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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 화폐 시대의 황혼기, '참된 가치'를 묻다

by 광명인 2025. 5. 6.

우리는 일상적으로 '화폐'의 증식과 축적을 갈망하지만, 정작 그 본질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가 이 '화폐'라는 관념 위에 구축되어 있으며, 그 기반의 균열은 곧 시스템 전체의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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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본질: 실물이 아닌 '신용'

주지하다시피, 현대 화폐의 본질은 실물이 아닌 '신용(credit)'에 기반한다. 만 원권 지폐 한 장의 물질적 가치는 미미하지만, 그것이 '만 원 상당의 재화 및 서비스와 교환될 수 있다'는 사회 구성원 간의 집단적 믿음, 즉 신뢰가 그 가치를 담보한다. 이 신용은 국가의 공권력, 중앙은행의 발권력, 법적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결국 화폐란, 특정 경제 주체의 미래 상환 능력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계량화한 지표이며, 한 국가의 통화는 그 국가 전체의 신용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통화 위기신용의 위기이며, 이는 곧 사회 시스템의 위기로 직결된다.

역사적 교훈: 신용 붕괴와 시스템 리스크

역사는 이러한 신용 시스템의 취약성을 반복적으로 증명해왔다. 1929년 대공황은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선 신용 시스템의 붕괴였다. 1920년대 만연했던 신용 기반의 자산 버블은 '미래의 상환'이라는 낙관론에 기댔으나, '검은 목요일'로 촉발된 주가 폭락은 순식간에 신뢰의 증발을 야기했다. 소멸한 것은 물리적 자산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신뢰' 그 자체였다. 금융기관의 대출 동결, 예금 인출 사태(뱅크런), 기업 투자 중단 등은 미래에 대한 불신이 경제 주체들의 의사결정을 지배한 결과였다. 금융 경제의 근간심리이며, 심리 신뢰에 의해 좌우됨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대공황 이후, 세계는 새로운 신뢰 시스템을 갈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지정학적 변동을 거치며 압도적인 자본력과 생산력을 확보한 미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의 설계자로 부상했다.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달러금과의 교환을 보증하며 국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했고, '달러에 대한 믿음'은 '미국 경제에 대한 신용'과 동의어가 되었다. 미국은 이 신뢰를 바탕으로 국채를 발행하여 재정을 조달했으며, 미 국채는 명목상 '무위험 자산'으로 간주되며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미국의 채무 이행 능력, 즉 정치경제적 안정성에 대한 국제적 신뢰에 기반한 구조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구조적 딜레마를 내포했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와 금 보유량을 초과하는 달러 발행은 결국 1971년 닉슨 대통령의 금 태환 정지 선언(닉슨 쇼크)으로 이어졌고, 세계 경제는 실물 담보 없이 오직 '미국이라는 국가 신용'에만 의존하는 완전한 명목 화폐(fiat money) 시대로 진입했다.

한편,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케인스주의적 정부 개입의 한계를 노출하며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부상을 촉진했다.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은 시장의 자기조정능력을 옹호하며 정부 개입의 비효율성을 역설했고, 이는 사실상 '시장에 대한 무한 신뢰'에 가까웠다. 레이건 행정부와 대처 정부를 필두로 한 감세, 규제 완화, 금융 자유화 정책은 금융 부문의 급격한 팽창을 야기했다. 실물경제의 성장을 압도하는 금융 부문의 비대화, 즉 금융화(financialization)는 기업 경영의 무게중심마저 생산성 향상에서 주가 관리로 옮겨놓았으며, 경제 뉴스는 고용지표보다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를 열었다.

규제 완화는 신용을 기반으로 한 자산 버블을 용이하게 형성시켰다. '자산 가격 상승' 자체가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며 실물 가치에 대한 평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파생금융상품(derivatives)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파생상품은 기초자산의 가격 변동 위험을 헤지하거나 이에 베팅하는 계약으로, 문제는 실물 없이도 거래가 가능하며 신용 위에 또 다른 신용을 중첩시키는 복잡한 레버리지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는 평상시에는 유동성을 공급하고 위험을 분산하는 순기능을 하지만, 외부 충격 발생시 연쇄적인 디폴트 위험을 야기하는 시스템 리스크의 진앙이 될 수 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복잡하게 얽힌 파생상품 계약으로 연결된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낸 예고편이었으며, 규제 밖에 존재하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 시스템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더욱 증폭시켰다.

현 국면: 초연결성 시대의 시스템적 취약성

현재 우리는 34조 달러를 상회하는 미국 정부 부채가 역설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축 역할을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 국채 금리는 글로벌 금리의 벤치마크이자 신용의 가격표로 기능하지만, 미국의 재정적자 심화 및 정치적 불확실성은 '미국 시스템에 대한 과거와 같은 절대적 신뢰'에 균열을 야기하는 신호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만약 미 국채에 대한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될 경우, 이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리셋'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본, 통화, 물류 등 모든 것이 극도로 연결된 '초연결성(hyper-connectivity)' 시대라는 점이다. 과거 '블랙스완'으로 치부되던 예측 불가능한 충격들이 이제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가능한 '회색 코뿔소(gray rhino)'로 변모하고 있다. 미 국채 신뢰도 문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가능성,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 등 복수의 잠재적 위협 요인들이 상존한다. 위기의 본질은 개별 사안의 '규모'보다 이들의 '상호연결성'에 있으며, 한 부분의 붕괴가 시스템 전체의 연쇄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에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편리함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연결과 신뢰의 기적적 작동에 의존하지만, 이 시스템은 예상보다 쉽게 파손될 수 있다. 일각에서 현시기를 문명사적 '대전환기'로 규정하며,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 가능성을 경고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수호해야 할 것은 계좌의 숫자가 아닌, 지속 가능한 생존 기반 그 자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위기 속 '가치투자'의 재정의: 무엇에 투자할 것인가?

그렇다면 신뢰가 잠식되고 시스템 붕괴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 '가치투자'는 통상 워렌 버핏 이후 '저평가된 우량주를 발굴하여 장기 보유하는 전략'으로 인식되어 왔다. 기업의 내재가치를 분석하고, 시장 가격이 이를 반영할 때까지 인내하는 투자법이다. 이러한 관점은 주로 재무제표상의 숫자, 배당수익률 등 정량적 지표를 통해 금융자산의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 국면은 '진정한 가치투자'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을 요구한다. 진정한 가치투자란 단순히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는 금융자산을 좇는 행위를 넘어, 미래에도 변치 않는 가치, 즉 거품이 걷힌 후에도 그 본질을 유지하는 '궁극적 자산'에 우리의 시간과 열정,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현재의 금융 시스템, 인터넷, 전력망, 물류 시스템, 시장 경제가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마비된다면, 무엇이 진정한 자산으로 남을 것인가?

  • 숙련된 기술과 지식 (Human Capital & Know-how): 시스템 붕괴 상황에서도 효용성을 갖는 실질적인 능력. 이는 AI로 대체 불가능한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포함한다.
  • 신뢰와 협력에 기반한 공동체 및 사회적 자본 (Social Capital & Community): 위기 상황에서 상호 부조와 협력을 통해 생존과 재건의 기반이 되는 인간관계 네트워크. 이는 오랜 시간을 통해 축적된다.
  • 내면의 확고한 철학과 보편적 가치 (Philosophical Anchors & Universal Values): 외부 환경의 급변 속에서도 개인의 중심을 잡아주고,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정신적 자산. 이는 고통과 성찰을 통해 내재화된 신념 체계로, 시스템 붕괴 이후 새로운 질서의 윤리적 토대가 될 수 있다.
  • 자립 가능한 생존 인프라 (Self-Sufficient Infrastructure): 자연과 조화되는 지속 가능한 농업,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 등 외부 의존도를 최소화하고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
  •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의 참여와 기여 (Contribution to New Systems): 기존의 화폐경제 시스템을 넘어, 신뢰와 협력에 기반한 대안적 경제·사회 시스템 프로토타입을 구축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행위.

이러한 '궁극적 가치'에 대한 투자는 현 금융시장의 단기적 변동성이나 자극적인 수익률과는 거리가 멀다. 속도는 느리지만 견고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하다. 이는 계좌의 숫자를 불리는 것을 넘어, 실제 작동 가능한 생존 기반을 확보하고, 참된 가치에 우리의 시간과 신념을 투자하며, 그 비전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문명을 살리는 투자자(Civilization Investor)'의 길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당신의 소중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가? 소멸할 거품 위에 단기적 수익을 쌓아 올리는 투자인가, 아니면 다가올 미래에도 굳건히 존재할 본질적 가치를 심는 투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이, 격변의 시대를 항해하는 우리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희망은 거대 시스템이나 첨단 기술, 막대한 자본이나 정교한 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올바른 태도, 견고한 관계, 그리고 의미 있는 연결 속에서 싹튼다. 위기는 파멸이 아닌 새로운 질서 창조를 위한 전환점이며, 무너짐은 다음 주기를 여는 시간의 파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무엇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