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관련 정보

기독교의 영성이란?

by 광명인 2023. 8. 25.

나 다움을 찾게 해주는 영성의 비밀ㅣ이종태 교수(잘잘법 22분) 
https://www.youtube.com/watch?v=4NJ_O45ygO4


[영성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다 가장 조회수가 높은 것을 접했는데요. 이종태 교수기독교 영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삼신오제본기에 나오는 우리의 영성문화를 알아보기전에 먼저 영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돕기위한 정보로 알찬 내용이라 판단되어서 정리해서 포스팅을 했습니다. 이종태 교수는 영성의 핵심은 관계성이며, 관계성이 좋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만개한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논리적 근거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인데요. 하나님이 곧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부르는 사랑의 관계안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부분은 제하고, 단지 영성이 관계성이라는 부분만 본다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하나님을 받아들인 올바른 영성이란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고, 확장시키며, 넓혀나가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기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방향으로 성숙되어 자신의 세계가 점점 넓어져간다고 이야기 하죠. 그리고 참된 기독교인은 주변의 사회문제환경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결국 기독교의 구원이란 것은 넓은 세계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러한 결론이 기독교인들의 일반적 결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설득력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만개한, 관계성이 좋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인 거죠.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영성이라는게 뭘까요? 영성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영혼 있는 삶을 산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 이런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영혼 없는 표정, 영혼 없는 말, 영혼 없는 공무원, 근데 사실 우리가 하는 말이나 짓는 표정이나 그 몸을 움직여서 하는 모든 일에 사실은 영혼이 깃들어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야 사실은 인생을 사는 것처럼 정말 사는 것이죠. 우리의 노동도 영혼이 있는 노동이 돼야 되고, 또 우리 정치도, 교육도 영혼이 있는 교육이 돼야 되죠. 

영혼과 자아의 차이점

사실 전에는 비슷한 의미로 자기(self)라는 말을 많이 썼었습니다. 자기 개발이라든지 자기 발견이라 할지, 자기 실현자아 정체성, 뭐 이런 말 이제 많이 했었죠. 자아라는 말 하고 또 영혼(soul)이라고 하는 말은 비슷하기도 하면서 또 다르죠. 자아라는 말이 다분히 심리학적인 말이라면, 영혼이라고 하는 말은 굉장히 종교적이고 또 영적인 그런 말이죠. 그간 제도적인 종교의 폐해를 많이 경험했던 서구 사회에서는 사회의 어떤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이 종교적인 어휘들을 많이 몰아내려고 애써왔던 것이 사실인데, 요즘은 인간이 진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또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이 영성이라고 하는 거 그리고 영성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핵심이고, 종교의 심층인데, 이 종교의 핵심과 심층으로서의 영성은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다움과 인간다움을 꽃 피워 가는 일에 정말 중요하다, 기초다 이런 생각이 확대되어 가고 있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그런 추세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세의 종교의 시대에서 근대의 이성의 시대로, 그리고 이제는 영성의 시대

중세 사회가 말하자면 종교의 시대였다면, 이제 근대 시대는 이성의 시대였고, 지금 그 포스터 모던 시대는 영성의 시대라고들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종교나 이성이 그러한 것처럼 영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 자체가 무작정 좋은 것도 아니고, 또 무작정 나쁜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영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옅은 생각이 아니라 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되겠고 또 어떤 획일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영성이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금 받았기 때문

기독교는 우리 인간에게 영성에 있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형상이라는게 그럼 뭘까요? 전에는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있다는 그 인간의 이성(reason)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이성은 뭔가 생각하는 거죠.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이 머리로 하는 생각이 있고요. 이 마음으로 하는 가슴으로 하는 생각이 또 있는 것 같아요. 이 두 가지 생각이 사실은 다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데카르트 이후에 인류는요 이 머리로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인류는 그간 머리가 굉장히 많이 좋아지고 커져서 사실 그 좋아진 머리로 많은 유용한 것들 좋은 것들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머리로 독가스도 만들고, 또 핵폭탄도 만들고, 지옥을 연출하기도 했죠. 그래서 지금의 이 시대에는 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이 중요한 것도 관계성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관계를 잘 맺으려면 생각을 잘해야 됩니다. 내 생각밖에 할줄 모르면 관계를 맺을 수 없잖아요. 마음의 생각을 할 수 있어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관계성이 좋은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죠. 관계성이 좋은 사람이 우리 기독교적으로 얘기하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만개한, 아주 충만하게 꽃 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인 거죠.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는요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Clive Staples Lewis C.S. 루이스

CS 루이스는 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이 성경의 말씀과 삼위일체라고 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입니다'라는 기독교의 진술을 반복해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입니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최소한 두 개의 위격(person)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사랑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단 하나의 위격(person)이라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

안드레이 루블료프 가 1410년 완성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하고 계셨고 계신다. 이런 뜻을 내포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뭘 사랑하고 계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는 것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다. 루이스가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사랑하고 계셨어요???] 성부 하나님성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셨고, 성자 하나님이 그 사랑의 응답해서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셨고, 그 사랑의 관계 그 사랑의 영이 곧 성령 하나님이셨어요.

태초에 조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는 거죠. 태초의 고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사랑의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사랑의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사랑의 관계로부터 비롯하는 것들이죠. 인간에게 영성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관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될 수 있고, 또 인간다움과 자기다움을 꽃 피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거죠. 

가장 소중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우리가 관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관계 그러면 나와 너 같은 이런 인간관계를 먼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죠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나와 너라는 인간관계보다 더 선행하는 관계가 있다라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그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이야말로 궁극의 너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독교는 이런 궁극의 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다른 관계에 기초이고,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그래서 우리 인간관계 나와 너와의 모든 관계가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심축이 바로 서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풀어지듯,,

그래서 루이스가 좋은 예를 들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퀴살들이 바퀴 축과 테두리에 제대로 끼워져 있기만 하면, 다른 살과의 간격도 자연히 바르게 조정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틀림없이 동료 피조물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모든게 해결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는 뿌리가 있으면, 그 뿌리에서는 반드시 이웃 사랑[이웃과의 관계]이라고 하는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라면 모든 타자들을 나의 그런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그 목적으로 대하고 또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나와 자연과의 관계도 좋아지게 됩니다.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죠. 사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자기 멋대로 착취하고 이용하고 써먹을 수 있다.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깃들어 있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영물로써 알아보고 그리고 만물이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아름답게 보존되도록 가꾸고 보살피는 그런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나와 자연과의 관계도 좋아지는 거죠. 

자신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좋아지면요. 나와 나 사이의 관계도 좋아지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정말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기란 어렵습니다. 인간은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고요. 자기를 용서해 주기 어려워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받아주기 힘들어 하죠.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얘기하죠.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진정으로 받아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잘 받아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먼저 나를 잘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죠. 

높은 자의식과 자존감은 반비례

현대인들은요 자의식은 굉장히 쎈데 자존감은 바닥이다 이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자의식이 쎄면요 자존감이 높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의식이라고 하는 말은 말 그대로 내가 나를 의식한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늘 내 모습을 어떤 거울에 비춰본다는 거예요. 근데 인간이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요, 높은 자존감을 갖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가 별로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심지어 싫을 때도 있고 그래서 늘 자기 모습을 거리에 비추어 보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영성 깊은 신앙인들은 자기 모습을 그렇게 거울에 비춰 보지 않습니다. 대신 그분들은 자기를 지금 이 순간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 그 하나님의 눈동자에 비쳐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 사랑의 눈동자에 비쳐 있는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사랑해 줄 수 있죠.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내 모습이잖아요.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는 나이기 때문에 나도 그런 나를 받아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나이아 연대기

자기의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그 존재의 모습이 그 아슬란의 눈동자에 들어 있었겠죠.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지금이 순간도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 그 하나님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 눈을 마주쳐야겠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그려야겠죠. 사실 기독교 영성이란 한마디로 우리가 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이고 영성적인 삶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깊은 영성이란

영성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렇게 바라보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 그리고 나와 너 사이, 나와 자연 사이, 나와 나 사이가 이렇게 좋아져 가는 것이죠. 이런 모든 사이가 좋아지면 우리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까요? 좋은 것들이 점점 많아져 갑니다. 저는 영성이란 좋은 것들을 좋아할 줄 아는 영혼의 능력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거든요. 비록 인간의 죄로 인해서이 세상이 어두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우신[진선미眞善美]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그런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우리가 마땅히 싫어해야 될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해야 되는 것들을 싫어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쓰다 보면, 인간이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것 같아요. 나쁜 것을 미워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쓰기보다는 그보다는 좋은 것을 좋아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더 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런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이신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C.S. 루이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우리의 지성에 닿으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의지에 닿으면 그것이 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감각에 닿으면 그것이 즐거움,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대해서 눈을 떠가고, 더 많이 알고, 누릴 줄 알게 되어 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세계가 점점 넓어져 갑니다. 내 세계가 점점 이렇게 넓어져 가요. 뭐 내가 못 보던 세계가 있잖아요. 근데 하나님을 알게 되면, 전에 못 보던 어떤 가치나 아름다운도 보게 되고 또 의미도 알게 되고, 또 전에 내가 못 보던 눈물도 보게 되고, 왜 전에는 나만 알았잖아요. 나만 알고 살았는데, 그게 전부였는데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지금도 사랑을 쏟아서 하나님이 구원하고 계신이 세상이 다 보이니까, 나만 알던 삶에서 내 마음도 넓어져가고 생각도 넓어지고, 커지고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우리가 커지고, 넓어지고, 내가 성장한다는 말 그래야만 사실 진짜 신앙인 것 같아요. 근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렇게 정말 내 존재가 이렇게 커지는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자신을 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건 내가 좀 더 넓어진다는 의미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것에 대해서 진정한 관심을 보이는, 대화할 때 남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그건 겸손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근데 진짜 겸손한 사람은, 남의 얘기에 그냥 귀를 기울여 주는게 아니라 진짜 관심이 가요. 왜냐하면 나를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모든 타자 많은 것들에 대해 관심이 갑니다. 나를 열거든요. 그런 것이 진짜 겸손이지, 입만 열면 자기를 비하하는 게 겸손이 아니라,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것이거든요.

영성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장하고 커지고 넓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사실은 기독교 신앙도 성경을 성경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더 깊게 읽으면 이 세상 많은 문제들에도 관심을 갖게 돼요. 환경 문제라든지 또 사회 문제라던지 그러니까 성경만 읽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성경에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많으시고,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으신 분이시거든요. 그럼 우리가 세상을 알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에는 뭐에 관심이 없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이제 다른 책도 알게 되고, 공부하게 되고, 이렇게 사회로 나가는 거죠. 그런 것이 건강한 신앙이 아닌가, 자기 생각에 파묻혀 있고 자기 문제에 파묻혀 있으면, 아무리 아침에 찬란해도 아침이 좋은지도 몰라요. 우리가 아무리 삶의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고, 어둠이 있지만, 또 우리가 눈 열어보면 우리가 감사할 수 있고, 기뻐 할 수 있고, 엔조이 할 수 있는 것도 천지거든요. 그런 것들을 알아보고 우리가 하나님께 정말 감사할 줄 알고, 즐거워 할 줄 알고, 누릴 수 있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삶이 녹록지 않지만, 우리가 영혼을 지켜가면서 살아갈 수 있겠죠.

여러분의 세계는 나날이 커져가고 있나요?

어떻습니까? 그 나이 들어갈수록 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가면 해갈수록 여러분의 세계가 커져가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쪼그라 들고 작아져 가는 것 같습니까? 혹시 후자라면, 점점 작아져 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영성적이지는 않은데 다만 종교적인 어떤 그런 생활, 어떤 그런 편협한 어떤 신앙생활하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한번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넓은 세계로 나오는 거, 그게 사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에요. 좁디 좁은 곳에 갇혀 있던 내가, 나 자신 안에 갇혀 있었던 내가 하나님의 세계라고 하는 그 드넓은 세계, 그 탁 트인 세계로 내가 이렇게 나오게 되는 것이죠. 바로 이런 구원 경험, 이런 영성적인 체험을 일컬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도다" (시편 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