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이틀동안 경주의 천년 고도에서 아시아 태평양의 미래가 논의되었습니다.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경주 선언'을 통해 새로운 협력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글로벌 무역 침체, 인구 구조 변화, 지정학적 갈등이라는 삼중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한국은 AI 기술과 K-컬처를 아태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격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성과의 이면에는 불편한 질문이 남습니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절박한 문제, 기후 위기는 왜 의제에서 사라졌을까? 그리고 북한이 배제된 한반도 평화 논의는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AI 시대의 주도권, 한국이 잡다
이번 회의의 가장 눈부신 성과는 미래 기술에 대한 공동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한국 주도로 승인된 'APEC AI 이니셔티브'는 'AI 기반 사회'와 '모두를 위한 AI'를 핵심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AI가 낳을 수 있는 기술 격차와 독점의 위험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혁신의 과실을 모두가 나누겠다는 선언입니다. 기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담긴 것입니다.
선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CEO 서밋에서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한국을 AI 거점으로 삼겠다며 파격적인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최대 14조 원 규모의 GPU 26만 장 공급. 전 세계가 목말라하는 최신 GPU에 대한 우선 접근권을 한국이 확보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하드웨어 거래가 아닙니다. 'AI 동맹', 나아가 '플랫폼 동맹'으로 평가받는 이 협력을 통해 한국은 AI 반도체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습니다. 주권형 인공지능(Sovereign AI) 개발에도 결정적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기술 주권 시대에 한국이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셈입니다.
경제 통합의 재확인, 그리고 11년 만의 악수
'경주 선언'은 글로벌 무역 침체라는 당면 과제를 정면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시장 주도형 지역 경제 통합과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달성 의지를 재확인하며 '푸트라자야 비전 2040'의 약속을 되새겼습니다. 인구 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공동 프레임워크도 채택되었습니다. 저출산·고령화라는 공통의 도전을 함께 풀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외교적으로는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11년 만에 성사된 한중 정상회담입니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한중 관계를 재설정하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가 아태 지역 번영의 '필수 조건'임을 강조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실현을 위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양국은 민생 협력 강화를 우선 추진하며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현실도 있습니다.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잠재적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반발 역시 상존합니다. 무엇보다 평화 논의의 핵심 주체인 북한의 적극적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이번 평화 논의의 근본적 한계로 지적됩니다. 당사자 없는 평화 논의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경주 선언'에 '문화 창조 산업'이 명시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K-컬처라는 소프트 파워가 아태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공식 인정받은 것입니다. 문화가 경제이고, 경제가 곧 외교라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확인한 순간입니다.
불편한 침묵: 기후 위기는 어디로 갔는가
화려한 성과 뒤에 깊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인류 생존의 근간을 위협하는 기후 위기에 관한 논의가 공식 의제와 성과 발표에서 사실상 누락되었다는 점입니다.
APEC 정상들은 글로벌 무역 침체의 단기적 해법과 AI 기술 주도권 확보를 최우선 순위에 두었습니다. 단기적 경제 이익과 기술 우위 경쟁에 몰두하는 동안,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환경 지속 가능성 문제는 '불편한 진실'처럼 다뤄지길 회피당했습니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인류의 미래가 AI와 반도체에 달려 있다 한들, 그 모든 산업이 존립할 기반 자체, 즉 지구 환경이 위협받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해수면은 상승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기후 현상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일상입니다. 생태계는 붕괴 직전입니다. 이것은 먼 미래의 추상적 위험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구체적 재난입니다.
APEC이 '푸트라자야 비전 2040'을 재확인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논의하는 장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봅시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가 공식 공동 대응 의제에서 배제된 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닙니다. 이는 이번 경주 APEC의 가장 큰 명암이자, 아태 지역 리더십의 진정성에 던져진 근본적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전술적 승리, 전략적 공백
2025 경주 APEC은 한국이 미래 기술과 외교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당면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봅니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AI 동맹 구축, 한중 관계 재개, K-컬처의 공식 인정. 이 모든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성과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근본적 문제에 대한 공백이 보입니다.
첫째, 한반도 평화 논의에서 핵심 주체인 북한의 합의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당사자 없는 평화는 공허한 수사에 그칠 위험이 큽니다.
둘째,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위협인 기후 위기를 외면했습니다. 미래 기술에 환호했지만, 지구의 경고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주에서 쏘아 올린 협력의 신호탄이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효과를 성취하려면, 다음 번 모임에서는 반드시 AI 기술과 기후 문제가, 경제와 환경이 함께 논의되고, 그리고 평화의 당사자들이 함께 하는 상생의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천년 고도 경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짜 교훈일지도 모릅니다. 미래는 화려한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지속 가능한 환경과, 상생의 질서 위에서만, 평화로운 미래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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