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환단고기/환국본기, 신시본기

19. 삼신을 수호하는 벼슬 삼랑-신시본기

by 광명인 2024. 1. 27.

19. 삼신을 수호하는 벼슬 삼랑

강화도 혈구 삼랑성의 뜻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장사를 지낼 때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고인돌)으로 표시를 하였다. 이것이 후에 변하여 단壇이 되었는데,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夕壇이라 불렀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城壇을 만든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土壇을 쌓은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의 승려들은 이를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壇이라 칭하는데, 옛날 우리의 고유한 법이 아니다.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郎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郎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말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郎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 신도[發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郎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郎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郎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절을 지어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것은 승려들이 옛 풍속을 따라 그대로 부른 것이요,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 또 "승도儈徒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때의 능묘 법제는 천하의 으뜸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백성이 계곡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곳에 장사 지내지 않았다. 위로 국왕부터 모두 동굴에 옮겨 천신과 짝하여 제사를 지내다가 후에는 더러 평지에 장사 지내고, 박달나무 · 버드나무 · 소나무 · 잣나무를 빙 둘러 심어 표시를 해 두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신시 시대에는 능묘陵墓 제도가 없었다.
그 후 중고中古 시대에 이르러 국가와 부족이 강성하여 사는 것이 풍족해지자 장사 지내는 것도 사치스럽게 되었다. 예로써 제사를 지내고, 묘지도 성대하게 단장하여 둥글거나 혹은 모나게 하고 사치스럽게 장식을 덧붙였다. 높고 크고 넓고 좁은 것이 방정하여 일정한 법이 있었고, 내벽과 외분이 모두 잘 정비되고 꾸며졌다. 이후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능묘의 법제가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

19. 三神을 守護하는 벼슬 三郞

密記에 云 "古者에 徙死無出鄉하고 合葬一處하야 表爲支石이러니 後變爲壇하야 稱支石壇이오 亦祭夕壇이라."
在山頂而塹山爲城壇者를 曰天壇이오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를 曰神壇이니 今儈徒가 混以帝釋稱壇하니 則非古也라. 護守三神하야 以理人命者를 爲三侍郎이니 本三神侍從之郎이오 三郎은 本倍達臣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니라. 高麗八觀雜記에 亦曰 三郎은 倍達臣라 하니
主稼種財利者는 爲이오 主敎化威福者는 爲이오 主聚衆願功者는 爲이니 卽古發神道也라 皆能降靈豫言하야 多神理中也라. 今穴口에 有三郎城하니 城者는 卽三郎宿衛之所也오 者는 即三神護守之官라 佛像이 始入也에 建寺稱大雄하니 此儈徒之襲古仍稱이오 而本非儈家言也라 又云 僧徒儒生이 皆隷於郎家라 하니 以此可知也라.


高句麗 때의 陵墓 法制는 天下의 으뜸

或云 古者에 人民이 散處溪谷하야 葬無定地하야 上自國王으로 皆遷置於隧穴하고 幷配天神以祭라가 後或有平地而葬之하고 環植檀柳松柏以識之라 是以로 神市之世에 無陵墓之制라
後至中古하야 國富族强하니 養生得贍하고 送死亦侈하야 祭之有禮하며 治墓頗隆하야 或圓或方에 克厥侈飾하며 高大廣狹이 方正有規하며 內壁外墳이 均整兼巧러니 至于高句麗하야 陵墓規制가 冠於天下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