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역사 서술 체제로 기록되었습니다. 기전체 사서는 황제들의 사적인 〈본기本紀〉, 각종 통계자료 및 연표인 〈표表〉, 여러 전문 분야에 대해 정리 서술한 〈서書〉,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世家>, 신하들의 사적인 <열전列傳>으로 구성된 사서인데, 기전체는 황제들의 사적인 〈본기〉가 중심인 사서입니다.
황제의 사적이 중심 기둥이 되어 우산을 펼치면 그 우산 아래 세가・열전・지・표 등이 종적, 횡적 연결관계를 갖고 움직이는 체제인데, 그 정점에는 항상 〈본기〉가 있습니다. 사마천이 기전체 사서를 고안한 이유는 중국사의 시조부터 시작하는 계통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마천이 한漢나라뿐만 아니라 상고사까지 쓴 이유는 바로 중국사의 계통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기》는 중국 최초의 중국민족사, 즉 중국한족사인 것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나라의 역사서가 아니라 천하가 어떻게 시작해서 한나라까지 왔는지 서술한 일종의 천하사입니다. 이런 역사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천하의 시조가 누구인가, 즉 천하의 첫 제왕이 누구 인가, 중국사의 시조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기》는 그때까지 나온 여느 역사서와 달랐습니다. 양계초가 사마천을 “사학계의 조물주”라고 부른 것은 과장이 아닌 셈입니다.]
사마천은 천하의 시조이자 중국의 시조를 황제 헌원으로 두고 있다. 그래서 동이족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황제 헌원을 중심으로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왜곡한 동방 조선의 역사에 관한 주요한 핵심 키워드 3가지는 금살치우(擒殺蚩尤), 무왕내봉기자어조선(武王乃封箕子於朝鮮), 조선왕만자 고연인야(朝鮮王滿者, 故燕人也)이다.
사마천 사기는 오제본기에 사마천의 중국의 시조로 여겼던 황제 헌원을 높이기 위해 신시 배달국때 전쟁의 신이며, 동방의 천자로 불리웠던 치우천황을 야만인의 수괴로 몰아 황제 헌원이 치우천황을 탁록에서 잡아 죽였다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송미자세가에 은나라를 정복한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감옥에서 기자를 풀어주고 기자에게 상륜지도에 관해 묻는다. 이에 기자가 홍범구주를 설명하는데, 이 후 뜬금없이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지만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는 엉뚱한 기록이 나온다. 이건 진짜 사마천이 기술한 것인지도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사마천은 조선열전을 조선왕만자(朝鮮王滿者)라는 문구로 시작해 마치 위만이 조선의 정통성 있는 왕이었던 것 처럼 조작한다. 위만은 원래 연나라 노관의 부하였다. 한고조에 의해 연나라왕으로 봉해진 노관은 이후 여태후의 숙청과 정치적 문제 등으로 흉노로 망명을 하게된다. 이때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도 부하들을 이끌고 번조선의 준왕에게 망명을 요청한다. 당시 북부여의 대단군이었던 해모수 단군은 준왕에게 위만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준왕은 위만을 받아들이는 잘 못된 결정을 하게 된다. 결국 위만은 기회를 틈타 번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험성을 점령해 정권을 찬탈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기원전 108년 위만의 손자 우거왕때 위만정권은 내부분열 등으로 한무제에게 패하게 되는데, 이 내용을 조선열전에 기록하여 마치 위만정권의 패배가 조선 전체의 패배였던 것 처럼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그러면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태백일사의 신시본기 [원문보기 클릭]에 의하면, 치우천황께서 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雄圖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와 태산 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 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원문보기 클릭]에 의하면 기자箕子가 살았던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는 조선의 25세 솔나 단군이 재위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기자는 지금의 하남성 지역에 머물렀고, 한반도에 기자가 들어와 조선의 왕, 즉 단군의 역할을 했다는 1차 사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위만에 관해서는 환단고기의 북부여기 [원문보기 클릭]에 아래와 같이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재위 19년 경진(단기 2113, BCE 221)년에 기비箕丕가 홍서하자 아들 준準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조선 왕으로 책봉되었다. 임금께서 관리를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데 더욱 힘쓰게 하셨다. 이보다 앞서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재위 45년 병오(단기 2139, BCE 195)년에 연燕나라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衛滿이 우리나라[번조선]에 망명을 구하였다. 임금(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운장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사마천 사기의 《五帝本紀 오제본기》[오제본기 원문보기 클릭]
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
황제자, 소전지자, 성공손, 명왈헌원.
生而神靈, 弱而能言, 幼而徇齊, 長而敦敏, 成而聰明.
생이신령, 약이능언, 요이순제, 장이돈민, 성이총명.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자손으로 성을 공손公孫으로 삼고, 이름을 헌원軒轅이라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웠고,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하였다. 어려서는 명민하고 기민하였고 성장하면서는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장성해서는 총명했다.
軒轅之時, 神農氏世衰.
헌원지시, 신농씨세쇠.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제후상침벌, 폭학백성, 이신농씨불능정.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
어시헌원내습용간과, 이정불향, 제후함래빈종.
而蚩尤最為暴, 莫能伐
이치우최위폭, 막능벌.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염제욕침릉제후, 제후함귀헌원.
헌원軒轅의 시대에 신농씨神農氏의 세력이 쇠하였다.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고 싸우며 백성들을 억압하였으나, 신농씨는 이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에 헌원은 무기를 익히고 병기를 사용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헌원을 따랐으나, 치우蚩尤는 가장 폭력적이어서 아무도 그를 정벌할 수 없었다. 염제炎帝가 제후들을 침략하려 하자,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귀부하였다.
軒轅乃修德振兵, 治五氣, 藝五種, 撫萬民, 度四方, 教熊羆貔貅貙虎,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헌원내수덕진병, 치오기, 예오종, 무만민, 도사방, 교웅비비휴추호, 이여염제전어판천지야.
三戰然後得其志.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수전연후득기지. 치우작란, 불용제명, 어시황제내징사제후, 여치우전어탁록지야, 수금살치우
而諸侯咸尊軒轅為天子, 代神農氏, 是為黃帝.
이제후함존헌원위천자, 대신농씨, 시위황제.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
천하유불순자, 황제종이정지, 평자거지, 피산통도, 미상녕거.
헌원은 덕을 닦고 군대를 정비하며, 오행을 다스리고 오곡을 재배하며, 만민을 어루만지고 사방을 측량하며, 곰·불곰·비휴·치타·호랑이 등 맹수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炎帝와 싸웠다. 세 번 싸운 뒤에야 목적을 이루었다. 치우蚩尤가 반란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모아 치우와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존경하여 천자로 삼았으며, 신농씨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를 황제黃帝라 한다. 천하에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황제가 이를 정벌하였고, 평정한 곳은 떠나며, 산을 개간하여 길을 내며 한 번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사마천 사기의 《宋微子世家 송미자세가》 [송미자세가 원문보기 클릭]
箕子者, 紂親戚也.
기자자, 주친척야.
紂始為象箸, 箕子嘆曰: 彼為象箸, 必為玉桮; 為桮, 則必思遠方珍怪之物而御之矣.
주시위상저, 기자탄왈: 피위상저, 필위옥배; 위배, 즉필사원방진괴지물이어지의
輿馬宮室之漸自此始, 不可振也. 紂為淫泆, 箕子諫, 不聽. 人或曰: 可以去矣.
여마궁실지참자차시, 불가진야. 주위음일, 기자간, 불청. 인혹왈: 가이거의.
箕子曰: 為人臣諫不聽而去, 是彰君之惡而自說於民, 吾不忍為也. 乃被髪詳狂而為奴.
기자왈: 위인신간불청이거, 시창군지악이자열어민, 오불인위야. 내피발양광이위노.
遂隱而鼓琴以自悲, 故傳之曰箕子操.
수은이고금이자비, 고전지왈기자조.
기자(箕子)는 주(紂)왕의 친척이다.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하자 기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가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틀림없이 옥으로 술잔을 만들 것이고, 옥 술잔을 갖게 되면 틀림없이 먼 곳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들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수레와 말과 궁궐을 갖게 될 조짐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주왕이 제멋대로 쾌락에 빠지자, 기자가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떠나야함이 마땅합니다.” 기자가 말했다. “신하된 자가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떠나면 이는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여 노예가 되었다. 마침내 숨어서 스스로 슬퍼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였으므로 이 곡조가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해지고 있다. 중략,,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무왕기극은, 방문기자.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 我不知其常倫所序.
무왕왈: 어호! 유천음정하민, 상화기거, 아부지기상륜소서.
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물리친 후 기자(箕子)를 찾아가 물었다. 무왕이 말했다. “오오! 하늘이 백성들을 어루만져 그들을 안정시키고, 서로 화합하며 살아가게 하시나, 나는 그 상륜(常倫, 우주의 이치에 따라 변화하는 윤리)이 베풀어지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箕子對曰: 在昔鯀陻鴻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從鴻範九等, 常倫所斁.
기자대왈: 재석곤인홍수, 골진기오행, 재내진노, 부종홍범구등, 상륜소두.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곤즉극사, 우내사흥. 천내석우홍범구등, 상륜소서.
기자가 대답했다. “옛날 곤(鯀)이 홍수를 막으면서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상제上帝(여기서 제帝는 초대 단군왕검을 뜻함)께서 크게 노하여 아홉 가지 큰 규범[홍범구주, 洪範九疇]을 주시지 않아 세상의 상륜(常倫)이 이로써 흐트러졌습니다. 곤이 죽임을 당하고 우(禹)가 그 일을 이어서 일으켰습니다. 하늘(단군왕검)은 곧 우(禹)에게 아홉 가지 큰 규범을 내리시어, 이에 따라 세상의 상륜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홍범구주에 대한 설명,,,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이불신야.
이에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하되,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마천 사기의 조선열전 [조선열전 원문 보기 클릭]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 朝鮮, 為置吏, 筑鄣塞
조선왕만자, 고연인야. 자시전연시상략속진번, 조선, 위치리, 축장새
秦滅燕, 屬遼東外徼。漢興, 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진멸연, 속요동외교 한흥, 위기원난수, 복수요동고새, 지패수위계, 속연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연왕노관반, 입흉노, 만망명, 취당천여인, 퇴결만이복이동주출새, 도패수,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거진고공지상하장, 초역속진번, 조선만이급고연, 제망명자왕지, 도왕험
조선의 왕이었던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의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아전[吏]을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국(秦國)이 연국을 멸하고 요동 밖 요(徼)에 소속시켰다. 한국(漢國)이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국에 소속시켰다. 연국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과 만이(蠻夷)들을 복속하여 거느리고 연국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참고: 한문화타임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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