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천제(天祭)는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환인으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지금의 유학자들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
檀君紀(단군기)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鴻荒之世, 開刱之業, 賴以成焉,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中, 多仙家語. 余以爲, 我國以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故, 說史者, 不可只擬班.馬之筆而踞蹐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况, 國史蕩失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 保於岩穴者也. 道家旣承, 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則其論東史者, 大有愈於緇流所記, 多出於牽强傅會‧臆爲之說者也. 余寧取淸平之說, 而欲無疑云.
신시씨[커발환 초대 환웅천황]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서 태고적 세상이 처음으로 개벽하던 일들이 모두 그에게 힘입어 이루어 졌으니, 무릇 단군 이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인이다. 예전에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진역유기(震域遺紀)》 세 권을 저술하였으니, 이는《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옛 역사를 갖추어 실은 것으로서 일연(一然)의 책과 비교하면 서로 사뭇 큰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내가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점차 스며들어 베어 있는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하여 단지 반고나 사마천의 글만을 흉내내며 옴짝달싹을 못하는가!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인데, 어찌하여 당당한 진역(震域)을 꼭히 한나라 정도에 견준 연후에야 만족을 하는가! 항차 나라의 역사가 몇 번에 걸친 병화(兵禍) 끝에 씻은 듯이 소실되고 지금에 근근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도가와 불가에서 기록하여 전하는 것뿐이었으나 요행히 바위굴에 간직되어 오던 것을 얻게 되었다. 도가는 이미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제한 근본 흐름을 이어받은데다 아울러 이렇게 문헌의 잔맥을 얻게 되었으니, 해동(海東)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견강부회하고 억측이 많은 불가의 기록에 비해 훨씬 낳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是卽神市氏. 蓬亭柳闕而居, 陶髮跨牛而治, 處無爲之事, 敷自然之化, 開創成業, 源流萬世. 及其暮年, 見功業已完, 民物樂生, 登太白山, 乃置天符三印於池邊石上‧檀木之下, 因化仙乘雲而朝天. 是以, 名其池曰朝天.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지 무릇 궐천년이니, 그가 바로 신시씨이다.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궁궐에 거처하면서 정성으로 사람을 교화함에,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다스리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교화를 널리 펴니, 처음으로 나라를 열어 이룬 위업은 그 근본이 만세로 이이졌다. 그 말년에 이르러 공들인 위업이 이미 완성되며 백성과 사물들이 즐거이 사는 것을 보고는, 태백산에 올라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印)을 못 가 돌 위의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때문에 그 못을 이름하여 ‘조천지(朝天池)’라 하는 것이다.
高矢氏諸人, 奉天符三印, 共推其子桓儉神人, 爲君長, 是爲壬儉. 壬儉者, 君長之意也, 新羅所謂尼師今者, 亦此類也. 以今追計, 約算四千餘歲, 正與唐堯同時, 世俗所謂與堯幷立者, 是也. 因稱檀君, 檀君者, 朴達壬儉之譯也. 盖神市氏, 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復踐阼於檀樹下, 故因以檀爲國名, 則檀君者, 檀國之君也. 而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謂君曰壬儉. 當時無漢字, 故只稱白達壬儉, 而後世之述史者, 譯以檀君, 復傳至後世, 則只記檀君字, 而不知檀君之爲白達壬儉之譯, 此漢字之功罪相半也. 今若以諺書幷用, 則必無是弊, 而草野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 此未遑長述.
고시씨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을 받들고 그의 아들인 환검신인(桓儉神人)을 다함께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으니, 이로서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라 함은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라에서 이른바 ‘니사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셈하면 대략 4천여 년이 되니 바로 당요(唐堯)와 같은 때로서, 세속에서 말하듯이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고 이름하는데,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단군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단군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다. 지금에 만약 언문과 함께 쓴다면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없을 것이니, 곧 들녘의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깨우쳐 문화의 계발이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於是, 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今, 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後屬凌夷, 盡擲先祖舊(彊)[疆]於他人之手, 而區區靺鞨一支, 猶能(拪)[捿]息於枌楡之地; 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 天門大捷, 國基賴定, 夫豈偶然也哉!
그리하여 모든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조영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대저 말갈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의 자손인데, 뒤에 점차 쇠퇴해져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던져 주고는 구구하게 말갈의 일족이 되어서 여전히 고향 땅에 깃들어 살더니, 대씨(大氏)가 한 차례 호령함에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이기고는 나라의 기초를 이로서 바로잡게 되었으니, 무릇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盖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今, 春川.淸平山南十餘里, 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濶而江流抱回, 是爲貊國故都.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이 자리잡은 곳에 신의 조화가 두루 미쳐 만세가 지나도록 그 운치가 끊어지지 않았음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춘천 청평산 남쪽 10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강이 합쳐지는 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맥국 역시 단군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 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었을 것이다.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 天命在爾, 統我震域 故, 國號曰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였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천통(天統)’이라 건원하며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에 이르러 교만하고 안락함에 빠져 점차 이를 폐지하고 또한 유학과 불교를 아울러 섬기니 마침내 쇠퇴하여……」라고 하였다.
今, 內外載籍, 幷無是語. 盖忽汗之敗, 遼虜凶殘, 室宮庫藏, 焚燒略盡, 復豈有載籍之得存者耶. 雖然, 渤海王子大光顯以下, 來投於高麗者甚衆, 中多公侯卿相及慷慨泣血之士, 淸平所記, 盖有據於渤海人之所秘藏者也.
지금 나라 안팎의 서적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아마도 홀한의 패배 때 요나라 오랑캐의 흉악한 잔당들이 궁실이며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거의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다시 어찌 서적 가운데 남아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고려에 투항해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공경대부나 제후와 재상 및 비분강개하는 의기로운 선비도 많았으니, 청평이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발해인들이 비밀리에 소장한 것에 근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可怪, 金富軾爲仁宗修三國史,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 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 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儉)」等[自](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 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蜜)[密]記》等書, 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 삼국의 역사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동천왕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 이름이《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지공기(誌公記)》·《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김부식)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
盖, 三國鼎立, 互事呑噬, 新羅終致聯唐兵而覆麗.濟, 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 不惟秦.越而已. 是以, 弓裔襲據漢北之地, 則恨平壤之茂草, 聲言爲高句麗報讎, 而浿西諸鎭, 望風歸服, 立國建元, 威壓列州; 甄萱叛據完山, 則憤百濟之衰亡, 以雪義慈宿憤爲言, 而西南州縣, 所至響應, 建都設職, 喜得人心.
대저 삼국이 정립하고 있으며 서로 집어삼키고 물어뜯고 하다가, 신라가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뜨렸다. 그후 발해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신라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궁예(弓裔)가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고는 잡초만 무성해진 평양 땅을 한탄하며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하니, 패서(浿西)의 모든 고을이 그 기세에 힘입고 모여들어 복종하기에,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함에 그 위세가 모든 고을을 제압하였다. 견훤(甄萱)은 완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거하고 백제의 쇠망을 분하게 여겨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천명하니, 서남쪽의 고을 가운데 그 명성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향응하기에, 도읍을 세우고 직책을 설치하여 기꺼이 인심을 얻게 되었다.
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 自有甚於古者[矣. 是以, 金氏撰史之時, 已無過問, 鴨北之事者.] 况, 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遊)[游]獵, 侵掠邊邑者, 麗.太祖初年所記也. 然則, 高句麗亡後三百年, 而平壤不免荊棘, 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然則, 忽汗敗而大氏之來奔高麗者, 亦家敗而睦族之類而已.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김씨가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미 압록강 이북의 일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 항차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고려 태조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즉 고구려가 망한 뒤 3백년이 지난 후 평양은 가시덤불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발해인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다. 그러기에 홀한에서 패한 대씨가 고려로 투항하여 온 것 역시, 마치 집안이 망하면 오히려 가족끼리는 화목하여 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 따름이다.
及夫玅淸之造亂, 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 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 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 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盖, 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 亦復奈何.
무릇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묘청의 요사스러움과 서경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발해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按《遼史․地理志》, 有「顯州.奉先軍, 上,節度. 本渤海.顯德府地. 天顯三年, 遷東丹民居之, 升爲南京城. 天顯十三年, 改南京爲東京府曰遼陽…」等句. 今遼陽在蘇密以南六百餘里, 與淸平之說, 甚相逕庭. 且遼陽旣爲中京, 則西京當擬於遼西.臨潢等地, 以渤海舊疆考之, 決無是理. 况, 淸平諸說, 已有所據, 而《遼史》則乃元.至正中, 丞相脫脫等所撰也; 經金.宋交爭以後數三百年, 文獻自多不備, 傳說亦多失正鵠. 而渤海亡後, 其世族舊臣, 隨處擧兵, 殆將百年不息, 遼人多遷其民, 與漢民雜處, 遼西之地, 以至城邑, 冒稱渤海, 本名者, 不下數十, 元人修史者, 只憑古傳名字, 輒自斷之, 不亦踈乎.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현주(顯州)의 봉선군(奉先軍)은 상절도(上節度)로서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 땅이다. 천현(天顯) 3년에 동란(東丹)의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승격시켜 남경성(南京城)으로 삼았다. 천현 13년에 남경을 고쳐 동경으로 삼고 관청을 두어 요양(遼陽)이라 하였다」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지금의 요양은 소밀(蘇密)의 남쪽 600여 리에 있으니 청평의 말과는 서로 차이가 매우 심하다. 또한 요양이 이미 중경이 되었으니 곧 남경은 당연히 요서(遼西)나 임황(臨潢) 등의 땅에 비견되어야 하므로, 발해의 옛 강토로써 이를 고찰하여 보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더욱이 청평의 모든 말은 이미 그것이 근거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만, 《요사(遼史)》는 곧 원나라 중정(中正) 연간에 승상 탈탈(脫脫) 등이 찬술한 것으로서, 금나라와 송나라가 서로 다툰 이후 거의 3백년이 지난 뒤이기에 문헌이 많이 소실되었고 내려오는 얘기 또한 자못 그 올바름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발해가 망한 후 그 명문세가나 옛 신하들이 도처에서 병사를 일으킴이 거의 백년 동안 쉴 틈이 없자, 요나라 사람들이 그 백성들을 많이 옮겨 한나라 백성과 섞어 거처하게 하였기에 요서의 땅에는 성읍에 이르기까지 발해의 지명을 모방하여 부르게 되어서 본래의 지명이 남은 곳은 수십 곳을 넘지 못하였음에도, 원나라 사람이 엮은 역사는 단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의 글자에만 의지해서 함부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므로, 이 또한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壬儉城者, 卽古語京城之意也. 平壤之意, 雖未詳, 亦必都城之義, 如新羅之徐羅伐‧百濟之慰禮也.《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王險城. 《史記》·《漢書》[通及](及《通)典》, 皆有王險城字, 此又儉字之誤也. 此可續述焉.
‘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서술하겠다.
檀君旣建都於壬儉城, 乃築城郭, 建宮室, 置主命‧主穀‧主兵‧主刑‧主病‧主善惡及主忽諸官, 以其子夫婁爲虎加, 緫諸加者也.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周](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으며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舊禮, 凡祭天, 必先定吉日, 擇白牛而護養之, 及期, 宰殺以頭薦之於嶽瀆. 白頭, 牛首之名, 頗亦有因於此也. 盖祭天報本之禮, 始於檀君, 後世歷代諸國, 莫不祭天. (扶)[夫]餘‧濊(洦)[貊]‧馬韓‧新羅‧高句麗諸國以十月, 百濟以四仲月, 各有禱天‧舞天‧祭天‧郊天‧迎鼓‧東盟之稱. 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蹏占吉凶之俗, 盖其源流久遠而沈漸成俗, 亦可知矣.
옛 예절에 무릇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먼저 상서러운 날을 정하고, 흰소를 선택하여 이를 보호하여 기르다가, 날이 되면 잡아서 그 머리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올렸다. ‘백두(白頭)’는 소의 머리를 이름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가 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 부여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니, 대개 그 원류가 오래되고 요원하지만 생활에 깊숙이 젖어 들어 풍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夫尊卑之禮, 必自敬鬼神而興, 上下尊卑之序定而先王經世之道行焉. 而敬神之禮, 莫大於祭天, 通萬古, 迄四方, 未有人而不知畏天者. 是以,《易》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又曰: 「首出庶物, 萬邦咸寧.」 盖言其聖人, 軆天而率民也.
대저 존귀하고 비천함에 대한 예절은 반드시 귀신을 공경하면서부터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위아래와 귀천의 순서가 정해지니 세상을 다스리는 선왕의 도가 행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역(易)》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乾)의 원(元)이여. 만물이 원(元)에 바탕하여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모두 다스리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싹이 터 나오니 모든 나라가 다 평안하니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체득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통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洪範八政, 三曰祀, 祀者, 所以通神明而報其本也. 是以, 陸有祭獸之豺, 水有祭魚之獺. 夫豺獺者, 禽獸也, 猶知報本之意, 况人而不知(其)報本之禮乎! 又况神市, 肇宅人界, 其降自天, 桓儉繼志述事, 未嘗少弛, 此桓儉所以, 纔定厥鼎而便祭上天也. 且太白山者, 神市陟降之靈地也, 檀君踐(祚)[阼], 亦肇于厥地, 此又始行之, 于太白也. 是爲東方萬世之國典, 故古代國君, 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 因以爲道.
홍범팔정(洪範八政)의 세번째는 ‘사(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란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육지에는 제사를 지내는 짐승인 승냥이가 있고, 물에는 제사를 지내는 고기인 수달이 있으니, 대저 승냥이며 수달은 짐승이면서도 오히려 근본에 보답하는 의미를 아는데 항차 사람이면서 근본에 보답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겠는가! 또한 신시씨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환검은 그 뜻을 이어 이를 처리함에 조금도 소흘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까닭에 환검이 비로소 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 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至於官職, 又有(太)[大]仙‧國仙‧皂衣之稱, 至若東明聖王, 有朝天之石, 明臨荅夫, 曾帶皂衣之職. 泉蓋蘇文, 入鳳凰山, 修鍊十年, [萬古奇傑; 金庾信, 亦入中嶽石]窟, 十年修道, 終爲名將, 助太宗致盛强. 渤海時有報本壇, 高麗時有聖帝祠, 遼有木葉山三神廟, 金有開天弘聖帝之廟. 我世宗, 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 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국선(國仙)․조의(皂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皂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발해 때는 보본단(報本壇)이 있었고, 고려 때는 성제사(聖帝祠)가 있었으며, 요나라에는 목엽산(木葉山)의 삼신묘(三神廟)가 있었고, 금나라에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의 사당이 있었다. 우리 세종께서는 단군묘(檀君廟)를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 ‘조선시조단군지묘(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盖, 神市氏之事, 聽者多疑其迂怪. 至今惟知崇檀君, 而不知其前實有神市氏之開創矣. 世俗不知原由, 只憑漢籍曰: 「仙敎是黃老餘流.」 殊不知, 以神設敎, 實自我神市之世也.
대저 신시씨의 일을 들은 사람은 현실에 맞지 않고 괴이함에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속은 그 연유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한나라의 서적에 의지하여 이르기를 「선교(仙敎)는 황노(黃老)의 한 부류이다」라고 하니, 신인으로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우리 신시씨의 세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도를 궁구하여 교화를 행한 지 수년만에 강토의 백성에게 모두 교화가 두루 미치니, 세상은 잘 다스려지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행함이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는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로서 곧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후에 계속하여 말하고자 한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 曰平壤, 卽第二(王)[壬]儉城也. 盖, 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淥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桓都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 치세 때 모두 네 차레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按《新唐書․渤海傳》曰: 「高麗(古)[故]地爲西京, 曰鴨(綠)[淥]府, 領神‧豊‧桓‧正四州.」《遼史․地理志》曰: 「淥州, 鴨淥軍, 節度, 本高麗(古)[故]國, 渤海號西京.鴨淥府, 都督神‧桓‧豊‧正四州事. 故縣三, 神鹿‧神化‧劒門, 皆廢.」 又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神鄕‧淇水, 皆廢.」 夫, 渤海承高句麗(之)後統, 高句麗復出於夫餘, 則渤海之世, 猶有古史之傳者, 想不少矣. 或曰: 「平壤之敗李勣, 盡燒宮室庫藏, 復虜其公侯世族, 則史籍亦不免灰燼矣, 渤海, 安得傳其史乎?」 余以(謂)[爲]不然. 渤海.高王, 乃高句麗舊將也. 高句麗之亡, 徙居營州, 及看藎榮之亂, 與乞四比羽, 領衆東還, 麗.鞨之衆, 響應而起. 盖其舊國宿將, 如百濟之黑齒常之明矣, 其麾下, 想多舊國遺臣, 能博通古今者. (耳)[且]自高句麗亡後, 距高王之興, 僅二十七八年事也, 古史能無得傳乎?
《신당서․발해전》에 따르면 「고려의 옛 땅을 서경으로 삼아 압록부(鴨淥府)로 이름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라 하였으며,《요사․지리지》에는 「녹주(淥州)의 압록군(鴨淥軍)은 절도(節度)이다. 본래 고려의 옛 국토로서 발해가 서경압록부라 불렀다. 모두 신(神)․환(桓)․풍(豊)․정(正) 등 4주의 일을 감독한다. 옛 현인 신록(神鹿)․신화(神化)․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환주(桓州)는 고려의 중도성(中都城)이며 옛 현인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훗날 그 지역을 다스렸고, 고구려는 다시 부여로부터 나왔으니, 곧 발해의 세대에는 아직까지 옛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패하여 궁궐이며 곳간이 남김없이 불타 버리고, 게다가 공경대부며 명문세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기에 역사 서적 역시 재가 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 발해가 어떻게 그 역사를 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고왕은 바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영주(營州)로 옮겨 거처하다가 신영(藎榮)의 난을 보고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무리를 영도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대저 그는 옛 나라의 노련한 장수로서 마치 백제의 흑치상지와 같음이 분명하니, 생각건대 그 휘하에는 옛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능히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는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로부터 고왕이 일어서기까지의 사이는 겨우 27,8년의 일이니 옛 역사가 능히 전해진 것이 없었겠는가?
且以文勢言之, 則神州當爲渤海.西京所在鴨淥府地, 而神州‧桓州之名, 又有近於神市‧桓儉等字. 况, 神市‧桓儉, 人每認爲一人, 至今擧世殆然. 而神州屬縣, 有神化‧神鹿等地; 桓州屬縣, 又有桓都‧神鄕‧淇水之名. 桓都者, 盖高句麗之丸都也. 丸都之名, 旣出於《魏志》·《北史》等書, 則桓.丸之誤, 固不可知, 而渤海旣以桓州‧桓都定名, 則其或原於慕遠之意.
또한 문장의 흐름을 보아 말하더라도 곧 신주(神州)가 마땅히 발해의 서경이 있는 압록부 땅이며, 신주(神州)나 환주(桓州) 등의 이름 또한 신시(神市)나 환검(桓儉) 등의 글자에 가까운 바가 있다. 항차 신시씨와 환검신인을 사람들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여기더니, 지금은 모든 세상이 거의 다 그렇게 여긴다. 신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신화(神化)와 신록(神鹿) 등의 땅이 있고, 환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또 환도(桓都)와 신향(神鄕) 및 기수(淇水) 등의 이름이 있다. 환도(桓都)는 아마도 고구려의 환도(丸都)일 것이다. ‘환도(丸都)’라는 이름은《위지(魏志)》나《북사(北史)》등의 책에도 이미 나오는데, 곧 ‘桓’이 ‘丸’의 잘못 된 표기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발해에서는 이미 환주(桓州)와 환도(桓都)로 이름을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는 아마도 오랜 옛날을 그리는 뜻에 그 근원을 두었으리라.
神鄕則, 有寓神市之鄕之義也. 神化則, 言神人之化也. 神鹿之稱, (丸)[尤]益可奇. 况古來, 稱桓儉曰神人, 則神‧桓等名, 決非偶然. 且淇水,《元.一統志》作浿水, 又與前述浿水之北之說, 暗合. 按漢籍, 說浿水及平壤者, 頗多, 今不可便述. 而神州‧桓州‧神化‧神鹿‧桓都‧神鄕‧浿水之名, 旣與檀君古事, 多合, 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신향神鄕’이라 함은 곧 신시씨에게 의지하며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 있으며, ‘신화神化’라 함은 곧 신인의 교화를 말하는 것이다. ‘신록神鹿’의 명칭은 더욱 기이하다. 항차 예로부터 환검(桓儉)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하였으니, 곧 ‘神’․‘桓’등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기수(淇水)는《원일통지(元一統志)》에 패수(浿水)로 되어 있으며, 또 앞에서 서술한 ‘패수의 북쪽’이라는 예기와 암암리에 부합한다. 한나라 서적에 의거하면 패수와 평양을 말한 것이 자못 많으나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 신주․환주․신화․신록․환도․신향․패수 등의 이름은 이미 단군의 옛 일들과 많이 부합되니, 곧 단군의 두번째 도읍인 평양은 압록강[고대의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且《三國史記》, 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 薛支見王曰: 「臣逐豕至慰那岩,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麋鹿魚鱉之産, 王若移都, 則不惟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云云. 故明年冬十月, 王遷都國內, 則其地, 非但山水險阻, 原野開濶, 亦可知, 適於耕農矣.
또한《삼국사기》의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설지(薛支)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희생(犧牲)인 돼지를 쫓아 위나암(慰那岩)에 이르렀더니, 그 곳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또한 순록과 물고기 및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 단지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 또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해 겨울 10월에 왕이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겼으니, 곧 그 땅은 단지 산수가 험준하고 들판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夫, 古者建都, 必取險固殷富及交通之便. 今平壤‧松京‧漢陽之地, 莫不皆然, 長安‧洛陽, 恒爲漢土建都之地, 亦此故也. 然則, 檀君之世, 民物漸繁, 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 以圖後日之隆運, 盖可想見矣.
무릇 옛날에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취하였다. 지금의 평양이나 송경과 한양 등지의 땅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장안과 낙양이 항상 한나라에서 도읍을 세우는 땅이 됨은 또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한 즉, 단군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패수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 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乃得婆豬江合流處, 又行二百里, 至江界.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山河固密. 盖, 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渤海.神州‧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또한《당서》의 <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 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洫,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榼, 有一童子, 衣緋衣, 從榼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犭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並)[麤莊], 風氣勁雄, 曰僂侲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卒本‧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僂侲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神誌氏受封於僂侲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麤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挹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挹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羙,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煖]而食肥羙,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 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睊睊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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