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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삼한관경본기

삼한관경 마한세가4-마한 수도의 위치와 역대 왕의 치적

by 광명인 2024. 2. 4.

4. 고조선 마한 수도의 위치와 역대 왕의 치적
마한의 초대 왕(부단군) : 웅백다

단군왕검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웅백다熊伯多를 마한 왕(부 단군)으로 임명하셨다. 도읍을 달지국達支國에 정하였는데,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 천제를 지내실 때 천왕(단군왕검)께서 조칙을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울을 보면 잘나고 못난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고, 백성이 임금을 보면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이 정사에 나타나 나니, 거울을 볼 때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임금을 볼 때는 반드시 먼저 정사를 보아야 하느니라."
마한 왕(웅백다)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거룩하신 말씀입니다. 성군은 뭇 사람의 의견을 잘 좋으므로 도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임금은 독선을 좋아하므로 도가 작아지 나니, 참으로 자신을 돌이켜 살펴서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삼랑성과 제천단을 쌓다

단군왕검 51년(단기 51, BCE 2283)에 천왕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郎城을 축조하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설치할 때 강남의 장정 8,000명을 동원하여 조역助役하게 하셨다. (91세 되시던) 신유(단기 54, BCE 2280)년 3월에 천왕께서 친히 마리산에 행차하여 천제를 올리셨다.
웅백다熊伯多가 세상을 떠나니 단군왕검 재위 55년(단기 55년, BCE 2279) 이었다. 아들 노덕리盧德利(2세 왕)가 계승하였다. 노덕리가 세상을 뜨자 아들 불여래弗如來(3세 왕)가 즉위하니 부루단군(2세) 12년 임자(단기 105, BCE 2229)년이었다. 가을 10월에 (단군의) 명을 받들어 칠회력七回曆을 백성에게 널리 반포하였다. 다음해 봄 3월에, 처음으로 백성으로 하여금 백아강에 버드나무를 심게 하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단기 109, BCE 2225)년에 삼일신고비三一神誥碑를 새겨서 남산에 세우고, 경신(단기 113, BCE 2221)년에 논을 개간하였다. 기해(단기 152, BCE 2182)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베푸니 나라를 다스리는 덕화가 널리 미쳤다.

(2) 3세 가륵단군의 중도 일심 정신에 대한 성훈

가륵단군(3세) 3년(단기 154, BCE 2180)에 불여래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두라문杜羅門(4세 왕)이 즉위하였다. 을사(단기 158, BCE 2176) 9월에 천왕께서 조칙을 내려 말씀하셨다. "천하의 대본은 내 마음의 '중도 일심[中一] 자리'에 있느니라. 사람이 일심의 중 자리를 잃으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고, 만물 이 중도 일심을 잃으면 그 몸이 넘어지고 엎어지느니라. 임금의 마음은 위태롭고 백성의 마음은 은미하니, 모든 사람이 균일하게 갖고 나온 천부의 성품을 잘 닦고 간직하여 그 조화의 중심 자리를 확립해서 잃지 않은 연후에야 일심 자리에 확고히 안주할 수 있느니라. 중정과 일심[中一]의 도아비된 자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된 자 마땅히 효도하며, 임금된 자 마땅히 의롭고, 신하된 자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된 자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된 자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노인과 젊은이가 마땅히 차례를 잘 지키고, 친구끼리 마땅히 서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니라. 몸을 삼가 공손하고 검소하며, 학문을 잘 닦고 맡은 소임을 연마하여 지혜와 능력을 계발하고, 널리 이롭도록 서로 권면하고, 자신을 완성하여 자유자재하며[成己自由], 만물의 뜻을 열어 고르고 한결같이 하라[開物平等]. 그리하여 천하의 일을 자임하고, 국통國統을 존중하고, 국법憲法을 확실히 지켜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면하여 생산을 보존하라. 국가에 일이 있을 때 몸을 던져 의義를 실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맹히 전진하여 만세토록 무궁한 복을 마련할지니라. 이는 짐이 너희 백성과 함께 간절하게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니라. 너희가 한 몸이 되어 완전하게 실천하기를 지극한 뜻으로 바라노니, 이를 잘 공경하여 받들지어다."

(3) 살수에서 배를 건조함

두라문(4세 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을불리乙弗利(5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세상을 떠나 아들 근우지近于支(6세 왕)가 즉위하니, 오사구단군(4세) 을유(단기 198, BCE 2136)이었다. 경인(단기 203, BCE 2131)년에 장정 30명을 보내어 살수薩水에서 배를 건조하게 하였는데, 그곳은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단기 225, BCE 2109)년에 마한 왕이 (4세 단군의) 명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드리는 일을 도왔다. 10월에 모란봉 산기슭에 별궁[離宮]을 지어 천왕(오사구단군)께서 순수하실 때 머무실 장소로 삼았다.

[조의 하사와 가관 의식]
(단군께서) 매년 3월에 마한에 명하시어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하셨다. 16일에 기린굴麒麟窟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皂衣를 하사하고 관을 씌우는 예식(관례)을 행하셨다.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행하고 파하셨다. 갑인(단기 227, BCE 2107)년에 근우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을우지乙于支(7세 왕)가 즉위하였다. 을우지가 세상을 떠나니 아우 궁호弓戶(8세 왕)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세상을 떠나니 자손이 없어 두라문(4세 왕)의 아우 두라시의 증손 막연莫延(9세 왕)이 명을 받들어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단기 341, BCE 1993)년에 우서한단군(8세)께서 백아강에 순행하여 머무시며, 밭의 경계를 정해 땅을 나누어 주고 네 집을 한 구역으로 정하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각 구역에서 일승一乘씩 갹출 하여 마을을 나누어 지키게 하셨다.

(4) 11세 단군 때 환도桓道 문명이 번성함
[신교의 제도화로 환도 문명이 번성]

노을단군(10세) 임인(단기 395, BCE 1939)년에 막연이 세상을 떠나고 아우 아화阿火(10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때 도해단군(11세)께서 강력한 의지로 개화에 힘써 평등하게 다스리실 때, (단군의) 명을 받들어 대성산大聖山 기슭에 대시전大始殿을 짓고 대동강에 큰 다리를 건설하였다. 세 고을마다 전佺을 두어 경당扃堂을 설립하고 칠회 제신 의례[七回祭神之儀]를 정하여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강론하니, 환도문명桓道文明이 번성하여 국경 밖까지 소문이 나게 되었다. 하夏나라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정사(단기 470, BCE 1864)년에 아화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사리沙里(11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한단군(12세) 을묘(단기 528, BCE 1806)년에 사리가 세상을 떠나고, 아우 아리阿里(12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불 단군(14세) 을유(단기 618, BCE 1716)년에 아리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갈지曷智(13세 왕)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세상을 뜨니 대음단군(15세) 무신(단기 701, BCE 1633)년에 아들 을아乙阿(14세 왕)가 즉위하였다.

[참성단의 제천 행사에 참여한 은나라 사신]
기유(단기 702, BCE 1632)년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쳤다. 을아가 세상을 뜨니, 여을단군(17세) 신미(단기 784, BCE 1550)년에 아들 두막해豆莫奚(15세 왕)가 즉위하였다. 임신(단기 785, BCE 1549)년 3월 16일에 여을단군께서 친히 마리산에 행차하여 참성단에서 삼신께 천제를 지내실 때, 은나라 왕 외임外壬이 사신을 보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세상을 뜨자 무인(단기 851, BCE 1483)년에 아들 자오수慈烏漱(16세 왕)가 즉위하였다. 자오수가 세상을 뜨니 기축(단기 922, BCE 1412)년에 아들 독로瀆盧(17세 왕)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세상을 뜨니 고홀단군(20세) 경오(단기 963, BCE 1371)년에 아들 아루阿婁(18세 왕)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세상을 뜨니 무오(단기 1011, BCE 1323)년에 아우 아라사阿羅斯(19세 왕)가 즉위하였다.

고조선 전삼한 시대의 대 전기점
[고등의 반역 사건]

이해(단기 1011, BCE 1323)에 고등高登이 개성開城에서 반역하여 천왕(21세 소태단군)에게 항명하였다. 마한 왕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고등을 치려 하는데, 홍석령紅石嶺에 이르러 천왕께서 고등을 우현왕右賢王으로 삼기로 윤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을미(단기 1048, BCE 1286)년에 천왕(21세 소태단군)께서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려 하시자 마한 왕이 불가하다고 간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색불루가 (22세 단군으로) 즉위하자 마한 왕이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이끌고 가서 해성에서 일전을 겨뤘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4. 古朝鮮 馬韓 首都의 位置와 歷代 王의 治績
馬韓의 初代 王(副檀君): 熊伯多

檀君王儉이 旣定天下하시고 分三韓而管境하실새 乃封熊伯多하사 爲馬韓하시고 都於達支國하시니 亦名曰白牙岡也라 登馬韓山하사 祭天하실새 天王이 下詔曰 人이 視鏡則妍醜自形하고 民이 視君則治亂見政하나니 視鏡에 須先視形하고 視君에 須先視政이어다. 馬韓이 上箚曰 聖哉라 言乎시여 聖主는 能從衆議故로 道大하고 暗君은 好用獨善故로 道小하나니 可無內省而不怠乎니이다.

(1) 三郞城과 祭天壇을 쌓다

檀君王儉五十一年에 天王이 命雲師倍達臣하사 築三郎城于穴口하시고 設祭天壇于摩璃山하실새 發江南民丁八千人하사 以助役하시니라 辛酉三月에 天王이 親幸摩璃山하사 祭天하시니라.
熊伯多가 薨하니 在位五十五年이라 子盧德利가 立하시니라. 盧德利가 薨하니 子弗如來가 立하니라 是檀君扶婁十二年壬子라. 秋十月에 以命으로 頒七回曆于民하고 明年春三月에 始敎民種柳于白牙岡하고 作都亭하니라. 丙辰에 刻立三一神誥碑於南山하고 庚申에 作稻田하고 己亥에 立蘇塗하야 施三倫九誓之訓하니 治化大行하니라.

(2) 三世 嘉勒檀君의 中道一心 精神에 對한 聖訓

檀君嘉勒三年에 弗如來가 薨하니 子杜羅門이 立하니라. 乙巳九月에 天王이 敕曰 天下大本이 在於吾心之中一也니 人失中一則事無成就하고 物失中一則軆乃傾覆하나니라. 君心은 惟危하고 衆心은 惟微하니 全人統均하야 立中勿失然後라야 乃定于一也니라 惟中惟一之道는 爲父當慈하고 爲子當孝하며 爲君當義하고 爲臣當忠하며 爲夫婦當相敬하고 爲兄弟當相愛하며 老少當有序하고 朋友當有信이니라. 飭身恭儉하며 修學鍊業하며 啓智發能하며 弘益相勉하야 成己自由하며 開物平等하야 以天下自任하며 當尊國統하며 嚴守憲法하야 各盡其職하고 獎勤保產이라가 於其國家有事之時에 捨身全義하며 冒險勇進하야 以扶萬世无疆之運祚也이다. 是는 朕이 與爾國人으로 切切佩服而勿替者也니라. 庶幾一軆完實之至意焉이니 其欽哉어다.

(3) 薩水에서 배를 建造함

杜羅門이 薨하니 子乙弗利가 立하니라. 乙弗利가 薨하니 子近干支가 立하니 乃檀君烏斯丘乙酉也라. 庚寅에 遣民丁三十人하야 造船舶于薩水하니 乃辰韓南海岸也라. 壬子에 韓이 以命으로 入常春하야 助祭三神于九月山하고 十月에 起離宮於荻丹峰中麓하야 爲天王巡駐之所하니라.

皂衣 下賜와 加冠 儀式
每當三月이면 命馬韓하사 閱武佃獵하시고 十六日에 祭天麒麟窟하실새 賜皂衣加冠之禮하시고 仍歌舞百戯而罷하시니라. 甲寅에 近干支가 薨하니 子乙于支가 立하니라. 乙于支가 薨하니 弟弓戶가 立하니라 弓戶가 薨하니 無嗣라 杜羅門之弟杜羅時의 曾孫莫延이 以命으로 入承馬韓하니라. 戊申에 檀君于西翰이 巡駐白牙岡하사 命劃田授土하사 四家作區하시니 區出一乘하사 分守鄕衛하시니라.

(4) 十一世 檀君때 桓道 文明이 繁盛함
神敎의 制度化로 桓道 文明이 繁盛

檀君魯乙壬寅에 莫延이 薨하니 弟阿火가 立하니라. 時에 檀君道奚가 方銳意開化하사 平等爲治하시니라. 以命으로 建大始殿于大聖山하고 作大橋于大同江하며 三忽爲佺하야 設扃堂하며 定七回祭神之儀하며 講三倫九誓之訓하니 桓道文明之盛이 聞于域外라 夏主厪이 遣使獻方物하니라. 丁巳에 阿火가 薨하니 子沙里가 立하니라. 檀君阿漢乙卯에 沙里가 薨하니 弟阿里가 立하니라. 檀君古弗乙酉에 阿里가 薨하니 子曷智가 立하니라. 曷智가 薨하니 檀君代音戊申에 子乙阿가 立하니라.

塹城壇의 祭天 行事에 參與한 殷나라 使臣
己酉에 耽牟羅人이 獻馬三十匹하니라. 乙阿가 薨하니 檀君余乙辛未에 子豆莫亥가 立하니라 壬申三月十六日에 親幸摩璃山하사 祭三神于塹城壇하시니 殷主外壬이 遣使助祭하니라. 豆莫奚가 薨하니 戊寅에 子慈烏漱가 立하고 薨하니 己丑에 子瀆盧가 立하니라 瀆盧가 薨하니 檀君固忽庚午에 子阿婁가 立하니라. 阿婁가 薨하니 戊午에 弟阿羅斯가 立하니라.

古朝鮮 前三韓 時代의 大轉機點: 高登의 叛逆 事件

是歲에 高登이 叛據開城하야 抗命天王이어늘 馬韓이 方擧兵討之할새 到紅石嶺界하야 聞天王이 許高登爲右賢王하고 乃止하니라. 乙未에 天王이 欲讓禪于海城 褥薩徐于餘이어시늘 馬韓이 諫不可로대 而不允하시고 及索弗婁之立하야 而馬韓이 整師躬率하고 往戰于海城이라가 戰敗不還하니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집일함삼執一含三: 우주의 한 조화 기운은 (삼위 정신으로 자존하는) '세 가지 창조 정신三神'을 머금고 있다.

회삼귀일會三歸一: 세 가지 창조 원리는 수렴해서 보면, 본래의 '사원의 조화 세계, 일기 속의 일신으로 돌아간다.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삼신 사상에서 갈라져 나간 제2 고등 종교인 유·불·선·기독교의 핵심 우주관·종교관은 바로 이 같은 신교의 일즉삼, 삼즉일하는 삼신의 본체와 기본 작용의 진리를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삼랑성은 강화도 전등산에 있는 옛 성[古城]으로 지금은 정족산성이라 한다. 삼랑은 본래 '삼신三神을 수호하는 벼슬인데 후세에 단군성조의 세 아들로 잘못 전해졌다.

칠회력七回曆: 14세 치우천황 때 자부선생이 일월의 운행 경로와 도수를 측정하고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 오행의 수리를 살펴 칠성력七星曆을 만들었다. 이것은 배달 시대에 이미 있던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역曆'에 연원을 둔 것이다. 여기서 칠회력은 곧 칠성력七星曆을 말한다.

도전稻田: 벼를 심은 밭 또는 논을 말한다. 지금부터 4천 년 전 고조선 초기에 이미 벼농사를 지을 정도로 발전된 농업 경제 단계에 돌입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으로도 공인되고 있다.

성기자유成己自由자신을 성취시키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다. 고문헌에서 '자유'라는 표현은 자기가 주인이 되다. 혹은 '제한과 구속을 받지 않다'는 뜻을 갖는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온 시선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에는 '공작동남비'라는 유명한 고시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내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분함을 품고 있었는데 네가 어찌 멋대로 할 수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개물평등開物平等만물의 마음을 열어 만물이 평등함을 깨닫다. 고문헌에서 평등은 '서로 같다'는 뜻을 나타낸다. 위진남북조 때 인도 승려 구나브리티가 492년에 한문으로 번역한 백유경의 이자분재유二子分財喩 편에 "너희에게 서로 똑같게 물건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 주리니 지금 갓고 있는 모든 물건을 부수어 이등분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인도 승려 구마라습이 한문으로 번역한 「금강경」정심행선분편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살수: '물이 살살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네 곳이 있다. 1)요동반도의 개평현 주남하 2)요동반도의 대양하 3)청천강 4)청주 무심천 등이다(최동, 조선상고민족사의 살수고 참조). 

상춘常春: 눌견, 장춘이라고도 하며 모두 '늘 봄'을 소리 또는 뜻으로 표기한 것이다. 고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있는 구월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

기린굴麒麟窟: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라의 동쪽에 큰 굴(大穴=기린굴)이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라고하고, 고구려에서는 10월에 국중대회를 열어 이 기린굴에서 수신(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다고 하였다. 

관례冠禮: 이러한 신교 문화가 퇴색한 이후로는 남녀가 성년에 이르면 어른이 된다는 의미로 남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던 의례儀禮를 관례라 한다.

경당扃堂: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글읽기, 활쏘기, 말타기, 예절, 가악歌樂, 권박, 검술 등 육예를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참조). 고구려 때에는 평민 자제를 교육하는 사학私學 기관으로 경당을 전국 각처에 설치하였고, 중앙에는 귀족 자제를 교육하는 관학인 태학太學을 두었다.

근厪: 하나라 13세왕

외임外壬: 은殷(BCE 1766~BCE 1122)나라 11세 왕. 재위 BCE 1549~BCE 1535.

고등: 22세 색불루단군의 할아버지(단군세기), 후에 우현왕이 된다.

개성: 요령성 개원, 

홍석령: 관전현 홍석남자에 있는 고개

욕살: 고구려 때에도 지방을 5부 나누어 다스리고, 지방 장관을 욕살이라 하였다.

색불루: 고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켜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초대 단군왕검으로부터 21세 소태단군까지 1,048년간 지속되어 온 '송화강 아사달 시대'를 마치고, 둘째 도읍지인 백악산(녹산)으로 도읍을 옮겨 860년간 '백악산 아사달 시대'를 열었다. 또한 국제를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고쳤다. 그러나 전 영토를 여전히 삼한관경체제로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