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정교하게 얽혀 있어, 단 하나의 사실을 조작하는 것조차 어렵다. 더욱이, 성공적인 역사 왜곡을 위해서는 단편적인 조작이 아니라 전체 서사를 일관되게 재구성해야 하며, 이는 단순한 기만술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특정 국가의 역사를 조작하려면 그 시대 다른 나라의 사서까지 왜곡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사적 진실은 다양한 사료 속에서 교차 검증되며, 조작이 시도될수록 모순과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일제가 한국사를 조작하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자원과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결국 제자리를 찾게 마련이며, 왜곡된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민낯을 드러내고 결국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사학자들하고 남한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나라의 낙랑군을 북한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북한 역사학계는 그 낙랑군을 지금의 요녕성 혜성시 부근으로 바라보고 있고, 남한의 민족사학계는 하북성 노룡현 부근으로 바라보고 있다. 북위의 태무제가 사신을 고구려 평양성의 장수왕에게 보내는데, '그 평양성이 바로 요나라 동경이다'라고 요사에 나와 있다. 이 기록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지금의 요녕성 요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요사 지리지 기록을 보면은 암연현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암연현은 지금의 요녕성, 개주를 뜻한다. 그런데 '이 암연현의 동쪽은 신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통일신라의 강역이 지금의 만주까지 걸쳐져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1차 사료이다.]
당시 요사 지리지 기록을 보면은 이 암연현에 관한 기록이 지금의 요녕성, 개주를 뜻하는 겁니다. 동쪽은 신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통일신라의 강역이 지금의 만주까지 걸쳐져 있었다라는 거를 말해주는 1차 사료죠. 오늘은 한국사의 강역 문제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 하는데요. 중점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 하는 부분하고 이것과 연결해서 통일신라의 강역까지도 이게 같이 연결되는 그런 부분입니다.
일단은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가 어딘가 하는 문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장수왕이 재위 15년, 서기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했다라고 하죠. 그런데 이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서는 다들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한 강단사학계는 반도사관에 따라서 그냥 평양이라고 하고 있고, 북한 학계도 평양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양에 이제 동북쪽에 대성산성이라고 있는데, 그곳을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김부식이 평양으로 천도했다라고 말할 때 그 전에도 평양이라는 이야기가 또 나오죠. 동천왕조에도 평양으로 천도했다라고 나오고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평양이 한 군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평양하고 패수를 연결시켜서 말씀한 적이 있었죠. 중국 사료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관련한 기록에 남아있는 곳은 원사 지리지에 동녕로(東寧路)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에 바로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관련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뭐라고 말하냐면 원나라 동녕로, '이 동녕로(東寧路)라는 것이 본래는 고구려의 평양성이다. 그런데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그리고 또 '한나라 낙랑 땅이다. 그런데 장수왕이 처음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라 하는 이야기죠.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 가지고 '압록수 동남쪽 천리로 옮겼다. 그런데 거기는 옛 평양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구절이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원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동녕로, 이 지역은 어디냐면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게 전혀 아닌 거죠. 이 원사보다 조금 일찍 나오는 기록이 요사인데, 요사 지리지에 '동경도 해주'부분이 있어요. 이 기록에도 방금 원사에서 읽었던 것과 마찬가지 내용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경도 해주'를 지금 중국 학계에서는 요녕성 혜성시로 보고 있어요.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과거 낙랑군이 있던 위치를 혜성시 부근으로 바라본 것이 이런 사료들을 다 이제 읽어본 결과로 나온 것이죠. 그래서 북한도 바로 이런 기록들을 가지고 낙랑군이 있던 지역을 지금 현재 요녕성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남한의 민족사학계는 중국의 여러 기록들이 낙랑군을 요동에 있다라 하고, 그 요동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일대를 뜻하는 것이죠. 그리고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곳이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여기가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영평부 자리죠, 뭐 이쪽이다라고 하는 기록들이 나오니까 남한의 민족사학계는 북한의 주장보다도 훨씬 더 인제 서쪽으로 가서 인제 하북성 일대라고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일본의 식민사학자들하고 남한의 강단 사학자들은 낙랑군을 북한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북한 역사학계는 그 낙랑군을 지금의 요녕성 혜성시 부근으로 바라보고 있고, 남한의 민족사학계는 하북성 노룡현 부근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요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동경도 해주, 요녕성 혜성시를 말하는 건데요. 혜성시 산하에 암연현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런데 당시 요사 지리지 기록을 보면, 이 암연현에 관한 기록이 지금의 요녕성 계주, 즉 중국 학계에서는 이 요녕성 계주를 뜻한다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기록에 뭐라고 돼 있냐면은 '동쪽은 신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통일신라의 광역이 지금의 만주까지 걸쳐져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1차 사료죠.
근데 우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다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신라의 강역이 옛날 백제 땅과 지금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일부까지 확대했다. 그다음에 문무왕이 평양 그 이남의 땅을 갖기로 중국 당나라와 합의한 이후에 비로소 통일신라의 땅이 지금의 평양까지 확대를 했다. 이렇게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중국 기록들을 보면 신라 강역이 분명히 지금의 만주까지 걸쳐져 있었다는 기록들이 명확히 나오는 거예요. 통일실이 신라 사료를 이렇게 보면은 신라가 말은 통일했다고 그러고, 차지한 광역을 보면은 이게 뭐 그냥 인제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일부만 차지하고 나머지 땅은 다 뺏겼지 않냐? 인제 이렇게 해석을 해 왔는데 우리나라 역사 지리 지식은 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살펴봐야 되는데요. 살펴보는 데 기준이 물론 이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되겠고, 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 부분들은 중국의 기록들을 가지고 살펴봐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기록을 가지고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 북방 강역을 살펴보면, 지금의 요녕성 혜성시 동쪽까지는 진출하고 있었다. 그쪽까지는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사 동경도에 보면 동경 요양부조가 나와요. 중국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지금의 요양시를 뜻하는 걸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와 있는 요양이 과연 지금의 인제 요녕성 요양시인가 이 부분은 아직도 이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은 원위, 그러니까 북위를 갖다가 어떤 기록에서는 인제 원위라고 말하는데, 위나라는 2개가 있었죠.
하나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있었고, 그다음에 중국사 보통에서 말하는 북위, 북위는 탁발 씨가 세운 위나라를 뜻하는 건데, 이 탁발 씨가 세운 위나라를 왜 원위라고 하냐면, 위나라가 낙양까지 차지하고 나서, 선비족 탁발 씨들을 중국 한족과 비슷하게 바꾸는 한화 정책을 수행하게 되죠. 그래서 성씨를 탁발씨에서 원씨로 바꿉니다. 그래서 어떤 중국 기록들은 원위라고 나오는데, 그 원위에 태무제는 재위기간이 408년에서 452년까지예요. 그러니까 장수왕이 천도했을 때 위에 황제로 있던 인물이죠.
이 태무제가 사신을 평양성에 보냈다. 그런데 그 평양성이 어디냐면 바로 '요나라 동경이 바로 평양성이다'라고 해가지고, 요사에 나와 있는 기록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을 지금의 요녕성 요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최소한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납득이 잘 안 가는 거예요. 당시 장수왕 그때 다른 기록들을 보면 당시 장수왕이 북위 및 북연과 아주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데, 평양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고구려의 국시인 다물을 포기하는 겁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지금의 요양인가, 아니면 요양보다 더 서쪽인가는 조금 더 검토해 봐야 됩니다만 지금 현재의 평양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당나라 고종이 여기(요녕성 요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했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안동 도호부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수도 자리에 설치했다해서 무조건 평양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아니라는 거죠. 이 안동 도호부가 있던 자리도 바로 만주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안동 도후부가 만주에 있어야 여러가지 설명들이 말이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국의 구당서를 보면은 처음에 안동도호부가 있다가 고구려인들이 저항하니까 한번 옮기죠. 안동도호부를 평주라는 곳으로 옮겼다라고 구당서에 기록이 돼 있는데, 평주가 어디냐면,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지금의 민족사학계 쪽에서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고 말하는 평주로 옮겼다라고 중국 기록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주에서 만주로 옮겼다라는 건 이해가 가지만, 북한의 평양에 있다가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에게 쫓겨 지금의 하북성까지 옮겨갔다는 것은 설명하기가 힘들죠.
그래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저도 물론 예전에 그냥 이런 문제의식 가지고 있지 않고,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배울 때는 아 평양인가 보구나라고 해서 공부를 했는데, 차차 이런 사료들, 중국 원사료들을 보다 보니까 이 평양일 수가 없다 라고 하는 확신이 이제 드는 거죠. 이런 확신은 전부 다 중국의 사료를 바탕으로 설명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뭐 나당전쟁 때, 신라군과 당나라가 싸운 뭐 호로고성을 지금 임진강변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거기 답사가 보면 거기는 싸울 장소가 아니에요. 그냥 평지고 그런 좁은 지역에서 그렇게 수많은 대군이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료들은 나당 전쟁이 전개됐던 자료들도 다 최소한 만주 지역에 가서 찾아야 실제 전투지를 찾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조선의 유학자들 그 사대주의 사상으로 축소해 놓은 우리 강역, 여기에다가 또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반도사관을 가지고 우리 강역을 반도 내에 전부 다 축소시킨 것을 아직까지도 한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들을 빨리 원래 있었던 자리 그러니까 제가 다른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료에 나와 있는 대로 그리고 그 당시 국제정세가 말해주고 있는 그런 합리적인 장소로 실제 있었던 장소로 빨리 바꿔가지고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참조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xEV_h2uCY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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