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47대 단군에 관해 만담형식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북애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결국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어느 산골에서 천우신조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규원사화를 쓰게 된다. 최태영 박사는 "북애는 실로 주체의식이 강하고, 확고한 사관을 세운 선각자이다"라고 북애를 평했다. 규원사화 서문엔 잃어버린 동방의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그의 비애감이 녹아 있다.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한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나라에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무릇《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 《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춘추》나 《강목》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누차의 전란과 화재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소멸되었다. 후세에 고루한 유학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서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고 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이니 어찌 천하지 아니한가!]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
《규원사화》는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揆園史話序(규원사화서)
北崖子旣應擧而不第, 乃喟然投筆, 放浪[於]江湖, 凡數三歲, 足跡殆遍於鯷域, 而深有蹈海之悲. 時經兩亂之後, 州里蕭然, 國論沸鬱, 朝士旰食, 野氓懷慍.
북애자는 이미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이에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강호를 방랑한지 무릇 삼년에, 발길은 이 나라 구석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때로는 바다에 이 발길을 내어 맡길까하는 비탄에 젖기도 하였다. 때는 두 난리를 겪은 뒤라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국론은 들끓어 올라 조정과 선비들은 끼니를 거를 만큼 경황이 없었으며, 뭇 백성들은 가슴에 그저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於是北崖子, 南自金州‧月城, 歷泗沘‧熊川, 復自漢山入峽而踏濊貊舊都之地; 北登金剛之毘盧峰, 俯看萬二千峯簇擁峭列. 乃望東海出日而泣下, 眺萬丈瀉瀑而心悲, 慨然有出塵之想.
이에 북애자는 남쪽의 금주(金州)와 월성(月城)으로부터 사비(泗沘)와 웅천(熊川)을 거치고, 다시 한산(漢山)에서 골짜기로 접어들어 예맥의 옛 도읍을 밟았으며, 북쪽으로 금강산의 비로봉에 올라서서 빽빽이 들어차 가파르게 늘어서 있는 일만 이천의 봉우리를 굽어보았다. 이에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 흐르고, 만길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를 쳐다보니 마음은 슬픔에 잠기는데, 그 복받친 마음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更西遊至九月山, 低徊於唐莊坪, 感淚於三聖祠. 及自平壤到龍灣, 登統軍亭, 北望遼野, 遼樹薊雲, 點綴徘徊於指顧之間, 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噫! 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 而今害毒日甚, 乃懷古悲今, 咨(差)[嗟]不已. 後還至平壤, 適自 朝家有建乙支文德祠之擧, 卽高句麗大臣, 殲隋軍百餘 萬於薩水者也. 經月餘, 至松京, 始聞荊妻之訃, 急遽還歸居家, 益復寂寞. 於是, 搆揆園書屋於舊居之南‧負兒岳之陽, 聚諸家書, 廣采其說, 意欲以此終餘生焉.
다시 서쪽으로 노닐며 구월산에 이르러 고개를 늘이고 당장평(唐莊坪)을 배회하자니 삼성사(三聖祠)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양으로부터 용만(龍灣)에 이르고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북녘으로 요동의 들판을 바라보니, 요동(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薊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는데, 작은 거룻배로 압록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 우리의 땅이 아니구나. 슬프다!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여 년에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해져 가니, 옛날을 그리워하며 지금을 슬퍼함에 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 후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이르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을 세우는 행사가 있다 하는데, 곧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살수(薩水)에서 수(隋)나라 군사 백여 만 명을 무찌른 분이다. 한달 남짓 지나 송경(松京)에 이르러 비로소 아내의 부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 왔으나 더욱 적막할 따름이라, 이에 옛집의 남쪽이며 부아악(負兒岳)의 양지 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모아 그 학설을 널리 연구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夫以力服人者, 力窮而人叛; 以財用人者, 財竭而人去. 力與財, 余旣不能有焉, 而亦不曾冀求. 觀乎! 荒凉北邙坂下, 曾何力與財之有乎! 且名者(宲)[實]之賓也, 余將慕名而爲賓乎! 名亦不足願.
무릇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할 것이며, 재물로써 남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는 그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권력과 재물은 이미 내가 가지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일찍이 바라거나 구한 적도 없다. 보라! 황량한 북망의 산비탈 아래에 어찌 권력이나 재물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명예란 것은 참된 것의 손님과도 같은데, 내가 명예를 그리다가 도리어 손님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명예란 것 역시 내가 족히 바랄 것이 되지 못한다.
昔者勿稽子有言, 曰: 「天識人心, 地知人行, 日月照人意, 神鬼鑑人爲.」 夫! 人之善惡正邪, 必爲天地神鬼之所照臨監識, 則斯已矣. 寧向髑髏人世, 汲汲然競寸銖之名利哉! 余決不爲. 惟存性養志, 修道立功, 以遺效於來世後孫, 則雖終世無知者, 亦可無慍, 或萬世之後而一遇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觀夫閃忽千年往事, 曾復何向髑髏人世, 爭寵辱於石火光中耶!
예전에 물계자(勿稽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내려 비춰보고, 귀신은 사람의 행위를 내어다 본다」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선하고 악함과 바르고 사악함의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천지신귀(天地神鬼)가 내려 비춰보고 살펴 아는 것이 곧 그와 같을 따름이다. 어차피 백골로 향하는 인생에서 어찌 그리도 조급하게 한푼어치의 명리를 가지고 다툴 것인가! 나는 결단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타고난 성품을 간직하여 뜻을 기르고, 올바른 수행의 길을 닦아 공을 세움으로서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남고자 하는 것이니, 비록 세상이 다하도록 알아주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성냄이 없을 것이나, 혹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 변명을 이해하는 이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절박하게 접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섬광과도 같은 천년의 지난 일들을 바라보며, 한낱 백골로 향하는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은 인생에서 어찌 또 다시 명예와 치욕을 다투겠는가!
余嘗論之, 朝鮮之患, 莫大於無國史. 夫《春秋》作而名分正,《綱(耳)[目]》成而正閏別,《春秋》·《綱目》者, 漢士之賴以立者也. 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後世孤陋者, 流溺於漢籍, 徒以事大尊周爲義, 而不知先立其本, 以光我國, 是猶藤葛之性, 不謀其直而便求纏絡也, 豈不鄙哉!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하던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나라에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무릇《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춘추》나《강목》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누차의 전란과 화재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소멸되었다. 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서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에 어찌 천하지 아니한가!
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讎爲不俱戴天, 則獨何故耶. 噫! 雖然, 若天加선寧廟十年之壽, 則卽可陳兵於遼.瀋, 馳艦於登.萊, 縱敗衄旋至而亦不失爲近世之快事也. 乃天不假만聖壽而終無其事, 幸耶? 不幸耶? 余則悽切而已矣.
고려조(高麗朝)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년인데도 한(恨)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 오호라! 비록 그러할지라도 만약 하늘이 효종에게 십년의 천수(天壽)만 더하여 주었더라면, 곧 병사를 요동의 심양으로 진군케하고 병선을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로 내달리게 하였을 것인데, 설령 패하고 꺾여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또한 근세의 통쾌한 일이 됨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임금의 천수를 빌려주지 않아서 마침내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나로서는 그저 처절하게 여길 따름이다.
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 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漢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經》曰: 「朝聞道,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 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씻은 듯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하였으니,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가 될 뿐이리다.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곡 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幽魂)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
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 北崖老人, 序于揆園草堂.
숙종 2년 을묘년 3월 상순 규원초당에서 북애노인이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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