험한 것을 일화기억으로 축적하는 기억자아'로 구분하는 것이다. 기억자아는 개별자아 혹은 에고(ego)라고도 불리며 일상적인 자아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험자아나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지금 음악을 듣고 있다. 이때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참 좋다고 느끼는 것은 경험자아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예전에 누구와 어디에서 이 음악을 들었었지'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기억자아다. 이러한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배경자아다. 다양한 형태의 내면소통 중에서도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배경자아의 알아차림이다.
배경자아의 존재는 조용히 늘 우리의 의식 저편에 있기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 존재를 잊고 지낸다. 그저 경험자아나 기억자아가 나의 본모습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이기에 묘사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늘 느낄 수 있다. 창문을 닫으면 방 안은 어두워지고, 창문을 열면 환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창문이 빛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단지 햇빛을 통과시켜줄 뿐이다. 경험자아는 마치 창문과도 같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햇빛을 통과시켜주는 존재다. 그 창문 위에 덧입혀진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커튼은 기억자아에 비유할 수 있다. 커튼 은 제한된 개성과 정체성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창문이나 커튼은 빛의 원천인 태양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배경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경험자아를 통해 드러나고 기억자아에 의해 제한되거나 가려지지만, 배경자아는 늘 그대로 있다. 배경자아를 '나'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다양한 명상 수행이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주체이며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를 늘 알아차리는 존재다. 배경자아는 그저 텅 비어 있고 고요하다. 그래서 평온하고 온전하다.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은 모두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일종의 소음이다. 감정도 생각도 경험도 넘어 선 곳에, 모든 소음이 사라진 그곳에 고요함은 떠오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없었던 고요함이 새로 떠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고요함은 원래 거기 그렇게 변함없이 있었고, 다만 소음이 고요함을 잠시 가렸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내면소통 명상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명상을 잘해내는가, 얼마만큼 생각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가, 무엇을 얼마나 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얼마나 놓아버릴 수 있는가, 얼마나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의도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은 늘 거기 그렇게 고요함으로 존재하는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요함은 무엇을 애써서 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게 되면 오히려 시끄러운 소음만 생길 가능성이 크다. 고요함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때 떠 오른다. 나의 고요함은 늘 거기 그대로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내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우리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한다. 만약 지금 명상을 하고 있는데 고통스럽고 괴롭다면 아마도 명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산길을 걷는데 커다란 돌덩어리가 하나 나타났다고 하자. 그 돌은 무거운가? 그 돌을 굳이 들어 올리려 한다면 엄청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그 돌을 들어 올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무거운 돌이 아니다. 돌을 들고 있으면서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돌은 무거움의 고통을 준다.
내면소통 명상은 "나는 왜 지금 이 무거운 돌을 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악착같이 이 돌을 들고 있어야겠다는 집착은 어디서 왔는가? 이 돌을 내려놓는 것이 마치 삶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 인가? 나는 '당연히' 이 돌을 꼭 들어야만 한다는 당연함은 어디서 왔는가? 사회적 통념? 주변의 시선? 확실한 것은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배경자아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반드시 이 돌을 들어야만 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자아이고, “돌이 너무 무거워서 고통스럽다”라고 느끼는 것은 경험자아다. 배경자아는 이러한 집착과 고통을 조용히 알아차릴 뿐이다. 무거운 돌을 들고 있겠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 다. 돌을 내려놓는 힘이 곧 마음근력이다. 명상은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이다.
-출처: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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