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고구려 영양왕때 역사서 신집 5권이 있었고, 그 전에 유기라는 역사서가 있었다고 전한다. 유기留記와 관련해서 단군세기는 "3세 가륵단군이 신지 고설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구려의 모든 역사서들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가을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 평양성과 함께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후백제 견훤이 완산을 점령하면서 모아놓은 삼국에 남은 고대의 역사책들도 후백제의 몰락과 함께 모두 전란으로 불타버리게 된다. 이로인해 동방의 참역사는 대부분 망실되었고, 중국 역사가들의 춘추필법과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의해 동방의 역사는 점점 왜곡되고 축소되어왔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일제에 의해 한민족의 전통 역사문화 서적 20만권이 불태워지면서 동방 조선의 고대사는 아리러니하게도 환단고기라는 역사의 정수精髓만을 남긴채, 그 뿌리가 완전히 뽑혀 버리게 된 것이다. 뿌리는 생명의 원천이라 뿌리가 망실되면 생명력은 점점 고갈되어, 결국 그 정신과 형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와 단군조선의 기록은?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高句麗인이 남긴 역사 기록은 「유기留記」와 「신집新集」이라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최소한 고구려 26세 영양왕 때 고유 역사서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양왕嬰陽王 11년, 서기 600년에) 대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고사古事를 요약하게 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문자를 쓰기 시작하던 때에 어떤 사람이 기사記事를 기록한 100권의 책자가 있어서 이름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글을 다듬고 정리하였다. (삼국사기 원문보기 클릭)
그리고 『단군세기』는 고구려 이전 단군조선의 역사 서적을 전해 준다. 서기전 2181년에 3세 가륵嘉勒단군은 삼랑三郎 을보륵乙普勒에 명하여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짓게 했고, 다음 해(서기전 2180년)에 신지神誌 고설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하게 했다. 가륵단군은 단군왕검의 손자이며, 9년 홍수 때 지나왕조를 구원해 준 부루단군의 아들이다. 『배달유기』에는 환웅천황의 배달 개창사와 단군조선 1, 2세 단군의 기록이 담겼을 것이다. 3세 가륵단군은 단군왕검와 부루단군 역사까지 기록했을 것이다. (배달유기 관련 단군세기 자료보기)
이후 6세 달문達門단군 때에는 하늘에 맹세하는 제천문인 ‘서효사誓效詞’를 남겼다. ‘서효사’는 환인, 환웅, 치우천황, 단군왕검을 중심으로 환국과 배달과 조선의 삼성조 역사의 큰 틀을 전하고 있다. 또한 ‘삼한관경제’라는 동방 조선족의 독톡한 통치법도 소개하며 진조선과 번조선, 막조선을 전한다. 『서효사』는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전수되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서적에 존재한다. (서효사 관련 단군세기 자료보기)
이런 상고 역사서는 당나라에 고구려가 패망할 때 대부분 불태워졌다. 그러나 동방 조선의 후손들의 구전을 통해 전했고, 다시금 기록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고려 후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고조선」 조는 『고기』를 통해 환국과 배달과 조선의 역사 맥의 큰 틀을 남겼다. 더 소상한 역사 기록은 고려 말 소전거사素佺居士라는 분이 잃어버린 옛 서적을 최대한 수거하여 이암李嵒, 범세동范世東, 이명李茗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이 ‘삼인 결의동맹’을 통해 잊힌 동방 조선의 원형 역사가 복원 전수되었다. 소전거사와 세 분을 통해 대한 상고사의 큰 맥이 복원된 것이다. 이 책이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북부여기北扶餘紀』와 『진역유기震域留記』이다.
동방 조선의 상고사 기록이 미약한 이유?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이 남긴 역사책은 없는 것인가? 분명 고구려 사관史官들도 당시의 기록을 남겼을 것인데 왜 전하지 않는 것인가? 조선 시대에도 역사 교육에 대해 고민한 두 선비가 있었다. 조선의 선비 이덕무李德懋(1741~1793)와 이만운李萬運(1723~1797)은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는 교과서 격인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전前 왕조 이상은 문헌이 부족한지를 물으니, 공이 탄식하며 대답하였다. “당나라의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나서 평양에 동방의 전적을 모아 놓고서 그 문물이 중국에 겸손하지 않음을 꺼려서 모두 불살랐고, 신라 말기에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을 점령하고 삼국三國에서 남긴 책을 실어다 놓았는데, 그가 패망하게 되자 잿더미가 되어 깨끗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3천 년 이래 양대 서액書厄(此三千年來二大厄也)입니다. (기년아람 원문보기)
이덕무와 이만운이라는 조선의 두 선비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동방 조선의 상고서적이 소실된 양대 사건을 만나게 된다. ‘3천 년 이래 양대 서액’의 첫 번째는 당나라 이적李勣 장군이 668년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동방전적東方典籍을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분지焚之)는 것이다. 둘째는 후백제 견훤이 패망할 때 신라와 백제의 역사서적을 불태워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양대 서액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기록한 역사서적과 그 뿌리인 단군조선, 북부여 등에서 계승되어 내려온 역사문서도 사라졌을 것이다.
고구려 패망과 당나라 이적 장군
이적李勣(?~669)은 산둥성山東省 조주曹州 출생으로 당 태종(이세민)과 당 고종(이치)의 명을 받고 고구려 원정을 온 장군이다. 668년 가을(음 9월) 결국 고구려는 80세 이적이 이끈 당나라 군대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만다.
이적의 본성은 서씨徐氏였고, 이름은 세적世勣이었다. 그러나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에게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고, 이름도 세적世勣에서 태종의 이름 세민世民의 ‘세’자를 피하여 적勣이라 칭했다. 산동성 출신 서세적徐世勣은 당나라 황실의 장군이 되어 이적이 된 것이다. 이적은 태종太宗에게 등용되어 하북·하남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우고 이정 장군과 돌궐을 격파했으며 설연타를 평정하여 당나라 대제국 건설에 공헌했다.
그럼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그 상황을 조명해 보자.
(668년)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쳐서 빼앗았다. 중략,,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병력을 놓아 성에 오르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성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자살하려 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삼국사기 원문보기 클릭)
이미 당 태종과 더불어 고구려 원정의 경험이 있던 이적 장군은 다시금 668년 당 태종의 아들 고종의 고구려 원정을 이끌게 된다. 이적 장군은 80세 노인의 몸이 되었지만 노련했고, 대군을 이끌 능력과 경험치가 출중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설인귀와 계필하력 등의 예하 장수들이 훌륭하지만 모두 이적 장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결국 이적과 당나라 장수들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벌어진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내부 결속력이 약화된 고구려를 붕괴시키게 된다. 이적 장군은 당나라 고종 27년, 668년 봄 정월에 출정해서 가을 9월에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항복을 받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적의 군사가 고구려 성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분성焚城’! 이때 고구려의 소중한 평양성도, 백성도 불탔지만 가장 중요한 고구려의 역사서적도 불타 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기년아람紀年兒覽』 서문의 내용처럼 이적 장군이 평양에 동방의 전적을 모아 놓고 그 문물이 중국에 겸손하지 않음을 꺼려서 모두 불살랐다는 것이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전쟁 후에는 끝까지 대항한 적국은 처참히 무너지게 된다. 고구려는 끝까지 항전하며 무너졌다. 고구려 원정 때문에 죽은 당 태종의 신하였던 이적 장군은 이때 고구려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 양제의 100만 대군, 당 태종 이세민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동방 천자국 배달·조선의 국통 계승 국가인 고구려가 결국 80살의 늙은 이적에 의해 처참하게 패망한 것이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설
우리는 당나라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올린 글을 통해 고구려의 원뿌리 역사 맥을 찾을 단초를 만나게 된다.
시어사 가언충(侍御史賈言忠)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요동에서 돌아가니 황제가 “군대 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중략,,,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말하기를 ‘900년이 되지 못하여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있어서 이를 멸망시킨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으로부터 나라를 가지고 있은 지 지금이 900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중략,,”라 하였다. (삼국사기 원문보기 클릭)
그럼 어떻게 고구려는 900년이 되는가?
우리는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서기전 37년 주몽에 의해 개국되고, 668년에 멸망당해 700년 조금 넘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900년 설은 주몽의 역사 정신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몽은 해모수를 태조(원시조)로 삼고 제사를 드렸다. 원시조를 북부여 해모수로 본 것이다.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삼성기 상 원문보기)
그리고 고구려 19세 장수왕은 “광개토태왕은 시조의 17세손”(“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이라 했다. 이처럼 광개토태왕비와 『환단고기』 「삼성기 상」의 기록은 고구려의 원뿌리가 해모수단군의 북부여임을 밝혀 준다. 해모수단군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임술(BCE 239)년부터 주몽을 거쳐 마지막 보장왕까지가 전체 고구려사다. 일반적인 700년 설은 주몽부터 보장왕까지를 말한다. 한마디로 고구려는 북부여부터 900년이며, 주몽부터 700년이다.
고구려사를 왜곡한 지나支那 기록
及漢武滅朝鮮(급한무멸조선) 以高句麗爲縣(이고구려위현) 屬玄菟郡(속현토군)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킴에 이르러 고구려를 현으로 하고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한 『통전通典』 )
한 무제가 단군조선을 패망시키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의 작은 현이 고구려였다고 주장한다. 지나족의 기록은 고구려의 뿌리를 한나라 식민지로 두고 있다.
이는 사실인가? 결론부터 말해 이것은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물론 현도에 고구려현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고구려의 뿌리라 하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방 조선의 기록은 고구려 시조 주몽은 고구려현 출생이 아닌 북부여의 혈통으로 동부여에서 탄생했다고 전한다. 또한 고구려 원뿌리인 북부여의 해모수단군도 한 무제가 세운 식민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한 무제의 군대는 단군조선 본조인 진조선을 붕괴시키지 못했다. 서기전 195년 단군조선의 서쪽 변방인 번조선 강역에 망명한 연나라 추장 위만은 이듬해 번조선의 기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런 위만조선을 서기전 108년 한 무제가 공격해 와서 폐망시킨 것이지, ‘삼한관경제’의 중심이었던 단군조선의 본조인 진조선은 점령하지 못했다.
연나라 추장 위만이 망명할 때 단군조선은 47대 고열가단군 시대를 끝으로 해모수단군의 북부여로 계승되었다. 서기전 239년 고리국 출신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나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북부여기』는 전한다. 다시 말해 『서효사』가 전한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의 중심인 진조선의 강역은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계승했고, 이후 동명왕 고두막한에 의해 한 무제의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이것이 동방 조선의 원역사 기록인 것이다. 결국 한나라 군대는 진조선과 말조선의 강역인 만주와 한반도에 들어서지 못했고,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도 번조선 강역에 세워졌을 뿐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낙랑, 현도군은 한반도가 아닌 서쪽 변방 위만조선 강역에 있었다.
고구려의 뿌리는 어디인가?
그럼 불태울 수 없었던 고구려의 두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뿌리를 찾아가 보자.
첫째,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비문이다.
惟昔始祖(유석시조) 鄒牟王之創基也(추모왕지창기야) 出自北夫餘(출자북부여)
天帝之子(천제지자) 母河伯女郞(모하백여랑)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의 기틀을 다지셨는데, 북부여에서 유래한다. 왕께서는 천상 상제님의 아드님이시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의 뿌리를 ‘부여’가 아닌 ‘북부여’라고 전한다. ‘출자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또한 시조 주몽을 ‘천제지자’라는 동방 조선의 천자관을 가진 성스러운 존재로 기록했다.
둘째는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라는 고구려인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35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하양어두(下羊魚頭)에서 발견되었다.
모두루는 광개토태왕 때 북부여 지역의 지방 관료인 수사守事였다고 전한다. 모두루 묘지명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뿌리를 전해 준다. 자신의 선조가 주몽을 모시고 북부여에서 내려왔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부여와 고구려 관계의 핵심 구절 두 가지를 원문을 통해 확인해 보자.
-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나왔고, 일월의 아들이자 성군이었다.
河泊之孫(하박지손) 日月之子(일월지자) 鄒牟(추모) 聖王元(성왕원) 出北夫餘(출북부여)
天下四方知此國郡最(천하사방지차국군최)
하박河泊의 손자孫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알지니.
-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에서부터 주몽(추모)을 수행하여 내려왔다.
聖王奴客祖先(성왕노객조선)□□□北夫餘隨聖王來(북부여수성왕내)
노객奴客(모두루)의 조선祖先이... 북부여에서부터 성왕聖王을 수행隨行하여 (이곳으로) 왔다.
해모수 건국에서 고주몽 계승까지
부여사를 왜곡한 지나支那 기록
후한後漢 시대 왕충王充(27 ~ 100?)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낙양에 유학할 때 저명한 역사가 반고班固의 아버지인 반표班彪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왕충은 『논형論衡』이란 책을 지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동명東明의 부여 개국을 전한다.
그럼 어떤 내용인지 원문을 통해 살펴보자.
『논형論衡』 「길험吉驗」은 크게 3단락으로 나눠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시녀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돼지와 말조차 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북이 탁리국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 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뒤에 아이를 낳자 돼지우리에 버렸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겨 놓아 말에 밟혀 죽게 하였으나 말이 역시 입김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
둘째, 북이北夷 탁리국 왕이 시녀의 아들(동명)을 ‘천제의 아들’로 여겨 죽이지는 않고 노비처럼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 아닌지 의심하여 그 어미로 하여금 노비처럼 키우게 하고, 동명이라 이름 짓고 소와 말을 기르게 하였다.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이 나라를 뺏길까 두려워 죽이려 하였다.
셋째, 왕이 나라를 뺏길까 두려워 죽이려 할 때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며 엄호수에서 어별(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강을 건넜고, 무사히 부여에 도읍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쫓아오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이어서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그래서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되었다.
즉, 핵심은 북이北夷 탁리국왕槖離國王의 시녀가 ‘하늘에서 달걀만 한 기운〔氣〕’을 받아 임신했고, 그 아이를 낳자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넣어도 밟아 죽이지 않고, 돼지와 말들이 입김을 불어 넣어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동명이고 엄사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것이 부여라는 것이다.
그러면 왕충王充이 말한 동명은 누구인가? 동명東明은 ‘동방의 밝은 인물, 해와 달 같은 인물’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럼 그는 주몽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아닌 북부여 해모수 단군과 더불어 부여사의 중심 인물인 졸본부여의 동명왕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이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淵男産의 묘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명왕 고두막한과 주몽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 고구려인의 기록이다. 고두막한은 한 무제 군대로부터 동방 조선을 지켜낸 구국救國의 영웅이며, 북부여를 계승한 5세 단군이다.
그런데 이런 동명을 지나支那 기록은 북쪽 오랑캐 탁리국 왕의 시녀가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동방 조선의 기록은 단군조선 47대 고열가단군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또한 부여는 동명왕 고두막한에 의해 건국되지도 않았다. 『북부여기』에 의하면 이미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있었고, 『삼국유사』 등에도 나와 있듯 동명왕에게 밀려 동부여로 간 해부루왕도 있었다. 이를 볼 때 동명이 부여를 개국했다는 지나의 기록은 문제가 있다.
부여와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이런 지나족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부여의 건국자로 명시된 동명은 천한 시녀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일 뿐 단군조선과의 관계도 발견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역사는 맥락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지나 기록은 동방 조선을 폄하하기 위한 단편적 기록으로 보일 뿐이다.
부여인은 북방의 오랑캐가 아닌 문화 민족이었다. 이는 지나 기록과 동방 조선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지면 관계상 『후한서』의 기록만 살펴보자.
以臘月祭天(이납월제천) 大會連日(대회연일) 飮食歌舞 名(음식가무)曰迎鼓(명왈영고)
是時斷刑獄(시시단형옥) 解囚徒(해수도)
섣달(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여러 날 큰 모임을 가져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노는데 이것을 영고迎鼓라 한다. 이 기간에는 형벌과 옥사를 다스리지 않고 죄수를 석방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교과서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지만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는 동방 조선의 정통 후예들의 중요한 문화였다. 부여인들은 제천祭天 문화를 소중히 여겼다. 영고는 북을 둥둥둥 울리며 천지신명과 조상신을 맞이하는 의식으로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문화 행사를 12월마다 열었다. 부여인은 인간 삶의 근원인 하늘(상제님)과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며 제사를 올린 것이다.
부여인을 중국인의 의식대로 본다면 하늘 제사를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만 하늘에 제사할 수 있는 지나족의 의식대로라면 부여의 영고를 통해 우리는 독자적인 우주관과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가졌음을 역으로 대변해 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부여는 중국인의 식민지가 아닌 것이다. 또한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도 동맹이라는 제천행사, 국중대회를 열었기에 속국이라 할 수 없다. 아울러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영락永樂과 연가延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했다.
지금 중국은 부여와 고구려를 자신의 지방 정권이라 칭하고 있다. 수·당나라와의 전쟁도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전쟁이었다고 왜곡하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와 부여사를 자신의 지방 정권이라 칭함은 천인이 공노할 역사 왜곡이요, 9년 홍수를 도와 준 동방 조선의 장자국에 대한 배은망덕이라 할 것이다.
사람은 맥脈이 떨어지면 죽는다. 역사의 맥이 떨어져도 죽는다. 참된 민족의 일원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촌 대한인은 누구나 역사의 맥을 찾아 가슴과 머릿속에 바로 세워야 한다. 북부여와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한민족의 역사 국통 맥의 숨결을 간직한 당당한 천자국이었다. 북부여 해모수는 천왕랑天王郞이셨고, 그 현손인 주몽은 일월지자, 천제지자였다!
기사 출처: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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