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 오동진 장군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군 사령관이자 광복군총영 총영장이었다. 송암 선생은 항일민족주의 학교인 대성학교 사범과를 1910년에 단기 속성으로 졸업한다. 이후 1919년 만주로 망명해 항일 지하조직인 광제청년단과 대한독립청년단, 나아가 대한청년단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0년 6월에 봉천성 관전현 향로구에 대한광복군총영을 설치하고 총영장이 된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일제 식민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밀정 등 친일 분자를 처단하며 군자금 모금을 목표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오동진 장군은 일제 밀정으로 전락한 김종원의 계략에 말려들어 악질 고등경찰 김덕기에게 피검되어 17년간 옥중투쟁을 하다 광복 9개월을 남겨두고 1944년 12월 1일에 임종을 맏게 된다. 18년간 옥살이후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한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오동진 장군은 관대하면서도 인자했으며 고매한 인품으로 청년들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인 형무소장마저 오동진 장군을 ‘가미사마’라 칭하며 항상 예를 갖출 정도였다고 한다. 송암 오동진 장군은 여천 홍범도 장군과 함께 환단고기 편찬에 자금을 대신 인물이다.]
오동진 장군은 환단고기 출간 자금과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을 위해 여비를 댔던 분입니다. 감옥에서 48일 동안 단식 투쟁을 하면서 일본인들도 기미사마라고 칭송해마지 않던 분이지만 일본이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자 정신병자 수용소로 보내 그 유해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역사에 사라졌습니다. 환단고기는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기록한 책인데 일본극우파 입장에서 환빠니 국뽕이니 하면서 맹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명 하성환 편집위원 입력 2024.11.26 02:02
올해는 오동진 장군이 순국한 지 80주년 되는 해입니다. 송암 오동진 선생은 대성학교 사범과를 단기 속성으로 1910년에 졸업합니다.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8년 평양에 세운 항일민족주의 학교입니다. 당시 대성학교 교사로 독립지사 차리석, 문일평 선생이, 그리고 체육 수업은 대한제국 군인 출신을 초빙해 군사교육을 가르칩니다.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 교육 구국 운동을 통해 항일 지사를 배출한 시절입니다.
송암 선생 역시 대성학교 졸업 직후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에서 일신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사립학교령」(1908)과 연이은 「사립학교 규칙」(1911)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성학교와 일신학교를 탄압해 1912년 폐교합니다. 대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송암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의주 일대 만세 시위를 이끌던 중 일제의 체포령으로 만주로 망명합니다.
1919년 만주 망명 당시 오동진(30세)은 항일 청년들을 규합해 항일 지하조직 광제청년단과 대한독립청년단, 나아가 대한청년단연합회 결성에 참여합니다. 항일 청년을 조직하는 활동 이외에 송암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기관에서 안동교통사무국 간부로 활동합니다.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책임진 위치에서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합니다. 이듬해 광복단(1920. 3월)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합니다. 송암 선생은 임정 연통기관 안동교통사무국이 이륭양행 건물에 상주해 있는 점을 활용해 일제의 감시를 피했습니다. 이륭양행 선박을 통해 상해를 오가며 임정으로부터 권총, 장총, 폭탄 등 무기를 반입하는 데에도 성공합니다.
1920년 무장투쟁의 분위기가 끓어오르는 정세 속에서 임시정부 역시 흩어진 독립군 단체를 통합해 단일대오로 광복군을 창설하고자 합니다. 대한청년단연합회, 서로군정서 등 여러 항일단체를 통합해 광복군사령부를 설치, 6개 군영을 두는데 오동진 장군은 제2군영 영장을 맡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 광복군사령부는 다양한 독립군 부대의 특성과 지리상 떨어져 있는 관계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기엔 적합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동진 장군은 1920년 6월에 봉천성 관전현 향로구에 대한광복군총영을 설치하고 총영장이 됩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일제 식민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밀정 등 친일 분자를 처단하며 군자금 모금을 목표로 항일투쟁을 전개합니다.
1920년 8월 3일 밤 9시 50분경, 치마에 폭탄을 숨긴 채 평양 시내에 잠입한 안경신 의사가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져 도청 건물 일부와 평양경찰서 외벽을 파괴하고 일경 2명을 처단한 사건이 바로 대한광복군총영이 수행한 투쟁입니다. 여성 독립군 안경신은 당시 대한광복군총영 대원으로 임신 5개월임에도 국내에 파견돼 작전을 수행합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창설된 1920년 한 해 동안, 일제와 78회에 걸쳐 교전했고 경찰주재소 56개소를 공격했으며 20여 개 식민 통치기관을 파괴, 후창 군수 등 95명을 처단합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와 10월 21일~26일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일제는 경신참변(1920. 10월~1921. 5월)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합니다. 간도에서 무려 3,700명이 넘는 조선인을 집단 학살하고 수천 채 가옥을 불살라 파괴합니다. 이후 1921년 6월엔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 부대가 일부 괴멸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습니다.
1922년 항일 독립투사들은 독립전쟁 전선을 다시 통일하기 위해 만주 일대 독립군 단체를 대한통군부(1922. 2월)로 통합합니다. 통군부는 그해 통의부(2022. 8월)로 개편되면서 오동진 장군은 통의부 교통부장, 재무부장, 민사부장, 군사부장을 맡습니다. 이후 통의부는 노선투쟁 끝에 1920년대 무장투쟁의 주력부대인 참의부(1923), 정의부(1924)로 분열돼, 신민부(1925)와 함께 1920년대 무장투쟁을 주도합니다. 오동진 장군은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이 중심이 돼 창설한 정의부 군사부장 겸 사령관이 되어 1927년 일제에 체포될 때까지 국경을 수백 회 넘나들며 국내진공작전을 펼칩니다.
오동진 장군은 남만주 일대 조선인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합니다. 농촌 생활 개선과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안정된 생활, 그리고 보건의료와 교육활동을 전개합니다. 정의부가 관할한 하얼빈 이남 남만주 일대 조선인들은 항일독립군을 영속할 인적·물적 토대였습니다. 정의부 또한 남만주 조선인에 대해 입법·행정·사법기능을 수행한 군정부이자 자치 행정기구였기에 오동진 장군은 조선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군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인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일제의 계략이 금광왕 최창학을 후원자로 내세웁니다. 당시 최창학은 일제와 결탁해 부자가 돼 일제 말기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지내는 등 반민족행위를 일삼던 친일파입니다. 해방 직후 임정이 환국했을 당시, 최창학은 백범 김구에게 자신 소유인 경교장을 헌납합니다. 해방된 정국에서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한 처세였습니다.
결국 일제가 파놓은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며 가지 말라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동진 장군은 1927년 일제 밀정으로 전락한 독립군 부하 김종원의 계략에 말려듭니다. 열차 이동 도중 오동진 장군은 부하 김종원의 태도에 이상한 낌새를 채고 도착 예정 장소인 장춘역에 앞서 길림 장춘선 흥도진역에서 하차하지만 앞서 잠복 중이던 악질 고등경찰 김덕기에게 피검됩니다. 오동진 장군은 피검 직전까지 연인원 14,149명의 부대원을 지휘합니다. 일제 행정기관이자 식민 통지기관을 143회 습격해 전소하고, 일제 관리와 경찰 149명, 그리고 일제 밀정과 친일 부호 765명 등 총 914명을 처단합니다.
체포된 뒤에도 재판정에서 “조선독립군을 처벌할 사람이 누구냐!”며 일본인 판사를 준열하게 꾸짖고 독립가를 우렁차게 불렀습니다. 재판 당일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오동진 장군은 위풍당당했습니다.
신의주 형무소에서 33일 동안, 그리고 1932년 경성 형무소(마포구 공덕동)로 이감된 뒤에도 48일 동안 두 차례 단식투쟁을 감행합니다. 일제는 빛이 없는 캄캄한 징벌방에 100일 동안 감금했지만 오동진 장군은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 선생은 평안북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항일무장투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18년에 이르는 최장기수로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 이규창이 정이형 선생의 맏사위로 이회영과는 사돈 간이다.(출처 : 국가보훈처) 이규창은 오동진 장군과 옥중 동지이기도 하다. 정이형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오동진 장군은 관대하면서도 인자했으며 고매한 인품으로 청년들을 매료시켰다.
감금에서 풀려나와 온전한 모습을 보이자, 일본인 간수장(형무소장)조차 신(神)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가미사마’(かみさま)라 칭하며 오동진 장군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습니다. 오동진 장군 앞에선 비루하고 부패한 일본인 형무소장마저 항상 예를 갖출 정도로 오동진 장군의 인품은 고결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동진 장군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음에도 한국사 교과서에 한 줄 기록조차 없습니다. 그 결과 일반 시민들은 오동진 장군을 전혀 모릅니다. 김좌진 장군보다 더 치열하게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음에도 아는 이가 없습니다. 민족주의 항일 독립투사로 남과 북에서 모두 존경받고 인정받은 열혈 지사임에도 대한민국 사회에선 망각의 인물입니다.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임에도 연구논문 한 편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 그저 한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동진 장군은 1931년 신의주형무소 시절부터 ‘형무소 정신병자’로 취급당합니다. 1944년 경성 형무소에서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공주 형무소로 이감됩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순국합니다. 17년간 감옥살이를 하며 옥중 항일투쟁을 이어갔던 오동진 장군이 해방을 아홉 달 앞두고 1944년 12월 1일 운명합니다. 감옥에서 어떤 고문이 자행됐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젠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공주교도소 수형 기록을 분석해 오동진 장군의 유해를 찾아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국가 보훈부의 존재가 아쉬운 순간입니다. 온 생애를 다 바쳤고 자신의 목숨마저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지사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동진 장군이 순국한 도시, 공주시 시민이자 쌍달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양동진 님(민족문제연구소 공주지회장)을 중심으로 김도석 교사 시인, 전병철 작가(우금티 기념사업회 이사), 민중가수 최도은 님, 무용가 조유진 님을 비롯해 뜻있는 분들이 2020년 12월 1일 첫 추모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오동진 장군이 공주 형무소에서 순국한 지 80주기가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오동진 장군을 새롭게 알게 된 분이나 추모 행사에 관심 있는 분은 오는 12월 1일 공주시 공산성 입구 안내센터 근처 오동진 장군 추모비를 한 번쯤 방문해 보길 권유합니다.
출처: 한겨레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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