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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환단고기 해제 등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by 광명인 2023. 10. 30.

[당시 위나라 사서인 위서魏書를 인용해 일연스님은 짧지만 단군조선의 건국역사를 아래와 같이 육하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조선 1호 박사라는 서울대 역사학과 출신인 송호정씨는 단군의 역사는 단순히 신화의 형식으로 쓰여있기 때문에 신화라고 주장한다. 즉, 신과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화라는데, 학자라는 자가 어떻게 이렇게도 무식한 해석을 공식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안타까운 건 그런 막무가네식 억지 논리가 전에도 먹혔고 아직까지도 먹히는 게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의 실정이다. 몽고의 침입을 직접 경험했던 일연스님은 당시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떠한 심정으로 삼국유사에 왕검조선의 역사를 기록했을까?]

<삼국유사>는 1281년 고려의 일연스님이 지은 것으로, 조선 중종 7년인 1512년 경주에서 간행한 목판본;중종 임신본(中宗 壬申本)이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남아 있어 대표적인 판본으로 꼽히고 있다. 위 판본은 서지학자 고(故) 손보기 교수가 소장해 온 조선시대 초기 판본으로 연세대 측은 이를 고인의 호를 따서 파른본으로 명명했다. 여기에는 석유환국이라 나와있다.


魏書에 云, 
위서    운
乃徃二千載에 有壇君王倹이 立都阿斯逹하시고
내왕이천재     유단군왕검    입도아사달 
開國 號朝鮮하시니, 與髙同時니라.
개국 호조선            여고동시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께서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시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시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1. 누가 who: 단군왕검이,
2. 언제 when: 위나라의 역사서를 작성한 시기로부터 2000년 전이며, 중국의 요임금이 통치했던 시기
3. 어디서 where: 아사달에서,
4. 무엇을 what: 조선이란 나라를,
5. 왜 why: 홍익인간,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6. 어떻게 how: 건국했다.

유튜브 영상 5분 12초부터 송호정교수가 주장하는 신화와 역사의 차이

古記에 云, 
고기    운
昔有桓國하니 庻子桓雄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 父知子意하고
석유환국       서자환웅      삭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下視三危太伯하니 可以弘益人間이라 乃授天符印三箇하사 遣徃理之하시니라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내수천부인삼개       견왕이지 
雄이 率徒三千하사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하시니
웅    솔도삼천        강어태백산정 신단수하
謂之神市요 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위지신시    시위환웅천왕야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서자(庶子)부의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天下)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거늘, 아버지 환인께서 아들의 이런 뜻을 아시고 삼위(三危)산과 태백(太伯)산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아들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며 그곳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셨다. 이에 환웅(桓雄)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오시어 이를 신시(神市)라 이르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시다.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하사
장풍백우사운사  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하사 在世理化시니라. 
범주인간삼백육십여사        재세이화

환웅께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와 주곡(主穀)·주명(主命)·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을 거느리시어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시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리고 교화하셨다. 

時에 有一熊一虎가 同穴而居러니, 
시    유일웅일호    동혈이거
常祈于神雄하야 願化爲人이어늘 
상기우신웅        원화위인           
時에 神遺  霊艾一炷蒜二十枚하시고 曰, 爾軰食之하라 
시    신유  영애일주     산이십매           왈   이배식지
不見日光百日이라야 便得人形이리라.
불견일광백일           변득인형

이때에 웅족과 호족이 같은 굴에 살았는데, 늘 신성하신 환웅(桓雄)님께 환족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께서 영험한 쑥 한 타래마늘 스무 매를 내려주면서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야 사람의 참모습을 회복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熊虎得而食之러니 忌三七日에 熊得女身이나  虎不能忌하야 而不得人身이라 
웅호득이식지       기삼칠일    웅득여신          호불능기        이부득이형
熊女者無與爲婚 故로 每於壇樹下에 呪願有孕이어늘
웅녀자무여위혼  고    매어단수하    주원유잉 
雄乃假化而㛰之하사 孕生子하시니라
웅내가화이혼지        잉생자

웅족과 호족이 환웅께서 주신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21일 동안을 삼가함에 웅족은 여자의 참모습을 얻었으나, 호족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참모습을 얻지 못하였다. 웅족 여인이 혼인할 곳이 없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에 와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웅족 여인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혼인해 아들을 낳으셨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근거한 고조선의 3왕조


號曰壇君王倹이시니 以唐髙卽位五十年庚寅에  都平壤城하시고 始稱朝鮮하시니라. 
호왈단군왕검            이당고즉위오십년경인      도평양성           시칭조선
移都於白岳山阿斯逹하시니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旀逹이니   
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            우명궁(일작방)홀산 우금미달
御國一千五百年이라. 
어국일천오백년

그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니 당(唐)나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던 경인(庚寅)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금미달이라고도 하니,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周虎王 卽位己卯에 封箕子於朝鮮하니, 
주호왕 즉위기묘    봉기자어조선        
壇君이 藏唐亰이라가 後에 還隠於阿斯逹하사 
단군     내이장당경           후    환은어아사달
爲山神하시니 壽는 一千九百八歳시니라.
위산신          수     일천구백팔세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 BCE 1122)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이에 단군이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가셨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山神)이 되시니 수(壽)가 1,908세 이셨다.
[사마천 사기, 송미자세가에 최초로 언급된 기자를 조선에 봉한다내용 보기]

[1908년이란 구체적인 숫자는 어디서 왔을까? 단군세기에 나와있는 47대 단군의 역년을 조사해 고조선 1, 2왕조의 연대를 합하면 정확히 1,908년이란 숫자가 나온다. 마지막 3왕조까지 합하면 단군조선의 역년은 2096년이지만, 일연스님은 당시 부족하고 한정된 사료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기술을 했으나 단군조선에 관한 정확한 고증엔 분명 한계가 많았을 것이며 그에 대한 오해와 오류도 있었으리라 본다. 1왕조 1,048년+ 2왕조 860년 = 1,908년]


唐裵矩傳에 云, 高麗는 本孤竹國이니
당배구전    운   구려    본고죽국
周以封箕子하야 爲朝鮮하고 
주이봉기자       위조선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 (北帶方)이라하고
한분치삼군  위현도 낙랑  대방 (북대방)
通典도 亦同此說이라.
통전     역동차설


당(唐)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나라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왕으로 삼았다. 한(漢)나라가 이를 나누어 3군(郡)을 설치하여 현도, 낙랑, 대방(북대방)이라 불렀다. 통전(通典)의 기록도 역시 이 설과 같다. 

[한글번역: 상생문화연구소]


[삼국유사]〈고조선〉 조항에는 [당서唐書]〈배구전〉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 本孤竹國)” 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일연이 인용한 〈배구열전〉은 [수서]와 [당서]에 모두 실려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矩因秦狀日 高麗之地孤竹國也 周以之封於箕子 漢世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爲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 但以楊諒不肯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得不事 使此冠帶之境 仍為蠻貊之列乎
배구裴矩(557-627)는 상소를 올려서 말했다.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습니다. 주周나라 시대에는 그 지역을 기자에게 봉했고 한漢나라 시대에는 나뉘어 3군으로 되었으며 진晉나라 때에도 역시 요동에 통합되었습니다. 지금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외역이 되어 있으니, 그러므로 선제先帝(수문제)께서 미워하여 그들을 정벌하고자 한지가 오래된 것입니다. 다만 양양楊諒이 불초하여 군사를 출동했으나 공로가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대에 당하여 어찌 그 일을 마무리 짓지 않으시고 중국이 다스리던 이 지역을 아직도 그대로 만맥의 대열에 있도록 놓아둘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수,당시기 유명한 재상이던 배구수양제 양광에게 올렸던 상소문 가운데 나오는 내용으로 〈수서>67 권에 실려 있다. 비로 길지 않은 문장이지만 이 글에는 한국 고대사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3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1. 강단사학은 그동안 한무제의 한사군이 압록강 유역에 설치된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고죽국 땅이 “한나라 시대에 삼군으로 분할되었다(漢世分爲三郡)” 라고 하여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 옛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주국 땅이 한무제 시대에 한 3군으로 분할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2. 강단사학은 그동안 요동은 오늘날의 요하 동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고죽국 땅에 대해 설명하면서 "진나라 시대에도 또한 요동에 통합되었다(晉氏亦統遼東)” 라고 하여 晉나라 시기에 오늘의 요녕성 요하 동쪽이 아닌 하북성 진황도시, 즉 옛 고죽국 지역요동에 포함되어, 요동으로 불린 사실을 말하고 있다.

3. 강단사학은 그동안 수당시기의 고구려는 대동강 유역에 수도 평양이 있었고, 그 강역은 오늘의 요하 동쪽 일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고죽국 땅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신하가 되지 않고 따로 외국의 강역이 되어 있다(今乃不臣 別爲外域)”라고 하여 수당시기에 고죽국 땅이 중국의 영역이 아닌 고구려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수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고죽국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가 당시에 모두 고구려 영토였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배구는 이어서 “수문제 양견의 아들인 양양의 반란 사건으로 인해 고구려 정벌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중간에 실패로 돌아간 점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고구려 땅으로 되어 있는 옛 고죽국 땅을 빨리 되찾아 와야 하며 언제까지나 맥족인 고구려 땅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수양제에게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본 자료는 중국의 정사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한사군, 요동 등 한국사와 관련된 내용들을 기존의 기록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 속살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수나라의 사관이 당시의 어떤 사건을 기술한 것이 아니고 배구가 수나라 황제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서 사관이 거기에 대해 자의적으로 자구를 수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수, 당 시기에 고구려가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있던 본래의 고죽국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수서〉와 [당서]〈배구전〉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은 수,당 시기에 고구려 수도가 대동강 유역 평양에 있지 않고 요서 평주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하나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인용한 자료들을 살펴볼 때 수, 당시기에 고구려의 수도가 하북성평주에 있었다는 사실과 수, 당이 공격한 고구려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하북성 평주에 있던 평양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근거가 명확하여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심백강,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 303~309 요약〉


천간으로 보는 기원전, 후, 단기, 신시기 년도, 예를 들면, 위만정권이 망한 년도는 육십간지로 계유년, 단기 2226년, 기원전 108년


[Samguk Yusa , “Ancient Joseon”]

In the Book of Wei, it is written, “Two thousand years ago, Dangun Wanggeom established a nation named ‘Joseon’ and made Asadal his capital. This coincided with the era of Emperor Yao’s reign.”

The Gogi (Ancient Records) records: “The Hwanguk nation existed long ago. Hwanung of Seojabu aspired to save all under heaven and bring deliverance to the human world. “Perceiving his son’s aspiration, Hwanin, ruler of Hwanguk, gazed upon Mt. Sanwei and Mt. Taebaeksan and deemed both suitable for fostering wide-reaching benefits for humanity. “Hwanin thus granted his son Hwanung the Heavenly Emblems and Seal—the Three Treasures then sent him forth to rule this region. Hwanung led three thousand people down to the foot of the Divine Tree on the summit of Mt. Taebaeksan. He named this place ‘Sinsi’ (Divine City), and he was called ‘Heavenly Emperor Hwanung.’ 

“Hwanung led the Pungbaek, Usa, and Unsa1, as well as the ministers of agriculture, imperial decrees, law,  health, and morality, in overseeing more than 360 realms of human affairs. He ruled and enlightened the people of the world with the truth of Spirit Teaching.

“During this period, the Bear Clan and Tiger Clan, who lived in the same region, continually beseeched the divine Hwanung to change them into ideal human beings. “In response, Hwanung gave them divine items, which were a bundle of mugwort and twenty cloves of garlic, and he commanded, ‘Eat these and avoid the sunlight for one hundred days. If you do, you will become ideal humans.’ 

“The Bear Clan and Tiger Clan disciplined themselves for three seven-day periods spanning twenty-one days, consuming only the mugwort and garlic. The Bear Clan members became ideal women. However, the Tiger Clan failed to comply with the precepts and did not attain the ideal human form. “Thereafter, a woman of the Bear Clan, lacking any ideal man to marry, came to the foot of the Divine Tree daily and prayed to be blessed with a baby. Hence, Hwanung granted her provisional acceptance into the Hwan people, married her, and begot with her a son: Dangun Wanggeom.

“Dangun Wanggeom named his nation ‘Joseon’ and established its capital in Pyeongyang-seong. This was during the year of the White Tiger, fifty years after Emperor Yao began his rule. The capital was moved to Asadal at Mt. Baekaksan, also known as Mt. Gungholsan (Mt. Bangholsan) or Geummidal. From Asadal, Dangun Wanggeom ruled the nation for 1500 years.

 “King Wu of the Zhou Dynasty became ruler in the year of the Yellow Rabbit (1122 BCE) and assigned Gija to rule Joseon. Dangun thus relocated to Jangdanggyeong. He returned to Asadal only later, and there he entered into seclusion, became a mountain deity, and lived 1,908 years.”

영문번역출처: 상생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