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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조한전쟁과 한사군의 실체

by 광명인 2025. 2. 3.

[사마천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사마천이 살았던 당대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한사군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 언급이다. 그러나 사기열전에 나온 사군四郡에 관한 서술은 지나치게 간략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전무하다.

기록에 따르면,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강과 노인의 아들 를 시켜 끝까지 저항하던 성이를 살해한 후,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以故遂定朝鮮, 爲四郡]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사군四郡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더군다나  진번 임둔이란 지명은 이미 위만정권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등장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패수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한사군 한반도설은 역사적 맥락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만약 조한전쟁이 한무제의 결정적 승리로 마무리된 영광스러운 전쟁이었다면, 춘추필법으로 서술된 사기에서 사군四郡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위사군爲四郡" 이후의 기록이다. 전쟁을 주도했던 한무제의 장수인 좌장군과 누선장군은 전투 수행에 실패한 이유로 기시형을 당하거나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반면, 조선의 유민들은 오히려 우거왕을 살해하고 위만 정권을 무너뜨린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을 받았다. 이는 조선의 신하들이 위만정권을 조선의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조한전쟁은 한무제가 완벽히 승리를 거둔 전쟁이 아니었으며, 한사군 설치 또한 실제 역사라기보다 후대의 조작이거나 사마천의 희망적 서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핵심부분 발췌]

조선의 왕이었던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의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아전[吏]을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국(秦國)이 연국을 멸하고 요동 밖 요(徼)에 소속시켰다. 한국(漢國)이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국에 소속시켰다. 연국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과 만이(蠻夷)들을 복속하여 거느리고 연국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때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의 시대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다.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는 것을 약속하고 새(塞) 밖의 만이(蠻夷)들을 보호하여 변경에 도적이 들끓는 것을 없게 하였다. 모든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막지 아니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것을 듣고 허락하였으므로 위만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眞番臨屯皆來服屬]. 영토는 수 천리가 된다.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서는 유인하여낸 한국(漢國)의 망명인이 번성하여 많았다. 위만은 입견(入見)을 막아 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로써 천자와 통하고자 하였지만 통하지 못하였다. 원봉(元封) 2년(BC109)에 한국(漢國)은 사신 섭하(渉何)를 보내어 우거를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우거는 즐겨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국경 상의 임패수(臨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마중나온 조선 비왕(禆王) 장(長)을 찔러 죽이도록 하고 임패수를 건너 새(塞)로 달려 들어간 뒤, 천자에게로 돌아가 조선장수를 죽였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였은즉 힐문하지 아니하고 섭하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이를 원망하고 군사를 발하여 엄습하여 섭하를 죽였다.

사마천 사기로 추정되는 왕험성의 위치(좌),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금서룡이 조작한 한사군의 위치(우)

천자(한무제)가 죄인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에 배를 띄웠다. 병사 50,000명을 거느리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출발하여 우거를 공격하였다. 우거는 병사를 발하여 왕험성을 막았다. 좌장군의졸정(卒正) 다(多)는 요동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종격(縱擊)하게 하였지만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만 도망왔으므로 법에 따라 죄를 물어 목을 베어 죽였다. 누선장군제(齊)의 병사 7,000명을 거느리고왕험성에 먼저 도착하였다. ,,, (중략)

원봉(元封) 3년 여름 니계상 참은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은즉, 우거의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반하여 다시 관리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우거의 아들 장강(長降)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꾀어 성이를 죽였다. 이에 조선은 드디어 평정되었고 4개의 군으로 하였다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니계상 참을 봉하여 홰청후(澅清侯)로 삼았고, 재상 한음추저후(萩苴侯)로 삼았고, 장군 왕겹평주후(平州侯)로 삼았고, 우거의 아들 장강기후(㡬侯)로 삼았고, 노인의 아들 최는 아버지가 죽은 공이 있어 온양후(温陽侯)로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들여 놓고 공을 다퉈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그러뜨렸으니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도 열구(列口)에 이르러 당연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제멋대로 먼저 나가서 많은 병사를 잃고 패하였으므로 당연히 죽여야 하나 속죄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전문 보기 클릭]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원문 보기 클릭]


[패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한반도설, 요동설, 요서설로 이렇게 나누는데, 현재 국내 다수설은 청천강설과 압록강설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와 근현대 주장된 패수한반도설과 요동설은 당대의 문헌 기록인 사기와 한서, 수경, 설문해자 등에서 말한 패수의 물의 흐름, 즉 북에서 남 또는 동쪽이나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요동이나 한반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정규철 박사는 1차 사료인 고문헌에 의거해 다양한 정황들을 살펴서 패수하북성, 현재 북경 근처를 흐르고 있는 조백하가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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