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Dionysius의 기도]
Thou trinity beyond being,
Direct us to the height of mystical revelation,
Sublime beyond all thought and light;
Wherein the simple, absolute, and immutable mysteries of divine truth are hidden in the translucent darkness of that silence which revealeth in secret.
For this darkness, though of deepest obscurity,
Is yet radiantly clear, and, though beyond touch and sight,
It overfills our unseeing minds with splendors of transcendent beauty.
그대, 존재를 넘어선 삼위일체시여,
신비스런 계시의 정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모든 생각과 빛을 넘어 승화시키소서.
신성한 진리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불변의 신비가
은밀히 계시하는 침묵의 투명한 어두움 속에 숨어 있나이다.
이 어두움은 가장 깊이 모호하지만 또한 눈부시게 명료하며,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뛰어난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우리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넘치게 채웁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신비신학>, <신의 이름>, <천상의 위계>, <교회의 위계> 등의 저술을 남기며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친 5-6세기의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이다. 신학적 용어들을 사용하면서도 불교의 공空 또는 노자의 도道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사상을 펼침으로써 후대의 신학자와 신비가들이 침묵과 비움의 길을 걸어갈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일설에는 아테네의 첫 주교였다고도 하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그 이름조차도 1세기에 바울의 전도로 개종한 아레오바고의 재판관 디오니시우스로부터 따온 것이다.
-신비신학 Theologia Mystica, 오쇼 강의┃김석환 옮김
고대 후기의 신비주의 철학자, 위(僞)-디오니소스 아레오파기타의 기도문은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 깊은 영적 체험에서 길어 올린 우주적 실재에 대한 경외와 통찰을 담고 있다. 그의 언어는 동양의 삼신(三神) 사상 및 삼극(三極)의 원리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으며, 이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영성의 증거라 할 만하다. 디오니소스는 분명, 치열한 신비주의 수행과 기도를 통해 삼신의 세계, 그 근원적 실체를 체험하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낸 듯하다.
기도의 첫머리, "그대, 존재를 넘어선 삼위일체시여(Thou trinity beyond being)"라는 부름은 이미 평범한 인식을 뛰어넘는다. 이는 우리가 '있다'고 규정할 수 있는 모든 현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 즉 동양에서 말하는 0무극(無極), 모든 분별과 형상이 사라진 순수의식의 상태를 직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극적 실재가 현실 우주에 작용할 때 세 가지 근원적인 힘, 즉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우주 성령, 바로 삼신(三神)을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삼신의 세계, 신비스런 계시의 정상이 "모든 생각과 빛을 넘어 승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나 감각적 경험(심지어 '빛'이라는 상징조차도)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디오니소스의 독창적인 표현, "침묵의 투명한 어두움(translucent darkness of that silence)"이 등장한다. 삼신의 실체, 신성한 진리의 신비가 숨겨진 곳을 그는 역설적 표현인 '투명한 어둠'이라 칭한다.
이 '투명한 어둠'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공허한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어둠을 "가장 깊이 모호하지만 또한 눈부시게 명료하며(though of deepest obscurity, Is yet radiantly clear)"라고 역설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0무극이 텅 빈 듯하지만 실은 모든 가능성을 품은 충만함이며, 최초의 빛, 최초의 질서를 발현하는 근원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삼신의 본질은 인간의 제한된 언어와 개념으로는 '모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만, 영적 직관을 통해 체험될 때에는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시게 명료한' 진리 자체인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 삼신의 실체가, 비록 세속적 인식(영성의 눈이 먼 상태)으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though beyond touch and sight)", 그 "뛰어난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우리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넘치게 채운다(It overfills our unseeing minds with splendors of transcendent beauty)"고 고백한다. 이는 삼신의 작용을 통해 펼쳐지는 우주 만물의 장엄한 질서와 생명의 신비가, 비록 우리가 그 전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존재 깊숙한 곳을 감동시키고 경외감으로 채우는 체험을 의미한다. 세속적 욕망과 분별심으로 가려진 우리의 '세속적 마음'조차도, 삼신이 발현하는 초월적 아름다움과 장엄함 앞에서는 압도당하고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디오니소스가 체험한 궁극적 실체는 동양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무극의 침묵과 만물을 비추는 투명한 어둠 속에서 작용하는 우주 성령, 삼신(三神)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기도는 그 삼신의 신비로운 현존에 대한 깊은 경외와, 그 초월적 빛으로 우리의 유한한 인식을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체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생생한 울림을 지니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동방 한민족 우주론의 정수에는 삼신(三神) 사상이 자리한다. 이는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근원적인 세 가지 작용, 즉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를 주관하는 원초적 신성이자 우주 성령이다. 이 삼신의 원리는 다시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이라는 삼극(三極)의 철학으로 구체화된다. 0무극(無極)은 모든 분별과 형상을 초월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공(空)이자 동시에 모든 가능성을 품은 충만(充滿)의 상태다. 천부경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 했듯, 모든 것은 이 무극에서 비롯된다. 동양에서는 이 궁극의 상태를 때로 '대광명(大光明)'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모든 어둠을 소멸시키는 순수한 빛,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절대적 명료함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 고요한 무극, 대광명의 침묵 속에서 최초의 움직임, 만물 생성의 첫 씨앗인 1태극(太極)이 발현된다. 태극은 음양(陰陽)을 내포하며 분화의 가능성을 잉태한다. 그리고 이 태극의 에너지가 현실 세계로 펼쳐져 만물을 생성하고 조화롭게 다스리는 역동적인 중심축이 바로 황극(皇極)이다. 천부경의 "석삼극(析三極)"과 노자의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은 바로 이러한 삼극의 원리를 통해 우주 창조의 비밀을 설파한다. 이 "단순하고,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신성한 진리의 신비"가 바로 삼극의 원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단순하지만 우주 전체를 관통하고, 절대적이기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영원히 변치 않는 우주의 근본 법칙인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동양의 심오한 우주관은 서양의 신비주의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기도문에서 그 메아리를 찾는다. 그는 치열한 신비주의 수행과 기도를 통해 이러한 삼신의 세계를 체험하고, 이를 독창적인 언어로 풀어낸 듯하다. 그는 "그대, 존재를 넘어선 삼위일체시여(Thou trinity beyond being)"라고 부르짖으며, 우리가 인식하고 규정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범주를 초월하는 궁극적 실재, 즉 동양의 0무극(無極)과 그 안에서 작용하는 삼신(三神)의 현존을 직관한다.
디오니소스는 이 초월적 실재가 "모든 생각과 빛을 넘어 승화"되어 있으며, "신성한 진리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불변의 신비(삼극의 원리)가 은밀히 계시하는 침묵의 투명한 어두움(translucent darkness of that silence) 속에 숨어 있다"고 노래한다. 이 '침묵의 투명한 어둠'이야말로 디오니소스가 체험한 무극의 본질, 삼신의 실체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역설적 표현이다.
'투명한 어둠'은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투명함(Translucent)'은 모든 것을 왜곡 없이 비추는 순수함, 동양의 '대광명'과 맞닿아 있다. 너무도 맑고 순수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절대적 명료함이다. 반면 '어둠(Darkness)'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함, 동양에서 말하는 '현묘(玄妙)함'을 상징한다. 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순수하여 인간의 감각으로는 오히려 '어둠'처럼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초월적인 밝음이자 동시에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의 상태인 것이다.
그는 이 '투명한 어둠'이 "가장 깊이 모호하지만 또한 눈부시게 명료하며,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뛰어난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우리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넘치게 채운다"고 고백한다. 삼신의 본질은 인간의 제한된 언어와 개념으로는 '모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만, 영적 직관을 통해 체험될 때에는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시게 명료한' 진리 자체다. 비록 세속적 인식(영성의 눈이 먼 상태)으로는 그 실체를 직접 만지거나 볼 수 없지만, 삼신이 발현하는 우주 만물의 장엄한 질서와 생명의 신비는 우리 존재 깊숙한 곳을 감동시키고 경외감으로 채우는 것이다.
결국, 동양의 삼신·삼극 사상과 디오니소스의 초월적 삼위일체 및 '투명한 어둠'에 대한 통찰은 표현 방식은 다를지라도, 우주의 근원적 실재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영적 지향점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넘어서는 신비이며, 언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다. 이러한 동서양 사상의 만남은 우리에게 좁은 문화적 경계를 넘어 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용기와 영감을 준다. 어쩌면 인류가 직면한 수많은 갈등과 분열의 해답 또한, 이러한 근원적인 지혜의 샘에서 길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존재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침묵의 소리에, 투명한 어둠 속에 빛나는 대광명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됨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개벽, 즉 각자의 도통만이 인류의식을 통일하는 유일한 최상의 방법이며, 개벽기에 각자 도통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유일한 생존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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