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은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 가르침은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가르침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스스로 극복하여 이를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하여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橇, 山行則梮,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偎(受)[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鄰,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偎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况, 其地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靚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遊)[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圯,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隈,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다. 갑비고차[강화도]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 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洦)[貊]‧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 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吳相(同)[通], 而彭‧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하는데,《한서․식화지》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癘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虫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虫遠遁而其害漸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石‧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夫蘇石‧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陿阨,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爲)[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野叟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且, 南鄙海島之民, 皆以蠙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尙書》所稱, 嵎夷‧萊夷‧淮夷‧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 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嵎夷)와 래이(萊夷) 및 회이(淮夷)와 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변(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猰犭兪之亂. 猰犭兪者, 獫狁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纔定而州里蕭然, 乃乘釁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於是檀君西至(王)[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陰陽‧四時之神, 及山岳‧河川‧里社之主.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毋妬‧毋淫.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爾觀于牛馬, 猶分厥蒭;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 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孽; 爾毋桀鷔以戕物, 毋傷人, 恒(導)[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며, 항상 하늘 본보기를 존중하여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爾如衝火于(花)[華]田, (花)[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爾雖, 厚包厥(杳)[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 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다.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십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嵒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嵒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殫記矣.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및《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桓雄‧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黙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兒小)[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三神者, 卽創天地‧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이다.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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