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는 바로 ‘엔 캐리 트레이드의 대규모 청산’이다. 수십 년 동안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은 엔화를 세계 최대의 ‘레버리지 통화(leverage currency)’로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일본인 투자자만의 전략이 아니라, 전 세계의 헤지펀드, 연기금, 투자은행, 보험사 등 수많은 글로벌 자금이 엔화를 차입해 미국이나 신흥국의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구조를 만들어왔다. 이 구조는 지금 전 세계 금융 시스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최근 일본은행(BOJ)이 장기간 유지해온 비정상적 금리 정책의 전환 조짐을 보이자, 시장은 긴장하고 있다. 엔화가 강세로 전환되면, 수조 달러에 달하는 캐리 트레이드 포지션이 한꺼번에 청산되며, 이는 세계 자산시장의 유동성을 급격히 위축시키는 트리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BOJ의 우에다 총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시 금리 인상 또는 외환시장 개입을 시사했고, 미국의 파월 연준 의장 역시 미국 장기금리(특히 10년물 국채 금리)를 조절하여 달러 강세를 유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엔화의 급등을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험은 예측 가능한 정책 대응이 아니라, 불확실한 외생적 변수들에서 비롯될 수 있다. 트럼프의 재집권과 함께 불붙을 가능성이 있는 고강도 보호무역주의, 대만 해협이나 중동에서의 지정학적 충돌, 또는 중국 부동산 시장 및 그림자 금융 붕괴 같은 블랙스완급 사태가 발생하면 시장 심리는 순식간에 ‘리스크 오프’로 전환될 수 있고, 그 순간 수많은 캐리 트레이드 포지션이 급격히 청산되면서 엔화 급등, 글로벌 자산 가격 폭락, 유동성 붕괴라는 연쇄 반응이 촉발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만약 일본이 난카이 해곡 대지진과 같은 초대형 자연재해를 겪는다면 그 충격은 단순한 금융위기를 넘어서게 된다.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 일본 산업 인프라 붕괴, 수천조 원 규모의 재건 비용은 일본 정부가 해외에 보유한 자산을 대거 매각하고, 이를 엔화로 환수(리패트리에이션, Repatriation)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엔화는 급등하고, 일본계 자금이 미국 주식, 국채, 신흥국 채권 등에서 이탈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인 유동성 수축과 시장 변동성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그야말로 “금융 지진”이 발생하는 셈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엔화는 대규모 송환 수요를 예상한 시장 심리에 의해 단기간에 강세를 보였고, 이를 막기 위해 G7 국가들은 이례적으로 공동 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2025년 세계는 더이상 공조의 시대가 아니라, 분열의 시대다.
- 미국은 역사상 최고 수준의 부채와 정치적 양극화로 금리 대응 여력이 제한되어 있다.
- 유럽은 에너지 구조 위기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중국은 성장률 둔화, 부채 위기, 자본 유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 러시아는 제재 상태로 국제 협조가 불가능하다.
-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는 다시 각자도생의 시대를 예고한다.
결국, 이번에는 엔화 급등을 막기 위해 통화 개입에 나설 나라가 없다.
그 누구도 일본의 환율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멈추면, 세계도 흔들린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단순한 투자 전략이 아니라, 세계 금융시장을 떠받치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층선처럼, 평상시에는 조용히 버티고 있지만 지각이 흔들리는 순간, 가장 먼저 무너질 수 있다. 일본이라는 ‘신용의 심장’이 멈추는 날, 우리는 세계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하게 연결돼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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