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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국본기, 신시본기

15. 한민족 역사 속의 백두산의 의미

by 광명인 2024. 1. 23.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

15. 한민족 역사 속의 백두산의 의미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거대한 산악이 광활한 대지 가운데 장중하게 자리잡아 가로로 천 리를 뻗고, 높이는 2백 리를 우뚝 솟았다. 웅장한 고산준령이 꿈틀거리며 널리 덮어 배달 천국진산鎮山이 되었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린 곳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하거늘,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妙香山이 단지 낭림산맥이 서쪽으로 뻗은 맥에 매여 있다는 사실 하나로 환웅천황께서 강림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속에서 묘향산妙香山을 태백산太白山이라 한다면, 그 소견은 동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 땅에 국한시키는 것이 된다. 또한 산의 조종은 곤륜산崑崙山이라 하여,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를 기꺼이 감수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이 수백 년이 지났으되 오히려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이는 글을 폐하고 크게 통탄할 일이로다. 그러나 지금 동방의 여러 산 가운데 태백산太白山으로 불리는 곳이 자못 많다. 세속에서는 대개 영변의 묘향산妙香山으로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실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의 눈알이 마치 콩알 같고 팥알 같으니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어 둘레가 80리요,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이 모두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 곳을 천지天池라 부르는데, 바로 환웅 신시씨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妙香山은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 없고,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도 아니니 거론할 것도 없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에서는 태황산太皇山이라 부른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 오줌을 누지 아니하고, 산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가져간 물건을 담아 갔다. 환웅천황이 처음 내려오신 곳이 이 산이다. 또 이곳은 신주神州(배달)의 왕업이 흥한 신령한 땅이니, 소도蘇塗에서 제천祭天하는 옛 풍속은 필시 이 산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그리고 예로부터 (동방으로 이주한) 환족桓族이 삼신상제님을 숭배하고 공경함이 또한 이 산에서 비롯하였으니 평범한 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금수조차 모두 신령한 감화에 젖어 이 산에서 편안히 살며 일찍이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였다. 사람도 이 산에 올라 감히 오줌을 누어 신神을 모독하지 않았으니, 만세에 걸쳐 항상 공경하고 수호하는 표상이 되었다.

15. 韓民族 歷史속의 白頭山의 意妹

三韓秘記에 曰 白頭巨岳이 盤居大荒之中하야 橫亘千里하고 高出二百里하야 雄偉嶝嵕하며 蜿蜒磅礴하야 爲倍達天國之鎮山이오. 神人陟降이 實始於此어늘 豈以區區妙香山이 只係狼林西走之脉으로 而能得叅於如許聖事耶아.  
世俗이 既以妙香山으로 爲太白則其見이 只局於東鴨綠水以南一隅之地오. 便唱山之祖宗崑崙하야 欣欣然以小中華自甘하고 宜其貢使北行이 歷累百年이로대 而不爲之耻하니 是乃廢書而長嘆者也라. 然이나 今東方諸山이 以太白으로 爲名者가 頗多오. 世俗이 率以寧邊妙香山으로 當之는 實由於一然氏 三國遺事之說이나 而彼等眼孔이 如豆如太하니 安足以與之論哉아.  
白頭山은 上有大澤하야 周可八十里오 鴨綠松花豆滿諸江이 皆發源於此하니 曰天池오 卽桓雄氏乘雲天降處也라. 妙香山은 會無一小洿하고 且不爲桓雄天皇肇降之太白山이니 不足論也라. 

魏書勿吉傳에 曰 國南에 有徒太山하니 魏言太皇이라 有虎豹熊狼호대 不害人하며 人이 不得上山溲溺하고 行逕者는 皆以物盛去라하니 盖桓雄天皇之肇降이 既在此山이오. 而又此山이 爲神州興王之靈地니 則蘇塗祭天之古俗이 必始於此山이오 而自古桓族之崇敬이 亦此山始하야 不啻尋常也라. 且其禽獸도 悉沾神化하야 安棲於此山而未會傷人하며 도 亦不敢上山溲溺而瀆神하야 恒爲萬世敬護之表矣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삼한비기三韓秘記: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만 해도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이 남아 있었다. 이 삼한비기는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삼국유사 이후에 나온 사서이고, 삼한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 고대사의 뿌리를 밝힌 도가 사서가 분명하다.

진산鎮山: 한 국가나 도시 또는 각 지방에 있는 주산

위서魏書: 북제의 위수가 왕명을 받아 551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554년에 완성한 북위의 정사. 그러나 위수가 주관적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서술하였다 하여 예사, 즉 더러운 역사서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물길, 거란 등의 열전이 실려 있다. 일찍이 정인보는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의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에서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셨다"라는 기록에서 위서는 탁발씨 북위의 위서가 아니라,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위서로 진나라 왕침이 지었다고 하였다(조선사연구 34쪽). 수서경적지고증에서는 "중국을 낮추고 동이족을 높였다”라는 이유로 왕침의 위서는 후대에 불태워졌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