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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국본기, 신시본기

10. 헌원을 토벌하여 신하로 삼다: 중화문명의 발상지 탁록-신시본기

by 광명인 2024. 1. 19.

치우천황의 비석박격기가 공성 투석기의 원조

10. 헌원을 토벌하여 신하로 삼다 

[중화문명의 발상지 탁록]

이때 공손公孫 헌원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다. '치우천황께서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병마를 크게 일으켜 치우천황과 승부를 겨루려 하였다. 천황께서 항복한 장수 소호少昊를 먼저 보내 탁록涿鹿을 포위하여 멸하려 하실 때, 헌원이 오히려 항복하지 않고 감히 수 많은 전쟁에 나섰다.
천황께서 9군九軍에 명하여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하시고,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곧장 탁록유웅有熊 들판에서 여러 번 헌원과 맞붙어 싸울 때,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조이면서 참살하시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시니, 적군은 두렵고 손이 떨려 바쁘게 도망쳐 백 리 안에 병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수淮水, 태산泰山 땅을 모두 차지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시고 회대淮岱(회수와 태산)에 집을 지으시니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체로 당시 서쪽 땅의 사람들은 한갓 화살과 돌팔매[矢石]만 믿고 갑옷의 사용을 알지 못하였다. 또한 치우천황의 뛰어나고 강력한 법력에 부딪혀서 두려운 마음이 들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 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탁록의 10년 대전쟁]
운급雲笈의 헌원기軒轅記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해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이라 여겼다"라고 하였으니, 적의 낭패가 얼마나 심하였겠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치우천황이 더욱 군용을 정비하여 사방으로 진격하셨다. 10년 동안 헌원73회를 싸웠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는 물러날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번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군사를 더욱 크게 일으켰다. 우리 배달을 본받아 무기와 갑옷을 많이 만들고, 또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싸움마다 출전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불같이 진노하여 형제 종족으로 하여금 대격전에 힘써 싸우게 하여 위엄을 확고히 세우셨다. 그리하여 헌원의 군사로 하여금 감히 추격하거나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시고, 더불어 대전을 치뤄 한바탕 몰아쳐서 휩쓸어 버리신 뒤에야 비로소 싸움을 그치셨다.

[사마천 사기의 비열한 역사 왜곡]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蚩尤飛라는 자가 급히 공을 세우려다가 불행히도 전쟁터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금살치우擒殺蚩尤]"라고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천황께서 진노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시니, 적진이 마침내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예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으로 예芮와 탁涿을 지키게 하시고, 동쪽으로 회대淮岱(회수와 태산)를 취하여 성읍을 만들어 헌원이 동쪽으로 침투할 길을 막으셨다. 천황께서 붕어하신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진실로 길이 남을 찬란한 그 위엄이 후세인의 가슴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10. 軒轅을 討代하여 臣下로 삼다: 中華文明의 發祥地 涿塵

時에 有公孫軒轅者가 土着之魁라. 始聞蚩尤天王이 入城空桑하사 大布新政하고 
而敢有自代爲天子之志하야 乃大興兵馬하야 來與欲戰이라. 
天王이 先遣降將少昊하사 圍迫涿鹿而滅之로시대 軒轅이 猶不自屈하야 敢出百戰이어늘 
天王이 動令九軍하사 分出四道하시고 自將步騎三千하사 直與軒轅으로 
連戰于涿鹿有熊之野하실새 縱兵四蹙하사 斬殺無算이시오 又作大霧하사 
咫尺難辯而督戰하시니 賊軍이 乃心慌手亂하야 奔竄逃命하니 百里에 兵馬가 不相見이라.
於是에 冀兗淮岱之地가 盡爲所據오 乃城於涿鹿하시고 宅於淮岱하시니 
軒轅之屬이 皆稱臣入貢이라. 蓋當時西土之人이 徒憑矢石之力하고 
不解鎧甲之用이라가 又值蚩尤天王之法力高強하고 心驚膽寒하야 每戰輒敗라.

雲笈軒轅記之所謂 蚩尤始作鎧甲兜鍪로시대 時人이 不知하야 以爲銅頭鐵額者라 하니
亦可想見其狼狽之甚矣로다. 蚩尤天王이 盆整軍容하사 四面進擊하시니 
十年之間에 與軒轅으로 戰七十三回로시대 將無疲色하고 軍不退後라
軒轅이 旣屢戰敗나 尤盆大興士馬하고 效我神市하야 而廣造兵甲이오 又制指南之車하야 敢出百戰이어늘
天王이 赫然震怒하사 使兄弟宗黨으로 務要大戰而立威하사 使軒轅之軍으로 不敢生意於追襲하시고 
與之大戰하사
混殺一陣然後에 方熄하시니라.

是役也에 我將蚩尤飛者가 不幸有急功하야 陣沒하니 史記所謂 擒殺蚩尤者는 蓋謂此也
天王이 赫怒動師하사 新造飛石迫擊之機하사 成陣聯進하시니 賊陣이 終不能抗也라. 
於是에 分遣精銳하사 西守芮涿之地하시고 東取淮岱하사 爲城邑하사 而當軒轅東侵之路하시니 
及之崩逝數千載로대
而猶有萬丈光烈이 能起感於後人者也라. 

출처: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황제헌원(BCE 2692~BCE 2593): 성은 공손, 이름은 헌원.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태호복희, 염제신농과 함께 삼황三皇의 한 인물로 불러왔다. 현재 대만의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황제헌원을 중국 한족의 실질적인 시조로 보고 있으나, 황제의 혈통은 웅씨족 후손인 소전(염제신농의 부친)에서 갈려나간 별파이다. 삼한관경본기에서는 "소전의 별파로 공손이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에 귀양가서 살았다. 황제헌원의 족속은 모두 그 후손이다"라고 하여 한족의 국통과 혈통의 뿌리를 밝히고 있다.

유웅有熊: 황제헌원의 호이자, 그의 도읍지 이름. 지금의 하남성 신정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북성 탁록 지방을 말한다. 사기정의의 오제본기에는 "여지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탁록의 본래 이름은 팽성인데 황제가 처음 도읍으로 삼았다가 유웅으로 천도하였다.[與地志 云:涿鹿本名彭城,黄帝初都, 遷有熊也]"라고 하였다.

운급雲笈운급칠점, 송나라 진종 때 장군방이 비각도서를 교정하여 요점을 뽑아 만든 122권의 책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전투 상황: 사기의 천관서는 "진시황의 시대에 .. 그 후에 진나라가 마침내 전쟁을 통해 여섯 왕국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병합하였으며,  ..초나라를 확대시키려는 세력들이 함께 일어나 30년 동안 병사들이 서로 짓밟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다. 치우 이래로 아직까지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탁록대전은 진시황의 6국 병탄 통일 전쟁과, 5년간 73회를 싸운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 그리고 유비·조조·손권의 삼국 쟁패전 이전의 중국 5 천년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전쟁이었다.

지남거指南車수레 위에 신선의 목상을 얹고 손가락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이다. 황제가 탁록 벌판에서 싸울 때, 치우천황이 일으키는 짙은 안개를 만나자 지남거를 만들어 병사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금살치우擒殺蚩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는 "탁록 들판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하여, 마치 헌원이 치우천황을 잡아서 죽인 것처럼 왜곡시켜 놓았다.

예탁芮涿는 지금의 산서성 예성현이며, 탁涿은 하북성 탁록현이다.

한서: 후한시대에 반고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로 전한서 또는 서한서라고도 한다. 모두 120권으로 되어 있고, 조선전과 지리지가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