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설은 북애자 개인의 철학적 사유를 풀어놓은 글이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삶에 관한 상당히 깊고 다양한 철학적 질문들과 이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기술한 글인데, 매우 깊이 있는 질문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감히 망령되게 단언하지는 못하나,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이 세상을 주재하며, 진실을 북돋우고 선을 기르며 흉악함을 소멸시키고자 하면서 만물을 통솔하고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일 것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리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며 괴로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힘써 일하면서 함부로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곧 착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품성을 보존하고 뜻을 기르며 착한 일을 행함에 태만하지 않아서 하늘을 우르러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기에 비록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다면 역시 족할 것이다. 내가 그러한 까닭에 우리 성인들의 가르침이 없어지고 드물어진 것은 한탄스럽지만, 우리 진역(震域)의 장수와 복록은 능히 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漫說(만설)
天其運乎, 地其處乎, 日月其爭於所乎? 孰主張是, 孰維綱是? 孰居天地之內, 恒推以行是? 意者, 其有機氣之不得已耶? 其運轉而不能自止耶?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땅이 멎어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 누가 주재하여 펼치고, 누가 이를 붙잡아 다스리며, 어느 누가 하늘과 땅에 머물며 항상 이를 밀어서 움직이게 하는가? 생각건대 그 곳에는 바탕이 되는 기운이 있어 마지못해 그리되는 것인가, 그 움직이고 구르는 것은 스스로 멈추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觀! 夫大界列宿, 迢迢燦爛明朗, 其光自何, 其大幾何? 觀乎千仞之岡而行人如豆, 望乎百里之海(而)歸帆似葉, 仰乎九萬里之遙而星辰如燭, 其大幾何, 其光何幾? 况! 地天之隔, 非但九萬者里耶!
이 넓은 세계에 늘어서 있는 별자리를 바라보노라면 멀디멀고도 찬란하게 밝으니, 그 빛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그 크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천 길 높은 산마루에서 살펴보노라면 지나다니는 사람은 마치 콩알만하고, 백리의 바닷길을 바라보노라면 돌아오는 돛단배가 마치 잎사귀 같은데, 9만리의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늘어선 별들은 마치 촛불과도 같으니, 그 크기는 얼마만한 것이며, 그 밝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항차 땅과 하늘과의 간격이 단지 9만리 만 될 것인가?
人行于市而肩尻摩, 車轉于通衢則其轂搏. 星辰麗于穹蒼, 則昭昭耿耿, 齊齊整整, 井然有序, 罔或有侵. 孰引是, 孰主張是? 日遠於星, 月近於星耶? 抑! 亦星居乎最遠耶? 日月之大, 較於列宿, 何如? 洪爐之火, 隔丈而燎之, 則不過微溫; 滿車之氷, 距尋而當之, 則只感微凉. 日月之氣, 來自九萬里而凉熱逼人, 其熱幾何, 其寒凡幾?
사람들이 저자거리를 지나다니자면 어깨와 꽁무니가 맞닿이게 되고, 수레가 번화한 네거리를 지나가노라면 곧 그 바퀴가 부딪치게 되는데, 늘어선 별들은 높고 푸른 하늘에서 빛을 발하면서 밝디밝게 반짝거리고 가지런히 질서가 있어 행여나 침범하는 일도 없으니, 누가 이를 이끄는 것이며 누가 이를 주재하여 펼치는 것인가? 해는 별보다 멀고 달은 별보다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별이 가장 멀리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의 크기는 별들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큰 화로의 불도 열 자 떨어져 불길을 쬐면 단지 따뜻할 뿐이요, 수레에 가득 실은 얼음도 얼마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으면 단지 서늘할 뿐인데, 해와 달의 기운은 9만리의 먼 곳으로부터 오면서도 춥고 더움이 사람을 다그치니, 그 열기는 얼마만한 것이며, 그 냉기는 또한 얼마만한 것인가?
且夫! 山岳之莊雄, 河海之汪洋, 萬象森列, 兆物備載, 岳頂一(卷)[拳]之石, 谷底一莖之草, 自得其所, 互誇厥美; 糞堆蠢蠕之蟲, 長渚飄泊之藻, 各安其所, 互弄厥質. 孰撑是而不崩, 孰護是而不決? 孰守是, 孰掩庇是?
또한 산악의 웅장함과 강과 바다의 광대함 속에는 만 가지의 모습들이 늘어서 있고 억 가지의 사물들이 갖추어 실려 있으며, 산마루의 한줌 돌과 골짜기의 한 뿌리 풀도 스스로 자리하는 곳을 얻어 그 아름다움을 서로 뽐내고, 거름더미에서 꿈틀거리는 벌레와 늘 물가를 떠다니는 풀들도 제각기 자기 자리에 깃들여 그 모양을 서로 희롱하고 있으니, 누가 이를 떠받쳐서 무너지지 않게 하고 있으며, 누가 이를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고 있는가? 누가 이를 지키고 있으며, 누가 이를 감싸안아 돌보고 있는 것인가?
意者, 宇宙之內‧蒼茫之外, 別有眞神之主宰歟? 東人則曰桓因主神, 漢土之人則曰上帝, 西域之人則曰佛陁, 大秦之人則曰天主, 皆以主宇宙‧統萬象爲言. 其造物者之爲性也, 隨民而各異耶? 同軆而異用耶? 抑! 同一而異觀耶? 同一之元首而, 我曰(王)[壬]儉, 漢曰帝王, 倭曰命或尊. 諸民之名造翁也, 亦若是而已耶?
생각건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참된 신이 있어 이를 주재하고 있는 것인가? 동방의 사람들은 곧 ‘환인주신(桓因主神)’이라 하고, 한나라 땅의 사람들은 ‘상제(上帝)’라 하며, 서역 사람들은 ‘불타(佛陀)’라 하고, 대진 사람들은 ‘천주(天主)’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바로 우주를 주재하고 만물을 통치함을 말로서 드러낸 것이다. 그 조물주의 성품은 백성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것인가, 바탕은 같으면서 드러남만이 다른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온전히 같으나 달리 볼뿐인가? 같은 우두머리를 두고 우리는 ‘임금’이라 하고, 한나라는 ‘제왕’이라 하고, 왜는 ‘명’ 혹은 ‘존’이라 하니, 모든 민족이 조물주를 이름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을 따름인가?
飛螢有光, 杇木放氣, 柹梨之木, 能接枝而致盛, 鳧鷄之屬, 能抱卵而孶育. 是, 軆質之外, 別有精力耶? 物物之精力, 能相交而致生耶? 宇宙之內‧蒼茫之外, 別有精靈, 貫流周包, 推運其體質耶? 漢人之說, 盤古.三皇之開闢創始者, 實耶? 東人之言, 三神之肇判開創者, 眞耶? 余不敢校其善否, 宇宙之內‧蒼茫之外, 別有一大精靈, 維綱是, 主張是, 能推運而經營之, 則信矣.
날아다니는 반딧불에도 빛이 있고, 썩은 나무에서도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감나무 배나무는 가지에 접을 붙이면 능히 과실이 무성해 지고, 오리나 닭 등은 알을 품어 능히 새끼를 낳아 기른다. 이것은 몸의 바탕 외에 따로 응결된 힘이 있어서 그러한가? 그러한 사물과 사물들의 응결된 힘이 서로 교접하여 능히 생명을 낳게 되는 것인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정령(精靈)이 있어서 일관되게 흐르고 두루 감싸안으며 그 몸의 바탕을 밀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겠는가? 한나라 사람의 말에는 반고(盤古)와 삼황(三皇)이 세상을 처음으로 연 창시자라 하는데, 이것이 진실인가? 동방 사람의 말에는 삼신(三神)이 세상을 처음으로 가른 창조자라 하는 데, 이것이 진실인가? 내가 감히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한 큰 정령(精靈)이 있어서, 이 세상을 잡아 유지하고 이 세상을 주재하여 펼치며 능히 밀어 움직여서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리다.
人生則軆溫而動, 靈能慧明; 人[事](死)則(驅)[軀]殼厥(今)[冷], 骨肉梗固, 腐爛而散滅, 不數年而膚肉不留, 不百年而骨骸莫存. 天地之氣, 聚而爲物‧爲質, 散則復爲空‧爲氣歟? 靈性發於氣質, [氣質]散亡則靈性亦隨而滅歟? 抑! 天地靈秀之性, 鍾而爲靈, 貞明之氣, 聚而爲體, 軆沒而靈自不滅耶? 靈旣不(沒)[滅]則返朝于天耶, 悠悠然, 縱遊乎六合耶, 抑! 如佛氏之說, 時墮輪回之苦, 重疊而爲人耶?
사람이 살아 있으면 곧 몸은 따뜻하며 움직이게 되고 영혼은 능히 총명하고 밝지만, 사람이 죽으면 곧 몸덩이는 싸늘해져 뼈는 굳어지고 육체는 썩어 문드러져 흩어 없어지게 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피부나 육체는 남아 있지 않고, 백년이 못 되어서 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이면 사물의 바탕이 되고, 흩어지면 다시금 공허로운 기운이 되는 것인가? 영혼의 본질은 기운이 모습을 갖춘 다음에 그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그 기운의 모습이 흩어져 없어지면 영혼의 본질 또한 그에 따라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하늘과 땅의 신령스럽고도 빼어난 본질이 모여 영혼이 되고, 곧고도 밝은 기운이 뭉쳐 몸이 되는 것이니, 몸은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게 영혼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곧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인가, 유유히 천지 사방을 떠돈다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부처의 말처럼 운명에 따라 윤회의 괴로움에 떨어져 거듭되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인가?
觀! 夫蟲蠶卵者, 能知其爲母蛾所産耶? 卵化爲虫, 蠕蠕然索餌而走動, 能知其[從爲](爲從)卵而出者耶? 虫旣成長, 造繭脫毛而爲蛹, 暗眠於其中, 使人觀之, 蘧蘧然樂矣. 雖然, 渠能知其方夢而覺夏虫之爲蛹耶? 蛹旣腄滿, 則脫殼爲蛾, 穿繭而出, 翩翩然飛(飛)舞於林樾, 渠能知其自蛹而變化者耶? 使人高脫乎其外, 歷觀變化之迹, 則其序瞭然, 曾無毫末之疑. 使蛾自量, 則是個未知從來底一生涯也, 寧知其四變之序耶? 使造翁超脫乎塵外, 達觀乎人生變化之迹, 則是亦若是而已耶?
살펴보건대, 무릇 한낱 벌레인 누에의 알이 어미인 나비가 낳음으로 해서 자신이 생겨난 것임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알이 부화하여 벌레가 되어 꿈틀거리며 먹이를 찾으러 쫓아다니면서 그 자신이 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벌레가 자라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그 속에서 깊이 잠드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면서도 즐거워하는데, 그 자신이 곧 잠을 잘 것이라는 것을 어찌 능히 알 것이며, 여름날의 벌레가 그 자신이 곧 고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고치가 잠에서 깨어나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어 고치를 뚫고 나와 숲속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그 자신이 고치에서 변화하였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은 멀찌감치 벗어나 그 밖에 있으면서 변화하는 자취를 낱낱이 보게 되니 그 순서가 분명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다. 나비는 스스로를 헤아린다 하더라도 한 생애를 다하도록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도 알지를 못하니, 네번이나 변하는 그 순서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조물주는 세상의 바깥에 벗어나 있으면서 사람의 삶이 변화하는 자취를 멀리서 두루 바라보면 그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 아니겠는가?
范縝有言曰: 「形者神之質, 神者形之用也. 神之於形, 猶利之於刀. 未聞, 刀沒而利尙存. 豈容形亡而神在哉!」 是說眞耶? 儒曰「魂升而魄降」, 佛曰「靈魂不滅」, 而涅槃‧地獄‧輪回‧解脫之說, 最繁. 乃檀儉則曰: 「功完而朝天, [歸神鄕.」 又曰: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乃朝天.」] 佛說可耶, 儒說不踈耶, [桓](檀)儉之訓眞耶? 抑! 范縝神滅之論, 乃發前人所未發者耶?
범신(范縝)이 한 말에 이르기를 「모습은 정신의 바탕이요 정신은 모습의 활용이다. 모습에 있어서 정신은 마치 칼에 있어서 날과도 같은 것이니, 칼이 없어지고 나서도 날이 남아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어찌 모습이 없어지고 나서도 정신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 말이 참된 것인가? 유가에서는 「혼(魂)은 오르고 백(魄)은 내린다」 하였고, 불가에서는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열반․지옥․윤회․해탈 등의 말이 가장 많으며, 단군 임금은 이르기를 「맡은 바를 완전히 이루면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으며, 또한 「모든 착한 것을 북돋우고 모든 악한 것을 소멸시키며, 본성에 통하고 맡은 바를 완전히 이루면 하늘에 오르게 된다」 하였다. 불가의 말이 맞는가, 유가의 말이 충실한 것인가, 단군 임금의 교훈이 진실된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범진의 ‘정신 소멸론’이 앞선 사람들이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새로운 것을 드러낸 것이란 말인가?
[人何由生], 人何由死? 人生自何, 人死歸何? 生是寄也[而]死乃歸耶? 生乃起也[而]死則落耶? 生也有涯而死則無涯耶? 抑! 亦死而後始有, 無限眞善之境耶?
사람은 어찌하여 생生하는 것이며, 사람은 어찌하여 사死하는 것인가? 사람은 어디서 생生하는 것이며,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삶이란 잠시 의지하는 것이요, 죽음이 곧 본질로 돌아가는 것인가? 삶이 바로 본질을 깨워 일으키는 것이고, 죽음은 곧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삶이란 것에는 끝이 있지만, 죽음에는 곧 끝이 없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역시 죽고 나서야 비로소 무한한 참된 선의 경계가 있게 되는 것인가?
摩利之塹城壇, 則經四千載而健存, 漠南之長城, 歷二千餘歲而猶崇墉屹屹, 慶州之瞻星臺, 過千數百年而尙巍巍然特立. 然(特立然)則, 人之所肩擔手磨, 規矩繩墨之者, 能閱累千載而不滅, 獨, 肩擔手磨, 規矩而繩墨(之)[之]之人生, 則與腐血杇肉, 盡消永滅於黃沙腐土之中, 不曾精靈之有留耶?
마리의 참성단은 4천년이 지났지만 굳건히 남아 있고, 사막 남쪽의 만리장성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높은 담으로 쭈삣쭈삣하게 서 있으며, 경주의 첨성대는 1천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높다랗게 우뚝 솟아 있다. 그러한 즉, 사람이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긴 것은 능히 수천 년이 지나고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유독 그것을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겼던 사람의 생生은 부패한 피와 썩은 살과 함께 모두 사라져서 누른 모래와 썩은 흙 사이로 영원히 없어져 버렸으니, 일찍이 정령(精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宇宙之內‧蒼茫之外, 旣有一大精靈, 瀰滿而推運之. 則人之生也, 非但血肉骨骸之, 從氣質中受者也, 更有精神魂魄之, 自精靈而稟者也. 余於儒.佛及檀儉之說, 雖不遑其辨證, 而人生自有不滅之靈, 扶善滅惡, 通性完功, 則身固有死, 而英靈不泯, 能朝天而入神鄕, 則可信矣.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이미 하나의 큰 정령이 있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밀어 움직이는데, 곧 사람의 삶이란 것은 비단 피와 살과 뼈를 그 기운의 바탕에 따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정신과 혼백을 정령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유가나 불가 및 단군 임금의 말에 대해 비록 증명할 만한 겨를이 없으나, 사람의 삶에는 없어지지 않는 영(靈)이 있어서 착함을 북돋우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성에 통하고 맡은 바를 온전히 하면, 곧 신체는 굳어져 죽는다 하더라도 영령(英靈)은 없어지지 않고 능히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昔者永郞, 恨人生之無幾, 慕先聖之化神, 乃棄其率, 入向彌山中, 修道行, 年九十有嬰兒之色, 鷺羽之冠, 鐵竹之杖, 逍遙于湖山. 神女寶德, 歎蜉蝣之殘命, 惜朝露之易消, 乃求師學道, 抱琴以歌, 音若靈霄之玉簫, 貌若秋水之芙蓉. 是固, 仙之達者也.
예전에 영랑(永郞)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앞선 성인들이 신이 되었음을 사모하다가 그 식솔을 버리고 향미산(向彌山)에 들어가 도를 닦더니, 나이 아흔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색을 하고서 백로의 깃으로 만든 관에 철죽(鐵竹) 지팡이를 짚고 호수와 산을 거닐었다. 신녀(神女) 보덕(寶德)이 하루살이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한탄하며 아침 이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애석해 하더니, 이에 스승을 찾아가 도를 배우고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는 마치 영묘한 하늘의 옥퉁소 같았고 그 모습은 마치 가을 연못의 연꽃과도 같았다. 이러한 것이 진실로 신선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若夫, 齊.景公, 泣牛山之落日; 秦皇, 嘆東南之雲氣; 漢武, 有悔於汾水之秋風; 阮籍, 乃哭於窮道, 落日蒼蒼者, 是人生之悲處耶? 秦皇而無死, 則東南之雲氣, 竟得無驗耶? 漢武而遇仙, 則建章柏(粱)[樑], 終免黃塵耶? 阮籍而寄生於虞舜之世, 則擊石拊石, 率百獸以舞耶?
또한 제나라의 경공(景公)은 우산(牛山)에 떨어지는 해를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진나라의 시황제는 동남의 구름 기운을 보고 한탄하였으며, 한나라의 무제는 분수(汾水)의 가을 바람결에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완적(阮籍)은 갈 길은 어려워지는데 해는 기울어 어둑어둑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니, 이것이 인생의 슬픔이 아니겠는가. 진시황에게 죽음이 없었더라도 동남에서 피어난 구름의 기운에 결국에는 그 영험스러움이 없었을 것인가? 한무제가 신선을 만났더라도 새로운 문장(文章)을 만들어 내었던 백량대(柏梁臺)가 결국에 가서는 누런 먼지로 변함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완적이 순임금의 태평세대에 더불어 살았더라면 옥쟁반을 두드리며 온갖 짐승을 거느리고 춤을 추었겠는가?
人之說生者, 是惑耶? 惡死者, 是弱(衰)[喪]而不知歸者耶? 方其夢而不知夢者耶? 余與人, 皆夢耶? (人之死者)[人之死者]人之說死者, 信可悔, 其始之蘄生耶? 此世則苦海也[而], 人之生也是墜落於苦海者耶? 兒出胎門則便哭, 眞有愁於人世而然耶?
사람으로서 삶을 좋아하는 것은 삶에 미혹되어서이며,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돌아 갈 곳을 몰라서인가? 한참 꿈을 꾸면서도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사람의 죽음이란 살아 있음을 참으로 한스러워 하다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참된 삶이 된다는 말인가?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이며 사람의 삶이란 것이 바로 고통의 바다에 추락한 것이라는 말인가? 어린아이가 뱃속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진실로 세상에 대해 근심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觀! 夫市朝, 宏樓層疊, 士女繁鬧, 肥馬大道, 長嘶花朝. 觀! 夫北邙, 古墳衰敗, 髑髏荒落, 寒鴉古木, 悲鳴秋風. 前何是熱, 後何是冷耶? 人之生也, 竟若是而已耶? 雲捲而山空, 潮落而海虛, 日月落, 星辰蔽而天地居然(瞑)[冥]閉, 人之死也, 竟若是而已耶?
저자거리를 살펴보노라면 거대한 누각은 층층이 겹쳐져 있고, 선비와 계집들은 북적북적 시끄러우며, 살찐 말은 큰길가에서 꽃이 피는 아침에 길게 울음을 운다. 그러다 북망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옛 무덤들은 허물어 쓰러지고 해골은 버려져 흩날려 있으며, 을씨년스러운 까마귀는 고목 위에서 가을 바람에 슬피 울고 있다. 이곳은 어찌 이리도 활기차며 저곳은 어찌 저리도 을씨년스러운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이와 같을 따름인가? 구름이 걷히면 산은 텅 비게 되고, 조수가 밀려가면 바다는 허전해지며, 해와 달이 떨어지고 늘어선 별들이 가려지면 천지는 꼼짝없이 어둠으로 닫혀지게 되니,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결국에는 이와 같을 따름인가?
觀乎! 窮蔀飢男餒女, 屋漏而牕裂, 潦浸竈, 雪打戶, 破衣襤褸, 頭蓬面垢, 何樂之樂, 何生之生! 人生而難得公侯豪傑之勢, 高人烈士之趣, 寒呌衣, 飢呼食, 睊睊役役而終一生, 寧投海而死者可耶?
가릴 것도 변변찮은 굶주린 남녀를 보노라면, 새는 집에 창은 찢어지고, 장마에는 부엌이 물로 잠기고 눈발은 집안으로 휘몰아치며, 남루하게 떨어진 옷에다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즐거움이 무슨 즐거움일 것이며 삶이 무슨 삶이겠는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다 공후(公侯)나 호걸(豪傑)의 권세와 고인(高人)과 열사(烈士)의 풍취를 어렵게 얻게 되는데, 추우면 옷을 입고 주리면 밥을 먹으며 전전긍긍 한 평생을 마치게 되느니,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 버리는 것이 낳지 않겠는가?
觀乎蜂蟻! 將者‧卒者‧守者‧戰者‧役者‧産者, 雄雄(窺窺)[雍雍], 來來去去, 運花搬(密)[蜜], 探腐捨死, 勞勞役役, 勤勤孜孜. 意者, 微物亦有, 久遠之大計耶? 抑! 旣有生則, 必求其存而不能自止者耶?
벌과 개미를 보라! 앞선 놈과 따르는 놈, 지키는 놈과 싸우는 놈, 일하는 놈과 새끼 낳는 놈들이 사이좋게 윙윙거리며 왔다 갔다 하면서 꽃의 꿀을 따 옮기고 죽어 버려진 것을 찾아 모으며 한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다. 생각건대 미물에게도 먼 앞날을 생각하는 큰 계획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주어진 삶이니 오로지 그 생존만을 갈구하여 스스로 그치지를 못할 뿐인가?
人之於生也, 亦若是而已耶? 世如苦海, 夭者爲福而壽者爲禍, 夭而無寃易, 壽而作善難, 人可赴海而死, 以(端)[短]其壽者善耶? 抑! 亦忍痛耐苦, 長其生而積其善, 以入于涅(盤)[槃]者, 爲最善耶?
사람이 삶에 대한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인가? 세상이 마치 고통의 바다와 같다면 요절하는 자는 복이 되고 장수하는 자는 재앙이 되며, 요절하면 억울한 것이 없기 쉽고 장수하면 착함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되니, 사람마다 모두 바다로 달려나가 죽음으로서 생명을 단축하는 게 옳은 일이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역시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그 삶을 늘이고 선을 쌓아 이로 열반에 드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가?
余于人之生死, 不敢妄斷而, 宇宙之內‧蒼茫之外, 儼存者主宰, 欲扶眞養善, 滅惡消凶, 以率萬物而生人也, 則信矣. 人之於生也, 樂道安分, 忍辛耐苦, 勤孜而毋敢怨, 則善矣; 存性養志, 行善而不怠, 使得俯仰而無愧, 則雖死而無(感)[餘], 亦足矣. 余, 於是乎, 歎聖訓之無踈, 而知震域之壽祿, 能致其久遠也.
내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감히 망령되게 단언하지는 못하나,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이 세상을 주재하며, 진실을 북돋우고 선을 기르며 흉악함을 소멸시키고자 하면서 만물을 통솔하고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일 것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리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며 괴로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힘써 일하면서 함부로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곧 착하다 할 것이며, 품성을 보존하고 뜻을 기르며 착한 일을 행함에 태만하지 않아서 하늘을 우르러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기에 비록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다면 역시 족할 것이다. 내가 그러한 까닭에 우리 성인들의 가르침이 없어지고 드물어진 것은 한탄스럽지만, 우리 진역(震域)의 장수와 복록은 능히 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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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 단군기-5 (2) | 2024.12.14 |
규원사화 단군기-4 (6) | 2024.12.13 |
규원사화 단군기-3 (1) | 2024.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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