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韓은 삼한三韓으로부터 왔고, 이 삼한은 바로 단군조선으로부터 왔습니다. 대한大韓에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어진 위대한 뿌리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것이죠. 고조선 시대 사관 발리가 지은 신지비사에 따르면 한민족 국통맥의 역사는 아홉 번을 바뀌며 전개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고 하는데요. 대한민국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는 겁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강역은 축소될 대로 축소되었는데, 이 속에서도 소한小韓의식과 대한大韓의식의 내부 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격렬한 역사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비록 땅이 축소되었을지언정 우리의 국통맥을 통해서 대한사관에 눈 떠서 대한의 정신을 가진다면 우리는 전 세계에 홍익인간의 빛을 비출 수 있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열국시대 이후 대한민국까지의 역사 과정 속에서 우리가 천자국의 전통을 어떻게 이어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열국시대 이후의 과정은 안타깝게도 전체적으로 쇠락의 역사 과정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영토도 축소되고 국통맥도 소실되고 역사 정신도 잃었지만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는 천자국으로서의 전통과 체제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천자란 어떤 존재인가 한번 짚고 가야겠죠. 천자天子는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준말인데요. 천제의 아들, 하늘의 아들이기 때문에 왕 중의 왕이라는 겁니다.

지구의 황제죠. 채옹의 독단이라는 기록을 보시면 천자는 이적의 호칭이며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하늘의 아들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이적이라는 것은 동이와 북적의 줄임말입니다. 중국의 동북방의 족속을 뜻하는 거니까 고대 우리 민족이라고 보면 되는데요. 우리가 예로부터 천자라는 호칭을 써온 것이고. 중국은 한 단계 아래인 왕의 호칭을 썼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여기는 부천모지父天母地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천자를 하늘의 아들, 그리고 하늘 땅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황국, 배달, 조선 삼성조 시대 때 천자국이었는데. 뿌리역사 후에도 고려 때 원나라의 침입 전까지는 천자국으로서의 전통과 체제를 이어왔습니다.

그럼 먼저 역사의 맥, 국통맥을 보면서 살펴볼게요. 북부여를 중심으로 한 열국시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사국시대, 우리가 발해라고 알고 있는 대진국과 통일신라로 이루어진 남북국시대, 고려, 조선 임시정부를 거쳐서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데요. 뿌리시대 이후의 역사는 사실상 고구려 역사의 연장선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북부여가 원고구려이고 북부여의 정통을 이은 고구려 그리고 대진국이 후고구려가 되고 이후 고구려의 정신을 이은 고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외국에선 코리아(Korea)라고 하죠. 한국의 외국 이름인 코리아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히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는데요.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이어진 코리아라는 호칭의 근원이 고구려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코리아의 어원이 왕건의 고려라고 해도 그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전달된 국호이기 때문이죠. 그럼 북부여의 정통을 이은 고구려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삼성기 상의 기록을 보면 고추모가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라고 분명히 전하고요.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냈다 라고 전합니다. 태조는 나라의 창업 시조를 말하는 거기 때문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또한 태백일사의 고구려국본기에서는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이다 라고 해서 북부여를 이은 고주몽이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음을 다시 지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고구려 역사 몇 년으로 알고 있나요? 교과서에 따르면 고구려의 역사는 700년이다 라고 말을 하는데요.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900년 역사로 얘기를 했습니다.

신당서 기록을 보면 가언충이라는 신하가 당고종에게 고구려는 900년이 못 되어 팔십 먹은 장수에게 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구려가 900년이 되어가고 우리나라 이적 장수가 80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왜 900년이라고 한 것일까요? 바로 고구려의 전 역사 북부여가 근 200년간 지속되었는데, 그 기간을 합쳐서 900년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라 유학을 했던 신라의 최치원도 고구려 900년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북부여의 정통을 이은 고구려이기에 고주몽이 천자임은 광개토태왕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에서는 고구려 추모왕이 천제지자 그러니까 천재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였고, 고구려 광개토태왕 때 북부여의 수사인 모두루의 묘지명에서는 일월지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일월지자日月之子는 천제지자와 같은 의미로 고구려가 천자국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환단고기에는 고구려를 통치한 일곱 분의 연호가 나와 있는데요. 연호는 천자만이 쓸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연호를 썼다는 것은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는 것 이것을 칭제건원稱帝建元이라고 하는데요. 칭제건원의 전통이 고려 원나라 침입 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고구려의 역사 맥을 이은 것이 우리가 발해라고 알고 있는 대진국인데요. 대진국 역시 칭제건원을 했습니다. 환단고기를 보시면 황제 이름과 연호가 기록되어 있고요. 1세 대중상은 당시 서압록하를 지키던 진국 장군이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동모상 기슭에서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그래서 구당설을 보면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죠.

대조영은 대진국을 699년에 건국하게 되는데요. 고구려 멸망과 대조영의 대진국 건국 사이 30년의 간극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대중상의 후고구려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진국이 썼던 금화인 발해통보를 보면 천통팔년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이 천통이 바로 대조영의 연호입니다. 또 신당서를 보면 대조영이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이라 하였다. 라는 기록 나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말하는 대진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말갈족이 주체가 되어 건립한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CCTV에서 방영된 장백산 드라마에서는 최은이라는 사신 앞에서 대조영이 무릎을 꿇고 발해군왕으로 책봉받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우세한 입장에서 당나라를 위협하며 자체 연호까지 쓰던 대제국의 황제 대조영이 당나라의 복속을 뜻하는 발해군왕 책봉을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함에도 중국은 이러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죠. 대진국 3세 무황제 때는 개마, 구다, 흑수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라 칭하고 조공을 바치고요. 당나라 그 동맹국인 신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동아시아의 강국이 됩니다. 또한 대진 무황제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대진을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 전통을 계승한 나라다 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4세 광성문황제는 스스로 고려국 왕 대흠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발해 사람들은 자국을 고려국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 거죠.

대진 제4대 문왕제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에는 문왕의 연호가 대흥으로 세겨져 있습니다. 묘지명에서 아버지인 문왕을 황상이라 부른 것뿐 아니라 왕비의 묘비명도 발견되었는데요. 여기서 황후라는 표현을 쓴 것 등은 대진의 칭제 사실을 명백히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11세 선황제 때 세력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한 경기도 일대까지 북으로 대흥안령산맥과 흥룡강까지 서로는 요하, 동으로 또는 연해주 일대까지 차지하여 영토의 넓이가 9천 리에 달했다 라고 합니다. 대진국 이후 들어서는 나라가 고려인데요. 고려의 북쪽 국경은 여전히 연구 과제이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대륙사를 소실하게 됩니다. 고려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식이 확고했고 대진과 마찬가지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였는데요.

고려의 정치 체제를 먼저 살펴보면 고려의 정치는 3성 6부 체제였는데 성이나 부는 제후국에서 사용할 수 없고 천자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입니다. 또한 고려의 국왕들은 조서나 칙서를 썼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황제의 명의로 작성된 문서를 뜻합니다. 고려가 금나라에 보낸 국사에서도 고려의 통치자는 스스로 자신을 황제라 칭했는데요. 대금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실제 고려 중기의 유명한 문인 이규보는 1209년에 지은 연등회 축시에서 고려 국왕에게 천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외에도 고려 역시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는 점과 고려의 수도 개성을 황도 혹은 황성이라고 한 것도 고려가 천자국이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죠.

하지만 몽골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황제국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하였고 국왕에 대한 칭호는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왕 이름 앞에 충 자를 붙이기도 하고요. 그 첫 번째 왕인 충렬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의 딸인 제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았는데 이후로 고려는 줄곧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들어가서는 한술 더 써서 유교에 물들게 되죠. 명나라를 대중화로 섬기는 의식이 팽배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라의 몰락은 당연한 과정이었고, 조선 말 결국 나라가 풍전등화와도 같은 위기에 놓였을 때 고종 황제는 칭제 건원을 하며 원구단에서 천제를 봉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우리의 본래 천자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회복하면서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려 했던 노력이었는데요.

우리나라의 국호인 대한민국의 대한의 유래는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비롯되었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겁니다. 임시정부의 당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국호를 정하기 위한 회의를 할 때 신석우 선생이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자 라고 하니, 여운형 씨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석우 씨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자 다들 좋다고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고 하고요. 1948년 7월에는 대한민국으로 정식 국호가 채택이 되었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대한을 쓰게 된 이유를 고종실록에서 알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활동 무대를 예로부터 한의 땅이라고 한 것은 바로 고조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으로부터 왔고, 이 삼한은 바로 고조선으로부터 왔습니다. 대한에는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진 위대한 뿌리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것이죠. 고조선 시대 사관 발리가 지은 신지비사에 따르면 한민족 국통맥의 역사는 아홉 번을 바뀌며 전개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고 하는데요. 대한민국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강역은 축소될 대로 축소되었는데 이 속에서도 소한小韓의식과 대한大韓의식의 내부 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격렬한 역사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땅이 축소되었을지언정 우리의 국통맥을 통해서 대한사관에 눈 떠서 대한의 정신을 가진다면 우리는 전 세계에 홍익인간의 빛을 비출 수 있는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한사랑청소년단의 그 일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고요. 오늘 기억할 세 가지 정리하면서 마칠게요. 첫 번째 천제지자의 준말로 하늘을 대변한 왕 중 왕을 뜻하는 말은 천자이다. 두 번째 우리는 고려 원나라 침입 전까지 천자국의 전통을 이어왔다. 세 번째 대한에는 삼한의 뿌리 역사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사명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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