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威化島하면 섬 도島자를 쓰니까 섬이 아니냐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이 도島라는 말은 우리 한반도韓半島라는 말처럼 3면이 물로 둘러쌓인 곳이나 강가에 있는 곳도 도島라고 불립니다. 인하대 허우범 교수는 여러 사료들을 토대로 해서 위화도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위화도가 아니라 압록강 너머 지금의 중국 단동시 관전현 서점자에 위치한 위화도라는 걸 새롭게 밝혀낸 것입니다. 강단 사학계에서 사실 이것을 굉장히 예민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위화도를 새롭게 찾았다라는 것은 그동안의 기록들 즉,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었던 고려나 조선의 조선 초의 국경선들이 잘못돼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 초 북쪽 경계 북계는 어디인가?
먼저 위화도는 잘 아시는 것처럼 고려 말에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서 이성계가 좌우군 약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서 진군을 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게 됩니다. 회군을 해서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요. 그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위화도가 지금 알기로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화도가 위치가 잘못됐다라는 주장을 한 분이 있죠. 누구냐면 인하대의 허우범 박사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제일 처음에 문제로 삼은 게 고려사에 나와 있는 기록입니다.
左右軍渡鴨綠江, 屯威化島 좌·우군(左右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
(고려사 권 137 열전, 1388년)
압록강을 건너 주둔했다는 이 문구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위화도에 주둔한 게 아니구나. 압록강을 건너서 있는 위화도에 주둔을 했다라는 문제 제기를 처음으로 하게 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아래와 같이 되어있는데요.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라고 일컫고 주성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기서 압록강의 지류라고 돼 있는데, 위에 보이는 위화도와 검동도는 압록강의 지류가 아닌 본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압록강의 본류에 있는 지금의 위화도와 검동도는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있고, 또 이 주성에서 25리라는 말을 통해서 지금 천리장성을 위 그림과 같이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 때 쌓았다는 천리장성이 압록강 남쪽에 있다. 여기서 시작을 한다라는 것인데 위화도의 위치가 잘못됐다면 천리장성의 위치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겠죠.
정조실록을 보면은 위화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위화도(威化島)는 토지가 비옥한데도 오랫동안 버려져왔습니다. ... ‘성조(聖祖) 께서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또는 ‘연변(沿邊)의 땅이다.’ 또는 ‘오래 버려진 땅이다.’라고 합니다.
(정조실록 48권, 1798년)
연변이라하면 도로나 강 언저리 또는 가장자리에 있는 것인데요. 지금의 위화도는 강 중심에 있습니다. 중앙에 있죠. 그래서 이 연변의 땅이라고 하는 말에서도 지금이 위화도가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고요.
정확한 위치는 세종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송골산(松骨山) 동북쪽 모퉁이의 대창산(大昌山) 서동(西洞)이 의주(義州)의 위화도(威化島)와 금음동도(今音同島)의 두 섬 사이의 거리가 삼식경(三息耕) 남짓한 도정(途程)으로서 길이 평탄하니, 곧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세종실록 113권, 1446년)
이 송골산 동북 그리고 거리가 삼식, 이 삼식은 지금으로 치면 90리입니다. 한식이 30리기 때문에 삼식은 90여리 남짓한 곳에 위화도가 있다라는 것인데, 이 송골산은 지금 오룡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룡산의 동북 90리에 위화도가 있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정조실록에 보면,
"압록강을 막 건너 만성(灣城)에 이르면 강줄기가 셋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있는 한 섬의 이름이 위화도(威化島)입니다." (정조실록 12권, 1781년)
그래서 강줄기가 셋으로 나뉘는 그 가운데에 위화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위화도는 압록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는 중심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화도가 아니다. 그래서 인하대 허우범 교수가 실제 이 위화도를 찾아낸 겁니다.
이 송골산 동북 90리와 강줄기가 셋이 만나는 곳 등 다양한 문헌적 자료들을 참조해서 중국 단둥시 관전만족자치현에 있는 서점자(徐店子)라는 곳이 바로 위화도다 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위화도하면 이 섬 도島자를 쓰니까 섬이 아니냐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구요. 이 도라는 말은 우리 한반도라는 말처럼 (3면이 물로 둘러쌓인) 강가에 있는 곳도 도島라고 불렀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북간도 할 때 도島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 지역에 가보면, 작은 강의 지류들이 흐릅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거나 장마가 지면 이쪽이 물에 많이 잠기는데 크지 않은 이 평야 지대입니다. 그래서 길이 굉장히 잘 나 있고, 요충지로 태조 이성계가 공적비도 세울 수 있는 곳이죠.
그래서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해서 위화도의 위치는 지금이 위화도가 아니고 압록강 건너 관전현에 있는 위화도다는 걸 새롭게 밝혀낸 것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 사실 굉장히 예민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위화도를 새롭게 찾았다라는 것은 그동안의 기록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었던 고려나 그리고 조선의 조선 초의 경계들이 잘못돼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입니다.
우리가 또 잘 못 알고 있는 게 뭐냐면, 조선 세종 때 4군 6진이 개척 되면서,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조선의 경계가 확정되었다. 이전까지는 이 고려의 천리장성이라고 해서 고려의 북계가 원산만까지였다가 쭉 밀고 올라가서 고려 말에는 의주에서 길주까지 이어지는 이곳이 바로 고려 말의 경계선이었고, 조선 초가 돼서야 이제 압록강과 두만강 경계로 했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건데요. 그게 잘못됐다는 걸 또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세종이 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을 잡아오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심온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나중에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심온이 당시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이 사신으로 가 있던 심온을 어디에 가서 잡아오게 하냐? 자 읽어보시면 아래와 같은 대목인데요.
"역관 전의로 하여금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연산참(連山站)으로 가서 심온(沈溫)을 기다려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잡아오되, 연산참을 지나가지 말고, 심온이 만약 사신과 함께 오거든 어머니의 병을 핑계하고 불러내어서 잡아오게 하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2권, 1418년)
이 연산참이 명나라와 조선의 경계였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곳이 국경이었기 때문에 이 연산참을 넘어가지 말라는 거죠. 강조하는 게 연산참을 넘어가지 말고 심온이 연산참으로 들어오면 그때 체포하라 라는 것이죠.
또 성종실록을 보면은 고황제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을 말하는 것인데,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죠.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성종실록 134권, 1481년)
그래서 조선 초 그리고 명나라 초기 조선의 경계가 어디냐라고 했을 때는 요동의 동쪽 180리에 있는 연산파절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연산파절이 바로 연산참이고요. 그다음에 이 동팔참은 연산파절을 경계로 해서 8곳에 참站을 두었습니다. 자 이 연산관, 연산파절, 동팔참을 알 수 있는 게 대청광여도의 요동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걸 확대하면, 이 연산관을 경계로 해서 동쪽의 조선과 서쪽의 명나라가 서로 경계를 접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경계가 표시가 돼 있어요.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위화도의 위치도 더 북쪽으로 가야 되고, 또 이 조선과 명나라의 경계도 이 연산관, 연산파절, 연산참을 경계로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웠던 고려 말, 조선 초의 경계가 지금 잘못돼 있는 거죠. 특히 서북 지역을 주로 해서 이렇게 봤는데요. 그래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이쪽 지역에 대해서 이 고려, 조선의 북계에 대해서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있고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미국 하와이대에 동아시아 역사 교재에도 보면은 이 명나라와 조선의 경계를 표시할 때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고, 그 요동반도에 있는 이 연산파절을 경계로 해서 이렇게 그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빌지도(1737년 제작)에 보면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로 표시가 돼 있잖아요. 예 그걸 따라서 아마도 이렇게 그은 것 같습니다. 근데 실제로는 이 밑으로 더 내려와야 되죠.
참조자료: [대한사랑 초대석 위화도의 비밀 1부]
참조자료: [대한사랑 초대석 위화도의 비밀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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