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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정보/인문학

해석학의 이해 - 장의준

by 광명인 2024. 2. 17.

다양한 상황과 저자들의 변화하는 심리를 꿰뚫어 볼 해석학의 잣대,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해석학(hermeneutics)은 주로 전통적으로는 신학의 영역에서 많이 다루었죠. 성서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또는 어떻게 해독할 것이냐? 성서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들, 이런 것을 논하는 게 해석학이라는 학문인데, 이게 전체적인 인문학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사실 해석학 대한 학문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요한 콘라드 단하우어(Johann Conrad Dannhauer)라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가 처음으로 해석학이란 표현을 썼었는데, 그 때 해석학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었던 것은 아니고, 명칭상 해석학, 헤르메노이티카(hermeneutics)라는 라틴어 이름이 생겼고, 그것을 이어받아서 딜타이(Wilhelm Dilthey)나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가 19세기에 해석학이라는 인문학의 분야를 창립시켰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뭐 철학이나 신학, 문학 이런 다른 인문과학들에 비해서 해석학 자체 역사는 비교적 짧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해석학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텍스트를 읽는 또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 또는 연구라고 볼 수 있겠죠. 이렇게 해석학을 규정할 경우는 해석학의 의미를 좁은 의미에서 규정하는 거고, 이걸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규정하면, 그건 바로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서 해석학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서 해석학이라고 할 때는 단순히 법률이나 신학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만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어떤 이론이나 학문 자체를 전개하는 원리 또는 그렇게 전개된 내용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해서 묻는, 그 원리들이란 것은 바로 어떤 자료들을 다루는 방법론적 원리를 말하는 거죠. 그럼 그 방법론적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해석하고 규정할 경우에는 해석학의 적용범위가 단순히 문학이나 신학의 텍스트들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방위로까지 확장될 수가 있죠. 말하자면 모든 학문의 어떤 기초가 될 수 있는 그런 학문으로서 역할을 해석학이 할 수 있단 말이죠.

이런 해석학의 의미 규정은 각각의 시기별 그 해석학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 또는 사상가들의 입장에 따라서 다양한데요. 오늘은 해석학에 대해서 예비적으로 이해를 하는 시간이니까, 시기적으로 우리가 해석학의 역사를 볼 경우에 그 초기에 있었던 해석학들, 스토아 학파나 교부들의 해석학 등은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해석학 자체의 어원 문제, 해석이라는 문제에 집중해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눠드린 강의물에 코치와 포수의 대화라는 것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코치랑 포수가 대화를 하는 거예요.
코치가 말합니다. 야 나도 부산에 가게 되서 자이언츠 감독이 나보고 코치를 맡아 달라 하더라.
포수: 어 진짜? 형이 코치 되면, 선수들 이름 모두 알아야지. 
코치: 다 알지 
포수: 벌써? 그럼 선수들 이름 좀 알려 줘 봐. 나 한번도 아직 안 만나봐서 모르니까 미리 알아두게. 
코치: 알았다. 말해줄 께, 근데 이름이 좀 희안해, 암튼 잘 들어. 
포수: 그래 
코치: 1루수는 누구야. 2루수 이름이 뭐야. 3루수는 몰라. 
포수: 그건 내가 알고 싶은 건데.
코치: 1루수는 누구야. 2루수 이름이 뭐야. 3루수는 몰라.  
포수: 형은 코치잖아. 아까 선수이름 안다면서, 
코치: 알지 
포수: 그래 그럼 1루수가 누구야?
코치: 어 
포수: 아니, 그 이름? 
코치: 누구, 1루수 누구. 
포수: 아니 1루수에서 뛰는 놈,,,,
,,,,,
포수: 난 지금 1루수 이름을 알려고 하고 있어.
코치: 누구.
,,,,,,

자 지금 포수는 계속해서 1루수의 이름을 묻고 있는데, 코치는 대답을 해 준 거죠. 근데 포수는우리가 읽은 텍스트 맥락상 포수가 이름을 끝까지 모르는 것 같죠?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까요? 

1루수 이름= 누구, 2루수 이름= 뭐야, 3루수 이름= 몰라. 
이게 이제 코치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죠. 근데 문제가 뭐냐면, 누구라는 이 단어는 지금 이 코치가 말하는 의미에서는 고유명사죠. 개나 사람이 가질수 있는 이름, 고유한 이름이에요. 근데 지금 이 포수는 누구라는 단어를 고유명사로 이해하지 않고, 의문대명사 같은걸로 이해한 거죠. 의문 대명사니까, 누구? 의문문을 구성할 때 사용하는 의문대명사로 이해하고, 마찬가지로 뭐야도 역시 이게 뭐야라고 물을 때, 그 의문 대명사로 이해하고, 몰라 같은 경우에는 분명히 코치는 고유명사로 표현한 거지만, 포수는 나는 그것을 모른다는 준말로 '몰라'. 일종의 문장을 축약한 형태로 받아들인 거죠.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코치가 분명히 이름을 말해줬는데,,, 포수는 그것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그렇게 계속 의사소통이 얽힌 상황인데, 자 물론 이렇게 대화할 때 화자가 말하는 내용을 청자가 이런식으로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해를 못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죠. 사실 이 경우는 텍스트 자체가 의도적으로 언어의 중의성을 이용해서 고안된 아주 정교한 텍스트니까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어떤 하나의 전언이나 메시지텍스트 내용을 접했을 때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경우를 만납니다. 그게 사실도 해석학이 생기게 된 원인이기도 하구요. 특히 성서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의 어떤 구절들은 대개의 경우 성서의 구절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게 인지될 수 있는 구조들이 많은 반면에 몇몇 구절들은 난해하다거나 또는 모호하다거나 아니면 불확실한 구절들이 있거든요. 정상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이 있을 때, 이런 구절들을 도대체 어떻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냐라는 문제 제기가 결국 해석학의 토대가 됐던 셈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근데 우리는 일상 안에서도 그렇게 불확실하거나 불투명하거나 아니면 애매모호한 단어들이나 문장들을 종종 접하죠. 예를 들어, 커플이 있는데, 상대방의 문자로 내가 왜 화났는지 알어? 이런 내용을 접했을 때, 내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반응을 해야 되는가? 여기는 해석의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게 개입합니다. 말 잘못하면 우리 관계가 끝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정답 같은거 인터넷에 나돌고 하는데, 그런데 너무 믿지 마세요. 연애는 글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자, 근데
이런 애매 모호한 상황도 있는데 자 아까 그런 말씀하셨죠. 니체가 말했던 걸 언급하면서 "모든 사건이 해석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대개의 경우 누군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책을 읽을 경우, 이 내용을 내가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문제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왜곡된 방식으로 또는 변질된 방식으로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항상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니체 같은 경우에는 모든 인식이 해석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때 해석이란 것은 어떤 힘들간의 투쟁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 투쟁 과정 즉 힘들의 충돌 과정내가 인식할 수 없고, 난 오로지 그것들이 화해된 결과물만 인식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해요. 이때 문제는 뭐냐면, 그 화해된 결과물이 나오는 그 과정 자체에 대해서 내가 접근할 수 없다는 거, 여기에는 이해의 과정이해된 결과물간의 격차가 생기죠

말하자면 둘 간에 어떤 단절, 거리가 생긴 셈인데 이 때 우리는 이해된 최종의 결과물에 이르는 과정에서 왜곡이나 변질이 없었다고 보증할 만한 어떠한 수단도 확보할 수 없어요. 만약 모든 의식이 해석이라는 니체적 관점에서 볼 때는 결국 모든 해석은 왜곡 되었거나 변질된 해석일 가능성, 즉 내가 그걸 참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것이 거짓일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다라고 볼 수 있는 거죠. 뭐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접하는 모든 해석의 경험들은 겉보기엔 굉장히 명료한 듯하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일웅일호를 왜 아직도 초딩수준의 유치한 문자적 해석인 곰과 호랑이로만 간주할까? 소위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라면 이 문자적 의미를 좀 더 깊이 본질에 맞게 해석을 해서 국민들에게 전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인식해석이며, 모든 해석은 왜곡되었거나 변질된 해석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해석학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해석학의 목적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스토리의 참된 의의를 찾는 것이라면,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의도와 의도된 거짓까지도 밝혀내는 것이 해석학의 영역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일웅일호一熊一虎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금살치우擒殺蚩尤일 것이다. 일웅일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단순히 곰과 호랑이 한마리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웅족과 호족으로 해석을 할 것이지? 여기서 텍스트를 저술한 일연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일웅일호를 기록했는지,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료 해석의 주체가 일웅일호를 한마리의 곰과 호랑이로 해석했을 때와 웅족과 호족으로 해석했을 때, 해석의 객체인 이 역사적 사료와 그 사료 해석의 주체인 나와 국가는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는지 등도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인류가 진실을 밝히려는 궁극적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하늘의 일이란 참됨으로 하나되게 함이라는 염표문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참이 아닌 것은 모두 결국 우주의 쓰레기 통으로 소멸되는 것이다. 소멸은 공허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해석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예를 들어 아침에 자명종 소리가 올립니다. 그럼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 일어나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나는 이 소리를 들으면 일어나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생각을 나는 자명종 소리를 듣는 순간, 알람은 일어나야 한다는 상황이 도래 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런식으로 명백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어떻게 가능하죠? 습관이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자명종 소리가 어떤 잠에서 깨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는 것을 내가 평소에 인지하고 있었고, 이게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체화돼 가지고 나도 모르게 자명종 소리만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런 소리들이 우리 일상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예를 들어 택배가 오면 초인종이 울리죠. 그러면 우리는 택배가 왔구나 하면서 웃으면서 달려 나간다 말하죠. 근데 만약에 이 상황을 옆에서 개나 고양이가 관찰 한다고 하면, 개네들 입장에서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울 거에요. 왜 주인은 저러고 있다가 저 초인종 소리만 나면 신나가지고 달려 갈까? 또는 왜 주인은 가만히 있다가 삑하고 핸드폰에 문자 오는 소리만 나면, 저걸 펼쳐 볼까? 또는 왜 주인은 가만히 있다가 전화벨 소리가 나면 가서 전화를 들고 대화를 할까 등등, 또는 과거에 살던 조선시대 선비가 가지고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우리 일상을 관찰한다 할 때 역시 이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겠죠.

하지만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맥락의 생활 속에 있는 어떤 물건들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고, 그 물건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지 무엇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를 학습이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물건들을 사용하는 거죠. 스마트폰 이건 전화를 거는 도구라고 자연스럽게 아는데 이때 나는 이것은 전화거는 도구라고 명시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런 무의식적인 사용 자체가 또는 실
천 행위 자체해석이라면 또는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면, 사실 해석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엄청난 범위로 확장될 수 있죠. 이 경우 아마도 모든 경험들도 다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게 되겠죠. 의문은 내가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이고, 그 인식함에 있어서 하나도 공짜로 되는 것은 없고 모든 의식은 내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더 큰 틀(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더 큰 틀은 조선시대에 살았던 선비가 갖고 있었던 이해의 틀(세계관)는 분명히 다를 테니까요.

리차드 팔머라는 사람이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집필했었는데, 이게 일종의 해석학 분야에 있어서 교과서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잘 작성된 편인데, 좀 난해하긴 하죠. 근데 이 해석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 시기가 1970년대 였거든요. 근데, 팔머가 이 책을 쓸 시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의 문학해석에 있어서의 주류는 실제론적인 비평이었어요. 말하자면 문학작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다루는 관점 자체가 실제론적인 관점에서 실제론적인 틀이었단 얘기죠. 여기서 실제론이라는 것은 그 사실 실제론이란 개념은 좀 복잡한 개념입니다.

먼저 플라톤의 실제론이 있죠. 플라톤의 실제론 같은 경우는 극단적 실제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보편자 내지는 일반 개념입니다. 인간이라는 추상명사는 일반 개념이죠. 보편적인 것을 나타내는 보편자라고 쓰는데, 이런 일반 개념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이런 물음에 있어서 플라톤 같은 극단적 실재론자들은 존재한다. 근데,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닌 이데아의 세계, 형상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런식으로 말하죠. 음 보편 개념이 존재하는데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에 존재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이라서 극단적 실제론이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온건한 실제론으로 분류가 되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보편 개념이 실제로 존재한다라는 데까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것이 저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사물들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죠. 요즘말로 하면 현상 안에 존재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겠죠. 또는 우리의 경험 안에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점이 그 사물들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게 대체적으로 중세 유명론과 실제론 논쟁 및 보편자 논쟁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기반들이구요.

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실제론은 자연주의적인 실제론 또는 소박한 실제론이라고 하는데, 나이브(naive)하다는 말이죠. 왜 나이브 하냐면, 이것은 상식적인 견지에서 우리가 사물들을 생각한 걸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일상적인 어떤 믿음이 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는 상식적인 견지에서 이 책상이 지금 내 앞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없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가 책상을 보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저 책상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나는 믿습니다. 실제로 뒤돌아보면 책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죠. 이건 일상에서 상식적인 생각이에요. 하지만 철학자들 한테는 결코 정확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이 문제를 갖고 고민한 사람들이 철학자들이니까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자 그런데 과학자들의 실제론은 사실 이 소박한 실제론과 비슷한데
지금 여기서 팔머가 문제 삼고있는 60년 문예 비평가들이 틀로 삼고 있는 실제론은 바로 과학자들의 실제론입니다. 물론, 이 과학적 실제론은 팔머의 기준에서 60년대 흥행하던 실제론이고, 지금은 또 다르죠. 과학적 실제론은 실험에 있어서 관찰자가 있고, 그 다음에 관찰할 대상이 있죠. 이런식으로 실험에 임하는 관찰자관찰될 대상이 서로 떨어져서 따로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바로 과학적 실재론입니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생각 같죠? 내가 실험하는 사람이고, 내가 물컵을 갖고 실험한다. 물컵은 당연히 나와 떨어져 있지. 이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인데, 이것을 조금만 바꿔서 이렇게 표현하면, 그렇게 당연하지 않게 돼요.

관찰자의 경험
대상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한다. 이런식으로 표현할 수 있거든요. 이 말은 그 관찰자는 컵을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또는 이렇게 소리를 내서 들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컵에 대한 감각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철학에서는 지각한다라고 하는데, 이 지각한다는 것은 관찰자가 그 대상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거거든요. 근데 대상인 컵관찰자의 지각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라는 것은 관찰자의 경험 따로 대상 따로 있다는 말이 되죠. 이게 무슨 말을 의미하느냐? 내가 이 컵을 어떻게 경험 하든지 간에 나의 경험이 이 대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말하자면 내가 지금 이 컵을 봄으로써 나중에 밝혀지게 될 컵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인식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거죠. 근데 사실 이런 생각은 지금 과학에서는 굉장히 이것도 역시 소박한 생각이죠. 왜냐하면 실제로 미시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관찰자의 경험실험들 대상에 영향을 미치니까(양자물리학).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의 문제는 텍스트의 의미가 텍스트 안에만 있는지, 텍스트의 바깥에도 있는지를 구분하는 주요 요인이다.

60~70년 대에는 과학적 실제론, 즉 실험을 하는 주체와 실험을 받는 대상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이 두가지는 그렇기 때문에 전혀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런 생각이 문학작품을 해석할 때 있어서 어떤 틀로써 받아들여졌다 말이죠. 그러면 이게 문학 작품 해석에 있어서 어떤 결과를 나았냐하면, 예를 들어 내가 지금 해석하고자 하는 하나의 텍스트가 있습니다. 성경이든 소설이든 시던, 하나의 텍스트가 있는데, 이 텍스트를 내가 문학 해석자로써 해석을 할 때 이 텍스트와 나는 서로 떨어져 있어요. 그럼 텍스트를 해석하는 나 바깥에 텍스트가 있는 셈이고, 또 역으로 텍스트의 바깥에 해석자가 있는 셈이죠. 말하자면 해석을 하는 주체와 해석을 당하는 객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얘기죠. 그 과학적 실제론을 적용해서 지금 텍스트를 해석하는 경우인데 이 때 귀결되는 결론은 해석자의 해석하는 경험, 내가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경험이 텍스트 자체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돼죠. 이거를 좀더 해석학적인 용어로 바꿔 말하자면 이렇게 볼 수 있죠. 내가 텍스트를 해석하는 경험텍스트의 의미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이게 가능하냐? 이에 대해 팔머는 반박을 하고 있는 거죠.

어째튼, 70년대는 마치 실험실에서 내가 개구리를 해부할 때 그걸 당연히 와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으로 여기지, 개구리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해부를 하진 않죠.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 하나를 실험실의 개구리와 같은 하나의 표본, 대상으로 간주하고 나와 떨어져 있고, 그것을 철저히 개념적으로 해부하는 게 바로 텍스트 해석이다. 이 바로 팔머의 관찰인 거죠. 그리고 이때 해석자의 경험, 여기에는 지각이나 읽기의 경험이나 어떤 사적인 기억들이 다 포함이 될 수 있겠죠. 이런 것들은 텍스트의 의미 또는 텍스트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 말은 결국 무엇을 뜻하냐 하면, 한번 텍스트가 쓰여지고 나면 그게 2천년 전에 그 텍스트를 읽는 사람이 그 텍스트로부터 얻는 의미나 2천 년 후에 우리가 그 텍스트로부터 읽어내는 의미가 똑같단 말이 되요. 왜냐하면 경험하는 사람이 어느 시대에 살았던 누구도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텍스트의 의미는 실제론자들에 의하면 텍스트 안에 있거든요. 텍스트 안에 의미가 있으니까 해석자들그 안에는 의미를 발견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해석자의 해석 경험자체는 텍스트의 의미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항상 똑같은 의미를 보게 되겠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이런 실제론적인 해석 이론에서 또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해석자의 경험 그리고 텍스트를 분리 햇죠. 마찬가지로 텍스트를 작성한 저자, 저자의 의도, 또는 저자가 텍스트를 쓰면서 했던 경험, 즉 창작의 경험과도 역시 텍스트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이거는 조금 복잡한데 저자가 텍스트를 쓰는 경험에 저자의 의도가 달려있다고 할 때, 막상 저자가 쓰고 난 그 텍스트 안에 있는 의미는 저자의 의도와는 구분이 될 수 있죠. 그럼 여기서 일종의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죠. 왜냐하면 나는 분명히 a라는 의미를 의도하고 썼는데 이미 쓰여지고 난 그 텍스트는 나와 분리되어 있기때문에 그것의 의미는 b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론의 틀을 지니고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해석자의 경험을 따로 있는 것으로서 전제를 하고 또 텍스트도 따로 있는 것으로 전제를 하고, 또 마찬가지로 저자의 의도도 따로 있는 것으로 전제를 한단 말이죠. 이런 실제론적 틀을 가지고 작업하는 해석자들이 작품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바로 그 작품의 자율성이라고 할까요. 왜냐하면 작품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또 저자로 부터도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작품 자체만의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 되거든요. 자율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의 의미에 있어서 외부의 것에, 작품 바깥의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독립적이다, 자율적이다라는 말이 됩니다. 결국 이런 식의 생각이 가르키고 있는 해석의 방향은 텍스트의 의미텍스트 안에 있다는 거죠. 해석자의 경우는 지금 텍스트의 바깥에 있죠. 저자의 의도텍스트의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안에 있다는 걸로 귀결이 되겠죠.

이와 반대되는 입장이 텍스트의 의미텍스트 바깥에 있다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가 고려해야 될 게 텍스트를 쓴 저자의 의도 또 텍스트 바깥에 있으니까 이것도 고려 해야 되고 마찬가지로 텍스트를 읽는 해석자 역시 텍스트 바깥에 있으니까, 그 해석자의 경험도 고려를 해야 되죠. 말하자면 텍스트의 의미는 이 경우 실제론자들의 입장 처럼 텍스트가 한번 고정되면 불변하는 2천 년 후에도 똑같은 의미로서 발견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해석자에 따라서 바뀔 수 있겠죠. 이 경우 의미가 가변적으로 변합니다. 이게 해석학의 큰 두 갈래라고 볼 수 있어요. 작품의 의미안에 있는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

해석학의 대가가 말하는 신학과 학문의 관계

우리의 역사 속에서 터툴리안이 가졌던 입장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그 맥락속에서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오늘 이 시점에서의 우리의 관심은 그 하나의 학문적 접근을 하더라도 신학이 하나의 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이 다른 학문 영역과 분리된 채 하나의 게토를 형성을 해서는 안된다.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끊임없이 교류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신학적 작업을 수행해 나가야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그 면에 있어서 가장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해석학 영역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

서양철학은 참으로 현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도전도 받고 하지만, 뿌리를 캐들어가다 보면 남는 것이 없는거죠. 모든 것이 해체되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 의미, 진리는 무엇인가? 사실은 서양철학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허무밖에 없는 거죠. 저자의 죽음이후에 텍스트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거기에 정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상의 흐름으로 점점 흘러가고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소박한 실재론적 해석학은 문제가 많은 것이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사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구 철학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적 신학은 이러한 오류로 인해 지난 역사속에서 엄청난 악업을 파생시켜왔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제 1법칙이 인과론인데, 그 오류에서 파생된 엄청난 악업들이 단지 "주여 믿습니다"만 외친다고 회피될 수가 있을까요? 지금은 근원을 찾아 뿌리로 돌아가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이 엄청난 문제들을 과연 기독교 진리로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기독교 진리가 완전한 진리였다면 과거에 벌써 지상천국은 이루어졌어야 했다고 봅니다. 물론 기독교 성경이 세상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경 자체의 피할수 없는 한계와 오류로 인해 그리고 무지한 해석으로 인해, 기독교는 피의 역사를 계속 써내려 왔고, 현재도 중동지역에서 처절한 피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과연 무엇이 그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채워줄 수 있을까? 뿌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허함은 더욱더 강력해지는 것이죠. 당신의 뿌리는 무엇인가요? 왜 인식을 전환시켜 서양에서 한민족의 고유정신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죠? 왜 서양 철학자들의 공허한 소리들은 줄줄 꿰면서 동양의 위대한 철인들의 우주론과 사상은 알지 못하는 거죠? 기독교 성경을 읽기 전에 9천년 한민족의 정신, 국혼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을 해본적은 있는가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교리는 깊이 이해하면서, 한민족의 위대한 경전인 천부경은 혹시 알기나 하시는지요? 천부경의 삼극론과 한민족 영성문화의 바탕인 삼신일체 원리는 들어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지금은 원시로 반본하는 때, 자신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