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신화와 과학, 문명 오디세이
원제 : Light: A Radiant History from Creation to the Quantum Age
저자: 브루스 왓슨(Bruce Watson)
브루스 왓슨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로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매사추세츠대학(애머스트)에서 미국 역사를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뉴욕 주 애넌데일온허드슨에 있는 바드칼리지에서 L+T라고도 일컬어지는 언어와 사유 과정을 가르친다. 브루스 왓슨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리처드 파인먼에 이르는 L+T 의 광범위한 커리큘럼을 처음 가르친 뒤에야 모든 학문 분야의 빛을 집대성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덧 붙이는 말]
20세기 후반에 빛의 새 대가들은 당혹스러웠다. 레이저 기술자, 광학 엔지니어, 광자학 엔지니어, 그리고 양자광학을 실제로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빛을 세속화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0-1990년대에 걸쳐 광자가 확률함수와 밀도행렬로 분석되던 때에도 빛의 신성함을 둘러싼 이야기는 널리 퍼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마치 낙원을 엿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거기서 늘 빠지지 않는 건 빛이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떠다니고,” “순수하고 투명한 빛”, “무척 밝고 정말로 환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빛.” ... 이 이야기들은 무척 비슷해서 ‘임사 체험’을 뜻하는 줄임말(NDE)까지 얻게 되었다. 이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정신과 의사 레이먼드 무디였다. 1975년 무디의 책 <삶 이후의 삶>은 50가지 정도의 임사체험을 서술하고 있다. 모든 사례에는 오늘날 NDE현상이나 산업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 있다. 유체이탈, 터널, 터널 끝의 빛, 따뜻하게 감싸 주는 빛 속으로, 때로는 ‘빛의 존재’라 표현되는 것 속으로 들어감 등등,
신성한 빛은 결코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일말의 의심 밑에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환시는 영적 생활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잔다르크,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나타났던 환영들뿐 아니라, 평범한 이들도 성스러운 빛, 성모마리아를 나타내는 빛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1857년, 프랑스 루르드 외곽의 어느 동굴에 빛줄기가 나타났다. 60년 뒤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는 “흰 빛이 나무 꼭대기 위로 지나갔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우타이산의 ‘부처의 광명’은 변함없이 빛나지만, 일부 티베트 불교는 무지갯빛이 뻗치는 것을 최고 영적 상태의 순수한 현현으로 본다. 인도에서 쿤달리니 요가 수련자들은 척수를 통해 뇌로 흘러가는 ‘액체의 빛’을 이야기했다. 에스키모의 ‘쿠아마네그’는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밝은 빛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주술사들은 빛의 결정체가 천상에서 내려오는 걸 보았고, 브리튼제도의 문상객들은 땅 위에서 움직이는 파란 ‘도깨비불’을 따라가면 무덤이 나온다고 했다.
죽음의 터널 끝에 빛이 있었다는 건 흔한 이야기였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은 죽어 가는 이에게 손짓하는 신비로운 빛을 묘사했다. “죽는 순간 영혼은 아름다운 빛과 만나 순수한 장소와 목초지로 이끌려 가고 목소리들고 춤의 환대를 받는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썼다. 성경속 믿음의 인물들인 야곱과 에녹, 사도 바울은 환하게 빛나는 낙원을 가보았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하룻밤 사이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가 밝게 빛나는 천국에 잠깐 머물렀다. 서기 14세기에 발굴된 <티베트 사자의 서>는 임종하는 이가 “순수한 광휘”를 본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수백 년을 지나오는 동안 특히 서양 세계에서 그런 이야기는 점점 드물어졌다. 가장 독실한 신자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신성한 빛이란 의심스러운 것, 허구의 것, 동양적인 것이었다. (...) 그럼에도 1980년대에 낙원의 빛은 당당히 밝게 빛났다. 그동안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유연해졌고, 영성은 기성 종교로부터 분리되고 있었으며, 의학의 발전은 더 많은 환자를 되살려 내고 있었다. (...) NDE사례 수집으로 나아간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의 뒷받침 덕분에 임사 학문 분야가 탄생했다. (...) 1982년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사후의 ‘빛’을 보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흥미로워했지만 믿으려 하지는 않았다. 수십 건의 연구에서는 NDE 빛의 임상 소스를 좁혔다. 애리조나주립대학의 심리학자 윌러비 브리턴과 리처드 부친 두 사람은 되살아난 환자들을 진찰했다. 빛을 목격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간질과 꿈 상태를 담당하는 오른쪽 측두엽이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두 학자는 추론했다. 예상했던 대로 공포를 체험하는 군인, 자동차 사고 피해자, 심장 질환자들과는 “생리적으로 다른” 환각을 NDE에서 발견했다. 켄터키주립대학 신경학자 케빈 넬슨은 NDE 환자들이 완전히 깨어 있을 때에도 렘수면 패턴을 보임을 알아냈다. 죽음의 문턱에서 보이는 빛은 “임종이 다가올 때 렘 의식과 깨어 있는 의식이 서로 뒤섞인 빛”이라고 넬슨은 주장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의 설명은 더욱 간단하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뇌는 기능을 멈추기 시작한다. 터널은 터널이 아니라 가장자리의 혈류가 차단된 망막을 통해 보이는 세계이다. 빛은 낙원이 아니라 죽어 가는 뇌간이 방출하는 화학물질이 유발하는 현상이다. 신경학적 원인이 있는 것이기에 환시는 죽어 가는 이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간질 환자, 출산하는 여성, 상당한 ‘중력’ 가속도를 받는 전투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에게도 나타난다. 여러 NDE 자료를 검토하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전형적인 환각의 사례들을 발견했다. “환각은 형이상학적인 존재나 장소의 실재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환각이 증명해주는 것은 환각을 창조해 내는 뇌의 능력일 뿐이다”라고 그는 썼다.
NDE는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남긴다. 빛이 저 너머로 가는 문이라면, 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모든 환자들이 임사 체험을 하지는 않는 것인가? 임사 체험을 하는 환자는 20퍼센트에 못 미친다. 모든 NDE가 어떤 특징을 띤다면, 그것은 사후 세계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뇌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인가? (...) 넘쳐나는 책은 영적인 갈구를 드러낸다. (...) 제1천년기에 그랬듯이, 제4천년기에도 환희의 빛은 변함없이 손짓하고 있다.
1장 빛이 나타나니: 창조신화와 태초의 빛
창조신화의 다섯 가지 유형
1) 잠수, 신이 어두운 물속으로 뛰어들어 최초의 땅을 건져 올린다.
2) 온 세상의 부모, 남성과 여성의 신이 모든 생명체를 낳는다.
3) 무로부터의 창조, 신이 “무로부터” 우주를 빚어낸다.
4) 출현, 더 낮은 세계에서부터 최초로 인간이 출현한다.
5) 우주의 알 유형, 태고의 알이 부화하여 신이 태어나고, 신이 알에서 만물을 꺼낸다.
다섯 유형 모두에서 빛은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빛의 창조는 보편적인 선물로 여겨진다.
빛은 신의 몸에서부터 나온다.
신에게서 비롯된 빛은 창조의 씨앗이었다.
힌두교
리그베다는 “어둠이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고 말한다. 이 깜깜한 허공을 가르며 나타난 최초의 빛은 그 기원이 다양하다. 창조신이며 나중에는 브라흐마라고 일컬어진 프라자파티가 빛과 어둠을 낳았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가 숨을 내쉬어 “빛나는 존재”인 신들을 보내자 하늘이 환해졌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원인 푸루샤가 등장한다. 푸루샤는 신들의 제물이 되었고 그 몸뚱이는 우주가, 그 마음은 달이, 그 눈은 태양이 되었다. 힌두 경전에는 (...)모든 유형의 창조신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에서 빛은 크나큰 기쁨을 불러일으킨다.
불교
빛의 기원에 관해서 불교는 훨씬 명확하게 말한다. 빛은 내면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부처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때, 이 세계가 수축하는 때가 온다. 세계가 수축할 때 대부분의 중생은 광음천에 태어난다. 그리고 거기서 머무는데, 그들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며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자유로이 떠돌며 장엄하다. 그렇게 매우 오랜 세월을 산다.” 스스로 빛을 낸다. 내면의 빛으로 빛난다. 태양도 달도 별도 없이 이 존재들은 스스로 환하게 밝힌 곳, 부처가 “빛의 세계”라 일컬은 곳을 자유로이 떠돈다. 그리고 또다시 “억겁의 세월”이 지난 뒤, 빛나는 존재들에게 “물 위에 퍼진 달콤한 땅”이 나타났다. 새 땅을 맛보니 꿀처럼 달콤하여 손으로 집어먹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내던 빛이 사라지고... 달과 해가 나타났으며, 밤과 낮이 나뉘고 한 달과 보름이 생겨나고 한 해와 계절이 알려졌다.” 내면에서 발하던 빛이 사라지자 우리는 해와 달에, 우리가 한때 품고 있었던 빛에 이끌리게 되었다.
기독교
하느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무에서부터 창조된 창세기의 최초의 빛은 신성한 만큼이나 신비롭다. 그것은 많은 최초의 빛 가운데 하나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의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 하느님은 말을 함으로써 빛을 만들어 냈고, 이어서 하늘과 땅을 창조한다. (...)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듯이, 창세기는 빛의 기원을 천상과 분리하여 빛은 자연의 힘이 된다. ‘큰 광명체’가 구름 뒤에 숨어 있거나 ‘작은 광명체’가 땅 끝에 걸려 있을 때에도, 이 빛이라는 실체는 천지창조에 가득하다. 빛은 해, 달, 별의 총합 이상임을 창세기는 알려 준다. 빛을 에너지로 여기기 전까지 오랜 세월이 흘러 과학이 그 사실을 드러내기 전까지, 창세기는 빛을 우주의 본질로 인식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이 빛은 도구, 다시 말해 천지창조의 첫 번째 도구이다. (...) 빛을 해와 달로부터 분리하는 창조신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마도 이슬람을 포함하여 서양 세계는 빛을 하나의 실체로서 연구하게 되었고 빛은 영감을 주는 데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 창세기 첫날 창조된 빛을 가장 완벽하게 연구하게 되는 문명은, “빛이 있으라”라고 말한 문명이었음을 역사의 전개에서 알 수 있다.
2장 빛이라 일컫는 것: 고대 철학자들
빛을 최초로 연구한 이들은 (...) 별난 무리였다. (...) 다른 사람들이 빛을 성스런 것으로 여길 때, 이 초기의 연구자들은 빛을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철학자들을 ‘피시코이’(phusikoi), 다시 말해 “자연을 연구하는 이들”이라 일컬었다. 이 그리스어로부터 ‘물리학’(physics)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물리학의 범주 안에서 빛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피시코이’의 탐구는 “가시적인 현상의 원인”과 “사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탈레스
기원전 585년에 일식을 예측했다. 탈레스는 달빛이 햇빛을 반사하는 것임을 알았고, 빛이 신들에게 마땅한 자격을 부여하는 한편 신 없이도 설명될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아낙사고라스
태양은 불타는 쇳덩어리이고 그 파편들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엠페도클레스
빛은 불이고 눈에서부터 나온다고 엠페도클레스는 말했다. (...) 빛은 눈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사물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엠페도클레스가 자기 자신과 대립하게 되면서 불을 지핀 논쟁이 시작되었다.
레우키포스
모든 물체는 아주 얇은 빛 입자를 방출한다고 레우키포스는 기원전 5세기에 썼다. 방출하는 물체와 비슷한 모양의 입자들이 만들어 낸 환영이 눈‘으로’ 들어간다.
에피쿠로스
“우리가 보는 실체와 모양이 동일하지만 질감이 매우 얇은 이미지 또는 패턴이 있습니다. ... 우리는 그것을 에이돌라라고 일컫습니다.” 빛이 아른거리고 환영같은 에이돌라, 단수 형태로 에이돌론은 빛이 눈 속에 든 불꽃일 수 없음을 증명했다. “외부 사물이 우리에게 그 빛깔과 형태의 본질을 각인시키는 방식은 그것과 우리 사이에 있는 공기라는 매질 또는 광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우리 눈이나 정신으로의 유입에 의해서입니다.”
플라톤
눈이냐 사물이냐?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두 입장을 동시에 취하려 했다. 현자 티마이오스는 신들이 특별한 불을 인간의 눈에 넣었는데 이 불은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고 한다. “신들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안에서 관여하는 순수한 불이 잔잔하고 조밀한 흐름으로 눈 속을 흐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낮에는 우리 눈에서 유출되는 빛이 모든 사물에 의해 반사되는 빛을 만나는 것이라고 티마이오스는 말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눈에서 유출되는 빛은 반사되는 빛을 찾지 못한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자고, 내려온 눈꺼풀 안에 갇힌 그 특별한 불이 우리가 꾸는 꿈을 밝힌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빛을 은유로서만 다룬다. (...) “진리가 있는 곳, 진리가 밝게 빛나는 곳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혼은 그것이 진리임을 이해하고 알아채며 지성을 갖게 된 듯 보일 것이네. 하지만 어둠과 뒤섞인 곳에 초점을 맞추면...”
* 동굴의 비유: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세계를 빛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성과 진리의 직접적인 원천이 지성에 있다. 동굴의 비유는 앞으로 영원히 빛을 지식과 연결시키게 되는 촛불을 밝혔다.
아리스토텔레스
“눈에서 빛이 나오는 것이라면 눈은 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인가? (...) 눈에서 유출되는 무언가의 덕분으로 볼 수 있다는 건 비이성적인 생각이다.” 빛은 불도 원자도 빛이 아른거리는 에이돌라도 아니다. 빛은 “하나의 작용, 그러니까 어떤 투명한 것이” 공기 중에 길을 내서 이미지가 지나가게 하는 작용이다. (...) 그는 소리가 공기에 파문을 일으킨다는 걸 알았으므로 눈과 사물 사이의 ‘무언가’에 빛이 파문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시각이 발생할 때 지각작용이 일어나려면 거기에 작용하는 매질이 있는 것이다. 분명히 어떤 매질이 존재해야 한다. 사실 중간의 공간이 텅 비어 있다면 정확히 본다는 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매질을 ‘에테르’라 일컬었다.
*에테르는 빛, 광명, 또는 순수한 공기의 그리스 신인 아이테르Aether에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자연은 진공 상태를 싫어하므로, 투명하고 감미롭게 흐르며 완벽한 에테르가 별들 사이의 모든 공간과 하늘을 채우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했다.
인도 바이셰시카학파
“햇빛 속에 보이는 먼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양이다. 물질이고 현상으로서 그것은 그것보다 더 작은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더 작은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고, 가장 작은 것은 원자이다.” (기원전 6세기)
“빛은 빛깔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물질을 비추며 뜨거운 느낌이 나는데, 이것이 빛의 뚜렷한 특질이다.” (바이셰시카 수트라) 빛과 열을 “하나의 물질”로 바라본 바이셰시카 수트라는 “잠재되어 있거나 드러나는” 두 종류의 빛을 상정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느껴지는 빛이다. “불은 보이고 느껴진다.” 뜨거운 물의 열은 느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달빛은 보이지만 느낄 수 없다. 눈으로 느껴지는 빛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지상의 빛은 흙 같고 천상의 빛은 물 같다. 둘이 결합되면 금이 되는데 그 “주요 성분은 빛으로서... 흙 입자와 섞여 고체가 되는 것이다.”
중국 철학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사람들이 빛에 관해 논쟁하는 동안 중국 사람들은 그림자를 연구했다. (...) 묵경은 공간, 시간, 기하학, 논리학, 겸애와 빛에 관한 연구서이다. (...) 묵가는 초와 거울, 그리고 최초의 핀홀 카메라로 실험을 했다. 분류한 물체를 들고 광원이 여러 개일 때, 거울 앞에 거울이 있을 때, 그림자가 어떻게 생기는지 관찰했다. 땅에 막대를 꽂고서 길어지고 짧아지는 그림자를 관찰하고, 빛이 어둠과 함께 어떻게 변화하는지 즐거이 지켜보았다. 묵가는 빛이 “쏜살처럼” 이동한다는 걸 알았지만 화살을 쏜 것이 눈인지 사물인지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보다는 (...) 빛이 인간의 신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했다. 그들은 빛이 ‘이해’ 또는 ‘앎’을 가리키는 ‘지知’와 감각적 인식을 관장하는 기관인 심心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
도가와 유가는 빛을 어둠과 얽혀 있는 것으로 보았지 그 자체로 연구해야 할 ‘사물’로 보지 않았다. (...)서기 2세기 무렵 중국에서 “밝은 창의 먼지” (위백양의 주역참동계에 나오는 구절)를 언급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와 인도에서 주목했던 바로 그 떠다니는 먼지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금, 수증기, 그리고 신체의 에너지인 ‘기’에 비유했다. (...) 중국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밝은 빛을 건설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
파로스 등대의 빛 아래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빛을 숫자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 기원전 300년 무렵, 에우클레이데스는 자신의 기하학 이론을 빛에 적용하여 광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광선은 눈에서부터 곧게 나아간다.” (...) 에우클레이데스의 <광학>은 빛을 화살 같은 ‘사물’처럼 다루는 만큼이나 각도와 광선과 점으로서 다룬다. (...) 빛의 광선들은 원뿔 모양을 이룬다고 에우클레이데스는 썼다. 원뿔의 크기가 공간지각과 거리지각을 결정한다. 시각의 원뿔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 에우클레이데스의 <광학>은 우리 시대 찬란한 빛의 기초를 놓았다. (...) <반사광학>에서 그는 반사시키는 표면에 부딪혀 튀어나오는, 종이접기 도안 같은 빛의 궤적을 계산했다. 거의 누구나 알고 있는 한 가지 광학 원리가 이 논문에 실렸다. 빛이 거울에 부딪힐 때의 각도인 입사각은 반사각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디오클레스
햇빛을 반사시키는 오목거울이 “신전에서 제물과 희생물에 불을 일으켜, 제물을 태우는 불이 명확히 보일 수 있도록” 정확한 각도를 계산했다.
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는 병사들에게 거대한 거울 또는 아마도 병사들의 방패로 햇빛을 반사시키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설은 전한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살상무기로서의 빛’이라는 꿈 또는 악몽은 이후에도 전설 속에서, 공상과학 소설 속에서, 그리고 미국 국방부의 계획 속에서 이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빛, 다시 말해 ‘시각광선’은 눈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런 학문적 경로 속에서 그는 최초의 광학 도구인 디옵터(렌즈 앞에 놓아 렌즈의 눈금보다 가까운 거리에 초점을 모아주는 렌즈)를 만들었다. 황동원반에 360도 눈금이 새겨진 이 도구를 사용하여 프톨레마이오스는 “입사각은 반사각과 동일하다”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정리를 증명했다. 그는 종이접기 같은 스케치로 각도를 도해하고 반사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디옵터를 만든 프톨레마이오스는 빛을 길들일 수 있도록 정확한 반사각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 굴절각을 계산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빈 그릇에 자신의 황동 원반을 넣고 물을 부었다. 원반을 향해 시선을 낮춘 그는 빗각을 점점 크게 하며 굴절각을 측정했다. (...) 하지만 그는 삼각함수 대신 산수를 사용했기에 산출 값은 거의 부정확했다. (...) 프톨레마이오스는 빛을 실험실로 끌어들인 최초의 학자였다.
3장 최고의 기쁨: 신성한 빛의 천 년
서력기원 첫번째 1000년이 흘러가는 동안에는, 빛은 신의 일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세계의 빛이라 일컫는 이들이 쉽게 걸쳐 입는 신의 가장 신성한 옷이었다. ... 빛은 종교의 버팀목이었다. 모든 주요 종교에서 빛의 의미는 다중적이어서, 구원, 계시, 내세의 문, 영혼의 정수를 뜻했다. (...) 그러나 신성한 빛이 상징과 은유가 되기 훨씬 전부터 수많은 이들에게 빛은 하느님이었다.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는 빛 속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1000년의 북부 페르시아로 거슬로 올라가는 전설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가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마을 전체에 쏟아지는 빛에 휩싸였다. 빛은 언제나 조로아스터의 곁에 일렁였고, 그의 나이 서른 살 때 순수한 빛의 옷을 입은 사람의 환영이 나타났다. 환영은 예언자로 움트고 있는 그를 지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 또는 “지혜의 신”의 가르침으로 안내했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가 무한한 빛으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이 밝음의 이면에는 어둠의 악마가 도사린 채 빛의 왕국을 침탈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 시간의 신인 주르반의 도움을 받아 아후라 마즈다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분리함으로써 낙원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빛의 왕국이 완전히 재건될 때까지, 조로아스터 교인들은 내면의 빛, ‘크바리나’(zvarenah)라는 미묘한 빛을 길러야 한다. 사람의 정액과 연관된 ‘크바리나’는 구원의 빛나는 유체로서 지혜와 정신을 함유하고 있다. 어둠이 완전히 정복될 때에만 ‘크바리나’는 “영원히 이 세상을 비추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이 빛은 그들의 옷이 되고 영원히 눈부시게 빛나며 바래지 않을 것이다.”
마니교
마니의 신도들은 광휘의 예수를 섬겼다. 예수는 나무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니라 빛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었다. 마니교에서 빛과 어둠은 과거, 현재, 미래에 전투를 벌인다. 이를 절대 은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니교도는 아주 실제적인 전쟁이 너무도 실제적인 이 적들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보았다. 어둠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여 빛의 왕국을 눈부신 파편들로 박살낸다고 마니는 말했다. 하지만 “빛의 존재들을 사랑하는 존재”들로 다시 돌아온다. 다시 벌어진 싸움에서 어둠의 악마들은 빛 전체를 삼켜 버린다. 소중한 빛을 구하기 위해 빛의 아버지는 어둠의 악마들을 무찌르고 그 육신으로 땅과 하늘을 만든다. 그러나 빛의 파편들은 인간의 영혼과 빛을 먹어 치우는 괴물들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빛의 아버지는 불과 물과 바람의 수레바퀴로 스스로를 정화하여 반짝이는 빛의 파편들을 달로 보낸다. 마니교도들은 신성한 빛이 나무와 풀, 과일들도 채우고 있다고 믿었다. 오로지 해와 달과 별만이 빛을 냈던 시대에 신의 빛은 피와도 같이 몸 안을 흐르는 것이었다. (...) 빛을 본다는 것, 빛이 영혼 속으로 흘러드는 걸 느끼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인간의 모습을 한 빛을 배격하고 그 자리에 은유를 채워 넣었다. (...) 하느님이 최초의 말씀으로 창조한 것은 “신체의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인간의 영혼이 빛의 증거라 해도, ‘그 빛이 아니라’ 말씀이신 하느님 자체가 ‘참된 빛으로서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불변하는 영적 빛”이라 일컫는 것을 칭송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은 라틴어 ‘룩스’와 ‘루멘’을 4천 번도 넘게 사용했다.
세계의 주요 종교
다른 어떤 것도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그만큼 깊이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빛은 완벽한 아바타였다. (...) 빛은 형상이나 형태가 없어 윤색하기 어렵다. 빛은 어느 곳이든 모든 곳에 있을 수 있고, 모든 빛깔과 모든 힘을 지니며, 덧없고 영묘하며, 신비롭고 아름답다.
힌두교는 크리슈나의 눈부신 빛을 보여 주지만, 신을 순수한 빛으로 격하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창세기가 편집된 때보다 1천 년 앞서서 힌두교도는 “가장 눈부신 빛”에 환호했다. 특별히 숭배한 대상은 매일 아침 갠지스강 위로 떠오르는 빛이었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찬가 가운데 거의 24곡이 새벽의 여신 우샤스와 여명에 바치는 것이다.
불교 또한 은유적이고도 신성한 빛을 숭배했다. 부처가 태어났을 때 아기 위로 다섯 가닥의 빛이 비쳤다고 경전은 말한다. 이 빛은 이후로도 석가모니 부처와 모든 부처를 위해 빛난다. 불교의 수많은 ‘깨달은 자’에는 무량광불, 무애광불, 염왕광불, 청정광불, 무대광불, 부단광불이 있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라면 나발 한 가닥으로도 우주를 비출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부처가 열반에 이르면 그 빛은 해와 달보다 밝다고 한다.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빛이 불교를 중국으로 전파했다고 한다. 불교의 극락은 정토인데, 병과 죽음이 없고 눈부신 꽃들이 가득하며 수많은 아라한이 다니며 “한량없는 빛”을 내뿜는다. (...)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오늘날 승려들은 “밝은 빛”에 이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의식이 완벽하게 깨어 있음을 가리킨다.
기독교
구약성서는 서양 문학에서 빛에 바치는 가장 풍요로운 헌사라는 특징을 드러낸다. 고난에 처하여 의지하는 이들에게 빛은 성역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리고 총명함이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전능함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이니라.” 감화이다. “나는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길잡이이다.
[사울이 체험한 눈부신 빛] “내 주변을 내리쬔 눈부신 빛”에 의해 개종하여 사도 바울이 된 그는 구약성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빛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 바울은 쏘는 스포트라이트를 구원에 집중시킨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비추는 빛,” “참 빛,” “세상에 온 빛”으로 묘사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 두 번 일컫는 것도요한복음 뿐이다.
*니케아 신경: 그리스도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라고 선포했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일부로 확인되었다.
“환시는 환시를 체험하는 이를 그의 세속적인 세계 또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끄집어내어 질적으로 다른 세계, 완전히 다른 세상, 초월적이고 성스러운 곳으로 들여보낸다. .... 빛을 체험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주체의 존재론적 조건이 변화하는데, 성령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이다.” - 미르치아 엘리아데
4장 그 유리는 별처럼 밝게 빛나고: 이슬람 황금시대
원시인은 빛을 숭배했다. 그리스 사람은 빛을 설명했고 기독교, 불교, 힌두교 신도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빛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빛을 ‘소유했고’ 이슬람이 소유한 빛이 투사하는 것은 부와 명성, 권력이었다. (...) 권력의 가장 고상한 상징물은 빛이었다.
빛은 기독교를 갈라놓으며 동쪽과 서쪽 사이에 균열을 냈다:
부활한 예수가 무덤에서 걸어나와 타보르 산에 올랐을때 비쳤다는 “타보르의 빛”에 관한 논쟁.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밝아졌다.” 바울 또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이 빛나는 얼굴을 보았다. 지중해 동쪽 지역 주교들은 (동방정교회) 그것을 실제의 빛으로 보았고 로마의 주교들은 은유로 보았다.
문명에 문명을 거치며 빛이 진보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과학은 주요 동력이다. (...) 이슬람 과학은 복잡하고 정밀하고 아름다웠다. 유럽 사람들이 신성한 빛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는 동안, 이슬람 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에우클레이데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기한 광학적 난제들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세계 최초의 천문대를 세우고, 천문관측의, 해시계, 해와 행성들의 움직임을 본뜬 혼천의 같은 것을 갖추었다.
이븐 사흘
최초로 삼각함수를 사용하여 빛이 물이나 유리와 부딪힐 때의 굴절각을 계산했다.
이븐 시나(아비센나)
빛은 정확한 속도를 지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빛을 인식하는 것이 광원에 의해 모종의 입자가 방출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빛의 속도는 분명히 유한하다.”
이샤크 알킨디 (이샤크ishaq는 빛을 뜻한다)
빛은 눈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하면서, 알킨디는 수평면에 하나의 원이 납작하게 깔려있는 2차원의 세계를 상상했다. 원이 빛을 발산한다면 그 광선은 모든 방향으로 튀어나가면서 원 전체가 눈에 보이게 된다. 그러나 옆에서 볼 때 원이 선으로 보이는 것은, 눈에서 나온 빛이 수평 방향에서만 원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 아마도 눈에서 나온 빛은 각 사물에서 나온 빛과 만나서 그리스 스토아학파가 ‘프네우마’(pneuma)라고 일컬은 것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프네우마라는 영묘한 본질을 눈이 지각하는 것이다. 알킨디의 계승자들은 그러한 본질을 “빛나는 숨”이라고 일컫곤 했다. 알킨디는 대체로 빛에 관한 그리스의 사고방식을 따랐지만, 빛이 전파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켰다. 빛은 평행으로 이동하지 않는다고 그는 추론했다. (...) 대신 그는 빛이 사방으로 퍼진다고 주장했다. “원소들의 세계에서 실재하는 모든 것은 모든 방향으로 빛을 발산하며, 그것이 전체 세계를 채운다.” 알킨디는 행성과 별들이 빛을 발산하고 알라의 뜻에 따라 모든 세속적인 일들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인간은 희망, 믿음, 갈망의 빛을 확산시킨다고 그는 말했다. (...)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물질이든 사건이든 간에 별처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빛을 발산한다.”
이븐 알하이삼 (알하첸)
969년 오늘날의 이라크에서 태어난 이븐 알하이삼은 광학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저술들은 케플러,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에게 영향을 끼쳤다. 일곱 권의 방대한 저술에서 이븐 알하이삼은 뉴턴 이전의 어떤 누구보다도 빛을 샅샅이 탐구했다. 그리스 광학에 “혼란”이 있음을 인식한 그는 추측을 배제하고, 형이상학과 에테르, 에이돌라 등을 방지한, 빛에 관한 최초의 연구를 했다. “아주 밝은 광원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심한 고통과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관찰자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해도 햇빛 때문에 눈이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태양 때문에 눈이 아픈 거라면, 빛이 어떻게 그 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빛이 눈에서부터 유출되는 것이라면, 그 빛이 어떻게 관찰자와 별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채우면서도 눈에 아무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은 “정말로 불가능하고 매우 불합리하다”고 이븐 알하이삼은 썼다.
빛의 마술 가운데 그를 속인 건 거의 없었다. 빛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말한 것처럼 원뿔 형태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빛은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그 피라미드는 수없이 많으며 모든 가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시각은 눈이 빛의 피라미드를 만나는 곳에서 발생한다. 각 피라미드는 손가락 몇 개 너비만큼 떨어져 있는 다른 지점에서 가로막히면 똑같은 사물이라도 다른 상을 맺는다. 눈의 작용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븐 알하이삼은 최초로 해부학적으로 올바른 도해를 형상화함으로써 눈에서부터 뇌로 이어지는 인간의 시각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색채 지각과 거리 지각, 주변 시력, 시신경을 설명하고, 눈처럼 경이로운 구조가 빛처럼 덧없는 것에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알려주었다. 모든 시각은 눈의 “수정체”를 통해 굴절되고 뇌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븐 알하이삼의 유일한 광학 발명품은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중국 묵가는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실외의 빛이 흘러들어 실내 벽면에 거꾸로 뒤집힌 상을 맺는다는 걸 최초로 발견한 이들이었다. (...) 그러나 이븐 알하이삼은 최초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라이트박스를 만들었다. (...) 측정과 계산을 마친 그는 빛이 섞이지도 않고 광선들이 교차하지도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나 광선이 흐려지며 마침내 물체가 라이트박스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최소한의 빛”이 존재하는가?
프톨레마이오스는 황동 원반을 물에 담금으로써 굴절 연구에 시동을 걸었다. 이븐 알 하이삼은 더 나아갔다. 그의 관찰 결과, 물질의 밀도가 조밀할수록 빛의 굴절은 더 커졌다. 그러나 빛이 굴절되는 때는 빛이 물이나 유리에 일정한 각도로 부딪힐 때뿐이었다. 빛을 물에 수직으로 비추면 수직으로 바닥에 부딪힌다.
최근까지도 서양의 과학자들은 이슬람의 광학을 얕잡아 보며 단지 “그리스 과학을 냉장 보관해 온”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슬람의 더욱 명석한 사유와 더욱 깊은 연구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에우클레이데스의 정수를 계승하고 실험을 보태고 어림짐작을 덜어 낸 알킨디, 이븐 알하이삼, 그리고 그 제자들은 빛에 관해 단일하고도 백과사전 같은 최고의 사고 체계를 창출했다. 그들의 업적이 있었기에 광학은 중세에 접어들어 확고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븐 알하이삼이 놓은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면 ... 케플러가 시작하고 뉴턴이 완성한 광학의 혁명은, 비록 상상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마크 스미스는 썼다.
수라와르디
수고된 금욕주의를 장려하는 그는 누구든 40일간 금식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주요 저서 <조명 철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식을 하면서 그는 “헤르메스와 플라톤이 인식했던 빛의 존재들과, 조로아스터가 말했던 천상의 빛, 영광의 빛의 근원과 빛의 왕국을” 보았던 것이다. 조로아스터와 마니처럼 수라와르디는 신이란 순수한 빛이 인간의 영혼 속에 빛나는 것이라 보았다. 우리는 저마다 빛의 근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이 어두워지는 밤이 되면 우리의 첫 번째 집인 빛을 갈구한다고 그는 썼다. 빛은 눈이나 사물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수라와르디는 주장했다. 금식을 하면서 정화된 영혼은 15개 유형의 빛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따뜻한 물”처럼 어루만져 주는 빛, “지극한 은총과 기쁨”을 주는 빛, “햇빛보다 강렬한” 빛, “자아를 낳는” 빛이 그것이다.
그의 순교로 인해 이후 그의 철학은 이슬람 종파 내부에서 널리 연구되었다. 그 찬송가에 매혹된 수피교도는 수피교의 성인들을 대리석 돔 아래 안치하게 되는데 대리석의 은은한 흰 빛은 알라의 빛을 상징했다. 수피 경전에 자극을 받은 인도 무굴제국 또한 대리석의 빛을 숭상하게 되어 여러 유산을 남겼고 그 가운데 타지마할이 있다.
5장 장엄한 성당이 찬란하도록: 고딕의 빛과 중세의 낙원
최초의 고딕 성당인 파리의 생드니 성당은 건축의 혁신을 통해 천국의 빛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1144년에 문을 연 생드니 성당에 자극을 받아 수많은 성당이 이를 모방하여 세워져 중세 고딕의 빛을 정의했다.
이슬람 과학이 빛에 관한 연구 수준을 높여 간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신성한 빛을 더욱 격상시켜 갔다. 목표는 고결했다. 낙원을 지상에 재창조하는 것. (...) 중세의 철인들은 (...) 낙원은 지극히 영광스러워서 문이나 옥좌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 것이며 지극히 중요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고귀한 것, 완벽한 것, 여기서도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중세의 손꼽히는 사상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더욱 고결한 천국이 있다면 분명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라고 썼다. (...) 중세의 절정기에 단테 알리기에리는 ‘천국’을 지나는 여행을 상상했다. 천국은 빛이 “살아있는 듯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곳이었다.
위僞 디오니시오스
중세가 신성한 빛을 바라보기보다는 ‘느꼈다’는 걸 이해하려면, 그 신앙의 시대에 배어 있던 “빛의 형이상학”을 감안해야 한다. (...) 일상적인 반짝임을 하느님의 빛과 연결시킨 철학자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를 ‘위僞 디오니시오스’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부른다. (...) 1100년 즈음, 쉬제 수도원장과 프랑스 사람들은 위디오니시오스가 프랑스 수호성인 생드니(Saint Denis)인 바로 그 디오니시오스, 다시 말해 드니(Denis)라고 믿었다. 이런 혼동 덕분에 위디오니시오스는 중세의 빛을 빚어냈다. 위디오니시오스의 저술은 빛, 다시 말해 “신성한 빛,” “신의 빛줄기”, “최초의 선물과 최초의 빛”으로 그득하다. “빛의 유일한 원천”은 그 광휘를 섬광, 번득임, 반짝거림으로 펼쳐 놓는다. “모든 피조물은 눈에 보이는 것이든 안 보이는 것이든, 빛의 아버지에 의해 존재가 된 빛이다”라고 위디오니시오스는 썼다. (...) 위디오니시오스가 쓴 글은 쉬제 수도원장에게 영향을 끼쳤다.
고딕 건축의 세가지 특징
◆ 늑골궁륭: 아치를 교차시켜 중력의 하중을 이어지는 여러 기둥에 분산시키는 기법
◆ 첨두아치: 반원형 아치보다 튼튼함이 입증되어, 창들을 마치 받침대에 얹은 듯 더 많이 배치할 수 있었다.
◆ 버팀도리: 대형 건물 외벽을 떠받치는 반아치형 벽돌 또는 석조 구조물
쉬제의 새 성당의 성가대석은 “빛의 왕관”이었다. 그의 “매우 환한 창들”은 생드니 성당 벽면의 78퍼센트를 채우며 빛에 아주 새로운 목표를 부여했다. (...) 더 이상 구름의 변덕에 시달리지 않게 된 신성한 빛은 하루아침에 일상적인 실재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빛을 칼리프와 왕자들의 노리개로 삼았지만, 중세 유럽은 장엄한 석조 건물까지 걸어올 수 있는 모든 이에게 빛의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고딕’이란 이름표는 중세 시대 내내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쉬제 수도원장은 자신의 양식을 ‘현대적’이라 일컬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고딕’이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이는 야만적인 고트족이라는 뜻이 내포된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들 성당을 과잉의 기괴한 본보기로 여겼다. 프랑스혁명은 ‘탈기독교화’를 위해 이들 성당을 표적으로 삼았고, 파괴자들은 노트르담과 생드니에 난입하여 성당을 파괴했다. 19세기 중반에 와서야 고딕 성당들은 다시 칭송을 받았다. 빅토르 위고는 고딕 성당 하나하나가 “돌로 지은 교향곡”이라고 표현했다. 오귀스트 로댕은 이 “웅장한 시들”을 칭송하며 그 안을 걸으며 “강렬한 환희”를 느꼈다고 했다. (...) “샤르트르에는 무신론자가 있을 곳이 없다”는 200년 전 나폴레옹의 말은 여전히 옳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손에 들고 다니는 화면마다 빛이 번쩍거리는 시대다. 그런데도 고딕 성당의 빛은 쉬제 수도원장의 목표를 상기시킨다. “마음을 밝혀, 참된 빛을 지나 참된 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학문을 바탕에 둔 스콜라철학의 수도사들은 신성한 빛과 세속의 빛을 융합하여 암흑시대로부터 광학을 이끌어냈다.
로버트 그로스테스트
“물리적인 빛은 존재하는 모든 실체 가운데 최상의 것이고, 가장 매력적이며 가장 아름답다.” 그가 본 것은 광선만이 아니라 지성, 영혼, 우주 자체의 근본이었다. 그로스테스트 주교는 하느님의 빛이 작은 반짝임 속에 드러난다고 믿었다. (...) 그는 창세기의 빛을 “최초의 실체적 형상”이라 일컬었다. (...) 그로스테스트는, 빛은 모든 방향으로 확산된다고 쓴 알킨디의 글을 읽었다. “빛이 있으라”는 단지 광점, 일종의 우주적인 지시등을 낳은 거라고 그로스테스트는 믿었다. 하느님이 만들어 낸 그 광점은 끊임없이 밖으로 확산되는데 원뿔 모양이 아니라 구 모양으로 확산된다. 빛의 내핵은 조밀하지만 외부는 훨씬 “성글어서” 더 큰 구체를 만들어 내고, 이는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9개의 천구가 완전히 나타난다.” 곧이어 최고의 구는 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확장되며 공기가 생긴다. 그리고 공기는 서로 모여 “그 바깥쪽을 팽창시키면서 물과 흙을 낳는다.” 이렇게 하느님의 최초의 빛은 만물을 낳았다. 빛이 우주를 낳았다면 모든 사물은 “일종의 빛”일 것이다.
600년이 흐른 뒤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에너지임을 입증했다. 한 세대 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가 물질과 같다는 걸 밝혀낸다. 하지만 1235년 그로스테스트는 중요한걸 알아냈다. 그는 빛을 확대시켜서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사물을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가까이 있는 큰 사물을 매우 작아 보이게” 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예견한 것이다. 50년도 되기 전에 최초의 안경이 베네치아에서 제작되었다.
로저 베이컨
로버트 그로스테스트는 빛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로저 베이컨은 빛을 “하나의 종種이고... 매질의 상이한 부분들을 통해 증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의 종으로서 빛은 분명히 유한한 속도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선이 없다면 점도 존재할 수 없듯이 시간이 없다면 순간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로스테스트 주교는 뒷날 빛이 증폭되리라는 걸 예견했다. 로저 베이컨은 더 멀리 내다봤다. “굴절된 상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면서, 베이컨은 “믿기 힘들 만큼 먼 거리에서 깨알만 한 글씨를 읽고 티끌과 모래 알갱이 수를 셀 수 있으며..... 또한 해와 달, 별이 마치 여기 아래로 내려오는 것처럼 만들 수 있고, 그와 비슷하게 적의 머리 위로 나타나는 것처럼 만들 수 있으며, 많은 비슷한 현상을 일으켜서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의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날이 오리라 예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이성이 하느님의 존재와 성경의 진리, 더 나아가 빛의 본질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학대전>에서 아퀴나스는 신성한 빛에 관한 중세의 연구를 요약하며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빛은 실체인가? 빛은 성질인가? 빛은 첫 번째 날에 만들어진 것인가? 아퀴나스는 빛이 단순한 물질일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어떤 물체도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없지만 빛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한다. 둘째, 어떤 물체도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없지만 “해는 수평선에 나타나자마자 반구 전체가 환해진다.” 셋째, 모든 물체는 시간이 흐르면 부식되지만 빛은 부패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결론에 따르면, 빛은 “실체적 형상이 있는 태양 또는 스스로 빛을 내는 또 다른 물체의 작용에 따른 활동적 성질”이다. 그는 또한 빛이 천지창조 “첫 번째 날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데,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낮이 있을 수 없으므로 빛은 첫 번째 날에 만들어진” 것이다. 빛의 신성함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을까봐 아퀴나스는 모든 회의론을 반박했다. 아담과 이브 이전에 우주는 순수한 빛이었다고 그는 썼다. 그들의 타락으로 주변의 빛은 희미해졌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써 빛은 우주를 다시 비추어 “물은 수정 같고, 공기는 천국 같으며, 불은 천국의 불빛 같아질” 것이라 했다.
단테 알리기에리
단테의 시 <향연>의 시구는 로저 베이컨의 광학에 공명하고 있고, ‘천국’ 편에서는 이븐 알하이삼의 “최소한의 빛”에 대한 탐구가 다음과 같이 투영되어 있다. “빛의 투과를 허용하지 않는 두께의 임계치가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고. 몇 행을 더 가면 베아트리체가 광학 실험을 제안한다. 거울을 세 개 준비한다. 두 개는 같은 거리에 놓고, 나머지 한 개는 훨씬 더 뒤에 놓는다. 촛불을 앞에 놓는다. “가장 멀어 보이는 빛이 / 크기는 가장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알 수 있을 거예요 / 그 빛의 밝기는 똑같다는 걸.” 단테 또한 빛의 가장 기본적인 반사 성질을 알고 있었다. “너무도 강렬한 빛을 가린 건 / 한 줄기 빛이 물에서인 듯 거울에서인 듯 / 저편에서 튀어 오를 때였는데 / 솟구치는 각도가 / 하강하는 각도와 같고 / 수직선에서 양쪽까지의 거리가 같은 것이 / 과학과 실험이 알려 준 바와 같으니”
단테는 지옥을 “모든 빛이 사라진” 곳으로, 연옥을 너무 어둑어둑해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곳으로 그렸다. 지옥과 연옥을 지나면서 단테의 시는 펼쳐지고, 그의 뜨거운 상상력은 낙원으로 향했다. 천국에서 그가 그린 빛은 힌두의 신 크리슈나의 눈부신 빛과 불국정토의 빛에 견줄 만하다.
‘천국’ 편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고 (...) 시인은 빛나는 천국의 등정을 시작한다.
단테가 그린 천국의 9+1 개의 하늘
◆ 월천 ▴ 수성천
◆ 금성 ▴ 태양천
◆ 화성천 ▴ 목성천
◆ 토성천 ▴ 항성천
◆ 원동천 ▴ 지고천(천국의 마지막 하늘)
천국에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지전능한 빛이 있다고 단테는 중세 세계에 분명히 알려 주었다. 천국에는 빛이 있어 영혼을 빚어내고 신의 태엽 장치를 움직인다. (...) 1300년대 말, 단테의 신성한 빛은 고딕미술보다 훨씬 휴대하기 좋고 건축가의 상상력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성서의 빛과 어깨를 겨루었다.
‘천국’ 편 23곡에서, 단테는 “천국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번역본에서 이 문구를 “천국을 재현하다,” “천국을 그려 보이다,” “천국을 설명하다”로 표현하고 있고, 문자 그대로 “천국에 대한 묘사”라고 표현한 번역본도 있다. 그러나 단테는 단지 천국을 재현하거나 설명하거나 그려 보인 게 아니다. 그는 건축가처럼 천국을 빚어내어, 그 천상의 빛을 유구한 빛으로 형상화했다.
6장 키아로 에 스쿠로: 캔버스의 가득 담긴 빛과 어둠
르네상스시대 (...) 화가들은 사진처럼 사실적인 빛을 서양 미술의 독특한 구성 요소로 만들었다.
조토 디본도네
130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의 거장 조토 디본도네는 초기의 원근법과 함께 최초의 사실주의적인 몸짓과 역광을 결합했다. 이로써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는 그를 “탁월하게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투박한 그리스 양식을 완전히 떨쳐 버린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마사초
조토의 살아 있는 듯한 프레스코화 이후 마사초는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을 음영을 넣어 그렸다.
프라 안젤리코
스포트라이트가 등장하는 <수태고지>를 그렸다.
필리포 브루넬레스코
1400년대 초에 화가들은 직선 원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관찰자의 시선을 멀어지는 ‘소실점’에 맞추는 기법을 완성한 이는 필리포 브루넬레스코였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회화에 관하여>는 (...) 미술을 “정말로 자유로운 정신과 고귀한 지성을 발휘”해야 할 일로 격상시켰다. “회화에는 참으로 신성한 힘이 있다”고 지은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썼다. 이 힘을 이용하려면 “화가들은 무엇보다 먼저 빛과 그림자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회화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을 르네상스의 미학과 혼합하여 빛을 포착하는 기교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의 <회화론> 깊숙이 하나의 스케치가 묻혀 있다. (...) 빛이 생생한 걸작으로 진화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스케치이다. (...) <회화론>에 실린 스케치는 복수의 광원을 받는 구를 묘사하고 있다. 호 모양의 트랙 조명처럼 일곱 개의 광선이 일곱 개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구 뒤쪽에서 다른 각도로 비추어 오는 것은 알하이삼과 알베르티가 상상했던 피라미들로서, 서로 겹치며 기하학적으로 음영을 이루는데 (...) 구 자체는 각 광원의 각도에 따라서 흰색에서 회색을 거쳐 검정색까지 단계적으로 색이 입혀진다.
1490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성 안의 도서관을 발견했는데, 그곳은 베이컨과 알베르티, 그리고 <원근법>이라는 저술로 이븐 알하이삼을 널리 알린 폴란드의 수도사 비텔로의 저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들 저서를 탐독한 레오나르도는 광학을 “물리학의 혈맥”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는 원근법에 매혹되어 “키아로 에 스쿠로”라고 일컬었다. “빛과 어둠”이라는 뜻의 이 이탈리아어 번역어는 이후 극명한 대비를 나타내는 미술 용어인 ‘키아로스쿠로’로 응축된다.
부드러운 빛에서 “색채 또한 연기처럼 점진적으로 옅어진다”고 알베르티는 썼다. 레오나르도는 똑같은 직유법을 사용하여 ‘스푸마토’ 기법을 완성시켰는데, 이 이탈리아어는 ‘부드러워짐’ 또는 ‘섞임’을 뜻한다.(...) <모나리자>와 다른 인물들은 한결같이 ‘스푸마토’에 의해 부드러워지는 배경 속으로 경계선 없이 스며든다. (...) 레오나르도의 호박색 바니시는 모든 외곽선을 번지게 함으로써 “윤곽선이나 옆모습 선을 또렷하고 확실하게 표현하기보다 뿌옇게 나타나도록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빛이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또렷하거나 황금빛이 아니라 부드럽고 미묘하고 수증기 같은 것이었다.
카라바조
카라바조는 조반니 파올로 로마초를 연구했다. 로마초에게 빛은 “신의 마음의 표상”이고, “그림에서 무척 큰 힘을 발휘함으로써 그림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로마초는 모델 바로 위에 등불을 두어 “해가 떠오를 때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햇살” 같은 빛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시력이 있는 레오나르도는 아늑한 오후처럼 축복 받은 빛을 추구했으나, 앞을 보지 못하는 로마초는 밤을 꿰뚫는 빛을 선호했다.
“카라바조를 사랑하는 이 가운데 그의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단지 기술적 장치라고 믿는 이는 없다”고 전기 작가 하워드 히바드는 썼다. 전기 작가 피터 로브는 더 나아갔다. “세계의 빛과 어둠, 그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으로서 의식의 빛과 어둠이기도 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빛에 그토록 원초적인 힘을 불어넣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 카라바조는 자신의 빛의 거장임을 증명하듯 아플 만큼 눈부신 빛을 담았다. (...) 레오나르도는 광택과 일렁이는 아우라의 효과가 “언제나 빛보다 더 강렬하다”는 걸 알았지만, 옷과 얼굴에 부드럽게 스치는 빛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광택을 드러냈고, 이를 “과시했다.” (...) 이전에 빛은 그토록 정성껏 그토록 세심하게 그려진 적이 없었다.
※“광학적 투사” 논란: 데이비드 호크니는 14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렌즈를 이용하여 캔버스에 빛을 투사하면서 세밀한 부분을 칠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호크니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특정 화가들이 광학 보조 기구를 사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해 왔다. 카날레토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유력한 용의자였다. 모든 최고조의 빛과 번쩍임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 화하가 빛의 광학적 묘기를 이용한 것일까?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확실히 알 수 없을 테지만, 이 논란은 예술과 모방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한다. 스포트라이트를 쏜다고 해도 카메라 옵스큐라는 카라바조의 세심한 손길처럼 과일의 빛을 드러내지 못한다. (...) 화가는 캔버스에 빛을 투사하고 플뢰르 드 리스에 이르기까지 그 복잡한 모양들을 따라 그렸을 수 있으나, 빛의 구체성, 그 힘과 정신을 포착하는 데는 거장의 시선이 필요하다.
렘브란트
1692년, 렘브란트가 어둑어둑한 작업실에서 자화상을 그렸을 때 비로소 그는 빛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에 걸쳐 매혹은 강박으로 변해 갔다. <은전 서른 냥을 돌려주며 참회하는 유다>는 흉갑의 금빛 번쩍임을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이는 곧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신성에 대한 암시를 조롱하는 세속의 빛으로 늙은 성인을 장식한다. 그리고 수많은 초상화에 등장하는 온화한 얼굴들은 한쪽에서 빛을 받는데, 이는 오늘날 이른바 ‘렘브란트 조명’ 양식으로서 렘브란트에게 불멸의, 그리고 나날이 더해 가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 빛은 렘브란트의 성배였고, 그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추구한 것이었다.
7장 빛의 본질을 파고들다: 과학혁명과 ‘천체의 빛’ 시대
‘천체의 빛’ 시대가 열린 건 1572년, 초신성 티코의 별이 발견되었을 때였다. 이 시대는 100년 뒤, 유럽 도시들이 깜깜한 거리에 등을 달기 시작하면서 끝났다. 그 기간이 “경이의 시대”로, 혜성, 초신성, 그 밖의 “무수한 별의 전령들”로 가득한 세기였다. (...) 또한 근대과학을 낳은 세기였고, 빛은 그 산파였다.
잠바티스타 델라 포르타
1580년부터 델라 포르타와 동료 선구자들은 베네치아의 놀라운 조선소 아스날에 모여 거대한 포물면 거울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 거울은 아르키메데스를 능가하여 “열 걸음, 스무 걸음, 백 걸음, 천 걸음 밖이나 일정한 거리가 아니라 무한히 멀리 떨어진 곳에” 불을 일으킬 거라고 델라 포르타는 예측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거울이 배에 불을 일으키지 못하자, 델라 포르타는 거울이 “멀리 보기 위한 도구”에 머물렀다며 탄식했다. 그러나 나폴리 출신의 그 소귀족은 포기하지 않고 빛에 관해 꿈을 꾸었다. 달에 전언을 비추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가 읽을 수 있게 하는 거울을 상상했다. 그리고 1589년의 <자연의 마력> 최신판에는 광학을 다룬 책이 보태졌다. (...) 핵심은 두 개의 렌즈, 다시 말해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함께 사용하는 데 있었다. “오목렌즈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물체를 매우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볼록렌즈로는 가까운 곳의 물체를 더 크지만 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두 렌즈를 조화시키는 법을 알면 멀리 떨어진 물체와 가까운 곳의 물체를 더 크고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델라 포르타의 고귀한 저술은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와 로저 베이컨의 꿈, “굴절된 상의 경이로움”을 알려주는 렌즈에 관한 꿈을 담았다. 델라 포르타의 예측 이후 20년 안에,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는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온 빛을 포착하게 된다. 망원경 덕분에 빛은 셰익스피어의 외침 “오, 멋진 신세계여!”와 공명하는 시대의 촉매제가 된다.
요하네스 케플러
케플러는 빛은 “전체 물질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썼지만, 가장 주목해서 읽어야 할 부분에서 그는 빛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 법칙에 종속된다”고 천명했다.
아주 가까이에서는 그토록 눈부신 빛이, 작은 방 안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으면 그토록 희미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특질은 하느님과 “가능한 한 가장 닮은 .... 형태”에 걸맞지 않다. 여기서 케플러는 중세와 현대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 케플러는 여기서 물리학의 중요한 법칙을 도출했다. 힘의 크기는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케플러가 발견한 이 역제곱 법칙은 나중에 뉴턴이 중력에 적용하고, 다른 과학자들이 모든 전자기에너지에 적용하게 되는 탄탄한 진리였다. 이 법칙은 양초 열두 개가 왜 방 하나를 완벽하게 밝힐 수 없는지, 지나가는 자동차 전조등이 왜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지, 맨해튼의 모든 불빛이 왜 뉴저지에서는 그저 희미한 빛으로만 보이는지 설명해 준다. (...) 그는 알하이삼 이후 빛에 관해 가장 정확하게 계산한 연구자였다.
※빛 최초의 경이로운 테크놀로지, 망원경
모든 게 훤히 보이는 기구에 관한 이야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원전 55년에 신기한 거울로 영국해협 너머 영국 해안까지 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천 년도 더 지난 뒤, 사제왕 요한의 전설적인 왕국은 모든 게 훤히 보이는 기구를 이용하여 경비를 선다고 여겨졌다. 초서의 <소지주의 이야기>(캔터베리 이야기)와 에드먼드 스펜서의 <선녀여왕>은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기구에 관한 공상을 펼쳐 보였고, 17세기의 어떤 글에 따르면, 예수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점성술 거울을 비추면... 아무것도 감출 수 없고, 다른 군주들의 추밀원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보거나 파악할 수 있다.” 잠바티스타 델라 포르타의 <자연의 마력>은 꿈 같은 망원경을 코앞의 현실로 느껴지게 했지만, 멀리에서 오는 빛을 모으기 위해서는 최상의 품질을 지닌 렌즈가 필요했다. (...) 베네치아의 유리 제조업자들이 맨 처음 안경을 제작한 뒤 300년 동안 렌즈는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 하지만 렌즈는 빛이 퍼져 빛무리가 지거나 반점, 더 나아가 무지개 현상이 나타나는 일이 잦았다. 렌즈 두 개는 고사하고 한 개만 통과해도 빛은 산탄처럼 흩어져서 왜곡 없이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뒤 1608년 가을, 네덜란드의 서로 다른 세 도시에서 일하던 장인 세 사람이 최초의 망원경에 대한 특허출원을 신청했다. 한스 리페르스헤이가 가장 큰 보상을 받았다. 망원경에 빛무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리페르스헤이가 내놓은 해법은 간단했다. 주렌즈 앞에 핀홀 조리개를 두어 산란광을 차단하고 필요한 빛만 들어가게 한 것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갈릴레오는 빛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여겼다. (...) 물리학자인 그는 빛을 “자연의 보편적 출발점”이라 생각했다. (...) 한 친구가 최초의 망원경 얘기를 알려주자 갈릴레오는 “그 멋진 물건을 손에 쥐고 싶은 욕망이 차올랐다.” 이탈리아에서는 구할 수 없어서 직접 만들어야 했다. 1609년 여름, 갈릴레오는 평범한 안경에서 안경알을 빼내 연마하여 볼록렌즈를 만들었다. 그리고 납 경통의 양 끝에 렌즈를 끼웠다. 그는 하루 안에 쓸 만한 견본품을, 그리고 한 주 안에 8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 8월 중순 즈음에는 20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 “나는 지상의 것들을 떨치고 천계의 탐구에 눈을 돌렸다. 처음 본 달은 무척 가까이 있는 듯 지구 두 개 지름만큼의 거리에 있는 듯 보였다. (...)오리온자리 삼성의 세 별과 오리온의 검 여섯 별을 보았다.”
1610년 여름, 갈릴레오가 <별의 전령>을 펴내 자신의 발견을 알리자, 별빛은 일상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 갈릴레오가 별의 메시지를 전해 준 뒤로, 빛에 관한 오래된 추정들은 마지막 빛을 깜빡이다 사라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부한 견해가 가장 먼저 무너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달의 표면이 매끈하고 거울처럼 태양을 반사한다고 보았지만, 갈릴레오는 벽에 걸린 거울을 갖고 이를 반박했다. 그는 사그레도와 살비아티라는 두 연구자가 대화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사그레도는 달이 거울이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몹시 밝게 빛날 것”이라 했다. 또한 하늘에 걸린 거울이라면 지구의 모든 곳에서 달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 했다. 거울에서 반사된 빛은 벽의 한 지점에만 부딪히기 때문이다.
여생 동안 갈릴레오는 빛에 관해 숙고했다. 빛이 어떻게 반사되고 구부러지는지는 알았지만, 도대체 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두 개의 단단한 물체가 서로 마찰될 때, “그 물체들이 더는 분리될 수 없는 원자로 마침내 분해되는 지경에 이를 때, 빛이 생겨날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빛이 원자라면 일정한 속도를 지닐 터였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에 관한 논문에 주력하던 때에 로마의 다섯 개의 태양 이야기를 들었다. 논문을 제쳐두고 그는 빛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 “광학에서 내 첫 번째 스승”이라 일컬은 케플러를 성큼 앞선 데카르트는 빛의 열세 가지 속성을 정의했다. 빛은 “발광하는 물체에서 모든 방향으로 뻗어 간다.” 빛의 이동은 “순식간이고.... 대체로 직선으로 확산한다.” 직선으로 퍼지는 빛은 산란하기도 하고, 렌즈나 거울에 의해 한 점으로 모여 불을 일으킬 수 있다. (...)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은 프리즘을 두 개 사용하는 “결정적 실험”을 시작했다. (...) 빛은 모든 색깔로 구성되어 있고, 일단 분리되면 각 색깔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붉은색, 노란색 등은 더 빠른 광선의 움직임을 크게 방해함 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광선을 멈추게 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리고 파랑, 초록, 보라색은 더 느린 광선이 아닌 더 빠른 광선의 움직임을 감소시킴으로써 나타난다.”
그가 <광학>을 출간한 것은 그다음 세기로 접어들어서였다. 그러나 뉴턴 덕분에 훗날 빛의 정복이 가능해졌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의해 재구성된 빛은 오늘날 판독과 치료와 측정과 측량에 쓰이지만, 여전히 그 속성은 아이작 뉴턴이 말한 그대로이다.
1671년, 갈릴레오의 굴절망원경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새로운 발명품인 길이 15센티미터짜리 반사망원경을 영국왕립학회에 보낸 뉴턴은 회원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 1672년 2월 8일 (...) 뉴턴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 광선들의 굴절성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광선들의 성질 또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색깔이나 다른 특정한 색깔로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색깔은 굴절 또는 물체의 반사로 인해 펼쳐지는 빛의 능력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은 빛의 고유하고도 타고난 속성으로서 광선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들어 있다.
◆ 동일한 색깔은 동일한 굴절 정도를 지니며, 동일한 굴절 정도는 동일한 색깔로 나타난다. ‘굴절성이 최소한’인 광선들은 모두 ‘빨간’색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 가장 ‘잘 굴절되는 광선들은’ ... 짙은 ‘보라’색으로 나타난다.
◆ 그러나 가장 놀랍고도 경이로운 구성은 ‘순백’의 빛이다. 홀로 순백으로 드러나는 광선 종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순백은 혼합이 되어야 나타나는 색으로, 앞에서 말한 모든 기본 색상이 다 들어가 적당한 비율로 섞인 것이다. 이렇게 ‘순백’은 ‘빛’의 평상시의 빛깔이 된다. 다양한 발광체에서 광선들이 어지러이 발산될 때, 빛은 온갖 색깔의 광선들이 뒤섞인 총체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후크는 빛이 맥동이라는 자신의 이론에 집착했다. 다른 이들은 빛이 압력이라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고수했다. 그러나 새 이론이 부상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그리말디
그리말디 신부는 덧창에 작은 구멍을 내고 빛다발이 들어오게 했다. 빛살을 동전으로 가로막자 그 그림자는 본디 그림자보다 윤곽이 흐릿하고 조금 더 컸다. “빛의 전파나 확산에는 직사와 굴절, 반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번째 방식인 회절도 있다”고 그리말디는 결론을 내렸다. (...) 빛이 단단한 모서리를 지나치면서 약간 휘는 현상인 회절은 윤곽이 흐릿한 그림자를 해명해 주었다. 또한 그리말디가 표면을 긁은 금속판에 빛을 반사시켰을 때 빛줄기들이 흩어져 희미한 빛깔을 띠는 이유도 설명해 주었다. 그리말디가 표면을 긁은 금속판은 최초의 회절격자였다. [지금의 CD 원리] (...) 빛의 미립자들은 회절을 설명할 수 없다. 입자라면 어떤 모서리를 지나가도 그 주변에서 흩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빛의 변화에 의해 빛은 지속적이고 뚜렷한 색채를 띠게 되는데, 그 변화는 아마 파동(undulation)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리말디는 썼다. (...) 빛이 ‘파동’이라는 그의 의견이 일으킨 논쟁은 250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빛은 압력일 수 없다고 하위헌스는 말했다. 그렇다면 서로 눈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서로 반대 방향의 압력이 부딪혀서 시력을 방해하지 않겠는가? 또 빛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믿음과 달리 공기보다 물속에서 더 빠르게 지날 수 없다. 유리, 물, 프리즘 같은 더 밀도 높은 매질은 모두 빛의 속도를 느리게 하고 그 광선을 휘게 한다. 하지만 빛은 광선인가 아니면 직선으로 흐르는 입자인가? 빛은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파동이어야 한다고 하위헌스는 주장했다. 파동의 각 부분이 또 다른 부분과 부딪히면 2차로 잔파동을 일으키고 이는 파두의 주변으로 번진다. 파동과 잔파동이 어떻게 굴절하는지 예측하기 위해 하위헌스는 인접 삼각형을 이용하여 각도를 계산하고 연쇄 운동을 분석했으며 스넬데카르트 굴절법칙을 적용했다. 그 결과 파동 운동의 정확한 수학적 모형이 도출되어 빛에 쉽게 적용되었다. “무수한 파동이 발광체의 다양한 지점에서 방출되더라도 발광체와 먼 거리에서 함께 단일한 파동을 형성하여 감지될 만큼 강해진다는 걸 알면 우리는 앞으로 놀랄 일이 없을 것이다.”
※뉴턴 원무늬
구면과 평면이 인접해 있을 때 두 면에서의 반사로 인해 생겨나는 동심원 모양으로 밝고 어두운 간섭무늬를 뜻한다. 단파장의 빛을 비추면 밝고 어두운 무늬가 번갈아 나타나지만 여러 파장의 빛이 혼합되어 있는 백색광을 비추면 프리즘에서와 같이 빛이 파장에 따라 분리되면서 무지개 빛깔의 원무늬가 나타난다.
뉴턴의 <광학>
“뉴턴이 <광학>을 출간하자 모든 것이 환해졌다.” -알렉산더 포프
“천년 세월 동안 그에게 필적할 만한 이를 찾기 힘들다. 뉴턴은 최고로 유능한 사람이 인체를 해부하는 것보다 더 능숙하게 빛을 해부했다.” - 볼테르
<광학>은 1704년에 출간되었다. (...) 물이 왜 빛의 입자 일부는 반사시키고 다른 일부는 굴절시키는지를 설명하면서 그는 “용이한 반사 주기”와 “용이한 투과 주기”의 ‘주기’를 말했다. 발광체로부터 방출된 빛의 모든 입자는 그것이 부딪히는 표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사되거나 투과되는 성질을 지닌다고 뉴턴은 보았다. 용이한 반사 주기에 입사한 광선은 표면에 닿자마자 반사되고, 용이한 투과 주기에 입사한 광선은 투과되는 것이다. 뉴턴은 입자설을 신봉했지만, 이 주기성은 빛을 입자이자 파동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물리학 최초로 암시한 것이었다. (...) <광학>은 프리즘이 광선을 굴절시키듯 극적으로 빛에 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광학>에 실린 스물여덟 가지 의문은 빛이 아이작 뉴턴마저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드러낸다. 에테르에 관해서 그는 “공기보다 훨씬 미묘한 매질”이라고 추측하면서도 “이 에테르라는 게 무언지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파동설에 바치는 오마주로서, 그는 “광선은 물체의 모서리와 측면을 지날 때 장어가 움직이듯 구부러지는 건 아닌가?”하고 질문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천문학자가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하며 빛의 속도를 측정했기에 뉴턴은 과감하게 자신의 추정치를 초속 315,431킬로미터,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 7분이 걸린다고 발표했다. 오차는 딱 1분, 초속 16,093킬로미터가 어긋났다. 마지막으로 뉴턴은 빛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 “광선이란 게 발광 물질에서 방출되는 매우 작은 입자들은 아닌가?”그리고 변화는 자연의 변함없는 본성으로서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구더기가 파리가 되는 거라면, “왜 자연은 형체를 빛으로, 빛을 형체로 변화시킬 수 없는가?” 인류는 이런 질문들에 이미 답을 내놓았을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짜 신들 ... 태양과 달, 죽은 영웅들의 숭배”에 낭비했다고 뉴턴은 결론을 내렸다.
볼테르는 샤틀레 부인과 함께 유럽 사회에 뉴턴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볼테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컵 속 동전부터 그리말디의 회절에 이르기까지 광학의 근본 원리를 끈기 있게 설명했다. 빛은 “불 자체”이고, “태양에서부터, 그리고 멀리는 토성 등으로부터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속도로 우리에게 던져진” 입자들로서 전해진다고 볼테르는 선언했다. 볼테르는 빛이 포탄보다 166만 배 빠르다고 추측했다. 그는 입자설을 설명하면서, 빛의 입자 하나하나는 정해진 무게를 지니며 빨간색이 가장 무거워서 가장 크게 굴절된다고 했다.
1783년 <뉴턴 철학의 요소들>이 파리에서 출간된다. 그리고 패러다임이 변화했다. (...) 나머지 18세기 동안 뉴턴은 빛이 되어 대륙에 퍼져 나가고 굴절되고 그가 예측한 그대로 움직였다. <광학>은 대학교에서 강의되고 시에서 칭송되고 궁정에서 환영받았다. 별개이고 지속적인 색깔들로 백색광이 구성되어 있다는 그 기본 주장은 상식이 되었다.
9장 격정적이고도 조화로운 선율: 낭만주의와 매혹의 빛
전쟁터를 뒤덮은 화염처럼 이글거리며, 낭만주의 시대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이며 ‘계몽’이라는 딱지가 붙은 모든 것에 저항했다. 바이런에서 괴테, 쇼팽에서 키츠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자들은 뉴턴의 실증주의, 루소의 ‘사회계약’,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을 거부했다. (...) 낭만주의는 아이작 뉴턴을 네메시스(숙적)로 삼았다. 18세기 내내 뉴턴의 업적은 전설에 가까워졌다. 뉴턴은 계몽주의 시대 세속의 신이라도 되듯 “우리의 철학적 태양”, “신 같은 사람”, “그 자체가 빛”이라고 칭송되었다. (...) 계몽주의 시대 내내 철학자와 천문학자는 우주를 확장했다. 1755년에 이마누엘 칸트는 밤하늘의 광막함을 추측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거대한 은하수를 채우고 있는 무수히 많은 세계와 우주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놀라겠는가! 끝도 없고 참으로 거대한 심연만 존재하니, 그것을 마주하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상상은 소진되어 침몰한다.” 한 세대 뒤에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은 너무 멀어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했다. (...) 은하수 너머에 있는 것은 천상의 빛을 가리고 있는 지구의 그림자가 아니라 “미래 태양이 될 무질서한 재료”로 얼룩져있는 거대한 허공이라고 허셜은 말했다. 빛은 항성의 본질이고, 태양은 수십억 항성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볼테르가 뉴턴의 프리즘을 통해 엿보았던 “새로운 우주”의 일부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낭만주의는 빛을 아름다움과 초월의 본질로 바라보았다. 거울과 프리즘, 방정식 같은 과학의 도구들이 “타락한 빛”에서 위엄을 빼앗았을지라도, 예술의 도구들은 그것을 복구하게 된다.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 내내 빛은 시로 칭송되고 교향곡으로 완성되었다. 태양은 캔버스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이글거리고, 달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빛의 낭만주의 시대,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합주로 시작되었다.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태양은 신이다”라고 윌리엄 터너는 선언했다. 그의 작품 <카나번 성>은 회화의 새 빛을 알렸다.
렘브란트의 것보다 더 눈부신 터너의 빛은 근원의 빛이다. 비평가 윌리엄 해즐릿은 터너가 “기꺼이 돌아가는 곳은 세계 최초의 혼돈, 또는 물이 육지와 분리되고 빛이 어둠과 분리되려 할 때의 상태이다. .... 모든 것이 ‘형체 없이 공허’하다”고 썼다. 후기의 터너 작품을 바라보는 건 태양 자체를 향해 떠가는 것, 단테처럼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것, 근원을 향해 가까이,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그동안 그 음악은 내부에서 점점 고조된다.
터너의 작품을 “터너의 작품”으로 만든 것은 노란색, 퍼져 가며 흰색으로 스며들어 빛이 엷어지는 하늘 속으로 해가 녹아드는 듯 만드는 노란색이었다. 존 컨스터블은 터너의 색채를 “색이 입혀진 증기”라 일컬었고, 1840년대에 거의 일흔을 눈앞에 두고 있던 터너는 “빛의 화가”로 알려졌다. 종종 그의 빛은 격노한 폭풍이나 파도에 휘말리며 한 세기 뒤 잭슨 폴록의 “내가 자연이다”라는 선언의 전조가 되었다. 터너의 마지막 작품들은 색채의 물결에 잠기며, 머지않아 물리학자들이 빛의 속성으로 발견하게 되는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드러낸다.
윌리엄 터너 작품 감상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세상 전체가 그렇듯이, 나는 모든 색상이 빛에 들어 있다고 확신했다.” - 괴테
괴테는 시와 과학 사이에 경계가 없다고 인식했다. 대신 둘을 통합한 “섬세한 실증주의”를 추구했다. 괴테의 빛은 고대 중국 도가의 빛과 닮은 것으로, 관찰자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에 완전히 통합된 빛이다. 인간의 눈에 의해 해석되고 인간의 영혼에 의해 이해된 빛만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괴테는 주장했다.
1810년 괴테는 <색채론>을 펴냈다. (...) <색채론>은 광학을 심리학과 추측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 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색채에 관한 연구인 만큼이나 색채에 관한 신학”이었다. 괴테는 관찰자는 “두 눈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아야 현상 자체가 더 많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가 ‘모든’ 색채라고 주장한 이 색깔들은 흑과 백 사이의 수평 경계로 인해 생겨났다. 뉴턴은 이어져 있는 일곱 가지 색깔을 보았지만, 괴테는 그의 프리즘이 드러낸 노랑, 주황, 파랑의 세 가지 색깔만 보았다. 나머지는 빛과 어둠의 혼합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흰 빛은 합성물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단색이며 나눌 수 없는 실체”라고 말했다. [베토벤, 터너, 루돌프 슈타이너 등이 그의 색채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바이런
낭만주의 시들이 유도등으로 삼기 전부터 달은 신화와 미신의 세계에 영감을 주어 왔다. (...)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보았을 때에야 달은 전설 속의 아우라를 잃기 시작했다. 낭만주의는 그 아우라를 복구하고 자신들의 것을 보태어 달을 연인들의 등불로 만들었다. [괴테, 자코모 레오파르디, 쇼팽, 워즈워스, 셸리, 존 키츠 등] 바이런은 로맨스를 달빛의 본질로 삼았다.
빛의 낭만주의 간주곡의 유일한 유산은 부드럽고 미묘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멋지고 매력적인 금빛의 달이었다. 1832년, 베토벤의 우울한 나무 그늘 소나타는 ‘월광소나타’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이런의 <돈 주안>은 새 세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달을 연인들이 다니는 으슥한 길의 고정 장치로 만들었다. 대부분이 프랑스인인 더 젊은 작가들은 바이런이 못다 한 자리를 차지하여, 보름달 아래에 자신들의 로맨스를 구성했다. 이후로 대중가요도 그랬다. 낭만주의는 달에 신선한 목적을 부여했다. 더 이상 다산의 상징이 아니라 이유가 된 달빛이 동요시킨 것은 운명도 이성도 아니고 마음이었다.
10장 입자 vs. 파동: 뉴턴이 떠난 자리
5천 년 문명 내내 빛은 길들여지지 않고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빛을 신 또는 신의 얼굴로 여기는 이들은 신앙에 의지해야 했고, 빛을 연구한 이들은 뉴턴이 스스로를 인식한 바와 같이 “발견되지 않은 거대한 진리의 바다를 앞에 두고” 바닷가에서 노는 어린아이였다. (...) 19세기 초에, 빛에 관해 알려진 내용은 다음이 전부이다.
◆ 빛은 직선으로 나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회절이 그것이다.
◆ 빛의 굴절 각도를 계산할 수 있다.
◆ 그 밝기는 중력과 마찬가지로 역제곱 법칙에 따라 줄어든다.
◆ 여러 색채로 분광될 수 있다.
◆ 빛은 대기에서 초당 231,746 또는 315,431킬로미터의 속도를 내며, 물속에서 훨씬 더 빠르거나 어쩌면 더 느리다.
◆ 빛은 발광 에테르 속을 흐르는데, 그 누구도 에테르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했다.
◆ 빛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혹은 파동일 수도?
1801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은 빛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 빛은 19세기 호기심의 대상에서 20세기의 도구로 진화했다.
※아이슬란드 방해석
1600년대에 발견된 아이슬란드 방해석은 빛줄기를 갈라놓는다. 이 작은 결정체는 과학자들을 좌절시키고, 빛의 본성인 파동을 연구하도록 자극했다.
아이작 뉴턴은 <광학>에서 “그 신기한 물체인 섬Island 결정체”가 빛을 가른다고 썼다. 결정체 두 개에 빛을 비춘 뉴턴은 신기한 점을 더 발견했다. 두 방해석의 넓은 면이 서로 평행하도록 놓으면, 두 번째 방해석도 첫 번째 방해석의 광선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한 방해석을 90도 회전시키면 그것은 한 빛줄기는 갈라놓지만 다른 빛줄기는 가르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던 뉴턴은 가설을 세웠다. “따라서 모든 광선은 마주보는 두 면들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뉴턴이 입자에 관해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크리스티안 하위언스는 파동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 그는 스넬데카르트 굴절법칙을 사용하여 방해석을 관통하며 ‘정상’과 ‘이상’ 굴절로 갈라지는 파동의 각도를 계산했다. 하위헌스는 풍차처럼 보이는 에우클레이디스의 종이접기 도안 모양에서부터 사각형과 삼각형을 둥글게 감싼 파동으로 나아갔다. 이는 하나의 결정체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굴절률을 지녀서 한 가닥 광선을 둘로 쪼갤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왜 두 번째 방해석이 ‘정상’ 빛줄기는 쪼개면서도 ‘이상’ 광선은 쪼개지 못하는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가로막혔다.
토머스 영
1801년 11월 12일 영은 빛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발표했다. (...) “고요한 호수 표면에서 똑같은 파동이 수없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파동이 겹쳐서 힘이 더해지거나 때로는 마루와 골이 만나 서로를 상쇄하여 정지된 수면을 만든다. “이제 나는 이처럼 빛의 두 부분이 혼합되는 지점이라면 어디든 비슷한 효과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며, 이를 빛의 간섭의 일반 법칙이라 일컫는다.”
1802년에 그는 수면파 수조라는 새로운 광학 도구를 발명했다. (...) 그러나 수조의 물결로 빛 자체가 파동임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영에게는 ‘결정적 실험’이 필요했다. (...) 오늘날 ‘영의 실험’으로 알려진 것은 “아마도 근대 물리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일한 실험”이었다. (...) 빛이 파동이어서 교차하고 충돌한다면, 이 ‘간섭’은 예측할 수 있는 무늬로 나타나야 한다. 두 파동이 동일한 경우에, 두 마루는 서로 일치하고 서로 보강하며 빛은 더 밝아질 것이다. 한 파동의 마루가 다른 파동의 골과 만나는 경우에, 두 파동은 서로를 상쇄하여 어두운 색, 또는 적어도 희미한 색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단색광의 평행 광선을 두 슬릿 사이로 통과시켰을 때, 영이 예상했던 무늬가 벽에 나타났다. 가운데에 밝은 줄이 나타나고 그 양쪽으로 얼룩말 무늬처럼 어두운 줄과 밝은 줄이 나타난 것이다. “운동 방향으로 일정한 동일 거리에 있는 단색광은 서로를 상쇄하거나 파괴하고, 서로 결합하게 되는 경우에 빛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반대의 속성을 지닌다고 추론할 수 있다.” (...)영은 빛의 파동을 최초로 측정했다. (...) 빨간 파동의 길이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짧아 0.00000065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보라색은 더 짧아서 0.00000044미터였다.
영국이 토머스 영의 파동론을 외면하자, 빛의 횃불은 프랑스로 넘어갔다. (...) 파리와 그 근교에서부터 최초의 빛 쇼, 최초의 사진, 최초의 근대적 등대, 최고 수준의 광속 측정, 빛을 가장 신선하게 사용한 회화, 최초의 활동사진이 나타나게 된다. 그 불꽃이 점화된 곳은 한 학교였다.(에콜폴리테크니크)
에티엔 루이 말뤼스
말뤼스는 뉴턴이 추측했던 것처럼 빛에 ‘면’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빛은 비대칭인 게 틀림없다. 말뤼스는 ‘편광’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빛의 ‘면들’이 정렬되면, 일부 투명한 표면은 통과하지만 다른 표면에서는 걸러진다. 말뤼스는 평행 축들을 따라 회전하는 거울이 위아래로 위치한 장치를 만들어 편광법칙을 입증했다. [편광을 사용해 TV 나 노트북의 모든 액정화면의 화소를 밝게 하거나 어둠게 한다.]
프랑수아 아라고1812년 운모판에 빛을 투과시키면서 프랑수아 아라고는 색편광을 발견했다. 햇빛이 편광될 수 있는 것처럼, 무지개와 모든 굴절되는 색채 또한 편광될 수 있다.
오귀스탱 장 프레넬
프레넬은 ‘정확히’ 빛이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소수점 셋째, 넷째, 다섯째 자리까지 계산했다. (...) “초점과 빛이 사실상 동일한 2밀리미터 렌즈를 사용하여, 실 가까이에 생긴 줄무늬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줄무늬 간격을 마이크로미터로 측정하니 0.015밀리미터 미만이었다.” (...) 회절이란 경계 위아래로 파동이 지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입자라면 이렇게 될 수 없다.
파동이론이 개연성이 있으려면 수학이 작용해야 했다.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넓은 공간을 군인처럼 줄을 지어 진군하는 파두를 계산했다. 하위헌스의 파동은 1700년 이전에 알려진 몇 안 되는 빛의 법칙에 따라 예측 가능하게, 수학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파동은 물과 마찬가지로 물체 주변에서 휘어진 다음 이어서 곧게 나아갈 수 있는가? 장애물에 부딪힌 물은 뒤로 밀린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빛이 그런 소용돌이를 형성한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그는 입자설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입자설이 빛의 운동 전체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입자 자체가 운동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 미적분학을 빛의 파동에 적용하면서, 프레넬은 오늘날 ‘프레넬 적분’이라 불리는 것을 정립했다. (...) 빛은 물처럼 소용돌이친다. 하위헌스를 토대로, 프레넬은 파동이 어떻게 이차 파두를 만들어 내는지 계산했다. “분자들은 평형상태이고(움직이지 않고) 그 순간 분자를 전진시키는 속도만 받아들인다면, 후퇴하는 파동 또한 생겨날 것이다. .... 따라서 이 두 운동은 역행하는 파동에서 서로 상쇄한다.”
프레넬은 토머스 영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빛의 속성을 제시했다. 파동론자들은 작업대에서 손바닥으로 손바닥으로 소금을 쓸어내듯이 빛의 파동이 평행한 파두를 따라 나아간다고 가정했다. 소리도 그런 파동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프레넬은 대안을 제시했다. 빛의 파동은 문고리에 줄을 묶고 흔들 때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며 나아가는 횡파일 것이라고.
11장 뤼미에르: 프랑스의 눈부신 세기
코르두앙 등대
프레넬의 “계단식 렌즈” 설계에 따라 유리 제조업자들은 직경 60센티미터의 다각형 판을 조립했는데, 각각의 판은 이랑을 이루듯 투명한 동심원들로 이루어져 사방에서 오는 빛의 초점을 모았다. 1823년 7월 25일, 깜깜하고 위험한 프랑스 해안은 인류가 만든 것 가운데 가장 밝은 빛으로 밝혀졌다.
환등기
1600년대 중반에 발명되었다고도 하고, 파동론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명했다는 말도 듣는 환등기는 원시적인 프로젝터인데, 양초, 렌즈, 채색한 슬라이드로 어두운 방 저편에 이미지를 나타내는 장치이다. (팡파스타마고리 쇼)
루이 자크망데 다게르
“달의 은”이라고도 불리는 질산은이 빛에 노출되면 잿빛으로 또는 검게 변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이미 거의 한 세기 전이었다. 염화은은 더 짙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빛의 무늬를 종이에 담는 데 최초로 성공한 때는 1790년대였다. 당시 웨지우드 도자기 명가의 상속자인 토머스 웨지우드는 종이에 질산은을 씌우고 나뭇잎을 올려놓은 채 햇빛에 노출시켰다. 그리고 노출시킨 질산은 판에 라벤더 오일을 발랐다. 그 결과 또렷한 윤곽이 나타났다. 그러나 웨지우드의 “포토그램”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고정 물질이 없으면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질산은을 검게 변하게 했다. (...)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질산은보다 염화은을 선호했다. (...) 그는 유대역청이라는 물질을 사용했다. 빛에 노출되면 유리에 고착되는 타르 물질이었다. 1826년 (...) 니에프스는 최초의 사진을 얻었다. (...) 니에프스는 자신의 공정을 ‘헬리오그래피’라 일컬었다. 1829년 다게르는 니에프스와 제휴관계를 맺었다. (...)
지난날 종교는 빛을 숭배했고, 물리학은 빛을 계산했으며, 회화는 빛을 복제했고, 시는 빛을 칭송했다. 하지만 마침내 빛을 포획한 것은 화학이었다.
다게르는 (...) 요오드 증기를 은판에 쐬어 요오드화은을 만들었는데 이는 염화은보다 색이 더 짙다. 탄산으로 음화의 명암을 바꾸고, 등불로 가열한 염소산칼륨으로 대비를 세밀하게 조정했다. (...) 어느날 다게르는 “내가 그 찰나의 빛을 포획했소! 나 대신 태양이 그림을 그리도록 한 것이오”하고 외쳤다. 하지만 흐릿한 형태는 여전히 점점 더 검어졌다. (...) 1835년 어느날, 다게르는 실험을 마치고 빛에 얼마 노출되지 않은 판을 화학약품 캐비닛에 넣어 두었다. 이튿날 아침 (...) 판에는 섬세하게 새겨진, 희미하기는 했지만 그가 실험한 것 가운데 단연코 최상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었다. (...) 징후가 포착된 물질은 수은이었다. 깨진 온도계에서 수은 증기가 샜던 것이다. 여러 고정 물질로 실험을 계속한 끝에 1837년, 다게르는 그의 최초의 영구 이미지를 얻었다. (...) 1839년 (...) 다게르는 시연을 했다. 은을 씌운 동판을 꺼내 부석 분말로 닦은 뒤 질산 용액에 헹궜다. 방을 어둡게 한 뒤 가열된 요오드가 들어 있는 상자 위에 동판을 엎어 놓았다. 증기가 모슬린 천을 통해 새 나오면서 동판이 누렇게 변했다. 그리고 다게르는 동판을 카메라에 끼웠다. (...) 렌즈 덮개를 열었다. (...) 몇 분 뒤 그가 렌즈를 덮고 판을 꺼내서는 수은이 들어있는 양철통 위에 기대 놓았다. 아래쪽으로는 불을 붙였다. 수은이 섭씨 60도에 이르렀을 때 다게르는 증기가 피어오르는 수은을 식힌 뒤 판을 용액에 세척했다. 티오황산나트륨 용액이다. (...) 파리는 순식간에 다게레오파이프 열풍에 휩쓸렸다.
다게르는 빛을 포획했고, 그 뒤로 빛은 찰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의 공정이 단순화되자, 사진술은 빛을 인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인상주의
1848년, 빛의 도시는 우울한 도시가 되었다. 다게레오타이프가 도시의 보물들에 초점을 맞출 때조차, (...) 파리는 “가난과 전염병과...질병이 일제히 만들어 내는 오물의 거대한 공장이자 햇빛이 거의 스며들지 않는 곳”이었다. (...) 1850년대 내내 파리는 재건되고 재탄생했다. (...) 이제 파리의 대로인 ‘그랑 불바르’는 탁 트인 하늘 아래 눈이 부셨다. 빛은 도시 어디에나 존재했다. 샹들리에게 반짝이고 카페에서 빛이 새나오고 거리에 줄지어 선 1만 5천 개의 가스등이 불을 밝혔다. (...) 공짜에 화수분 같고 즐거움을 주는 빛은 파리 사람들이 도시와 하늘과 서로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0년 뒤에는 예술가들이 이 빛을 포착했다.
에드가르 드가는 무대의 무대의 풋라이트를 무희의 내비치는 스커트에 담았다. 베르트 모리조는 빛의 흐름을 아기 침대 위로 늘어진 레이스에 표현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얼룩처럼 떨어지는 여름빛을 나무 그늘의 소풍에 드러냈다. 알프레드 시슬레는 겨울 빛을 눈 위에 드리웠다. 조르주 쇠라는 빛의 모든 점을, 그리고 그것 이상을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담았다. 클로드 모네는 건초더미를 아침의 은은한 잿빛과, 정오에 작열하는 주황빛과, 저녁의 보랏빛 어스름 속에 나타냈다.... 그린 것이 무희든 건초더미든 바다든 눈이든, 주제는 빛이었다. “햇빛에 취했다”고 르누아르가 표현한 것처럼, 인상파는 미술의 지겨운 규칙을 깨뜨렸다. (...) 인상파는 모든 곳에서 불쑥 나타나는 빛을 좋아했다.
인상파 이전에 회화의 빛은 로마와 성시 시대의 ‘룩스’와 비슷하여, 집중되고 강렬한 빛이 창을 통해 흘러나오거나, 물체에서 반짝거리거나, 구름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다게르는 ‘룩스’가 화가의 관념일 뿐임을 알려 주었다. 다게레오타이프에 동결된 빛은 ‘룩스’가 아니라 ‘루멘,’호수에서 반짝거릴 수도 있지만 땅과 하늘에 고루 퍼진 하나의 분위기였다. 그런 빛을 채색하려면, 화가들은 카라바조의 번득이는 빛과 렘브란트의 백열을 잊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멍청이라도 사진은 찍을 수 있지만, 회화가 요구하는 것은 미술적 완성을 넘어선 것이었다. 인상파는 카메라가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흐릿하고 덧없는 빛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직접적인 광학적 감각 데이터, 또는 ‘시각’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상파 화가들이 왜 어린아이의 배우지 않은 눈을 닮고 싶다고 했는지 설명해 준다”고 미술사학자 앤시아 캘런은 썼다. 혁명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이었으며, 앞선 프랑스혁명과는 달리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물감과 캔버스가 수반되었다. 1892년 봄, 클로드 모네는 변화하는 빛을 받는 루앙의 고딕 성당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 해 뒤 성당 그림 스무 점이 전시되었을 때, 한 비평가는 “총성 없는 혁명”이라고 연작을 칭송했다.
시네마토그래프
프랑스는 군주제에서부터 혁명과 제국, 공화제로 나아가면서 빛에 새로운 역할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타임머신이었다. 햇빛은 언제나 믿을 만한 시계였으나 이제 시계는 정지될 수 있었다. 한 순간은 구리판이나 캔버스에 고정될 수 있게 되었다. 다게르가 창가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포착하여 기자들에게 보여 준 것은 오후의 한 순간이었다. 모네는 시간을 고딕 성당 그림에서 (...) 시간을 빛 만큼이나 자신의 모티프로 삼았다. 이렇듯 새롭게 길들여진 빛은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이들에게는 선물이었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열어 보는 선물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지에 매혹된다. 그래서 빛을 손에 쥐고 보는 것이다. “이 순간을 정밀하게 저며 내어 동결시킴으로써 모든 사진은 시간이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림을 증언한다”고 수전 손택을 말했다.
파리, 1895년 12월 28일, 카퓌신 가 14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 한 남자가 최신 빛 쇼인 ‘시네마토그래프’를 관람하라고 사람들을 꼬드긴다. (...) 영화, 다시 말해 움직이는 빛이 도착한 것이다. 그 발명가는 리옹 출신의 형제,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이다. (...) 역설적이게도 ‘뤼미에르’의 뜻은 ‘빛’이다.
12장 작고 동그란 햇빛: 전기, 밤을 정복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천 년의 밤을 밝혀 준 건 오로지 양초와 등불이었다. (...) 1700년대에 들어서야 더 나은 빛이 등장했다. 심지 두 개짜리 기름등이 그것이다. (...) 그리고 아르강등이 나타났다. (...)1800년대에 들어와서 가스등이 도시 거리와 저택을 밝혔으나, 세계 곳곳의 오두막과 가정집, 마을에서는 해가 지면 옛날 방식대로 불을 밝혔다. 1860년대 원유에서 정제된 등유는 기름덩어리와 악취와 도축을 어느 정도는 거두어 주었다. 하지만 빛은 여전히 불꽃을 필요로 했고 (...) 대도시에서 발생한 ‘대화재’는 ‘무시무시한 어둠’을 몰아내는 보상으로 빛이 강요하는 대가였다.
촛불과 등불을 밝힌 수천 년 동안, 이후에 세상에 흘러넘치게 되는 빛의 원천은 허공에 숨어 있었다. (...) 탈레스는 호박돌에서 불꽃이 튀는 걸 보았다. 중국의 묵가 또한 정전기를 관찰했고, 인도 바이셰시카 학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의 2천 년이 흐르는 동안 이 불꽃을 손에 넣지 못했다. (...) 정전기가 일어나면 깜짝 놀라고 머리털이 쭈뼛 선다. 라이덴 병의 전극에 의해 가둬진 전기가 방출되면 한 사람을 방 저편으로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라이덴 병은 하전을 만들어 내는 18세기의 발명품이다. 당연히 그토록 불안정하고 그토록 위험한 힘은 절대로 안정적인 광원이 될 수 없었다.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가 1802년에 백금 가닥을 통해 작은 전류를 흘려보냈을 때, 타오르는 듯한 빛이 순식간에 필라멘트를 달구었다. 7년 뒤 데이비는 또 다른 전광을 만들어냈다. 불꽃이 탄소봉 사이를 도약하는 아크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크등은 너무 눈이 부셔서 가정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가정 조명은 안정적이고 믿을 만해야 하지만, 전기는 장어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벼락처럼 치명적이었다. 가정과 전기가 마침내 연결되는 것은 다정하고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의 창의성 덕분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빛이라 일컫는 것’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발견을 공유하게 된다. 경쟁자의 발견을 반박하되 그 진실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연구를 보완하고, 한참 동안 함께 산책하고 더 한참 동안 회의를 하며, 조각조각 퍼즐을 맞추어 갔다. 그러한 협력은 과학의 성숙, 또는 철학으로부터의 분화를 알리는 것일 수도 있으나, 가장 유력한 원인은 복잡성이었다. 빛에 관해 많이 알게 될수록 더 생소해진다. 수학은 더 어려워지고 변수는 더 복잡해져서, 빛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모든 최고 지성들의 통찰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마이클 패러데이
런던 사우스엔드 대장장이의 아들인 패러데이는 험프리 데이비에게 고용되었다. (...) 그러다가 1820년 어느날 덴마크에서 전해진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전기 강의를 하던 물리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쥐고 있던 코일을 전지에 연결했다. 그런데 옆에 나침반 바늘이 움직였다.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다니! 전기는 자기와 동일한 힘인 것인가? 외르스테드는 곧 “모든 현상은 동일한 힘에 의해 생성된다”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그가 말한 ‘현상’은 열, 전기, 자기, 그리고 빛이었다.
패러데이는 파동과 편광에 흥미가 생겼다. 편광이 자석처럼 전류에 반응하는지 궁금했다. (...) 빛과 전기와 자기는 모두 빠르고 실체가 없으며 파동을 이룬다. 오랫동안 각각의 “가늠할 수 없는 유체”로 생각되어 온 그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패러데이는 확신했다. 프레넬의 파동설 또한 새로운 운동 원인을 암시했다. 뉴턴이 법칙을 수립한 이래로 힘이 전해지는 방식은 한두 가지로 여겨졌다. 물체를 움직이려면 테니스공이든 입자든 직접 접촉하거나 에테르를 통해서 먼 곳의 힘이 작용해야 한다. 파동설은 제3의 방식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장場, 철가루가 자석 가까이에서 동심원 모양으로 드러내는 ‘힘의 선’이다. (...)
1845년 패러데이는 “빛, 자기, 전기는 분명히 연관이 있다”는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거대한 자석을 이용해 빛이 회전하는 것을 발견한다. (...) 전류가 차단되면 렌즈는 테이블과 수직인 각도로 빛을 차단하지만, 전류가 흐를 때 빛은 렌즈를 투과한다. 편광 각도가 바뀐 것이다. 자석으로 각도를 변화시켰다. (...) 그는 “광선을 자기화하고 전기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빛이 자성을 띤다고? 정확한 말은 아니다. 자기장을 통과할 때 빛줄기는 물이나 유리를 통과할 때처럼 방향이 바뀌지는 않는다. 패러데이가 본 것은, 럭비공처럼 빙글빙글 나아가는 편광, 그 파동의 수직면이 자성에 의해 편광면 회전효과를 일으킨 것이었다. (...) 오늘날 ‘패러데이 효과’라 일컬어지는 것은 빛이 전자기에너지일 수 있다는 최초의 암시로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빛의 연구자들, 이를테면 모든 물리학자는 수학적 증명을 요구한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역선에 관하여>라는 빛의 전자기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전기와 자기가 꼬여 있는 빛의 수수께끼를 최초로 ‘확인’한 사람이 되었다. (...) 아인슈타인은 뒷날 “과학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함께 열렸다”며 찬사를 보냈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와 자기가 밀접하게 얽혀 자연이라는 직물을 이루고 있고, 그 둘은 하나의 장에서 패러데이의 ‘역선’을 따르며, 하나의 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물질의 전도성, 원자의 밀도, 그리고 몇 가지 다른 요인에 따라 다른 장에서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을 입증했다. 다시 말해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 시대가 다가올 길을 닦는 것이다.
패러데이의 엄청나게 큰 자석이 편광을 회전시켰다는 내용을 읽은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일 거라고 추론했다. (...) 빛과 전기는 역제곱 법칙에 따라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약해졌다. 둘 다 파동으로 진행하는데, 음파가 쓸 듯이 나아가는 종파가 아니라 옆으로 진동하며 나아가는 횡파이다. (...) 맥스웰은 전기, 자기, 빛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획기적인 변화를 제시했다. 셋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단일한 힘의 현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전기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거의 같으므로, 복사열을 비롯한 모든 복사를 포함하여 빛 자체가 전자기 법칙에 따라 전자기 장을 통과하는 파동 형태의 전자기적 교란이라고 결론지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빛은 자신만의 별난 법칙을 따르는 신비한 발산체가 아니라 전자기 스펙트럼이라는 연속체의 일부였던 것이다. (...) 1800년 윌리엄 허셜은 적외선을 발견하고 몇해 뒤 독일화학자는 자외선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제 맥스웰은 모든 빛이 하나의 스펙트럼, 다시 말해 전기와 자기가 얽혀 있는 것의 일부라고 말하고 있었다.
맥스웰의 빛, 한 마디로 모든 빛은 하나의 파동이 아니라 두 개의 파동이다. 한 파동은 광선의 전기적 요소를 띠고, 나머지 한 파동은 자기적 부분이다. 광선의 전기적 부분과 자기적 부분은 맥스웰이 “상호 포옹”이라 일컫는 형태를 이루고 나아간다. 한 파동은 수직으로 출렁이며 나아가고, 다른 파동은 앞의 파동과 90도 각도를 이룬 채 나아간다. 둘은 마치 롤러코스터와 그 그림자와 비슷하다. 그러면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밧줄 묘기이다. 묘기를 뽐내는 자연은 밧줄 하나를 위아래로 출렁이게 하면서 다른 밧줄은 수평면에서 뱀처럼 구불거리며 나아가게 한다. 두 파동의 파고 점들은 동조를 이루며 초당 299,338킬로미터의 속도로 나아간다. 파고 점 사이의 거리인 파장이 색채를 결정하는데, 빨간색은 파장이 길고 파란색과 보라색은 파장이 짧다. 그리고 파고, 다시 말해 진폭이 클수록 빛은 밝아진다.
토머스 에디슨
가정용 백열등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183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명가들은 빛을 내되 연소되지 않는 필라멘트를 찾아내려고 고심했다. (조지프 스완, 윌리엄 소여, 하이럼 백심)
에디슨은 컴컴한 방에서 연구에 골몰하는 고독한 천재가 아니어서, 자신이 “한패”라 일컫는 대서양 연안의 최고 엔지니어들을 뉴저지 주 멘로파크에 있는 자신의 실험실로 불러 모았다. (...) 에디슨은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고 상업적 안목이 탁월했으며, 뒷날 그가 천재의 본질로 내세우는 노력을 쏟아붓는 사람이었다. (...) 1879년 10월 22일 에디슨은 연구에 골몰하여 “한밤중에도 등불의 기름을 태우고” 있었다. (...) 그 저녁, 보조 연구원 찰스 배첼러는 “면사로 만든 곧은 탄소선들에 매우 흥미로운 실험들”을 했다고 밝혔다. (...) 탄화시킨 면사를 사용한 에디슨의 획기적인 전구는 윌리엄 소여, 조지프 스완, 하이럼 맥심의 디자인과 비슷했지만, 에디슨은 자신의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보여주었다.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
에디슨은 발전기가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으면 되는 저압 직류(DC)를 선호했다. (...) 그러나 명민한 세르비아 이민자 니콜라 테슬라는 고압 교류(AC)를 개발했는데, 전력원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모든 가정에 송전할 수 있었다. 에디슨은 AC의 3천 볼트가 무시무시하다는 걸 알았다. 사업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를 후원하자, 에디슨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만큼 분명하게, 웨스팅하우스는 어떤 규모로든 시스템을 내놓은 뒤 여섯 달 이내에 고객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그러나 새로운 발명품인 변압기가 고압 전력을 가정용으로 낮추었다. 더 많은 특허와 수백건의 소송 뒤에 AC는 표준 전류가 되었다.
전기 조명의 매력은 비용과 편리함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 전기는 태양 그 자체인 듯 천상의 것이었고, 그 빛이 내뿜는 매혹은 바로 오늘날 디지털 기기의 그것과 동일했다. “충분히 진보된 테크놀로지는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공상과학 소설가 아서 C. 클라크의 말은 유명하다. 빛의 마법에 보태진 것은 인간의 독창성이었다.
13장 C: 아인슈타인과 양자, 입자, 그리고 파동
20세기 초, 아주 오랫동안 변덕스럽고 알기 어려운 것이었던 빛은 우주의 닻이 되었다. 먼저 진공상태에서 빛의 속도는 일정해 보였다. 초속 약 30만 킬로미터로 다가왔다 가 버린다. (...) 이 놀라운 사실이 자리 잡자 새로운 문제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시간이 느려진다. 우주 자체가 휘어져 있다. 그리고 오랜 논쟁인 입자냐 파동이냐의 문제도 되살아났다. 빛이 어떤 식으로든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사라지지 않는 가능성은 오히려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에 관한 의심을 일으켰다. 단 하나, 변함없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남았는데 바로 빛의 속도였다. 방정식에서 빛의 속도는 단 하나의 소문자 ‘c'로 나타내는데, 라틴어 ’셀레리타스‘(celeritas)의 줄임말로 빠르다는 뜻이다. 20세기가 펼쳐지면서 이 상수는 T.S. 엘리엇의 시구처럼 “온 우주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우선 헤아릴 수 없는 빛의 속도가 측정되어야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빛이 속도를 지닌다고 생각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빛은 “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 빛의 속도를 측정했다. 밤중에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라고 헤론을 썼다.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그 순간 먼 별들을 지각하는 것은 빛이 “무한한 속도로 방출”됨을 입증하는 것이다. (...) 이슬람 과학자들은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고 생각했고, 케플러와 데카르트는 빛이 순식간의 속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서 연구하던 네덜란드 천문학자는 행성들의 규칙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마침내 빛의 시간을 쟀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초속 약 231,746킬로미터) 반세기 뒤, 영국의 천문학자 제임스 브래들리는 ‘광행차’, 다시 말해 지구의 태양 공전 속도에서 비롯되는 항성들의 위치 변화를 이용하여 빛의 정확한 속도에 다가갔다. (...) 그리고 1800년대 중반, 두 명의 프랑스 물리학자는 빛의 속도를 더 정확히 구했다. (이졸리트 피조 초속 약 316,197킬로미터, 레옹 푸코 초속 약 298,051킬로미터)
마이컬슨-몰리 실험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에테르로 가득하다고 했는데, 에테르는 그리스의 빛 또는 창공의 신을 가리킨다. 그 뒤로 ‘빛을 내는 에테르’는 우주의 구성 요소였다. 아무도 에테르를 본 적이 없지만 모두 에테르를 잘 알았다. 뉴턴은 그것을 ‘태양의 연료’, 공기와 비슷하지만 “더 희박하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더 탄성이 강한” 것으로 여겼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행성 사이의 공간은 텅 빈 곳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한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균일한 실제적 물질 또는 실체로 채워져 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에테르가 뒷날 실체가 없음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해와 달을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
오귀스탱 장 프레넬은 지구가 에테르를 지나면서 “에테르 끌림”이 일어난다고 시사한 바 있다. (...) 프레넬은 ‘에테르 끌림 계수’를 계산했으나 그것을 검출해 낼 수 없었다. 이폴리트 피조는 프레넬 이론을 검증했다. 물이 흐르는 관 속에 평행 광선을 쏜다면, 빛의 속도는 물과 같은 방향일 때 더 빠르고 물을 거스르는 방향일 때 느려져야 한다. 피조는 실험을 거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지구는 초속 30킬로미터로 우주를 운행하므로, ‘에테르 끌림’은 측정되는 광선의 방향에 따라 지구 속도만큼 빛을 감속 또는 가속시킬 것이다. 그러나 초속 30킬로미터란 광속의 1만분의 1이고, 그런 극소 시간을 측정하려면 전례 없는 엄밀성이 요구될 것이다.
앨버트 마이컬슨은 에테르 속도계를 고안했다. 그의 발명품이 업그레이드된 제품은 오늘날 ‘간섭계’라는 이름으로 모든 현대 광학 실험실에 비치되어 있다. (...)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885년 마이컬슨은 다시 실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에드워드 몰리와 함께였다.
1887년 7월 8일,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케이스응용과학학교의 지하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실패한 실험”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 두 사람은 에테르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과 거스르는 빛을 측정했는데, 속도에서 눈곱만큼의 변화도 검출하지 못한다. 마이컬슨은 “지구와 발광 에테르 사이에 상대운동이 존재한다면 매우 작은 게 분명하다. 프레넬의 광행차 설명을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작다”고 보고한다.
앨버트 마이컬슨의 1887년 실험은 ‘발광 에테르’ 존재의 오류를 입증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양자론
“내가 ‘c’의 속도로 광선을 쫓아간다면, 그 광선은 내게 제자리에서 공간적으로 진동하는 전자기장처럼 보일 것이다”라고 아인슈타인은 상상했다. (...) 자신이 “빛 매질”이라 일컫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빛은 틀림없이 언제나 모든 방향으로 동일한 속도로 진행할 것이라고 아인슈타인은 추론했다. (...) 넘어서야 할 난제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의 불변성에 있었다.
1902년, 독일 물리학자가 자외선이 금속판에 부딪히면 금속판에서 전자가 떨어져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빛이 전자기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빛이 강할수록 운동에너지가 더 높은 전자를 방출해야 하지만, 빛을 아무리 밝게 해도 모든 자유전자는 동일한 에너지를 지녔던 것이다. 에너지를 올리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색광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파란색 짧은 파장은 전자를 방출시키지만 빨간 긴 파장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빛이 파동이라면 어떻게 입자를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인가?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1905년)는 뉴턴의 ‘프리즘의 해’만큼 빛에 관한 이해에 중요한 해로 몇 가지가 그 점화를 도왔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의 저작을 읽었다. “절대공간과 절대운동에 관해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들은 순전히 생각의 산물이고, 순전히 정신적 구조물이다.” 또한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이론을 익혔다. 푸앵카레는 시간의 상대성을 주창했으나, 에테르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
아인슈타인의 혁명은 물리학을 괴롭히던 문제 가운데 하나를 굴복시켰다. 물질은 어떻게 열을 방출하는가? 불 속에 쇳덩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가열되면서 쇠는 불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일부를 방출한다. 그러한 열을 흑체복사라 말한다. 쇳덩이가 더 뜨거워지면서 흑체복사가 가시화될 때 전자기 파장은 적외선에서 스펙트럼의 붉은 부분으로 바뀐다. 쇳덩이가 계속 가열되면 색은 노란색으로 그다음 파란색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 자외선 부분으로 넘어간다. 백열 상태일 때 쇠는 스펙트럼의 모든 가시적인 색채가 혼합되어 보이는 것이다. 식어가는 쇠는 에너지를 잃고 그에 따라 색이 변해 간다. 하지만 식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쇠가 아니라 거울로 만든 상자가 있고 상자에 작은 구멍 하나만 뚫렸다고 상상해 보자. 열을 가두어 바깥으로는 거의 나오지 못한다. 상자가 가열됨에 따라, 에너지가 축적되면서 복사의 파장은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그리고 자외선으로 변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흡수한 상자는 터져 버리지 않겠는가? 이는 물리학자들이 오랜 세월 다듬어 온 이론에 맞지 않기 때문에 물리학자를 괴롭히는 역설로서 “자외선 파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해법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된다. 모든 것을
‘자외선 파탄’을 골똘히 고민한 수많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막스 플랑크였다. (...) 그는 마침내 필사적으로 색다른 해답을 도출해 냈다.
어쩌면 에너지 방출은 파동이 아니라 다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발로 이루어지는 에너지 방출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연속적인 곡선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 다발이 방출될 때마다 한 계딴씩 상승하는 모양이 된다. 플랑크는 복사를 도식화하고 계산한 결과 계단식 상승을 도출했으며 각 도약이 일정한 비율로 일어나는 걸 확인했는데, 이는 오늘날 ‘플랑크 상수’로 불린다.
플랑크는 에너지 다발을 양자(quantum, 복수형은 quanta)라 일컬었는데, ‘얼마나 많은가?’를 뜻하는 라틴어 ‘quantus’에서 따왔다. (...)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플랑크의 양자를 무시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껏은 마치 발밑의 땅이 뽑혀 나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빛이 금속판에서 전자를 튀어나오게 하는 ‘광전효과’를 고려하여, 아인슈타인의 ‘매우 혁명적인’ 논문은 양자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전제는, 한 지점에서 광선을 쏠 때, 에너지는 확장되는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국소적으로 위치하고 완전한 단위로서만 생성, 흡수될 수 있는 유한한 수의 에너지 양자로 구성된다는 것이다”라고 아인슈타인은 썼다. 빛이 양자라면, 다시 말해 아인슈타인이 쓴 대로 “리히트크반튼(광양자)”이라면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 그는 플랑크 상수를 사용하여 에너지 흡수와 복사를 계산했다. 왜 색깔이 다른 빛은 운동 에너지가 다른 전자를 방출하는가에 관해서, 아인슈타인은 각 색상의 에너지 양에 주목했다. “가장 단순한 개념은 하나의 광양자가 그 에너지 전체를 하나의 전자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빛은 그 방향이나 광원과 무관하게 어떻게 동일한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가? (...) 엄청나게 빠른 제트기에서 광선을 쏜다, 앞으로 뒤로, 양쪽으로 쏠 때, 빛은 ‘언제나’ 동일한 속도로 나아간다. 바로 그 초속 약 299,792킬로미터로. 빛은 우주의 다른 어떤 것과 비슷하게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1905년 5월 어느 늦은 아침, (...) 아인슈타인은 알았다. 모든 관찰자에게 보이듯 모든 은하계에서, 모든 실험실에서 빛이 동일한 속도로 나아간다면 시간은 분명히 가변적이다. (...) 광속의 일정함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은 알고 있었다. (...)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면, 빛은 어떻게 서로 다른 거리들을 ‘정확히 동일한 시간에’ 지나갈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이 “범인”이라고 아인슈타인은 지목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면 시간은 그럴 수 없다. 모순을 설명하는 유일한 길은, 고정된 관찰자에게 인식되는 시간은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더 느리게 간다고 믿는 것, 아니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로렌츠 변환 방정식을 사용하여 시간이 제트기 같은 속도에서 몹시 미미하게 느려지지만 물체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거의 멈춘다는 것을 계산했다. (...) 70년 뒤, 원자시계는 시간 지체를 검증할 만큼 충분히 정밀해졌다. 시계 두 개는 지구를 돈 뒤 고정되어 있는 시계와 비교를 거쳤다. 이동했던 시계가 돌아왔을 때는 고정되었던 시계보다 1초도 안 되는 시간만큼 느려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계산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오늘날 입자가속기가 원자에서 아원자 뮤온을 검출할 때, 뮤온이 존재하는 시간은 찰나에 가깝다. 하지만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될 때, 그 시계는 느려지고 입자들이 존재하는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진다. 시간이 범인이고, 빛은 공범인 것이다.
닐스 보어는 1912년 여름과 가을 내내 보어는 원자에 적용할 수 있는 모형을 탐구했다. 스승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성당 안의 파리처럼” 작은 핵 주위를 단일 궤도에서 공전하는 전자들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공전하는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핵과 충돌하지 않겠는가? (...)일곱 달 뒤 보어는 그 해답이 양자와 관련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각 핵 주위를 도는 하나의 궤도 대신 보어는 많은 궤도를 제시했는데, 한마디로 원자 크기의 태양계인 셈이다. 안정적일 때 전자는 안쪽 “정상 상태”의 궤도에서 핵 주위를 돌지만, 빛이나 열이나 전기에너지를 받은 전자는 그 에너지 다발을 흡수한다. 활성화된 전자는 안쪽에서 바깥쪽 궤도로 도약한다. 더 이상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전자는 안쪽 궤도로 추락하며 흡수한 에너지를 하나의 광양자로 배출한다. 보어의 원자는 연소되는 화학물질이 나타내는 미지의 색색 줄무늬를 설명해 주었다. 이 줄무늬는 지문처럼 고유의 패턴이 있어, 이 덕분에 천문학자들이 항성의 구성 요소를 알 수 있다.
사고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상상한다. 육면체는 성층권을 향해 점점 속도를 높인다. 그 운동은 그를 계속 바닥 쪽으로 누르며 더욱 빨라진다. 하지만 창문이 없다면 운동을 감지할 수 없는 그는 자신이 느끼는 ‘무게’감이 중력 때문인지 가속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로써 수많은 가능성이 생겨나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빛의 휘어짐이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반대편 벽에 닿는 위치는 들어온 지점보다 조금 낮다. 가속이 곧은 광선을 휘게 하는 듯하다. 그리고 가속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에게는 중력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중력 또한 빛을 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의 탄생).
중력은 뉴턴이 인식했던 그런 힘이 아니라고 아인슈타인은 주장했다. 대신, 담요에 얹은 볼링공처럼, 물질은 주변의 공간을 휘게 만든다. 항성, 위성, 그리고 행성은 주변의 공간을 구부러뜨리고, 가까운 물체를 끌어당기며, 빛을 휘게 한다는 것이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를 가로지르는 광선처럼 태양을 지나는 별빛은 휘어질 것이다. 그런 휘어짐을 관찰할 수 있는 때가 일식이다. (...) 아인슈타인의 계산에 따르면 태양의 중력은 별빛을 1.7초 각도만큼 휘게 한다.
1922년 말, 세인트루이스 외곽의 실험실에서 아서 콤프턴은 흑연에 엑스선을 쬐었다. 예상했던 재로 엑스선은 모든 각도로 산란되었다. 하지만 산란된 모든 광선은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잃었다. 산란 각도가 심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잃었다. ‘광전효과’가 그랬듯이 콤프턴 산란은 빛이 입자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모든 광학 실험실에서 토머스 영의 간섭무늬는 여전히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었다.
루이 드브로이는 1924년에 빛이 “물질파”로 구성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입자는 파동을 타고 예측 가능한 곡선을 따라 추진된다는 것이다. 입자‘이자’ 파동이다. (...) 드브로이는 파동이 양자를 어떻게 추진시키는지 계산했다. (...) 한편 불확정성을 지지하는 보어는 빛이 실험에 따라서 입자 ‘또는’ 파동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뉴욕 벨연구소의 과학자들은 결정체에 전자빔을 관통시켰다. 그 결과 빛은 파동처럼 회절하지만 입자처럼 산란했기에 ‘이중성’은 표어처럼 자리 잡았다.
1927년 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은 보어와 대립했다. (...) 닐스 보어의 최신 이론인 ‘상보성 이론’은 일부는 과학, 일부는 인식론이었다. 우리가 자연에 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던지는 질문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어는 주장했다. 빛에 관한 절대적인 진리는 없을지 모른다. 빛이 어떤 실험에서는 입자처럼 활동하고 또 어떤 실험에서는 파동처럼 활동한다면, 그런 변덕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의 작동 방식을 알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라고 보어는 말했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이신론자인 아인슈타인은 목청을 높였다. 무신론자인 보어가 답했다. “우리는 신에게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운영하라고 명령할 수 없다.”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숨을 거둘 때까지 이어진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이중성과 불확정성, 양자로 분해된 빛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양자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년에 막스 플랑크는 말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양자론은 확산될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 양자론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여전히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빛은 진실로 무엇인가?” “빛은 파동인가 아니면 광자의 빗발침인가? ...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사실에 대해 두 가지 모순되는 그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두 이론 어느 쪽도 혼자서는 빛이라는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둘을 합치면 설명이 된다.”
마법의 지팡이처럼 ‘c’를 휘두르며, 아인슈타인은 뉴턴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물리학을 양자화하고, 질량, 에너지, 공간, 시간 같은 것의 항상성을 무너뜨렸다. 이윽고 더 많은 것들이 밝혀진다. 광자는 어떻게 양전자와 음전자로 전환될 수 있는가. 쌍으로 방출된 광자의 ‘자전’은 서로 거리를 두고도 어떻게 일치하며, 한 광자는 자전의 변화를 다른 광자에게 어떻게 알리는가. 이를 일컬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어나는 신묘한 모습”이라고 아인슈타인은 표현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관찰자가 전자의 위치를 더 정확히 판단할수록, 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은 더욱 커진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누구도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전자와 광자, 그리고 다른 모든 입자들에 관해, 가능성이 확정성을 대체하고, 확정성은 영원히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14장 꿈에 성큼 다가서다: 레이저와 경이로운 일상 용품
한스 베테
1938년 미국물리학회의 전문 저널 <피지컬 리뷰>에서 한스 베테는 ‘태양은 수소가 융합되어 헬륨을 만들고, 그 부산물로 빛을 방출하는 원자로’라고 썼다. (...) 뒷날 맨해튼 프로젝트(1942-1945년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 정부의 연구 계획)와 핵무기 제어 연구로 유명해진 한스 베테의 경력이 시작된 건 태양을 해독하면서부터였다. 1938년 초여름, 조지워싱턴대학의 물리학자 찰스 크리치필드와 논의한 끝에, 베테는 우주의 빛의 원인을 찾아냈다.
오븐을 절대온도 2천만 도로 예열한다. 수소 핵 두 개가 필요한데, 각각 하나의 광자로 구성되어 있다. 항성 내부에서나 발견되는 압력을 가한다. 온도와 압력으로써 광자의 상호 척력을 극복하고 광자들이 충돌하도록 한다. 광자들을 중양자, 다시 말해 중수소로 융합시키며, 전기적으로 중성의 아원자 입자인 중성미자, 전자, 그리고 양자에 기반한 반입자인 양전자를 방출시키도록 한다. 곧이어 (...) 전자와 양전자가 충돌하여 상대를 붕괴시키며 하나의 광자, 한마디로 빛을 내뿜는다. 그러나 광자는 시작일 뿐이다. 반응을 지속하기 위해서 탄소를 보탠다. 탄소의 촉매 역할로 헬륨이 형성된다. 융합반응이 계속 일어나는 동안, 양성자, 양전자, 전자가 붕괴하며 더 많은 광자를 방출하고 더 복잡한 핵으로 융합된다. 태양의 중심에서 방출되는 광자가 코앞에서 생겨난다.
태양은 초당 400만 톤의 질량을 순수 에너지로 바꾼다. 그 고정에서 만들어진 광자는 백만 년까지도 용광로 속을 떠도는데, 과학자들은 이 여행을 “무작위 행보”라 일컫는다. 일단 태양 표면에 도달하면 광자는 지구까지 8분 남짓 만에 도착한다.
메이저: 레이저의 조상
레이저를 탄생시킨 아이디어는 물론 아인슈타인한테서 비롯되었다. 1916년, 아인슈타인은 닐스 보어의 태양계 같은 원자 모델에 관해 숙고했다. 보어는 광양자가 자발적으로 방출되는 때는 들뜬 전자가 에너지를 잃고 안쪽의 정상 궤도로 떨어질 때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충분한 자극이 가해지면, 전자는 광자를 방출하고 그 광자는 다른 전자를 들뜨게 하여 더 많은 광자를 방출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보어의 ‘자발방출’과 더불어, 아인슈타인은 빛의 ‘유도방출’을 예측했다. 원자에 충분한 전자기에너지를 가하면 매우 밝은 광선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비교하자면 햇빛이 더 흐려 보일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국방부는 마이크로파와 유도방출에 관한 연구를 후원했다. 물리학자 찰스 타운스와 아서 숄로는 1954년에 최초의 메이저를 만들었다. ‘유도방출에 의한 마이크로파 증폭’의 줄임말이다. 물리학자들은 광파 또한 증폭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목표는 ‘반전분포’일 것이다. 정상 상태보다 들뜬 상태가 된 전자가 훨씬 더 많아져서 서로를 더 높은 에너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광파는 마이크로파보다 1만 배는 조밀하므로 시동을 걸려면 1만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고든 굴드
빛은 공상과학의 단골 ‘살상 광선무기’였다. (...) 리얼리티가 공상과학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건 1958년, 위대한 발명가 타운스와 숄로가 <적외선과 광학 메이저>라는 제목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을 때였다. (...) 1957년 가을 (...) 고든 굴드는 튜브가 불투명하고 안쪽에 거울을 붙이면, 갇힌 광자는 광속으로 ‘유도방출’을 유발할 것이고 그 빛은 “물체를 1억 도까지 가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굴드는 자신의 생각을 ‘레이저: 유도방출에 의한 광 증폭 가능성에 관한 대략적인 계산’이라고 표제를 붙였다. 레이저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것이다.
시어도어 메이먼
1960년 5월, 시어도어 메이먼이 최초의 레이저를 만드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메이먼의 기기는 루비와 안에 거울을 댄 튜브, 그리고 섬광 전구를 사용했다. (...)산란되는 햇빛과는 달리, 레이저 빛은 완벽하게 정렬되고, 그 단색 파동은 모두 동일하며, 1백만 분의 27인치 정도로 가느다란 필라멘트에 그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었다. (...) 1970년 즈음, 레이저는 집적회로를 용접하고 ,북베트남에 유도탄을 투하하고, 망막 분리를 치료하고, 달까지의 거리를 센티미터 단위까지 측정하고 있었다.
리처드 파인먼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빛이 물질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다이어그램으로 나타냈다. 파인먼 다이어그램은 오늘날에도 양자전기역학의 핵심이다.
레이저가 모든 광학 연구실에 설치되자,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혼합한 파인먼의 QED, 다시 말해 “양자전기역학, 빛과 물질의 생소한 이론”은 빛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설명했다. 물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경우는 빼고 말이다. 토머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양자가 준 혼란을 생각해 보자.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하도록 광선을 쏘면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하지만 광자 하나씩 슬릿을 통과하도록 해도 여전히 간섭무늬가 나타나, 마치 각 광자가 완전한 파동인 듯하다. 광자는 어떤 슬릿을 선택하겠다고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가? 파인먼은 의문을 던졌다. 하나의 광자는 왜 다른 광자에 간섭하는 것인가? 더더욱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때는 각 광자의 경로를 탐색하기 위해 각 슬릿에 탐지기를 설치하는 경우이다. 그러면 간섭무늬는 완전히 사라지고 화면에는 광자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이 남는다. 빛은 ‘감시당하는’ 게 불쾌한 것인가? 파인먼은 답한다. “되도록이면 ‘어떻게 그럴 수있지?’라고 끊임없이 자문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양자광학과 레이저 냉각 기술..
빛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는 한계가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에 빛은 신이거나 신의 사자였다. (...) 그러나 양자의 세기인 20세기 말, 그 모든 찬미와 그 모든 탐구는 너무도 순진하고 너무도 오래전의 것인 듯 보였다. 해와 달은 여전히 가던 길을 갔고 별은 여전히 반짝였으나, 빛은 인간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
빛은 무엇인가? 빛에 매혹된 세월이 약 4천 년이나 흘렀지만 그 답은 다양하다.
호기심과 경외감이 솟아나는 4천 년의 세월이 경과한 오늘, 빛은 처음 모습 그대로 여전히 우주의 마법사이다.
[에필로그]
빛은 영원하므로 빛에는 끝이 없다. 광자는 다른 아원자 입자들과는 달리 질량이 없기에 부패하지 않는다. 신이 만들었든 무심한 우주가 만들었든, 천지창조 최초의 광자들은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억겁의 세월에 걸쳐 식은 최초의 광자들은 빅뱅의 잔재인 우주배경복사의 일부이다.) 빛에 대한 숭배 역시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 (...) 빛은 매력을 잃지 않는다. 입자이자 파동일 뿐만 아니라 신비와 기적을 행하는 주인공이라는 이 이중성 덕분에 빛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매혹하는 빛, 틈입하는 빛, 놀라운 빛, 영원불변의 빛의 네 현신을 드러낸다.
매혹하는 빛
세계의 빛의 축제: 스톤헨지 / 아일랜드 뉴그레인지 / 미얀마의 타자웅다잉 / 힌두교 빛의 축제 디왈리/ 유대인이 기념하는 하누카 등 ... 미래의 빛은 LDE, 발광다이오드이다. 1960년대에 발명된 LED는 닐스보어의 원자 모델로부터 생성된 빛이다. 들뜬 광자가 전구의 전극 사이를 도약하는 것이다. (...)고에너지파인 파란색 LED를 개발하기까지는 수십년이 더 걸렸다. 더 싸고 더 밝으며 흔하디흔한 LED는 지난날 해넘이와 함께 두려움에 떨었던 세계를, 어둠을 쉽게 정복하는 세계로 바꾸어놓고 있다.
틈입하는 빛
한때 도시의 골칫거리였던 빛공해는 이제 가장 외딴 지역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하늘의 어둠을 바랜다. (...) “인류는 스스로 야광 안개에 덮여 가고 있다.” 이 시대 바로 여기서, 셰익스피어가 “밤의 양초”라 일컬었던 별빛은 우리 눈앞에서 어슴푸레해지고 있다. (...) LED가 일반 가로등을 대체하면서 전기는 절약하지만 환한 빛은 증가한다.(...) 백색 LED가 방출하는 고에너지의 파란색 파장은 걸러내기가 더 어렵다. 또한 파란 빛은 다른 주파수보다 훨씬 넓게 산란한다. 청색광은 “끔찍한 스펙트럼”이라고 천문학자 리처드 웨인스코트는 말했다. “청색광은 정말 억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밤 풍경은 사라질 것이다.”
놀라운 빛
보스아인슈타인 응축(BCE): 빛이 광섬유 케이블 속에서 이동하는 거리를 늘릴 수 있다.
광유전학: 빛으로 우울증을 치료한다. 빛 펄스로 편도체를 자극하여 마음에 안정을 가져왔다(2011년 스탠퍼드대 실험). 관입식 전기탐침에 의해 자극되는 다른 기능들도 빛으로 활성화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 20년간 신경과학에서 일어난 가장 혁명적인 일”이다.
레이저 핵융합: 인류에게 무한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가 생길 수 있다.
메타물질: 광파, 즉 빛이 사물을 감싸면서 휘게 되면 그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광컴퓨터: 빛으로 작동되는 회로를 갖춘 컴퓨터는 전기보다 발열이 적고 더 빠르며 훨씬 효율적이다.
영원 불변의 빛
최초의 빛은 빅뱅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신의 눈동자에서부터 빛난 것도, 하이든의 <천지창조>에서처럼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것도 아니다. 여전히 새로이 다듬어지고 있는 우주 이론에 따르면, 우주 탄생 순간에 전자와 쿼크, 중성자와 양성자 같은 기본 입자들은 자유전자에 의해 산란되는 초고에너지의 광자들이 모인 엄청나게 뜨러운 매트릭스 안에 죽처럼 뒤엉켜 있었다. 이는 매우 밝은 플라스마 상태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불투명한 빛의 커튼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스마가 냉각되면서 전자와 광자가 최초의 원자를 형성할 수 있었고, 광자는 이제 투명해진 우주를 막힘 없이 자유롭게 떠돌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우주과학자들이 “암흑의 시대”라 일컫는 4억년이 지나서야 별이 형성되고 우주에 빛이 흐르게 되었다.
2011년 1월 허블 우주망원경은 132억 광년이나 떨어진 은하계를 찾아냈다. (...) 빅뱅은 137억 년 전에 일어났다고 여겨지므로 은하계 ‘UDFj-39546284’의 빛은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은하계의 빛이다. 그러나 애리조나주립대학 김대욱 교수는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꿈을 꾼다. 애리조나주립대학의 스튜어드 천문대 미러랩은 지름이 거의 8.5미터에 이르는 역대 최대의 현미경 반사경을 제작하고 있다. 덕분에 칠레에 위치한 자이언트 마젤란망원경은 우주 최초의 빛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빛은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빛은 인간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면서도 만질 수는 없는 유일한 것이죠. 양자역학의 영역에서 말고는 놀랍게도 부피나 질량을 가지지 않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빛은 가장 빠른 것이고, 물리적 공간을 전혀 차지하지 않으며, 거의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늘 마술 같았죠.”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김교수는 과학과 창세기를 둘 다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갈등이 없다. “성경은 물리학 교과서가 아니니까요.”하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빛이 있으라”의 기적을 믿는다. “최초의 망원경이 나온 뒤로 400년이 지나서 드디어 우리는 반대쪽 끝에 다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매력적인 부분이죠. 최초의 빛은 매우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우리 과거를 보고 있습니다. 빛은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말해 주고, 만물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꿀 것입니다.”
나는 애리조나주립대학을 나서며 우리가 빛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확신했다. 증기와 석탄의 시대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여전히 석유로 전력을 생산하는 시대에, 빛은 우리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망없어 보이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사건)로 떠오르고 있다. 빛은 다른 어떤 것도 갈 수 없는 곳을 가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빠르게 도달하며, 그 이미지를 보내 준다. 빛에 우주 속도 한계 말고 다른 한계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아직 검증하지 못했다. “빛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 갈릴레오가 꿈꾸었고 아인슈타인이 끊임없이 찾아내려 했던 그 답을 우리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 노력 자체가 영원히 이어지며 근원을 향해 되돌아갈 것이다.
스톤헨지와 피라미드보다 오래된 뉴그레인지는 기원전 3000년대에 보인강 유역에 세워진 여러 널길무덤군 가운데 하나이다. 원시의 널길은 해에 맞추어 조성되어 있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다우스에 있는 묘실은 동짓날 일몰을 향한다. 근처인 노스와 라크루의 널길은 동서 방향으로 나 있어 3월 춘분과 9월 추분의 일출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곳 뉴그레인지에서, 15미터 길이의 널길은 12월 21일의 일출에 완벽하게 맞추어져 있다. 해마다 12월 21일이면 아일랜드 뉴그레인지에 수백 명이 모여들어 그해 가장 짧은 낮을 비출 해가 뜨는 걸 본다. 뉴그레인지의 널길무덤에 동지 일출의 빛이 가득해진다. (...) 빛은 다시 축복을 내린다. (...) 하지만 우리는 더 바라볼 수 없다. 해가 너무 밝기 때문이다. 둥글고 이글거리며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동그란 공이 지평선 위로 솟는다. 눈을 감지만 우리는 여전히 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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